7월 초1일
오전에 서늘한 바람이 선들선들 불었다.
7월 초 2일
오전에 가좌유사(家座有司)와 적간색리(摘奸色吏)가 와서 국사(國事)를 개탄하였다▣. 저녁 때 황간(黃間, 間은 澗의 오자) 국암(麯岩)에 사는 사형(査兄)이 왕림하여 이르길, “왜병(倭兵)이 상주(尙州)로 많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유사(有司)를 월촌(越村)의 주점에서 전별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구부내(大邱府內)에서 ≪왔는데≫, 남자는 짐을 지고 여자는 짐을 이고 들어왔다. 그래서 주막에서 상세히 물어보니, “≪6월≫ 27일에 왜병 700여 명이 대구로 곧장 들어가 남문(南門) 밖에 장사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사또(使道)가 사람을 시켜, ‘그대들은 무슨 까닭으로 왔는가?’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왜인이 말하길, ‘옛날 임진(壬辰)년 이후로, 우리는 사람가죽 300장씩을 공물로 바쳐왔다. 그래서 왜의 씨가 거의 마를 지경에 이르렀다. 300명씩 조선에 수자리 살러 왔기 때문이다. ≪이 일을≫ 지금까지도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삼남의 토지와 인민들을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또가 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알리길, ‘부내(府內)의 백성들은 각자 은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시에 인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강 밖의 두 사람이 두 마리의 소에 오이를 싣고 와서 왜인들한테 팔고 돌아가려고 하자, 왜인들이 그 소를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이 파는 노인[苽翁]이 말하길, ‘다른 사람의 소를 세내어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왜인들은 그래도 억지로 팔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이 파는 사람[苽人]은 소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소 주인을 찾아가보니, 소 주인은 이미 달아나고 단지 부녀 두 사람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부녀에게≫ 왜인들이 소를 사겠다고 억지로 청하는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부녀가 말하길, ‘우리 소는 우리가 당연히 가서 끌고 와야지.’ 하고, 남문의 장사진 앞으로 곧장 달려가 소를 끌고 돌아오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왜병들이 두 부녀를 그 자리에서 참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7월 초5일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지난 달 6월 26일에 청나라 제독 섭사성(聶士成)이 왜병(倭兵)과 성환(成歡)의 작은 골짜기 사이에서 싸웠는데, 청나라 병사가 크게 패하였다고 한다.
7월 초6일
완골(莞骨) 베는 일을 마쳤다. 해질 무렵 내가 남초(南草, 담배) 밭에서 돌아왔는데, 존주동(尊周洞) 배서방(裵書房)이 찾아왔다. 같이 방으로 들어가 안부를 나누고 물어보니, 소요가 일어난 것은 피차일반이지만 북면(北面)의 가뭄은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7월 초8일
배서방(裵書房)이 두 아들을 데리고 ≪존주동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1일
오전에 큰 아이 혼자 돌아와서 말하기를, “웅학(雄學)이는 발을 다쳐 같이 오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오시(午時)에 담배를 다 베어서 왔다.
7월 12일
서풍이 종일 불었다. 오시(午時)에 황간 국암(麯岩)에 사는 사형(査兄)이 와서 머물렀다.
7월 13일
아침식사 후에 사형이 큰 아들을 데리고 ≪황간 국암으로≫ 돌아갔다. 신목평(新木坪)에 보를 쌓는 일로 보 근처에 가보니, 읍내(邑內) 배치종(裵致鍾)이 마침 오이밭 원두막[苽樓] 아래에 이르러 서로 안부를 물었다. 배치종이 말하길, “요즘 듣자니 저곡(杵谷) 장생원(張生員) 댁에 어떤 관문(關文, 공문)이 도착하였다고 하니 같이 가서 봅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가다가 도중에 덕원보(德源甫)를 만나 같이 주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글을 자세히 보니, 앞부분에는 조선이 자립(自立)한 일이 적혀 있고, 중간에는 복식을 고친 일이 적혀 있었다. 또한 청과 왜가 성환(成歡)에서 전투를 하여 청병(淸兵)이 크게 이득을 얻었다고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할 기록은 놔두고, 세 사람이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보를 쌓고 오후가 되어서 돌아왔다. 해질 무렵, 동내(洞內)의 여러 친구[諸益]들이 신목평(新木坪) 보 아래로 천렵(川獵)을 가자고 청하여 ≪같이 갔다가≫ 술이 거나해져서 저녁 때 돌아왔다. 존주동(尊周洞) 배서방(裵書房)이 웅학(雄學)과 같이 왔다.
7월 14일
오전에 잠깐 시장에 갔다가 돌아왔다. ≪시장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며칠 전에 양가동(陽佳洞) 생원 유치백(柳致伯)이 동학 무리의 침입을 받아 미륵당(彌勒堂)에서 곤욕을 당하고 있을 때, 양가동과 역리(驛里)의 상하민인(上下民人)이 같이 가서 구해주었다. 그로부터 12일 후, 동인(東人, 동학도)들이 점차 몰려들어 오늘에 이르러 300여 명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저녁밥 때가 되었는데, 월촌(越村)의 유서방(柳書房) 집에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사람이 향약의 본의에 따라 일제히 달려가는 한편, 사람을 두릉(杜陵)으로 보내 향장(約長, 향약의 임원)에게 다툼이 일어난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였다. 점막(店幕) 문 앞에 이르러 보니, 동인(東人) 6~7명이 이미 유서방의 집에 들어가 엉뚱하게도 송가의 아들을 잘못 잡아가고 없었다. 얼마 있다가 두릉(杜陵)의 여러 사람이 와서 중론을 모아 동인(東人)을 불러보고자 하였으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 사환(使喚)이 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 함께 사청(射廳, 활 쏘는 곳)에 이르러 보니, 달빛이 낮처럼 밝았다. 남정(南丁)을 바라보니, 저들이 긴 둑에 빙 둘러 서 있었다. 또 한편으로 시장을 향하여 가던 사람들이 다리 근처에 머물러 서서 큰 소리로 말하길, “도인(道人, 동학도)들은 건너오시오. 만약 받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법이 있으니 어찌 한 사람인들 받들지 않을 것이며, ≪만약 받들지 않으면≫ 어찌 보복을 받지 않을 리가 있겠소? 우리들이 찾아온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없이≫ 끌려와 구타를 당하는 변을 막기 위함이오. 급히 와서 시비를 밝혀 바른 길을 선택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저들이 말하길, “갑자기 초강(草江)을 향하여 간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가 있어서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모두 근처의 난류(亂類)들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두 사람이 곧바로 동문의 다리 근처로 쫓아가 동학 몇 사람을 제압하였다. 그들이 벌벌 떨면서 빌기를, “우리들이 이미 졌으니 떠날 것인즉, 하필 이와 같이 합니까? 이 읍의 향약은 심히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강변의 주점으로 돌아와 유 서방이 술을 넉 잔 사서 나누어 마시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흩어졌다.
7월 15일
아침밥을 먹은 후 저동(杵洞)의 덕원보(德源甫) 집에 가서 순무씨[菁種] 1홉을 얻어 왔다. 저녁 무렵에 덕원(德源)이 도사랑(都舍廊, 큰사랑)에 와서 말하길, “방금 전에 들었는데, 왜선(倭船) 12척이 동래포(東萊浦) 한곳에 정박하고 대구(大邱)에 이르러 본부(本府)를 약탈하고 점거하였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7월 16일
문전평(門前坪)에 보를 쌓았다. 신시(申時) 말에 가랑비가 약간 뿌렸다.
7월 17일
오후에 저동(杵洞)의 김공필(金公弼)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신목평(新木坪)의 오이밭 원두막(苽樓) 아래로 가보니, 김공필과 정진사(鄭進士)가 같이 있었다. 얼마 있다가 정참봉(鄭參奉)이 와서 말하길, “청나라 장수가 3척의 배에 군사 3만여 명을 싣고, 또한 영선(令船, 영국의 배, 令은 英의 오기) 1척을 세내어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싣고 바다를 떠서 일본대양(日本大洋)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왜선(倭船) 3척을 만났는데, 왜인이 묻기를 ‘무슨 배인가?’하니, 청나라 장수가 말하길, ‘너희 일본이 공연히 조선을 요란케 하므로 우리가 ≪너희들을≫ 도륙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왜인이 말하길, ‘그렇다면 지금 바다 위에서 한판 전투를 벌여 보겠는가?’하니, 청나라 장수가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는 미리 회산포(回山砲)를 배의 앞머리에 숨겨 두었다가 일시에 방포하였다. 그래서 청나라 배 3척은 모두 분쇄되었다. 영선이 나중에 도착하자, 왜인이 말하길, ‘이는 누구인가?’ 하니, 영국인이 말하길, ‘우리 영국은 세를 받고 배에 청나라 군수물자를 싣고 왔다.’라고 하였다. 왜인이 말하길,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청나라 배를 모두 부수었으니, 그 물자를 우리 배로 옮기는 것이 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국인이 말하길, ‘우리는 이미 많은 삯을 받고 청나라 물자를 싣고 온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군대가 이미 패하였다면 마땅히 완벽한 상태로 청나라로 돌아가 ≪물자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인이 말하길, ‘네 놈들이 죽고 싶은 것이냐?’하고, 일성의 포향이 울렸다. 이윽고 영국의 배가 모두 부서지고, 영국사람 수백 명이 오리 떼와 같이 줄을 지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였다. 그리고 탈출하자마자 영국으로 전보를 보냈다. 영국(令國)은 서양에 속한 나라이다. ≪전보를 받고≫ 서양의 국가들이 크게 군대를 내보냈다 하더라. 또한 원대인(袁大人, 袁世凱)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출발하였다 하더라. 서울에 있는 왜인이 30만여 명인데, 겨우 파수군(罷守軍) 천 명만 남겨두고 일시에 모두가 평양을 향하여 갔다 하더라.”라고 전하였다. 얼마 있다가 날이 저물었다. 정진사(鄭進士)가 나귀를 타고 들어왔다. 덕원당(德源堂) 숙▣(叔▣)도 마침 이르렀다. 내가 돌아가려고 하자 정참봉이 말하길, “원컨대 여러분들과 한잔 하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모두 “좋소.”라고 하여, 같이 저동의 주점을 향해 가니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 함께 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4~5잔을 나누어 마시고는 돌아왔다. 보 근처에 이르러 비를 만나 옷이 홀딱 젖어서 돌아왔다.
7월 18일
듣자니 동류(東類, 동학 무리)가 옥천(沃川)의 이원(利園, 伊院의 오기)에 몰려들어 난을 일으키니 그 정도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 큰 아들과 그 내종(內從)이 같이 왔다. 그들에게 그곳의 소식을 물어보니, “왜인(倭人)이 상주(尙州)로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15일에 김천(金泉) 시장으로 왜인 2명이 들어갔다 합니다. 가뭄으로 인한 그곳의 소동은 여기보다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7월 19일
새 누룩 3개를 가지고 시장가로 가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놓고, 곧바로 금리(錦里)로 가서 김우(金友)를 찾아보았다. 집 안이 고요하였다. 그래서 정도사(鄭都事)의 집에 들어가서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우(金友)와 대도사감역 어른(大都事監役丈, 도사와 감역을 지낸 사람)이 왔다. 같이 앉은 지 오래지 않아 다시 대도사(大都事) 집의 어떤 이원하인(利園下人)이 와서 말하길, “이씨 집의 노복이 손으로 동류(東類, 동학도)를 때려죽여 ≪동류가 그 대가로≫ 엽전 수천 냥을 빼앗아 모두 나누어 흩어졌습니다. 혹자는 양산(梁山)을 향해 갔다 하고, 혹자는 다시 적등(赤登)을 향해 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돌아오려 하니, 김우(金友)와 대도사(大都事)가 억지로 만류하여 점심밥을 먹고 돌아왔다.
7월 20일
아침밥을 먹은 후 소나무값 7돈 5푼을 주었다. 오전에 범사평(泛沙坪)의 보를 쌓았다.
7월 21일
창촌(倉村)에 부질(婦姪, 姻姪)을 보냈다. 저녁밥을 먹은 후 소나기가 내렸다.
7월 22일
아침밥 이전에 소나기가 크게 내려서 농가에서 기뻐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그치니 모두 말하길, 사나흘은 급한 대로 가뭄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하였다. 저녁 무렵에 월촌(越村)의 강생원(姜生員)이 찾아와서 몇 마디 나누다 돌아갔다. 저녁밥을 먹은 후 듣자니까, 동류(東類, 동학도)들이 초강(草江)에 크게 모여들어 세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하였으며 노략질을 한 뒤 읍내를 향해 갔다 하였다. 그래서 인심이 크게 놀랐다.
7월 23일
용산(龍山,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으로 길을 잡아 가는 길에 금리(錦里)에 들어가서 초강(草江)의 소식을 자세히 물어보니, 송씨 집안 세 사람을 잡아가고, 엽전 만 냥을 빼앗고, 총과 창을 모두 거두어 포동접소(浦洞接所)를 향하여 갔다고 하였다. 곧바로 존주동(尊周洞)을 향해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의 농사 형편을 물어보니, 한재(旱災)가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한참 후에 용산(龍山)에 이르러서 시장 주변의 농사 형편을 잠시 살펴보니, 전답의 곡식이 큰 풍년을 이룬지라 땅의 비옥함에 탄식할 만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표종(表從, 외종사촌)의 집에 다다라 안부를 물은 뒤 저녁밥이 곧 들어왔다. 저녁밥을 먹은 뒤 뒷산의 서정(書亭)에 올라가 더위를 피하고 있자니, 오래지 않아 계당(稧堂)의 이서방(李書房)이 왔다. 안부를 나눈 뒤 농사에 대해 물어보니, 약간의 밭이 말라 들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고종(大姑從)의 집으로 내려가 보니, 마침 양정(楊亭)의 장군집(張君集)이 와 있어서 같이 편안하게 잠을 잤다.
7월 24일
아침밥을 먹은 후 곧바로 돌아왔는데, 오후의 폭염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 잠시 존주동(尊周洞)을 방문해 보니, 배군(裵君)은 이미 농사일터로 가고 없었다. 얼마간 앉아 있다가 금리(錦里)로 돌아왔다.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집 안 가득 모여 있었다. 얼마 있다가 점심밥을 먹을 때, 중론[衆議]이 흉흉한 가운데 말하길, “도인(道人, 동학도인)들이 시장에 많이 들어와 있어서 몰래 듣는 귀가 많다. 괜히 이 집에 모여 있다가는 주인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우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옳지 않겠다.” 하여, 즉시 흩어져서 돌아왔다.
7월 25일
오후에 들으니, 검촌(黔村)의 합천 민씨의 집에 도인(道人) 천여 명이 갑자기 몰려와서 바깥사랑채를 다 부수고 검촌 사람들을 결박하는 등 작란(作亂)이 아주 심하였다고 한다.
7월 26일
아침밥을 먹기 전에 들으니, 도인 몇 사람이 양가동(陽佳洞) 사람을 결박하여 곧바로 작곡(昨谷)을 향하여 갔다고 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도인들이 작곡(昨谷)으로 간 것은 을곡(乙谷)에 산화(産貨)를 맡은 직임[産貨之任]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 또한 직임을 둔 일[任置之事]이 있으므로, 오래지 않아 ≪도인들이 여기로≫ 이를 것이니 어찌 해야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명언보(明彦甫)가 여장(汝長)을 불러 꾸짖어 말하길, “나는 을곡(乙谷) 사람들을 보지도 못하였는데, 물화(物貨)를 가지고 와서 우리 집에 두었으니, 그대가 한 일을 장차 어찌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장(汝長)이 크게 노해서, “만약 그대들이 두려워한다면 모두 도망가라. 나 혼자 남아서 담당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문단속을 마치기 전에 마침 앞문의 돌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몇몇 사람들이 연이어서 왔다. 특별히 살기가 느껴져서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몇 마디 하고는 곧 마을 뒤 골짜기로 달아났다. 일촌(一村)의 바람이 흩어져 왔다. 잠시 각목치(角木峙)에 서 있으려니 순업(順業)이 팔을 걷고 오기에 본동(本洞)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도인들이 대여섯 사람을 결박하고 무수히 난타하였으며, 총과 창을 모두 찾아내고, 갑자기 집집마다 쳐들어가 내정(內庭)을 수색해서 낫이나 호미 같은 것들을 찾아내고, 급히 을곡(乙谷)의 물화(物貨)를 맡고 있는 사람을 찾았으며, 또 본동(本洞)의 약장(約長)이 누구인가 물어보았다.”라고 하였다. 약장(約長)은 바로 나였다. 이윽고 화동(花洞)의 안산(案山, 남산)으로 가서 소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였다. 날은 이미 정오를 지났다. 기동(基洞)의 소나무 숲 사이를 보니, 군데군데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물어보니, 소문보다 더욱 심하였다. 물가의 갈대와 물억새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마침 이웃의 조이(召史, 과부 별칭)가 지나갔다. 그래서 저녁밥을 좀 내오라고 몰래 청하였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자 과연 저녁밥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밥을 가지고 아버님이 계신 산으로 올라가 함께 밥을 먹고 흩어지니, 밤이 이미 깊었다. 집안 소식과 아이들이 있는 곳에 대해 전혀 듣지를 못하여 답답한 심정에 생각만 오락가락하였다. 벼가 자라는 논두렁 사이로 잠복하고 잠행하기를 반복하여 울타리 가에 이르러 보니, 도인들이 창(槍)을 끌고 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人의 소리가 크고 작게 들렸다. 한참 있다가 읍내에서 불빛이 일어나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우리 마을에서도 도인들이 횡행하면서 고함을 질러대고 뛰어갔다. 그래서 집안으로 잠입하여 자세히 물어보니, 규방 문을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르고, 자식들의 소식은 알지 못한다고 하며, 집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급히 갓과 망건을 챙겨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 앞의 길을 바라보니, 등불과 횃불이 별처럼 수 삼리에 걸쳐 늘어서 있고 유치백(柳致伯)을 잡아 끌어내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잠시 뒤 유치백의 집과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주변의 다른 집들도 문과 벽, 가산을 부수는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그 중에 누가 말하길, 이 고을에 도인의 집이 하나 있으니 다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아버님과 동네의 여러 친구들이 차츰차츰 몰려들었다. 모두들 간담이 서늘하고 뼈가 떨린다고 하였다. 자식들은 국촌(菊村)에 있다는 기별을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한참 있다가 모두 읍내를 향하여 갔다. 다시 산을 내려가 웅아(雄兒,아들의 미칭 웅의 음을 지닌)를 이끌고 나가니, 닭이 이미 두 번째 우는 때가 되었다. 같이 국촌으로 향하였는데, 국촌에 이르기 전에 날이 이미 밝아왔다. 우리 마을 사람 20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7월 27일
아침밥을 먹은 후에 주인이 말하길, “물가에 가서 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물가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벅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양산(陽山, 지금의 충북 영동군 양산) 사람이 할머니 산소를 파려고 하여 급히 할아버님을 찾아왔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이 누가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주인장이 이르러 보니, 결박된 채로 굴착하고 있어 주인의 아들과 함께 산에 올라 산소를 파헤치는 것을 막았다. 그 정황이 참혹하였다. 곧 돌아가려고 하자, 주인이 억지로 만류하고 있을 즈음에 아버님이 또 오셔서 같이 묵었다. 우리 마을의 소문이 까마득하여 양산 장터로 가서 탐문해 보니, 혹자는 이미 안정되었다고 하고, 혹자는 아직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쌍암(雙岩)에서 저녁밥을 먹은 후, 큰 아들과 같이 저문 때를 틈타 화동(花洞)에 이르러 탐문해 본 연후에 비로소 집으로 들어왔다.
그믐날, 아침밥을 먹은 후, 아버님께서 웅아(雄兒)를 데리고 오셨다. 아침나절에 동네 사람들과 서로 보고 웃었다. 이번에 날린 비용이 100여 냥이고, 강씨와 유씨[姜柳] 두 집안이 혼이 났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