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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 초4일

또 기포(起包)하였다.

10월 초9일

지붕을 이었다.

10월 12일

또 기포하였다.

10월 14일

중(僧)에게 저녁 때 들으니, 대진(大陣) 6~7만 명이 청산(靑山,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에서 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병정(兵丁)인지, 도인(道人)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인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을 때, 밥상 700개를 분배하라는 통문이 우리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촌사람들이 공동으로 의논하여 밥상을 분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밥을 먹은 후 듣자니, 금리(錦里)로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10월 16일

사시(巳時)에 200여 명이 우리 마을로 달려 들어와서 집집마다 나귀·소·말 10여 필과 포군(砲軍) 수십 명씩이 들어차고, 그 나머지는 다 창군(鎗軍)이었다, 모두 노략질한 화물(貨物)을 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르길, 충주(忠州) 미산포(美山包)니, 진천(晉川, 晉은 鎭의 오기) 광혜원접(廣惠院接)이니 하였다. 혹자는 싣고 온 소고기를 먹었고, 혹자는 끌고 온 소를 잡아서 먹었다. 그리고 촌사람들을 시켜 불을 놓고 밤이 새도록 수직(守直)하라 하였다. 그러니 사람 마음이 어느 누구인들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겠는가? 이날 밤 나이 어린 권구(眷口, 家屬)들은 쌍암(雙岩)으로 피신시켰다.

10월 17일

오시(午時)에 어떤 10여 인이 우리 마을로 곧바로 들어와서는 자칭 여주성찰(驪州省察)이라 하였다. 그들은 갑자기 안뜰[內庭]로 들어가 백미 석 섬, 솥 10여 좌(座), 그리고 땔감이니, 바가지니, 이엉이니, 소금·장물이니 할 것 없이 수탈하여 30여 짐을 노략질해 성 안으로 갔다. 얼마 있자니 어떤 사람이 도소(都所)에서 왔다고 하고는 담배 1짐을 거두어 갔다. 또 이날 오래지 않아 자칭 안성포(安城包)라는 자들 6~7인이 와서는 땔감과 소금과 장물 등을 수탈해 갔다. 이 날 이와 같이 4차례에 걸쳐 노략질을 하였다.

10월 18일

노략질하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왔다 갔다 하니,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다. 내가 잠깐 성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진중의 군막이 총총한 가운데 얼굴에 회칠을 한 사람 1명과 도둑 2명이 본읍(本邑, 영동)의 포(包)에 결박되어 있었다. 얼마 있다가 도소(都所)로 보낼 것이라 하였다. 차일(遮日)을 설치해 놓은 곳에 맑은 물 한 상을 차려놓았다. ▣손사문(孫斯文) 등 5~6명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와 말하길, “본래 우리 도는 비록 미물 곤충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도이다. 지금 대진(大陣)이 이곳에 주둔하여서 모두 그 가르침대로 하였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 양반부녀를 겁탈하였으니, 어찌 이런 더러운 이름을 무릅쓰고 살기를 바라겠는가? 하늘에 고하고 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수만 인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회를 바른 사람이 바로 여주포(驪州包) 소접주(小接主)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그 형이 끊임없이 ≪동생을 살려달라고≫애걸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때에 안성(安城)과 각 포(包)들은 각자 진(陣)을 치고 있었다.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 돌아가고 싶었으나, 마음 한편으로 우리 집의 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 사방을 돌아보니, 어느 한 곳에서 ≪우리 집의 솥에≫ 막 불을 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표시를 해두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땔나무 3짐을 약탈해 갔다. 땔나무를 빼앗긴 것이 모두 6~7짐이다.

10월 19일

새벽에 일어나 보니, 하얀 안개가 사방에 짙게 끼어서 비가 오는 듯하였다.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성 안으로 가서 솥 1개를 찾아서 돌아왔다. 이때 선진(先陣)은 이미 떠났다고 하였다. 영동(永同)의 대접(大接) 조경완(趙敬完)이 선진이 되어 옥천(沃川)으로 배행(陪行)했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고, 얼마 후에 성안(城岸)으로 내려가 보니, 안개는 여전히 개이지 않았다. 저들 진(陣)은 연속하여 화암로(花岩路)로 이어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것을 다 보고 나서 혼자 명륜당(明倫堂, 향교에서 강의하는 곳)에 올라가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별칭)을 향하여 4배를 올리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나와서 배오위장(裵五衛將)을 만났는데, 솥 4개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하길, 같이 읍내에 나가서 그 광경을 한번 보자고 하였다▣. 내가 좋다 하고 같이 가서 두루 살펴보니, 부내(府內)가 숙연하여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날이 기울 무렵, 본읍(本邑, 영동)의 대장(大將) 박덕현(朴德賢)이 본포(本包)를 거느리고 초강(草江)을 향하였는데, 그를 따랐는데 그는 기포(起包)가 미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20일

떠나지 않은 사람은 진(陣)으로 돌아가는 날에 모두 집을 태울 것이라 하였다. 또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동네의 여러 사람과 읍내로 내려가 모두 술에 취하여 돌아왔는데, 그것은 대개 기포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21일 전날 기포한다는 설이 흉흉해지자, 일부 동네 사람들은 초강(草江)을 향해 많이 떠나갔다. 마음이 두렵고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뒤따라 초강(草江)으로 가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다른 두 사람과 저문 때를 틈타 집으로 돌아오면서 서로 말하길,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모두들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과 개화리(開和里)에 사는 두 사람이 이르길,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7~8일을 지나는 동안은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10월 28, 29일

옥천(沃川)으로 떠났던 사람을 비로소 맞이하였다. 그가 이르길, 금산(錦山)에서 다시 옥천(沃川)으로 접어들어 머들재[머들嶺]에 이르러 접전을 벌였는데, 도인이 수십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죽인 이 사람들은 분명 왕사(王師, 관군)이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주석
청산(靑山,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에서 온다고 하였다. 북접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은 10월 11일 청산에서 대규모 대회를 개최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영동, 옥천을 거쳐 논산으로 이동해 전봉준부대와 합류하였다. 따라서 10월 14일 청산에서 영동으로 이동한 대진(大陣)은 북접 동학농민군들이었다.
손사문(孫斯文) 사문은 선비의 존칭. 최시형의 고제인 청주출신 손천민은 영동 옥천일대의 농민군을 지휘했는데 여기 손사문은 손천민을 가리키는 듯하다.
도인이 수십 명을 죽였다 1894년 10월 29일 동학농민군 약 1만 명 이상이 옥천 증약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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