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4일
상주(尙州)의 의병(義兵) 정직(丁直)이 본읍(本邑, 영동) 안으로 들어와 저녁밥을 사먹고 양산(陽山)으로 갔다.
12월 초5일
밤에 다시 본읍으로 돌아와 유숙하고 떠났다.
12월 초6일
전해 들으니, 곧바로 옥천(沃川)의 자작촌(自作村)에 이르러 접주(接主) 두 사람을 죽이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12월 초7일
저곡(杵谷)에 이르러 들으니, 어떤 곳의 동도(東徒) 3만여 명이 무주(茂朱) 안성(安成)에서 와서 곧바로 기일필역(基一必驛)에 다다랐다. 그래서 인심이 크게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오촌(梧村) 원동(院洞)으로 갔다 한다. 그래서 몸 둘 곳을 몰라 인민들이 흩어져 도망쳤다고 하였다.
≪글을 모르는 선비가 많으니 첫 번째 모를 일이다≫(衍文)
12월 초8일
저들 진이 유숙하였다.
12월 초9일
≪저들 동학진이 출발하여≫황간(黃澗)으로 떠났다. 나머지 무리들은 본촌(本村)의 마을로 들어가 이르지 않는 곳 없이 노략질하고 떠났다.
12월 초10일
아침밥을 먹은 후 갑자기 들리는 소문에, 어제 떠났던 저들 진이 다시 읍내(邑內, 영동)로 크게 몰려 들어갔다고 하였다. 인심이 물 끓듯 들끓었다. 읍내의 총기 수십 자루를 빼앗아 갔다고 하였다.
12월 11일
수석촌(壽石村)과 죽전촌(竹田村)이 모두 불태워지고, 죽전(竹田)의 노치선(盧致先) 형제를 죽이고, 또한 용산(龍山)의 강용구(姜容九)를 죽였다. 그리고 상주(尙州)의 병정들과 회고치(灰古峙)에서 전투를 벌여 병정(농민군) 두 사람을 죽이니, 병정들이 패주하였다. 용산(龍山)의 소·양·돼지를 잡아서 빼앗아 갔다.
12월 12일
청주(淸州)의 병정(兵丁)들과 동문촌(東門村) 앞에서 전투를 벌여 병정들이 패주하였다. 또한 동문촌의 박서방(朴書房)을 죽였다.
12월 14일
청산(靑山)에 머물면서 소사동(小蛇洞)에서 전투를 벌여 이겼다. 또 영관(領官) 한 사람을 죽였다.
12월 16일
보은(報恩) 본읍(本邑)으로 가서 기포(起包)하였다는 말이 들려 인심이 크게 놀랐다.
12월 17일
저들 무리가 보은(報恩) 북실(北室)에 머물고 있었는데, 병정(관군)들이 사방에서 크게 들어와 동도(東徒)들을 수없이 죽였다. 처음 들리는 말에는 근 3천 명이 죽었다고 하고, 나중에 들리는 말에는 적어도 5백 명은 죽었다고 한다. 나머지 잔당들은 속리산(俗離山)으로 많이 숨어들어갔다고 한다. 그 후 진천(晉川, 晉은 鎭의 오기)·청안(淸安)·죽산(竹山) 등지에 출몰하였으나 패하였다고 하였다.
12월 24일
일본인들이 양산 쪽에서 말을 타고 본읍(本邑, 영동)으로 들어오더니, 점점 많이 들어와 도로표지판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