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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정월 초3일

≪일본인들이≫비로소 떠나갔다.

정월 초4일

용산(龍山)의 표종씨(表從氏)와 학원보(學源甫, 보는 남자의 미칭)가 돌아온 것에 대한 인사로 동헌(東軒)에 왔는데, 그동안 겪은 일을 대강 설명하였다. 용산 사람들은 혼이 몸에 붙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하길, 집을 떠난 지 여러 날 되어,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작별하였다고 하였다.

정월 초7일

전해 들으니, 옥천(沃川)의 의병들이 초강(草江)으로 크게 몰려 들어갔는데, 선봉 20여 명은 읍내(邑內, 영동)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정월 초9일

초강(草江)의 정우범(鄭尤凡)이 와서 말하길, 옥계(玉溪)의 박가 무리 6명을 잡아와서 머물렀는데, 해질 무렵에 병정들이 고당포(高塘浦)에서 와서 곧바로 지장(地庄)을 향하여 갔다고 하였다. 이 날 병정과 일본인·민보(民堡)가 점점 많이 몰려들어 읍내의 관아와 집집마다 들어찼다.

정월 11일

동면(東面)의 김가 무리를 찾아 체포하려고 하는데, 마침 제사를 지내고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그들을 잡아 부내(府內)로 송치하여 심문하였더니, 최법헌(崔法軒, 최시현)이 도보로 동면(東面)을 지나 양산(陽山)으로 갔다고 하였다. 11일 밤에, 병정과 일본인들이 저동(杵洞)으로 가서 40여 명을 결박하고 읍내로 돌아간 뒤 하룻밤을 묵고 모두 흩어졌다.

정월 12일

『모시(毛詩)』 3권을 빌리고자 중함치(中咸峙)에 갔다. 병정들이 내함(內咸)으로 들어가서 임가(任哥)와 김마당(金馬堂)의 아들을 붙잡았는데, 마당(馬堂)은 최법헌(崔法軒)을 잡겠다고 자원하여 병정 15명을 거느리고 갔다고 하였다.

정월 13일

아침밥을 먹고 나자 누가 이르길, 일인(日人)과 병정(兵丁)들이 다 황간(黃澗)으로 향해 떠나고, 죄인들은 다 풀려났다고 하였다. 이 뒤에도 일인과 병정들이 종종 왔다 갔다 하였다.

정월 21일

일인과 병정 300여 명이 전라도에서 본읍(本邑, 영동)에 이르렀는데, 지나온 촌락마다 차례로 짐을 채워서 떠났다. 본읍에서 자고 청산(靑山)으로 향하여 갔다. 이후로 본읍에서는 특별히 의사(義士) 10여 명, 별초군(別抄軍) 80명을 선발하여 동도(東徒)의 거괴(巨魁)를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3월 초7일에 이르러 18명을 총살하였다. 그 후 또 5~6명을 체포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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