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초2일
병정 300명과 일본인 3명이 옥천(沃川)에서 와서 하루를 머무니, 인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12월 초3일
그들이 청산(靑山)을 향해 갔다.
12월 초5일
병정 5명이 금산(錦山)에서 와서 본부(本府)에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황간(黃澗)을 향해 갔는데, 사람들은 그 사리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12월 초6일
오후에 이르길, 황간(黃澗)의 수령이 머리를 자르고 본부(本府)에 갔다고 하였다.
12월 초7일
오시(午時)에 본부의 수령 역시 단발하였다 한다.
12월 초8일
공주(公州)의 병정(兵丁)들이 청양(靑陽) 정산(定山)의 의병(義兵)을 대파하고, 홍주(洪州)는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무너졌다.
12월 초9일
금영(錦營, 충청감영)의 병정들이 군사를 떨치고 돌아와 군영을 보니, 모든 사람이 단발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안동(安東)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대단하였다.
12월 25일
금산(金山) 사람이 와서 안동(安東)·예안(禮安)의 통문을 전하였다. 그 역시 안동의 의소(義所)에 동참하였는데, 병정 200명이 갑자기 안동으로 들어가 방포(放砲)하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자, 소위 대장이라는 권세원(權世遠)이 먼저 신을 신고 도망쳤다. 회원(會員) 4만 8천 명도 모두 도주하였는데, 이때 서로 밟아 깔려 죽은 자가 7명이라 하였다. 이때 황간(黃澗) 사람이 용안(龍安)에서 왔다 하면서, 지나온 길에 삭발이 정지되었다고 하였다.
12월 28일
쌍암(雙岩,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구강리)의 박생원(朴生員)이 왔다. 그는 인동(仁同) 등지에서 왔다 하고는 이르길, “영영(嶺營) 관찰사(觀察使)가 병정 200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안동(安東)으로 들어가 병정 30명씩 조를 이루어 방포(放砲)하게 한즉, 모두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믐날, 저녁 때 큰 바람이 불고, 눈이 조금 내렸다. 남쪽에서 불빛이 일었는데, 천만리(千萬里) 산막동(山幙洞)의 권감찰(權監察)의 집이 모두 불에 탔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