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3월 초1일
동풍이 크게 불어왔다.
3월 초5일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3월 초6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 비가 내렸다.
3월 초8일
저동(杵洞)의 김아(金雅), 화동(花洞)의 김아(金雅), 공주(公州)의 두 김아(金雅)와 같이 뒷산에 올라 크게 취하여 돌아왔다. 광주(廣州)의 의병이 패하고 흩어져 화적(火賊)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벼슬살이 하는 사람 중에서는 최익현(崔益鉉, 유학자)이 첫째가는 사람이고, 유림 중에서는 전우(田愚, 유학자)가 첫째가는 사람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수고당(守古黨)이 출범하였을 때 이범진(李範臻)·윤용구(尹容九)·이준용(李俊容)·이완용(李完用) 등이 우두머리였다고 하였다.
3월 초9, 10일
면화를 심는 일을 마쳤다.
3월 12일
또 비가 내려서 교자계원(轎子楔員)들과 같이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3월 13일
읍내의 손윤오(孫允五)·손공훈(孫恭勛)이 찾아와서 같이 술을 마셨다. 선복▣(先卜▣)을 애써 찾아갔다. 해가 질 무렵 용산(龍山)의 표형(表兄)이 찾아와서 또 들으니, 영남(嶺南)의 의병들이 지례(知禮)의 홍심동(紅心洞)으로 많이 들어가 점거하였다고 하였다.
3월 14일
또 들으니, 의병 200여 명이 월전(月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혹자는 이르길, 안의(安義) 전투에서 패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3월 15일
신목평(新木坪)에 보를 쌓았다. 어떤 사람이 이르길, 오시(午時)쯤 월전(月田)의 의병들이 천만리(千萬里) 산막동(山幕洞)으로 들어가 점심밥을 먹었고, 신시(申時)쯤 양정로(楊亭路)에서 나팔소리를 내면서 기를 앞세우고 행인 100여 명이 읍내를 향해 갔는데, 수령과 공형(公兄)은 도망하여 피신하고 손윤오(孫允五) 한 사람이 잡혀서 저녁밥과 아침밥을 제공하였으며, 포군(砲軍)과 군기(軍器)를 샅샅이 수색했다고 하였다. 그 역시 도주하고 읍내 사람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3월 16일
본읍(本邑, 영동)에 머물며 기병(起兵)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고을 향교에 통고(通告)하자, 향교에서는 곧바로 통문을 가지고 율리(栗里)의 정도유사(鄭都有司, 책임자) 댁으로 갔다. 또한 본읍의 포수장관(砲手掌管) 박가(朴哥)를 결박하고 여러 포수(砲手)를 불러내라 재촉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포군(炮軍) 6명과 함께 가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3월 17일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전해 들으니, 읍내의 의병이 어느 날 떠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군중의 심리가 흉흉한 것은 병정이 와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3월 17일
가랑비가 내렸다. 오후에 의병들이 황간(黃澗)을 향해 떠났다. 떠난 후에 또 비가 내렸다. 본읍 사람 30명과 포군 10여 명이 따라갔다.
3월 18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비가 내려서 물이 좀 불어났다.
3월 27일
모를 심었다.
3월 29일
어젯밤부터 오후까지 비가 내려서 물이 불어나 보를 넘었다. 오후에 ▣양(▣陽)을 듣고 화치(花峙)로 가서 시장에서 5냥을 얻어왔다. 2냥을 고공(雇工)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고공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3월 30일
3냥을 서원(書員)과 선복(先卜)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