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월 초1일
자시(子時)와 축시(丑時) 사이에 북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백설이 펄펄 날리고 땅이 비로소 얼어붙었다. 이때부터 점점 큰 추위가 몰려왔다.
초10일
다소 온화한 기운이 있었다.
11일
또 추워졌다.
초3일
무지개가 서는 변고가 있었다.
초4일
이 달에 맞지 않는 기상이변인 추위로 인해 칩거한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12일
이후로 날씨가 차츰 풀렸다.
15일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보름달을 볼 수 없었다.
17일
또 무지개가 서는 변고가 있었다.
20일
오시(午時)에 식사를 마친 후, 5, 6조각의 무지개가 겹겹이 서쪽 해를 두르고 있다가 일몰 후에 사라졌다.
21일
아침밥을 먹기 전에 동쪽에 무지개가 뜨고, 아침밥을 먹고 난 후에 큰 지진이 있었다.
「추우사(秋雨辭)」
아! 옛날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추풍사(秋風辭)」를 지었고, 두공부(杜工部, 杜甫)는 「추우탄(秋雨歎)」을 읊었는데, 지금 「추우사」를 짓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때는 바야흐로 신축(辛丑, 1901)년이라. 이 해의 가뭄은 동토(東土) 3천 리에 처음 있는 일이요, 대한(大韓) 5백 년 동안 일찍이 없던 일인지라, 이제 1년간 비온 내력을 하나하나 말해볼까 하는 것이로다.
해가 바뀌고부터 만춘(晩春, 음력 3월) 보름 사이에 연일 내린 비라야 겨우 해갈(解渴)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중하(仲夏, 음력 5월) 초6일의 비는 겨우 쟁기 하나 적실 정도였으니, 일찍 파종한 땅에는 한 구기[一勺]의 물도 얻을 수 없었고, 보가 설치된 논에서만 근근이 차례로 이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름쯤에 또 먼지를 적실 정도의 비가 내렸으니, 담배[南草]와 들깨[法荏]는 겨우 옮겨 심을 수 있었고 콩은 겨우 모를 세울 수 있었으나 점점 시들어 갔다. 이에 고을에서는 5차례 기우(祈雩)의 예를 올렸고, 읍(邑)에서는 초하루와 보름에 도무(禱巫, 굿거리)를 거행하였으나 끝내 조금의 효험도 없었다. 27일 비가 조금 내려 먼지를 적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