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實記)
선생은 휘(諱)는 승택(升澤)이요, 자(字)는 희백(羲伯)이며, 호(號)는 농산(農山)이다. 헌묘(憲廟, 憲宗) 무술(戊戌, 1838)년 6월 14일에 태어나셨다. 태어나던 날 밤 왕부군(王府君, 할아버지)의 꿈에 어떤 신선이 찾아와서 말하길,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고 이름이 높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여, 귀현을 어릴 때의 이름으로 썼다. 어릴 때 놀이를 함에도 기개가 있었기에 아이들이 모두 굴복하고 따랐다.
9세 때 글방에 나아가 스승을 섬겼는데, 스승이 눈[雪]을 대하고 ‘병(兵)’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글을 지어 보라 하자≫응답하여 말하기를, “소무는 눈과 담요를 씹어 먹으면서도 선우의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네[蘇武喫雪氈 不畏單于兵].”라고 하였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기특한 재주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12세 때, 누님의 남편 정세용(鄭世容) 공(公)이 그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우공(禹貢)」 (『(尙書)』의 편명)을 읽게 하였다. 3번을 읽고는 곧 외우게 되었는데, 한 글자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형들의 명으로 응주사문(應主司文)을 지었다.
14세 때, 성주 향시(鄕試)에 나아가 명성을 크게 떨쳤다.
1861년에 지은「첩향해(捷鄕解)」 는 지금까지 글방선비들이 자주 전하면서 외우고 있다.
1865년에 선친께서 서울에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돌아오는≫길에 집에 이르는 동안 혼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3년 동안 중문(中門)을 넘지 않고 날마다 반드시 묘소를 살피고 눈물을 흘리는데, 눈물이 떨어지는 곳의 풀이 시들어 버릴 정도였다. 군자(君子)께서는 ‘효자가 거상(居喪)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두 손을 마주잡고 세상이 끝난 듯이 애통해하였다. (이후) 매번 상례를 치를 때마다 비록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지게 되었어도 곡(哭)하는 것은 처음과 같이 하였다. 그러다 백공(伯公, 큰형님) 또한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뜨시자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의 존칭)께서 하루에 아주 적은 양만 드시고 더 이상 세상살이에 뜻을 두지 않으셨다. 이에 선생께서는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하여 (대부인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였다. 심지어는 혹 손수 패사(稗史, 이야기)를 베끼기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좌우에서 읽어 드리도록 하였다.
1879년 대부인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뜨니, 척(戚, 외척, 곧 모계)의 예로 바꾸어 한결같이 이전의 상례(아버지의 상례)와 같이 하였다. 상례를 마치고 탄식하여 말하길, “상투적 규범을 없앤 것은 어버이를 위해서였지 나의 뜻이 아니었다.” 하셨다. 드디어 자리를 잡아 서실을 하나 짓고 종일 고요히 그 속에 거처하셨다. 선생은 재주가 높고 뜻이 굳세어 우주 사이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를테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전진(戰陣)의 방법에 대하여 두루 섭렵하고 정밀하게 핵실하셨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쏟아 날마다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예기(禮記)』의「단궁(檀弓)」 과「학기(學記)」, 그리고 『주역(周易)』의 건곤괘(乾坤卦)의 역수(易數) 등 수백만 마디의 글귀를 외우셨고, 『통감절요(通鑑節要)』의 경우에는 더욱이 그 뜻을 잘 이해하고 통달하셨다. 평생 동안 받아들인 것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사미(四未) 장 선생(張先生)은 같은 마을에서 도(道)를 강술하셨다. 선생은 조석으로 바른 도를 구하셨으니, 그때 문하에 들어간 선비치고 우러러 존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882년에 국가에 군변≪임오군란을 말함≫이 있어서 인정이 몹시 불안하여 조석으로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 마을과 약속하여 다섯 집을 묶어 통을 만들고 좌보법(坐堡法)을 만들어 놀라고 두려운 일에 방비하셨다. 이때 막내동생과 조카 장상기(相岐)와 함께 하나의 계(契)를 조직하며 오중(吳中)의 범장의 의리(范庄之義)를 따랐으며, 혼례와 상례에는 두루 구휼하여 각기 가져다 쓰도록 하였다.
1885년 무뢰배들이 가까운 곳에 근거를 두고 남의 부형을 잡아가고 남의 무덤을 파헤쳤다. 선생께서 길에서 도적들을 만나 길흉화복으로 깨우치셨는데, 말씀이 엄하고 의리가 곧으셨다. 그러자 잠시 후 도적패들은 과연 쥐새끼들처럼 흩어져 도망하면서 “아무 어르신의 가르침을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1894년 동비(東匪)들이 크게 치성하여 성(城)과 관부(官府)를 몰래 점거하고 인가를 마구 부수었는데, ≪선생의≫집 또한 잔혹한 짓을 당하셨다. 선생은 그곳을 피하여 군의 동쪽 화곡(華谷)으로 옮기셨다. 군관(郡官) 조응현(趙膺鉉) 공(公)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듣고자 마을 어귀에 도착한 것을 하인들이 와서 아뢰었다. 이에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적의 형세가 이와 같은데, 법을 집행하는 자가 먼 산 보듯이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셨다. 조공(趙公)이 말하길, “우리 읍은 작고 적의 형세는 크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이에 ‘동비를 평정할 5가지 계책(平東五策)’을 일러 주셨는데, 첫째, 원수의 감정을 나누는 것[分怨]이요, 둘째, 즉시 적의 괴수를 베는 것[卽斬巨魁]이요, 셋째, 도록을 태우는 것[燒都錄]이요, 넷째, 접경을 넘어 행군하는 것[越境行軍]이요, 다섯째, 통의 규정을 세우고 무기를 수리하는 것[立統約修軍械]이었다. 조공이 그에 따라 급히 안찰사[按使]에게 알리고, 동시에 군사를 발동하자 열흘이 되지 않아 경내가 깨끗해졌다.
그때 단발령[髠剃令]이 내려졌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초야에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선비가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란 것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도를 지키기 위하여 죽어야 할 책임이라면 실로 있는 것이다. 만약 시세가 궁박하다면 어쩔 수 없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것을 궁극적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1895년 사미(四未)와 선생께서 아림(娥林)의 처소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가니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가 찾아와 만나셨다. 대계(大溪)가 말하길, “화산(花山)의 의거가 갓 패하였고, 진양(晉陽)은 오히려 소란스럽습니다. 지금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우리 유림에서 강론해야 할 것이 이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옛날 진(秦)나라 ≪시황제≫정(政)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자행함에 어디다 몸 둘 곳이 없었는데, 진섭(陳涉)이 한번 고함을 지르고 떨쳐 일어나자 홀을 큰 띠에 꽂고 다니는 벼슬아치들이 제기(祭器)를 끌어안고 그에게 귀순하였습니다. 하물며 500년간의 옷차림을 해오던 나라가 갑자기 오랑캐의 습속으로 변할 리야 있겠습니까? 화산(花山)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을 거부하고≫상투를 지키겠다[保髮]고 의거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따랐던 것입니다. 무릇 병사를 잘 쓰는 것은 둥근 돌덩이를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은 신속함을 귀히 여기고, 병사는 주저하고 이리저리 재는 것을 꺼립니다. 신속하게 하면 사기(士氣)가 떨쳐 일어날 것이고, 위세가 더욱 불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저하고 이리저리 재고만 있다면 인심이 흩어지고 첩자들이 쉬 틈을 타고 들어올 것입니다. 화산(花山)의 여러 공(公)들이 끝내 주저하고 이리저리 재다가 패배를 당했던 것이며, 저 진양(晉陽)의 행동은 겨우 하나의 성을 얻고는 곧 스스로 만족하여 그대로 머물며 낭자하게 술을 마셨으니 어찌 뜻을 성취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대계(大溪)가 말하길, “두 능의 원수[二陵之讐]와 8월의 변란[八月之變,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보고도 끝내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비록 그래야 할 의리야 있겠지만 진실로 그럴 때가 아니라면 또한 지혜로운 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가 북쪽으로 옮겨 가고[二帝北遷] 삼궁이 포로로 잡혔을 때[三宮被虜],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실로 자양(紫陽)의 큰 가르침이었으나 주희(朱熹) 문하의 제자들은 일찍이 스스로 일어나 의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셨다.
1897년에 부지암(不知巖)에서 여러 학생에게 강론하셨다.
1900년에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함께 『남명조선생집(南冥曺先生集)』을 교열하였는데,「관서문답(關西問答)」 과「음부서두류록(淫婦書頭流錄)」 가운데 기생 이름을 약간 깎아내고, 나머지는 다 옛 기록 그대로 두어 ‘옛것을 그대로 지킨다’는 뜻을 받드셨다.
그 해(1900년) 3월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황계폭포를 보셨다.
4월, 미헌(未軒) 선생이 돌아가시자 복을 입고[加麻] 곡을 하셨다.
3월, 문집 12편, 보의(補疑) 6책을 나란히 판각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 또한 글을 영남에 드러내 새겼으니 먼저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다.
1901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심은 ≪본체로서≫리 하나로 되어 있고[心爲理一], 성은 ≪작용으로서≫여러 가지로 나뉜다[性爲分殊].”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에 선생께서는 ‘허령설(虛靈說)’을 내세워 분별해 말씀하시길, “이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져 보면 차이가 있는 것이니[此本根親切地毫忽差], 곧 노장이나 석씨[莊釋]의 이론으로 흘러들어가 주자(朱子)의 말을 버린 것이다. 석씨(釋氏)는 신령스럽게 깨닫는 것[靈覺]을 성(性)이라고 잘못 파악하였는데, ≪그 이론의≫병통은 가리켜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릇 이(理)와 기(氣)가 합쳐져서 허령(虛靈)한 것이 심(心)이다. 형체가 있는 것[有形者]을 가지고 말해 보자면, 동(銅)에다 수은(水銀)을 합쳐 보면 밝게 드러난다. 동은 비유하자면 이(理)요, 수은은 비유하자면 기(氣)이다. 지금 성(性) 또한 허령(虛靈)하다고 한다면, 성도 이와 기가 합쳐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1906년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와 『동강김선생집(東岡金先生集)』을 교열하였는데,「보유류부제편(補遺類附諸篇)」 을 나누고「김상문답(金相問答)」 과「흥요무(興要務)」 두 편을 합하여 ‘잡저(雜著)’로 옮겼다.
1910년 사옥(社屋)에서 문득 읍을 하고 소매를 적시면서 말씀하시길, “불행히도 늙어서도 죽지 않아 오늘≪의 이 참상≫을 보게 되었구나.”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비록 이웃에 경조사가 있더라도 가지 않으셨다. 이 해에 ≪총독부에서≫국내에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아 각각 돈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글로써 이를 배척하면서 말씀하시길, “무릇 선비는 빈궁하다고 해서 그 절개를 바꾸지 않고, 위협을 당한다고 해서 그 의지를 빼앗기지 않는다. 흰 머리가 나고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살고 부친과 조부 윗대에서는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처지에, 어제 나라가 망했는데 오늘 하사품을 받는다는 것은 개·돼지와 같은 행실이다. 선비가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어찌 협박에 굴하겠는가?”라고 하셨다. 그 우두머리가 전해 받아 읽어보고는 낯빛이 변하면서 일어나 경의를 표하며 말하길, “의인이로다. 감히 강요할 수 없겠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그 우두머리가≫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선생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1916년 10월 13일 불초 제가 부친의 상을 당하여 시신을 수습할 적에 선생이 자리에 가서 곡을 하시었다. 슬프다. 21일부터 편안치 못하시다가 25일 인시(寅時, 새벽 3~5시)에 정침에서 고종(考終)하였다. 하루 전날 소자 곁에서 모시고 있자니 홀연 근심스레 말씀하시길, “내가 무슨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는가? 그저 한두 벗이 그릇된 것을 두고 서로 칭송하는 정도였다. 실로 사미옹(四未翁)이 바람처럼 흘러가 지금 어느덧 늙어 버렸구나.”라고 하셨다. 이를 보니 생사의 기로에 서면 그런 감정이 반드시 미리 들게 마련인가 보다.
그 해 12월 6일, 길마현(吉馬峴) 집안 묘지에 하관하였다. 이때 사림(士林)으로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고, 문인(門人)으로 가마(加麻)한 사람이 50여 세계(世系)였다. 자손들이 집안에 있는 문서 중 저술하신 것을 기록하니,「농재강설청사(農齋講說靑史)」 ,「역대당평(歷代黨評)」 ,「취송고증사유편(聚訟考證四惟篇)」 이 있어서 문집으로 약간 권을 엮었다.
선생은 타고나시길 지극히 굳세었고, 고명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일찍이 학문의 바른 길을 얻으셨다. 이후 80여 년간 깊이 침잠하여 짙고 향기로운 공을 이루셨으니, 그 이르신 바의 경지는 지극히 깊고도 높은 즉, 후학의 얕은 견해로는 쉽게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날마다 보여 주신 행동을 보자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스러웠고, 형제를 대함에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을 다스림에는 엄정하였고, 사물을 접함에는 공경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평상시 거처하심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을 하시었고, 종일 단정히 앉아 일찍이 기우뚱하게 서거나 기대앉으신 적이 없었다.
늘 말씀하시길,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점이 다만 경(敬)에 있을 뿐이다. 경(敬)이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높이 우러러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尊瞻視].”라고 하셨다.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서는 물 뿌리고 비로 쓸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서부터 사리를 연구하고 타고난 성품을 다 발휘하는 데 이르기까지,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 일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순서를 두어 일찍이 그 순서를 뛰어넘는 일이 없으셨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학문을 함에는 마땅히 먼저 그 나아갈 방향을 살펴야 하는 바, 방향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만 권의 책을 독파한다 하더라도 그저 헛될 뿐이다.”라고 하셨다. 내놓는 언론(言論)은 넓고 크고, 마음을 두고 하시는 일은 광명정대하였으며, 저술한 문장은 평이하되 완숙하여 참으로 체(體)와 용(用)을 갖추고 계셨으니, 세간의 위대한 인재요 통달한 선비라 할 것이다. 가령 벼슬을 하여 직위를 가지고 도를 행하셨더라면 세상을 다스림에 난세에 일대 예악(禮樂)을 일으켰을 것이며, 우연(虞淵)으로 떨어지는 해를 돌려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한 자락의 포의를 걸치고 험한 바위 아래에서 끝내 늙어 가셨으니 시절을 잘못 만난 것이요, 타고난 명이 그런 것이요, 하늘이 주신 복이 그런 것이다[時也命也天也].
오호라! 천하가 장차 학술을 어지럽히고자 할 때는 먼저 선왕이 하신 말을 무너뜨리고, 일세를 뒤덮어 버리는 것이다[懷襄一世]. 선생께서 일어나셔서 일방의 사람들을 불러 깨닫게 하여 모두 ≪선생의 학설이≫주자·퇴계 이래로 이기(理氣)의 참뜻과 부합됨을 알았으니, 실로 우리 도[吾道, 유학]의 우두머리였다. 이런 점에서 선생이 이 학문[斯文, 유학]과 이 세상에 전연 공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호라! 내가 스스로 밥을 먹고 말을 할 수 있었던 때로부터 하루라도 선생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부자(父子)의 은혜를 입은 데다 아울러 스승과 제자의 의(義)를 겸하였다.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 그 덕이 실로 깊은 바다와 같이 끝이 없고 글이 짧고 말이 부족하다. 지금 그 덕을 나타내는 글을 지었다고 하나, 또한 그 만분의 일도 그려낼 수 없었다. 오호 통재라! 조카 상학(相學)이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