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갑오) 의흥현감 채경묵 님께 보냄[與義興倅蔡侯慶默]
치우(致宇)는 대략이나마 글을 이해하여 일찍부터 서울에 머무르면서 자주 병란을 당하다가, 지금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사또의 치하에서 거주한 지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삼가 누추한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는 쓸모없는 몸이 나이는 어느덧 70이 되어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근자에 듣건대 호남(湖南)의 잔당들이 다시 ≪충청도≫ 청산(靑山)과 황간(黃澗) 두 고을에 모였다고 하는데, 길에 떠도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5월에 동도(東徒)가 완영(完營, 전라감영)에 들어가서 점거하고 있을 때,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특별히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보내어 친군(親軍)을 통솔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적들과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으나 끝내 우두머리는 잡지 못하고 잘못하여 양민들만 죽였으며, 군대가 철수하는 날에 군인들이 대오를 이탈하여 민가로 흩어져 들어가서 아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니, 홍계훈이 군대를 잘못 통솔한 죄는 용서하기 어려우며, 또 묘당의 계책에도 잘못된 점들이 있습니다.
저 동도들은 모두 선왕(先王)께서 교화하고 기르신 백성들인데, 불행히도 동양과 서양이 혼동된 이 세상을 만나고 또 탐관오리들에게 침탈을 당하자, 하소연할 길이 없어 부모 친척과 이별하고, 조상의 묘소를 버리고 산속에 은거하며 태평한 세월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배고픔 때문에 본성을 상실하여, 혹은 부잣집에 쌓아 놓은 곡식을 탈취하고, 혹은 나그네의 봇짐을 빼앗기도 하는데, 비록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좀도둑에 불과합니다. 만약 저들 가운데 지모와 용기를 가진 자가 있다면 바로 경성(京城)으로 들어가서 선왕의 옛 제도를 다시 일으켜서 당당하게 참된 절의(節義)의 선비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하여 낮에는 숨었다가 밤이 되면 모여서 화적(火賊)의 무리가 되는지요? ≪이를 통하여≫ 저들의 무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감히 영남의 경계를 넘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영남은 옛날 추로(鄒魯)의 고장입니다. 소문을 듣고 의(義)를 두려워하여 혹은 영동(嶺東)으로 달아나고, 혹은 호남에 모여 있으면서 도인(道人)이라고 떠들지만, 사물에 통달한 눈으로 보면 한바탕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대원위(大院位, 흥선대원군)께서는 이들이 무리를 짓는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후환이 있을까 걱정되어 글로써 타이르고 방전(方典, 시골. 곧 坊田의 오역인 듯)에 게시하여 말하기를, “귀화하여 오는 자는 재주를 가려서 벼슬과 상을 내릴 것이고 저항하는 자는 죄를 다스려서 형벌을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저들을 귀화시키려고 하였으나 저들은 끝내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토벌하는 것도 무방하지만 차마 처벌하지 않은 것은 양민들을 헤칠까 걱정해서입니다.
군서(軍書)에 이르기를, “탐욕스런 백성은 이익으로 유인하여 복종시키고, 반역을 일으킨 자는 죄를 성토하여 처형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지금 조정의 조치는 백성들을 안정시킬 줄은 모르고 다만 역적을 처형할 줄만 알고 있습니다. 친군(親軍)으로 하여금 스스로 친민(親民)을 해치도록 한다면, 이는 칼을 들고 스스로 자기 다리를 찌르는 것이며, 다른 나라 사람을 불러 와서 우리나라 백성을 죽인다면 이는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 주어 자신을 헤치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동서양의 새로운 풍속이 번개처럼 신속하게 우리 소중화(小中華, 조선) 군자의 나라에 전해지고 ‘복설(卜說)이 대궐에서 횡행’하는데, 직언하는 선비는 재야에서 입을 다물고 있고 교활하고 아첨하는 신하는 조정에서 비위를 맞추고 있으니, 이로부터 나라가 병들어 다스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비뚤어진 소인배들이 기회를 틈타 난을 꾸미고 국권을 훔쳐서 농단하며 선량한 자들을 함부로 죽이고 있습니다. 이는 대궐에서 도적을 기르고 향곡(鄕曲)에서 백성들을 토벌하는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영남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사방이 놀라 두려워하는데, 더구나 흉년을 만난 백성들이 함부로 날뛰는 지금과 같은 때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영남은 인재의 부고(府庫)입니다.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며 이름난 현인과 장수들이 이곳에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조(宣祖) 임진년(壬辰年)에 신임이 두터운 간성(干城)이 되어 대란(大亂, 임진왜란)을 평정하고 사방을 안정시켰으며, 상처 입은 백성들을 부축하여 일으켜서 농토로 돌려보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경상좌도소모사(慶尙左道召募使) 정의묵(鄭毅默)은 선정(先正, 鄭經世를 가리킴)의 후손으로 명망 있는 선비입니다. 지위와 명망이 높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저들 무리들의 이합집산을 따지지 않고 먼저 인심의 동정을 살피니, 참으로 대장의 그릇이며 그 일처리는 군자와 같습니다. 경상우도소모사(慶尙右道召募使) 조시영(曺始永)은 보잘것없는 저들을 두려워하며 여러 고을에 관문을 발송하여 민심을 선동하니, 이 무슨 망령된 계책입니까? 영하(營下, 경상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김산(金山, 현 김천시)과 상주(尙州) 등지로 와서 대령하라고 한 것은 사사로운 의도가 아님이 없습니다. 만약 대진(大陣)이 당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각자의 구역을 수비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한다면, 저들 무리들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질 것입니다.
강우(江右, 낙동강 우측인 경상우도)와 강좌(江左, 낙동강 좌측인 경상좌도)는 각자 구역이 나누어져 있으므로 남의 경계를 넘어가서 관문을 기다리는 것은 먼저 체통을 잃는 것입니다. 더구나 강우(江右) 30개 고을이 어찌 대읍(大邑)에만 한정되겠습니까마는 이곳 의흥(義興)과 의성(義城) 두 고을의 병사들로 하여금 남의 경계를 넘어가서 기다리도록 하는 것 또한 올바른 계책은 아닙니다. 삼가 듣건대, 합하(閤下)께서 각 면(面)에 전령(傳令)을 내려 밤낮으로 단속하며 자나 깨나 불안해하신다고 하니, 이는 걱정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당초 관문이 도착한 날에 즉시 방보(防報)하였더라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으나, 만약 마지못해 봉행해야 한다면 어찌 좋은 계책이 없겠습니까? 약장(約長, 향약 책임자)과 통장(統長, 오가작통의 우두머리)으로 하여금 한 고을의 거족과 명망가에게 통보하여 그들을 공당(公堂)에 모이도록 한 다음, 12개 면(面)을 5가(家)씩 통(統)으로 묶고 호(戶)마다 점고하여 별도로 책자를 만들되, 양반과 상인을 막론하고 순서대로 이름을 적어 넣는다면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 가운데는 틀림없이 문학의 소양이 있는 선비도 있을 것이고,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정병(精兵)일 뿐만 아니라 모두 의병(義兵)이며, 한 고을의 군사 총수가 족히 3,700명은 될 것입니다.
이들 군사들로 하여금 각자 3~4되의 양식을 갖추도록 한다면 족히 5일의 양식은 될 것입니다. 기치와 호령을 바로 잡고 대오를 잃지 않도록 하며, 등에는 탄환과 양식을 지고 손에는 칼과 창을 지니도록 하며, 군율이 정연하고 군명(軍命)이 엄숙하다면, 지나는 곳마다 모두 소문을 듣고 목을 빼고 발돋움을 하면서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금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들 무리들은 틀림없이 흩어질 것이니, 우리 군사들은 머무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사이 5일간의 양식도 모두 써버릴 것인데, 김산과 같은 부유한 고을과 소모사의 힘으로 수일간의 양식을 공급할 수 없다면 반드시 철군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니, 군사들이 돌아오는 날에 관리와 백성들의 마음과 군사들의 사기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지난번 점고하던 날 한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신원(薪院)에 모였을 때 200명을 선발하였는데, 그 가운데 혹 군대를 따라가려 하지 않는 자에게 매질을 하여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군서(軍書)에 이르기를, “절의(節義)를 지닌 선비는 형벌로 위협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가려 하지 않았던 저들이 절의를 지닌 선비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자원하여 따라간 자들이 모두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로서 돈을 탐하여 몸을 팔았으니, 돈이 떨어지는 날에 도망갈 마음이 생기지 않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또 듣건대, 군량미 20여 석과 경비로 쓸 돈 2,000여 냥을 먼저 실어 보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 돈과 곡식을 장차 어떻게 조치할 작정입니까? 만약 민호(民戶)에 분배한다면 부자들이야 괜찮지만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군서(軍書)에 이르기를, “부세를 무겁게 하고 자주 거두면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일이 마무리된 후에 백성들이 흩어진다면 누구와 함께 고을을 다스릴 것입니까?
난리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이 이런 큰 흉년을 만나 밤낮으로 곡식을 달라고 소리치며 장차 죽어서 골짜기를 메울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도 선무사(宣撫使)가 군(郡)에 이르렀을 때 결전(結錢)과 호역(戶役)을 태반이나 탕감해 주어 백성들이 소생할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가을 추수기가 되어 예전처럼 거두어들이니 백성을 구휼하는 은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촌사람들이 올해의 흉년은 난리보다 더 걱정된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쟁터는 사지(死地)이더라도 혹 사는 사람이 있지만, 기근이 든 백성은 살아갈 바탕이 없으니, 어찌 생존자가 있겠습니까? 치우(致宇)는 너무나 통탄스러워 감히 몇 가지 항목을 고안해 보았으니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입니다. 근래 학자들은 성인의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이단의 학문에 들어가서 명성을 바라고 관직을 구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널리 현자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열 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과 신의를 가진 자가 있으니, 실질적인 학문과 반듯한 행실을 지닌 선비를 뽑아서 강장(講長)으로 임명하여 매달 한 차례씩 그곳에서 강좌를 열도록 하되, 만약 뛰어난 수재가 있으면 강장이 이름을 지명하여 아뢰어 관아에서 별도로 상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거문고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날마다 사방에서 들려와서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농업은 천하의 큰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칠월(七月)」편 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읊조렸습니다. 군서(軍書)에 이르기를, “농업과 잠업에 힘쓰도록 하여 그 농사철을 빼앗지 않고, 부세를 적게 거두어 재산을 궁핍하게 하지 않고, 요역을 줄여서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각 면에 전령을 보내 근본에 부지런히 힘쓰는 자를 천거하여 권농장(勸農長)으로 삼아 놀고먹는 백성들을 농토로 나가도록 한다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집안은 넉넉해지며 사람들은 각자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될 것입니다.
공업은 물건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금·은·구리·철 등 불려서 주조하는 물질로는 각각 그릇과 도구를 만들며, 나무에는 재인(榟人, 목수)이 있고 흙에는 도인(陶人, 도공)이 있으며, 그 나머지는 각자 그 재주에 따르는데, 이 모두는 생업입니다. 근래에 농사가 연이어 흉년이 들어 모든 장인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물건 가격은 비싼데 장인들이 그 이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관청에 납부하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데 있습니다. 그래서 철점(鐵店, 철물가게)과 토점(土店, 질그릇가게)이 그 역(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바라건대, 공고(工庫)에 분부하여 예전처럼 역에 응하는 것 외에 더 이상 침탈하지 않도록 한다면 모든 장인들이 편안하여 칭송의 소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상업은 물화를 유통시키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을 때 시장을 개설하여 서로 물자를 교역하도록 하였습니다. 산에서 나는 구리와 철, 바다에서 나는 생선과 소금 및 기타 토산물들은 모두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입니다. 상인들은 운송비가 배나 되고 식대가 지나치게 높다고 하지만, 이는 흉년이 든 해이기 때문에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고을을 설치하고 이곳에 시장을 개설한 때부터 각 상점의 각종 세금과 관용(官用)으로 납부하는 역(役)은 상인들이 관례에 따라 납부하는 것입니다.
근래 부상(負商)의 접장(接長)과 보상(褓商)의 반수(班首)들이 공납(公納)이라고 핑계를 대며 쇠잔한 상인들을 침탈하고, 또 시세색장(市稅色長, 시장을 담당한 벼슬아치)이 관납(官納)을 핑계 대며 잔약한 상점을 침탈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심한 것이 우전(牛廛)의 구전(흥정 값)인데, 촌민들은 세금이 두려워서 소 매매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는 농가에서 소중히 여기는 물건입니다. 나라에는 3대 금지 조항이 있는데, 우금(牛禁)이 가장 엄격한 것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함입니다. 근자에 관아의 푸줏간 외에 각 시장과 상점에 모두 사설 푸줏간을 설치하여 함부로 도살하면서 세납(稅納)이라고 핑계를 대는데, 관아의 푸줏간 외에 또 무슨 관납(官納)이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근년에는 우역(牛疫)이 창궐하여 열 집에 한 마리의 소도 남아 있지 않으니, 내년 봄의 밭갈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시세색장에게 분부하여 물가에 따라 편리한 쪽으로 삭감해 주도록 하고, 보부상의 접장들을 일체 금지시켜 경계 밖으로 쫓아내고, 우전(牛廛)의 구전은 소와 송아지를 구분하여 줄여 주고, 고을 밖의 사설 푸줏간을 특별히 엄격하게 금지한다면, 농부들은 농사철을 놓치지 않고 짐꾼들은 그들의 힘을 허비하지 않게 되며, 이로부터 농민들이 번성하고 교화가 보잘것없는 사물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네 부류의 백성 외에 놀고먹는 자들은 모두 난민(亂民)입니다. 그들은 이 네 가지 생업을 잃고 잡기에 빠져 부모의 가르침을 돌아보지 않고, 가산을 탕진하며, 촌가의 자제들을 꾀어내고 무뢰배들과 교유하여 많은 부채를 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독촉 받는 날에는 칼을 뽑아서 다투거나, 부형에게 강제로 받아 내거나, 친척들에게 함부로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붓을 던져 버리고 그 주위에서 놀거나, 농사일을 집어치우고 그 속에서 빈둥거립니다. 이런 무리들을 특별히 엄격하게 금지하여 도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다스린다면 더 이상 이런 폐단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