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동안(柏谷洞案) 뒤에 다시 씀 [再題柏谷洞案後]
영남의 풍속에는 향촌(鄕村)에는 반드시 향안(鄕案)이 있었으며 향안에 명부를 올린 자를 향족이라 불렀다. 혼인을 해도 향족이 스스로 알아서 했고 장례나 초상에도 향족이 스스로 알아서 조문했고 연회를 할 적에도 향족이 스스로 알아서 모였다. 이 밖에 명부를 올린 자는 비록 관위가 재상 반열에 오르고 행적이 안연(顔淵, 공자의 제자)이나 민자건(閔子蹇, 공자의 제자)와 비슷하더라도 향인들이 헤아리지 않음이 있었다.(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뜻) 이 때문에 정약포(鄭藥圃) 탁(琢)이 예천에 살면서 관위가 정경(正卿, 정2품 이상 벼슬)이었으나 향안에 들지 못했다. 향안을 수정할 적에 어느 향인이 “정탁이 벼슬이 높으니 입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자 어느 사람이 “만일 입안한 뒤에 우리에게 혼인을 요구한다면 어찌할꼬?”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기담이다. 그러니 남쪽 사람들이 향안을 중히 여김이 어떠하겠는가?
동네에는 동안이 있으니 이는 향안에 버금간다. 그 중요함은 반드시 향안과 대등하다. 우리 백곡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 적지 않으나 동안에 든 사람들이 이 정도에 그쳤으니 그 중요함을 진실로 알 수 있다. 이 동안을 보는 사람들은 이를 또한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한약우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