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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이 4개의 병황(兵荒, 전쟁으로 인한 기근 및 그 밖의 재앙) 중에 3개 [兵荒三之四]

① 만력(萬曆, 명의 연호) 계사(癸巳, 1593년의 임진왜란) 계사(癸巳, 1593년)년에 진주성이 무너진 뒤에 주(州)의 창고는 면(面)을 나누어 옮겨서 설치되었다. 설창(雪倉)은 백곡촌(柏谷村)으로 옮겼다. 진주(晋州)의 주지(州誌)에 나온다.

② 만력(萬曆) 정유(丁酉, 1597년 정유재란) 김대용(金大容)의 아내인 정씨(鄭氏)가 정유년에 적(賊, 일본군)을 만나 절개를 지키고 죽은 일이 ≪임금에게≫알려져서 정려(旌閭, 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가 이루어졌다. 신응창(愼應昌)과 그의 아들 연(衍)이 정유년에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다.

③ 금상(今上, 고종)의 갑오년 [當宁甲午] 금상(今上, 고종임금)의 초기에 경주(慶州)사람 최복술(崔福述, 최제우)이 사학(邪學)을 먼저 부르짖고 그 학문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하여 신령한 부적과 물을 내려주어 병을 고칠 수 있다.”라 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사교(邪敎)로 여겨 그를 죽였다. 그의 무리인 신유갑(申由甲) · 권일청(權一淸) · 최제우(崔濟佑)가 이어서 나왔다.

신유갑은 호남에 거처하였는데, 배우러 오는 무리들은 남녀가 섞여 살면서 난잡하게 짝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그를 유갑(由甲)이라고 불렀는데, 유(由)는 위로 천문(天文)에 통달하였다는 뜻이고, 갑(甲)은 아래로 지리(地理)를 살핀다는 의미이다. 그 후에 처형되었다.

권일청(權一淸)은 호서(湖西)에 살았는데, 사람에게 약(藥)을 먹여 춤추게 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헛소리를 하여 말하기를, “중니(仲尼, 공자)가 왔는가?”라고 하거나, 자신이 대답하기를, “왔다.”고 하였다. 자신이 묻고 대답하며 응수(應酬)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다음날 그의 무리가 물으면 “어젯밤에 내 친구 중니가 왔었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죽은 것을 알지 못한다.

최제우(崔濟佑, 최시형의 오기로 보임)는 복술(福述)의 친척으로 전에 말하기를, “나는 옛 사람인 희헌(羲軒, 황제와 복희씨)에게 배웠고 공자(孔子)와 벗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허무맹랑한 것이 이와 비슷하였다.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이 그 얘기에 미혹되어 따르는 자가 몇 천 명이 되었다. 진주(晋州)사람 백낙도(白樂道)는 본래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최제우에게 배워서 하루아침에 선사(善士)가 되었는데,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지키는 바가 있는 듯하였다. 그가 가르치는 책 중에 동경대전(東經大全)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문과 한글이 섞여서 순서가 없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주문(呪文)은 단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인데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가리는 음식은 닭 · 개 · 술 · 밀가루였다. 그 학문을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다.

동방(東方)의 풍속에 사족(士族)을 양반(兩班)이라고 불렀는데, 양반에는 동서(東西, 문인과 무인) 양반이 있었다. 선세(先世, 선조) 중에 양반에 한번 들어온 자가 있으면 자손대대로 양반이 되었고 그 밖의 사람은 상놈이라고 하였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매우 엄격하여 상놈이 비록 재주가 뛰어나 크게 두각(頭角)을 내더라도 조정에서 등용하지 않았고 향인(鄕人)이 그를 천대하였다. 그래서 상놈 된 자는 뜻을 얻지 못하는 것을 늘 억울해하였다. 동학은 그렇지 아니하여 비록 남의 종으로 태어났더라도 한번 그 도(道)에 들어오면 곧 양반과 동등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놈이 일제히 입도하였다.

그 무렵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성(城) 안에 가득하여 남의 돈과 비단을 빼앗고 남의 자제(子弟)를 결박하니 분위기가 근심스럽고 참담하여 백성은 살 길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동학에 들어간 자가 이 법망(法網)에 걸려들면 동학은 바로 자신의 무리를 인솔하여 가서 구제하였기 때문에 양반 중에 지각이 없는 자가 한꺼번에 동학에 들어갔다. 이때에 부유한 자의 겸병(兼倂)이 매우 심각하고 이자놀이가 성행하여 가난한 백성이 일 년 내내 고생을 하니 부유한 사람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동학의 도(道)는 부자를 누르고 가난한 자를 부축하였기 때문에 빈민 중에 이익을 얻으려는 자가 일제히 동학에 들어갔다. 또한 이때에 참서(讖書)가 성행하여 궁을(弓乙)이라는 참서가 있었는데, 동학에서 궁을의 노래를 지었다. 전내(奠乃)의 참서가 있었는데, 동학에서 전내(奠乃)의 패(牌)를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 중에 제법 육갑(六甲;60갑자)을 아는 자가 한꺼번에 동학에 들어갔다. 또한 부수(符水, 부적과 정화수)로 병을 치료할 수 있어서 병자(病者)가 동학에 들어갔고, 언문으로 설교를 하여 부녀자가 동학에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는 자는 문학(文學)하는 서생(書生)과 법도가 있는 집안의 자제들뿐이었다.

진주(晋州)에서 낙도(樂道, 백낙도)에게 배운 자는 무려 수천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손웅구(孫雄狗)가 가장 드러났다. 웅구의 무리 중에 고만준(高萬俊) · 임정룡(林正龍) · 임말룡(林末龍)이 가장 뛰어났고, 그 밖의 무리는 헤아릴 수 없다.

최복술이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나 임신년 모월에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계사(癸巳, 1893년) 3월에 동학이 호서(湖西)의 보은현(報恩縣)에 대대적으로 모였다. 수십만의 무리가 글을 올려 복술(福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선 그들이 난리를 일으킬 것을 걱정하여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그들을 타일러서 깨우치게 하니 동학이 마침내 해산하였다.

이때부터 동학이 조정에서도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아 기세가 더욱 대단해졌다. 관장(官長, 수령)을 욕보이고 마을을 제멋대로 다녀도 사람들이 감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날에 ≪동학에 들어가지 않고≫빠졌던 자가 이번 기회에 모두 동학에 들어갔다. 동학을 펴는 것을 포덕(布德)이라고 하고, 동학의 도를 배우는 것을 입도(入道)라고 하였다. 동학의 도에 들어가지 않은 자를 가리켜 속인(俗人)이라고 하고, 속인은 그들을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도인의 우두머리를 접주(接主)라고 불렀고, 서로 존대하여 접장(接長)이라고 하고 자신을 가리켜서 하접(下接)이라고 하였다. 통문(通文)은 경통(敬通)이라고 하였다. 임장(任掌, 직임을 맡은 사람) 중에 집강(執綱)과 성찰(省察)의 이름이 있었다. 1명이 포교하는 것을 포(包)라고 하였는데, 포는 장각(張角, 황건적의 우두머리)이 말한 방(坊)과 같은 것이었다.

1894년 봄에 호남(湖南)의 고부군(古阜郡)에서 농민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 때문이었다. 난리가 평정되고 조정에서 그 일의 주모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에 전명숙(田明叔, 전봉준의 오기)이란 자가 실제로 그 일을 주도하였다. 이에 명숙이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무리를 인솔해 바로 동학에 들어가서 손화중(孫華仲) · 김개남(金蓋南, 蓋는 開의 오기) 등과 난리를 일으키니 호남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조정이 여러 번 정벌을 하였으나 평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역내(域內, 팔도의 내)에 명을 내려 동학을 대대적으로 잡게 하였다.

이때에 백낙도는 덕산(德山)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무리가 사방에 산재(散在)하여 선동하기를, “그 스승은(백낙도를 가리킴) 한 번 뛰어 하늘에 올라 신(神)을 부르고 귀신을 부릴 수 있다.”고 하였다. 영장(營將) 박희방(朴熙房)이 300명을 인솔하여 가서 체포하니 일개 백성이었고, 그 도당(徒黨) 중에 특출한 자 대 여섯 명을 잡아 죽였다. 그의 집을 몰수하여 제자록(弟子錄)을 얻었는데, 그 이름을 나열하여 쓰고 관작(官爵)도 함께 적었다. 누구는 무슨 벼슬이고 누구는 무슨 관작(官爵)이라고 ≪적었는데≫낙도(樂道, 백낙도)는 이조판서였고, 손웅구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백(方伯)과 수령이었다. 영장 박희방이 모두 불태웠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귀화하였다.

1894년 7월에 호남의 동학인 김인배(金仁培)와 옹방규(邕方奎) 등이 하동(河東)을 함락하니, 진주병사(晋州兵使) 민준호(閔駿鎬)가 매우 겁이 나서 소와 술로 경계에서 영접하고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들었다. 그들이 진주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이에 전에 귀화하였던 자가 모두 기뻐 뛰며 다시 일어나서 손웅구를 추대하여 와주(窩主,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곳곳에서 모여 위험스런 말로 선동하여 말하기를 “백낙도(白樂道)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고 하니, 영장 박희방이 도망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어쩔 수 없이 왜(倭, 일본군)로 하여금 동학을 잡게 하니 김인배 등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호남으로 도망하였다. 그래서 웅구(雄狗, 손웅구) 등도 크게 두려워서 군대를 내어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1894년 10월에 백곡평(柏谷坪)에 모였다. 무릇 18개 포(包)에서 십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탐학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3일 동안 ≪백곡평에≫머물렀는데, 마을이 모두 텅 비었다. 그런 다음 그들 무리를 이끌고 진주로 향하였다. 북평(北坪)의 고승당(孤僧堂)에 이르러 왜군 40명에게 공격당하여 죽은 자가 500~600명이 되었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흩어졌다. 이때가 10월 14일이었다. 그 후 2~3일 동안 왜군 400여 명이 동학의 뒤를 밟아 백곡(柏谷) 장기촌(場基村)에 와서 묵었으나 전혀 침범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가져와서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날에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갔다. 호서와 호남의 동학도 모두 왜에게 격파를 당하여 거괴(巨魁)가 도망을 가거나 항복을 하여 모두 평정되었다.

주석
부적과 물 부적(符籍)과 정화수(井華水)를 말한다.
신유갑(申由甲) · 권일청(權一淸) · 최제우(崔濟佑)가 이어서 나왔다 저자가 최복술과 최제우(崔濟佑)를 혼동하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최제우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으로 보인다. 복술은 최제우의 아명임.
신유갑 최제우의 제자로 호는 삼전(三田). 최제우가 만년에 남원 은적암에 있을 때 검가를 가르쳤다 한다. 그때 신유갑은 서장옥과 함께 은적암 뒷산인 묘고봉에 올라가서 목검을 들고 검무를 익혔다고 한다. 서장옥과 함께 최시형과 다른 남접계열 인물이었다.
권일청(權一淸) 본명은 종화, 일청은 호라 함. 이운규(李雲奎)는 김항 최제우의 스승이라 한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고 김항은 대종교(大宗敎) 또는 영가무도가(詠歌舞蹈敎)를 창시했는데 권일청은 그 3대 교조였다고 한다. 이를 남학(南學)이라 불러 동학과 구분했다. 이능화의 조선교도사에서 ‘영가’(詠歌)를 ‘영가’(靈歌)라 표기했는데 오음을 상징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의식 또는 수련을 한 것으로 보면 앞의 영가가 맞을 것이다.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시형이 최제우가 지은 글을 간행할 때 한문본인 『동경대전』과 언문본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동시에 간행해 보급했다. 동경대전 개간은 목천의 동학접주인 김용희는 1883년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을 배포키 위해 병천 김은경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차려놓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각각 100부씩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겸병(兼倂) 요호(饒戶)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작인들에게서 고율의 도조를 받았다. 이를 토지 겸병이라 한다.
궁을(弓乙) 궁을은 동학의 기본 부적으로 약(弱)의 글자를 파자한 것이라 한다.
전내(奠乃) 전내는 정(鄭)의 파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감록』에 나오는 정씨 왕조설을 의미한다. 둘 다 이 이름의 참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정감록』이 유행했다.
하동(河東)을 함락하니 영호대도소 김인배부대는 1894년 9월 1일 하동을 공격해 점령한 뒤 9월 18일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영접을 받으며 진주성을 무협 입성하였다.
민준호(閔駿鎬) 준(駿)은 준(俊)의 오기. 민준호는 농민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농민군에 동조해 농민군을 수해했다. 일본군에 저항하는 한 방법으로 농민군을 지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월 14일이었다 진주 고승당산 전투 : 1894년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 고승당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스즈키(鈴木)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정상을 놓고 2시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으로, 일본 기록에는 185명으로 되어 있고, 『오하기문』에는 4백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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