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1일 정미[四月 初一日 丁未]
오늘은 입하(立夏)이다. 종일 비가 내림. 냉면을 먹었다. 김 오위장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다.
초2일[初二日]
맑고 따뜻함. 장리(將吏)들이 용천에서 돌아왔다.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병세는 여전하다고 하였다. 감영의 막중(幕中)이 녹지(錄紙)를 보내왔는데, 감사의 교체와 관련한 사항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고부(古阜) 등 7개 고을의 동학(東學) 무리들이 완영(完營, 전라감영)에 모였다는 전보(電報)가 답지하였는데, 군대를 출동시켜 토벌하는 것 외에는 해산시킬 방도가 없다고 하니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초3일[初三日]
맑았다가 흐리고 저녁에 비가 내림. 황 참봉의 편지가 왔으며, 꿀 1종지를 보내 왔다. 관노(官奴) 재신(才信)과 방자(房子)가 용천으로 가기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섬에 있는 하인이 농어 3마리를 가져왔기에 2마리는 용천으로 보냈다. 황 단천과 김제원이 와서 객지의 회포를 달래 주어 감사하였다. 냉면을 먹었다. 이방이 용천에서 와서 만났다. 4월 초1일에 용천 노파가 와서 내아(內衙)의 일을 상의하였다.
초4일[初四日]
맑았다가 흐림. 식전에 송충증(蜙蟲症) 때문에 꿀에 잰 비자(枇子)를 먹었다. 관노 재신(才信) 편에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그의 중씨(仲氏)를 초열흘께 떠나보내는 일을 부탁하였다.
초5일[初五日]
맑았다가 흐림.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감영에서 경운미(京運米, 서울로 보내는 쌀) 200석을 1석에 3냥으로 대전(代錢)하기 위하여 영리(營吏)가 내려오며, 그래서 김영하(金永河)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으며, 환곡을 보내라고 하였다.
초6일[初六日]
맑고 따뜻함. 김영하가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방이 돈으로 바꾸는 일[換事]을 논의하러 송(宋)가에게 갔다가 못 만나고 왔다고 하였다. 허 국수(許局守)의 말 값이 135냥이라고 하였다.
초7일[初七日]
맑았다가 흐리고 저녁에 비가 내림. 여러 장리(將吏)와 중방(中房)이 모두 용천으로 가기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으며, 나 훈장(羅訓長) 편에 또 편지를 부쳤다. 이방을 양시(陽市)로 보냈다. 섬의 주사별장이 농어 2마리를 들여보냈다. 저녁에 객지의 쓸쓸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초8일[初八日]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음. 관노 재신 편에 주령의 편지가 왔으며, 정육(正肉, 쇠고기)과 생조기를 보내 왔다. 연대별장과 주사별장에게 전령(傳令)이 왔다. 서울에 사는 첨지(僉知) 변흥식(卞興植)이 의주에 와서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새 옷을 입었다.
초9일[初九日]
맑고 따뜻함. 이방이 양시(陽市)에서 돌아왔다. 송(宋)가와의 환사(換事)가 실패하여 한탄스러웠다. 양사(洋紗, 서양 옷감) 8자의 가격이 4냥 4전이고, 당목(唐木, 중국 목면) 13자의 가격이 8냥 4전 5푼으로 도합 12냥 8전 5푼이었다. 중방(中房)이 용천에서 돌아오면서 주령의 편지를 갖고 왔는데, 보름 전에 김제원의 집으로 와서 머물 것이라고 하였다.
초10일[初十日]
오전에는 비가 내리고 오후에는 맑음. 이필손(李弼孫)이란 놈이 칼을 뽑아 사람을 해쳤다고 하여 잡아 가두었다.
11일[十一日]
맑고 따뜻함.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저녁에 답장이 왔다. 환사(換事)가 성사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용천 노파에게 돈 4전을 빌려 주었다.
12일[十二日]
맑고 따뜻함. 신 첨지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저들의 배가 콩을 사러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경운미(京運米) 200석을 1석에 3냥으로 대전(代錢)하면 200석의 값은 600냥이 되는데,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영의 제사(題辭)가 이와 같았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13일[十三日]
맑고 따뜻함.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직접 신변(申弁)의 집에 가서 콩을 파는 일을 대면하여 논의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김영하(金永河)를 대신 보냈다. 이방이 섬에서 보고하여 오기를, 콩을 파는 일 때문에 대동구(大同溝)로 간다고 하였다. 신변(申弁)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콩을 파는 일은 이미 작정하였다고 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는데, 주령의 편지도 같이 붙여서 보냈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달이 밝으니 고향 생각이 났다.
14일[十四日]
맑고 따뜻함. 『맹자』 7권을 전부 읽었으며, 또 『서전(書傳)』을 읽었다.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17일쯤에 김제원의 집으로 온다고 하였다. 저녁에 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김영하(金永河)가 신변(申弁)의 집에서 돌아와서 (콩을 파는 일을)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15일[十五日]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와서 만나 조세로 받은 콩을 매매하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상당 부분 뜻이 맞지 않았다. 섬에서 농어 2마리를 보내 왔다. 대청 아래 장미꽃이 만발하였다.
16일[十六日]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왔기에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김영하를 저들의 배로 보냈다. 저녁에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17일[十七日]
맑고 따뜻함.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그의 중씨(仲氏)가 20일에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아전 김씨가 저들과 콩을 매매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내어준 콩 섬의 양이 많이 축나 있다고 하였다. 저녁에 이방이 대동구(大同溝)에서 와서 콩을 파는 일을 아직 작정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김 중군(金中軍)이 술을 가지고 와서 만났다.
18일[十八日]
맑았다가 흐림.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답장이 왔는데, 오늘 덕계(德溪) 김제원(金濟元)의 집으로 옮겨 머문다고 하였다. 김영하(金永河)와 이방이 동창(東倉)에 가서 저들에게 콩을 내어 주고 원보(元寶) 3개를 받아 왔다.
19일[十九日]
맑고 따뜻함. 평실(平室)의 생일이었으나 별달리 물품이 없어서 서글펐다. 신변(申弁)의 나귀를 얻어 와 그것을 타고 덕계로 가서 주령을 만났다. 주령의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어서 걱정스러웠으나 격조하였던 회포를 풀고 거기서 잤다.
20일[二十日]
맑고 따뜻함. 주인 김제원의 좋은 집터와 건물 등 모든 것들은 속태를 면하였으며 칭찬할 만하였다. 훈서(勳西)에게 보낼 작은 쪽지를 작성해 두었다. 오후에 주인의 노새를 타고 돌아왔다. 떠내려 온 유하목(流下木)이 26개라고 하였다. 주령은 용천 노파에게 30냥을 주라고 시켰다고 하였다.
21일[二十一日]
맑고 따뜻함. 집에 보내는 편지와 서울에 보내는 편지 및 늑현(勒峴)에 보내는 편지 등 1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본가에 보내는 포(布) 2필, 석새삼베 2필, 돈 4냥을 쌌다. 중포(中布) 1필의 가격은 11냥 6전, 36자의 가격은 10냥 8푼, 적진(赤袗) 10자의 가격은 3냥 1전 5푼, 중의(中衣) 15자의 가격은 4냥 3전 5푼으로 도합 29냥 1전 8푼이다. 낭사(囊絲)의 가격은 6전 5푼이다.
22일[二十二日]
맑고 따뜻함.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오늘 출발할 계획인데 원보(元寶)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안타까웠다. 관아의 목수가 대로 만든 화살통을 만들어 지고 왔는데, 황칠(黃漆) 장식을 한 1쌍의 값으로 1냥을 지급하였다. 황 단천과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원보 2개는 아직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내아(內衙)의 침모(針母)에게서 담배를 구하고 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하였다.
23일[二十三日]
맑고 바람이 붐. 주령이 본가에 보내는 포(布) 18필 14자(가격은 215냥 1전) 8바리 짐을 두 마리 말(가격은 285냥)에다 포장하여 실었다. 아전 김씨와 전(田)씨가 와서 아뢰기를, 저들의 원보가 내일 온다고 하였다. 용천 노파의 옷감이 왔다.
24일[二十四日]
맑고 따뜻함. 아전 김씨와 전씨에게 동남창(東南倉)으로 나가서 조세로 받은 콩 199석을 저들에게 지급하라고 분부하였다. 종인(宗人) 경칠(景七)은 먼저 덕계로 출발하였다. 천리 타향에서 작별을 하자니 슬퍼서 넋이 나가 견디기 힘들었다. 22일에 쓴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또 종인 성함(聖咸)에게도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원보(元寶) 2개가 들어왔다. 이전의 3개와 함께 포장하니 모두 5개로 가격은 3,000냥이었다. 아전 이보근(李甫根)이 은(銀)으로 바꿀 때 방해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통탄스러웠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바로 답장이 왔다. 서울에서 갓을 사서 보내는 일을 노미(老未)에게 거듭 부탁하고 돈 10냥을 그 값으로 지급하였다. 주사별장 김명현(金明玄)이 후추 한 봉지를 들여보냈다. 전송하기 위해 출타하였다가 이군과 김 중군(金中軍)에게 들러서 만나 보았다.
25일[二十五日]
맑고 따뜻함. 중방(中房)과 노미(老未)가 아침에 출발하였다. 천리 길을 함께 왔다가 지금 작별을 하자니 더욱 섭섭하였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함께 거처하던 두 사람이 모두 떠나고 나만 홀로 객지에 남으니 나그네의 서글픔을 견디기 힘들었다. 태옥(泰玉) 편에 주령의 편지가 왔다. 섬에서 장리(將吏)가 나와서 지난 22일에 건져 낸 유하목(流下木)이 133개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어서 뜻밖이었으나 다행이었다.
26일[二十六日]
맑고 따뜻함. 오위장 김경달(金景達)의 편지가 와서 즉시 답장을 보냈다. 내아(內衙)에 그네를 매달았다. 오후에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억류하고 있던 선박을 풀어 주라는 일이었다. 섬의 장리(將吏)가 들어갔다.
27일[二十七日]
맑고 따뜻함. 나귀를 타고 덕계로 가서 주령을 만나 제반 사무를 논의하였다. 용천부사(龍川府使)의 편지가 왔으며 거기에 녹지(錄紙)가 있었는데, “동학(東學)이 호남(湖南)의 고부(古阜)와 정읍(井邑)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서울에서는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를 파송하였으나 관군은 왕왕 패배하였다. 이달 초7일부터 초10일까지 완백(完伯, 전라감사)과 금백(錦伯, 충청감사)의 전보가 날마다 이어졌으며, 호중(湖中, 충청도)의 회덕(懷德)과 공주(公州) 등지에서도 저들 무리들이 크게 회합을 가지었기 때문에 군사를 소모(招募)하여 방어하였다. 적의 세력이 이처럼 창궐하여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어수선하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걱정스러웠다. 저들 무리들이 ‘고부에서 내린 글’을 보니 이치에 매우 가까웠다. 지금 세상에 난리가 일어났는데 천리 밖의 객지에 있어서 고향 소식을 아득히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오후에 돌아왔다. 어제와 오늘 이틀 저녁은 나그네 수심이 더욱 깊었다. 관아의 목수가 가래나무 1개를 가져갔다.
28일[二十八日]
맑고 따뜻함.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 갔다. 황경록(黃景祿)이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이방이 섬으로 들어갔다. 아전 김씨가 원보(元寶) 1정(錠)을 들여왔기에 내아(內衙)에게 맡겼다.
29일[二十九日]
맑았다가 흐림.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치자 즉시 답장이 왔는데, 이필손(李弼孫)을 석방한 일 때문에 중군(中軍)을 크게 질책하였다고 하였다. 백목(白木) 15자의 가격은 3냥 4전 5푼이고 상목(常布) 6자의 가격은 1냥 2전으로 합이 4냥 6전 5푼이라고 하였고, 신임 만윤(灣尹, 의주부윤) 이근명(李根命)이 지난 27일에 부임하였다고 하였다.
30일[三十日]
맑고 따뜻함. 김 중군(金中軍)이 이필손을 사사로이 석방한 일 때문에 주령에게 질책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부자리를 새로 꿰매는 일을 용천 노파에게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