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6월에 왜(倭)가 군사를 거느리고 국도(國都, 都城. 서울)에 들어왔는데, 지금 서두(書頭)에 날짜를 헤아려 쓰지 않는 것은 한 달 동안에 있었던 일을 합쳐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완산(完山, 전주[全州]의 옛 지명)의 무리 지은 도둑[群盜, 동학농민군]이 일어날 때에 ‘왜국(倭國)를 배척한다’고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왜놈이 갑자기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곧장 서울에 들어와 네 방위에 진을 쳤다. 청(淸)나라 원대인(袁大人, 袁世凱)이 청나라의 장수로 서울에 주둔한 사령관이다. 청나라 사람은 ‘장수’를 ‘대인(大人)’이라고 한다. 령을 내려 말하기를,
“무릇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피란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피하라.”고 하였다. 명령이 떨어지매, ≪서울≫ 사람들 절반 이상이 ≪피란하러≫ 나갔다. 이에 원대인이 왜놈 수괴[倭酋]에게 말하기를, “한바탕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승부를 결정짓자.”고 하니, 왜놈 수괴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수십 일 동안 서로 버티고 양보하지 않았다. 이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조선(朝鮮) 사람들과 회의(會議)하며 말하기를, “요즘 아라사(俄羅沙)가 천하에 강대한 나라라 반드시 조선(朝鮮)을 병탄(倂呑, 남의 영토나 물건을 아울러 차지함)할 것이고 조선이 망하고 나면 ≪그 재앙이≫ 장차 일본에까지 미칠 것이오. 그 잠식(蠶食)하는 형세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는 형상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는가? ≪내가≫ 귀국의 정사(政事)를 엿보건대, 국사(國事)가 나날이 잘못되어가고 있지만 한 사람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데도 나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시급하게 시행할 일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후생(後生)들을 가르쳐서 인재를 가려 쓰는 일이요,
≪둘째는≫ 군사를 양성하여 역시 불의(不意)의 재난(災難)에 대비하는 일이요,
≪셋째는≫ 주(州)와 현(縣)을 병합하여 번다한 비용을 줄이는 일이요,
≪넷째는≫ 교량(橋梁)을 보수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는 일이요,
≪다섯째는≫ 잠세(潛稅)를 징수하여 나라의 씀씀이[國用, 國費]를 보조하는 일입니다.
무릇 이 다섯 가지 조항을 묘당(廟堂)의 석상에서 의논한 후에, 시행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국(兩國)이 서로 공격하여 승패(勝敗)를 결정지어야 하오.” 하니, 조선 사람이 말하기를,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를 즉시 시행하지 못하겠소.” 하자, 왜인이 “그러면 우선 후일을 기다립시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원대인이 무슨 변고(變故)가 있어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면서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존칭)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아무리 멋대로 날뛰더라도[猖獗] 우선 그들이 하는 일을 들어준다면, 우리의 출국(出國)을 기다렸다가 그때부터는 여러 가지 나랏일을 저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군국(軍國)의 기밀 업무와 식산(殖産, 생산을 늘임)과 흥업(興業)을 한결같이 그들이 지휘하는 대로 들어주어야 될 것입니다. 도성의 문과 대궐문에 있어서도 모두 그들이 스스로 맡아 지키고 드나드는 자는 왜인과 원대인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시절이 승평(丞平, 昇平. 나라가 태평함)한 날이 오래인데도 인심이 흉흉하여 저잣거리의 가게 상인들이 문을 닫고 진열한 물건을 거두어들였다.
흥선대원군(국태공)이 방(榜)을 붙여 백성들을 일깨워주었는데, ≪그 효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즘에 일본인이 우리의 국정(國政)을 붙들어 바로잡으려는 이유로써 권면(勸勉, 권하여 힘쓰게 함)하는 일이 있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해 보면 좋은 일이지만, 일로써 따져보면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노릇이다. 본국의 정사를 이미 스스로 바로잡지 못해서 이웃 나라에게 권면을 당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 얼마나 면목(面目) 없는 일인가. 오늘에 다다른 일의 형세는 본국의 정치가 바르지 못한 까닭으로 인하여 이에 천하(天下)의 공의(公議, 公論)가 있었다. 장차 성명(聲明)을 발표하여 바로잡는 것은 일본인들이 화충(和衷, 마음속으로 화합함)을 역설(力說)하여 천하 사람들이 와서 권면하기를 원했던 까닭이다. 현재 일본군사가 목을 지키고 이르러 오자, 동도(東徒)가 다시 성하게 일어나 완산의 군도(群盜)들이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안팎이(조정과 지방) 모두 어지러워 이를 맡아 다스릴 사유가 아닌 것이 없다. 이미 (그들을) 물리칠 훌륭한 계책이 없다면 아직 그들의 권면을 따라 일을 수행하는 것만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
슬프도다. 오늘날 이 거사(擧事)가 그것이 어찌 우리의 본마음이리요마는 진실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의 형편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너희 모든 백성들[大小民人]은 놀라지 말고 의심하지도 말며 각기 안심하고 자기의 생업에 종사할지어다. 다시 우리 임금[聖上]의 중흥(中興)의 치세를 보려면 지금의 토벌로써 우리 인민들을 위하는 것이 제일이다. 위아래 사람들이 함께 정신을 가다듬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기다리면 장차 후일(後日)에 분발(奮發)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에 저잣거리의 가게가 문을 열어 상품을 진열하고, 인심이 점점 안정되게 살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청나라 군사와 왜군이 천안(天安)과 아산(牙山) 등지에서 서로 싸웠는데, 청나라 군사가 싸움에 패하자 곧바로 충주(忠州)로 달아났다.
○ 왜놈이 도성으로 들어온 것은 실상은 혜당(惠堂) 민영준(閔泳駿)이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 의도가 반역(叛逆)을 도모하고자 한 정황[情形]이 자못 드러났다. 하지만, 조정 신하들의 대다수가 이를 갈면서도 그의 권세가 두려워 감히 한마디 말도 그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임금께서 시사(時事)를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영의정[領相] 심합(沈閤, 沈舜澤 閤下)을 불러 하문(下問)하시기를, “지금 왜놈이 ≪우리에게≫
3가지 요구인, ‘삼남(三南)을 구제하는 일과 간청(干請)하는 일, 공물을 바치는[入貢] 일 과 삭발(削髮)하는 것’을 말하는데, 계획이 장차 어찌 되어가오?”하니, 심합이 대답하기를, “신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녹만 먹는 사람으로[素餐尸位] 실로 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오니, 좌의정[左相]에게 하문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조정승[趙相, 좌의정 조병세(趙秉世)]에게 하문하시니 즉시 아뢰기를, “먼저 혜당(惠堂, 민영준)의 머리를 베어야 나랏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자, 그때에 중전(中殿, 왕비)이 뒤에서 노한 목소리로 “조정승은 다시는 입시(入侍,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모심)하지 마시오.” 하니, 조정승은 드디어 나가버렸다. 혜당이 조정승[趙閤, 조병세 합하]에게 나아가 청하여 묻기를, “지금 왜놈들이 저렇게 멋대로 날뛰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합니까?”하매, 조 정승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아뢰기를, ‘우선 대감(당신)의 머리를 베어야 옳습니다’하였소.” 하자, 혜당이 움츠리고 한마디 말도 못하였다. 그때에 신장군(申將軍, 申正熙)이 또 ‘혜당을 먼저 베어야 합니다’라고 임금께 주청하니, 조야(朝野)에서 모두 “조정에는 두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혜당은 재앙이 자기에게 미칠 줄을 미리 알고 우선 처자(妻子)와 보화(寶貨)를 양관(洋關)으로 실어 보냈는데, 흥선대원군(국태공)이 다시 나랏일을 보게 되니[감국(監國)], 혜당은 곧 먼 악도[遠惡島]로 보내어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