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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갑오년 추7월[秋七月]에 청나라 장수 섭지초(聶志超, 聶은 葉의 오식)가 군사 6000명을 거느리고 와 청주(淸州)의 신당(新塘) 저자에 자면서 크게 노략질하고 떠났다. 청과 왜가 서로 싸웠는데 청군이 화약과 철환(鐵丸, 탄알. 처란)이 다 떨어져 곧바로 충주(忠州)로 도주하였다. 이에 충주에 사는 백성들이 하룻밤 사이에 ≪난을 만나≫ 모두 흩어져 제각기 살 길을 도모하니, 충주의 목사(牧使)가 마침 쌀과 장(醬)을 준비하여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은 왜군이 충주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던 길을 바꾸어 신당의 저자로 들어갔는데, 그 수효가 무릇 6000여 명이었다. 우리와 같이 있던 동네사람 1명이 즉시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방자하게 멋대로 다니는 데도 한 사람도 이를 금한 자가 없었으니 그 군율을 알 만하다. 군병들이 민가로 흩어져 들어가 소나 닭을 탈취한 자도 있고 또 한 말의 쌀[斗米]과 한 자의 베[尺布] 및 심지어 호박과 마늘과 고추[椒] 들까지 모두 탕진하여 남은 것이 없었으니, 거주민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장차 어디로 갈 것이냐?”하고 물으니, “지금 북도(北道)의 원산(原山, 原은 元의 오식)으로 들어가 원대인(袁大人)과 만나서 그 지휘를 들어보면 다른 계략을 품고 있을 것이라[異圖].”고 하였다. 이때부터 백성들이 근심하여 원망하며 산업을 일삼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온종일 이야기한 것은 모두 청과 왜에 관한 풍설이었다. 더러 산업을 경영한 자가 있으면 문득 ‘이 난리가 난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고 하나도 장구한 계획이 없이 다만 일시적인 안일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한 것인데, 지금은 근본이 한결같이 흔들려 문득 썩은 고삐를 잡고 말을 모는 형상에 처해 있다. 아무리 궁벽한 집에서 ≪홀로≫ 슬피 탄식한들 장차 나라에 만분의 일도 보탬이 없으니, 역시 내 뜻은 원대하나 재주가 모자라는 한(恨)이 없지 않을 뿐이로다.

○ 청나라 군사가 신당저자에 들어왔는데, 어떤 사람이 그 말의 굴레를 벗기고 산골짜기에 놓아주며 스스로 묘한 계책이라 말하였다. 이윽고 청병 수십 명이 그 말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잡으려 하였으나 끝내 붙잡지 못하였다. 어쩔 수 없이 드디어 총으로 쏘아 죽이니, 그 마음씀[用心]이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청인(淸人)이 조선을 구원하러 나왔으니 필시 약탈할 리가 없을 터인데, 지금 그렇게 ≪약탈≫하는가?”하자, 청인이 대답하기를, “대군(大軍)이 지나간 뒤에는 원래 약탈하는 도적이 있는 것인데, 또 이 군대는 일찍이 해랑적(海浪賊)을 격파하여 항복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 이후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의심을 받으니 ≪그들이≫ 곧바로 달아났다. 와전된 말이 더욱 과장되어 크게 퍼져나갔다. 본읍(충주읍)의 동서쪽에 사는 백성들 또한 수백 명씩 당을 만들어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다. 다시 서로 왕래하며 일을 당하면 바람이 일듯이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일찍이 저 당인(동학당) 30여 명이 그 당인의 집에 가서 모였는데, 그들을 목격한 사람이 있으매 즉시 달려 각기 집으로 돌아가 먼저 처자와 살림살이를 도피시켰다.
곁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진실과 거짓을 알아보지 못한 채 역시 그와 같이 가족과 세간을 피난시켰다. 드디어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 떠도는 말이 후에는 당적(黨賊) 400~500명이 차례대로 크게 노략질하러 왔다고 했다. 이에 인심이 선동되고 마을마다 몹시 소요하니, 이는 소위 개 한 마리가 어떤 형상을 보고 짖으매 뭇 개가 그 소리만 듣고 짖는 격이다. 그 후에 자세히 탐문해 보니, 서울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헛소문에 놀랐다고 하니, 아마도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 생길 조짐이 아니겠는가?

○ 충주의 수령[邑倅]이 쌀과 보리로 그 고을을 지나가는 청국 군사를 도와주었다. 또한 관자(關子, 關文)를 받들고 새로 영(令)을 내려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지(告知)하였다. “금년 가을부터는 너희가 소작한 농사 ≪소득≫의 절반을 나누어 나라에 바치면 그밖의 세금은 걷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왜추(倭酋, 왜놈의 수괴)를 일러 ‘대일본(大日本), 대황제(大皇帝)’라고 하고 조선도 역시 ‘대(大)’자를 붙여 왕호를 폐하고 황제라고 칭하라.”고 하였다. 농작물의 절반을 나누어 바치는 법[分半法]은 왜놈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것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녹봉을 나누어주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당초에 왜국이 이 법령을 냈을 때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목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1년 사이에 사람을 1천여 수레나 살해하여 ≪일본에서는≫ 마침내 시행하였다’고 했다. 일본이 조선에게 ‘大’자를 붙여 황제라고 칭한 일은, 대개 왜인이 조선을 청국에 소속시키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후일에 ‘분반법(分半法, 또는 半分法)’은 시행되지 않았다.

7월 11일[七月十一日] 을유(乙酉)에 저헌(樗軒) 선조의 문집(文集)을 읽었다.

우리 14대조인 저헌 문강공(文康公)은 영락(永樂, 明 성종13, 조선 태종15, 1415) 을미년 겨울 10월 정축일(丁丑日)에 태어나셨다. 의정공(議政公)이 늦은 나이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삼각산(三角山, 北漢山)에 기도하였다. 공(公)을 낳기 전날 저녁에 의정공이 마침 금성(禁省, 대궐, 대궐 내의 관아)에서 숙직하고 자는데, 꿈에 백룡(白龍)이 커다란 돌을 쪼개고 뛰어나와 날아 올라갔다. 꿈을 깨어 보니, 사인(舍人, 심부름 하는 머슴)이 달려와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주었다. 그 휘(諱)는 대개 이 사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공이 태어날 때 푸른 태보(胎褓)에 싸여 있었다. 그 태보를 벗기고 아이를 보니, 살결은 몹시 검고 뼈마디가 거칠고 성겼으며 온몸에 털이 있었다. 부인 박씨(朴氏, 본은 春川)가 ≪아이의 생김새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하며 그 아이를 내다 버리려고 하자, 의정공이 그 아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참으로 기이한 사내아이로구나’하고 버리지 않았다. 엉덩이에 큼직한 검은 무늬가 있었는데, 손 모양 같기도 하고 은은한 거북 모양과도 같았다. 장차 기쁜 일이 있을 꿈을 꾸었으니, 엉덩이의 거북모양이 필시 몸에 둘렸을 것이다. 아이가 점점 자람에 따라 그 모습이 기특하게 뛰어나고 기개와 도량이 매우 너그러웠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황해감사(黃海監司)을 맡았을 때 임금(세조(世祖))께서 본도(本道, 황해도)에 행행(行幸)하실 적에, 공이 도(道)의 경계에 나가 어가를 맞이하여 호종(扈從)하였고 평안도(平安道)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돌아왔다. 임금이 당초에는 강가 쪽에 있는 여러 보루(堡壘, 작은 성)를 두루 순행하실 작정이었으나, 별다른 견책(譴責, 잘못을 꾸짖고 나무라는 것)도 없이 대가(大駕)가 중도에 되돌아가셨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관리와 백성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공이 이 일을 조용히 잘 처리하여 마침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임금이 당초에 황해도 경계에 들어오실 때, 공을 불러 이르시기를, “저번에 경이 다스리는 도에서는 내 뜻에 맞아 순유(巡遊, 순시하며 다님)하였으나, 평안도에 이르렀을 때는 일이 크게 서로 어긋난지라, 오래 머물지 않고 어가(御駕)를 재촉하여 돌아갔소. ≪경은≫ 짐이 되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빠를 줄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한 어떠한 정치(조치)를 하였기에 ≪짐이≫ 안심하고 여기에 이르게 하였소.”라고 하셨다. 이어 농담말씀으로, “도주(道主)가 비록 나에게 후히 공대(恭待)하였으나, 나의 토지에서 나는 산물로 대접하였으니, 무슨 기쁨이 있었겠소?”하고 드디어 크게 칭찬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공을 인견(引見)하면서 임영군(臨瀛君,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이구[李璆])에게 이르기를, “이 아무개와 의당 ≪술을≫ 마실 것인데, 어떤 술그릇이 좋겠소?”하고 묻자, 임영군이 대답하기를, “이 아무개는 술을 한량없이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 의당 큰 그릇으로 마셔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시기를, “군의 대답은 틀렸소.”라고 하시며, “내가 묻는 바는 이 아무개의 주량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 아무개가 바야흐로 우리를 응접할 때에 만일 큰 그릇으로 마시게 되면 주인이 취하여 넘어질 터이니, 객이 어떻게 ≪그를≫ 의지하겠소?”하고 드디어 안마(鞍馬, 안장을 갖춘 말)를 하사하고 크게 포상(褒賞)을 더 내렸다. 다른 날 ≪임금이≫ 공을 만나볼 적에는 반드시 돌아보며 중궁(中宮)에게 이르시기를, “이이가 예전에 내가 서쪽 지방(황해도와 평안도를 칭함)을 순행(巡幸)할 때에 황해도의 관찰사로 있었소.”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헌부(憲府, 사헌부)가 나랏일에 관한 상소[言事]의 실수로 폄출(貶黜, 벼슬을 낮추거나 면직시킴)을 많이 당하였는데, 공이 사헌부의 장관이 되면서부터는 논의가 강직하여 개연히(慨然, 뜻을 떨쳐 일으키는 모양)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는 의지가 있었다. 어느 날 한 대신(大臣)의 탐오(貪汚)로 법을 어겼던 일을 상소(上疏)하여 논핵(論劾, 죄를 논하여 탄핵함)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이 매우 격렬하고 절실하였다. 소를 올리자 임금께서 탄복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미 공을 만나보고 진작(進爵)을 분부하였으며,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공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지난번 이 직위에 전임(前任)했던 사람들이 모두 경과 같았다면 내가 비록 그를 폄출하고 싶어도 폄출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이내 그의 상소를 좌우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이 아무개가 올린 상소인데, 지금은 ≪탄핵을 당한≫ 아무개를 비호(庇護)해 줄 수 없다.” 하고 즉시 그 일을 윤허하였다. 그때에 참교(參校)인 배맹후(裵孟厚)가 연해서 생원(生員) · 진사(進士)의 양과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에 임금이 공에게 이르기를, “배(裵) 아무개 또한 3장원(三壯元)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맹후와 같이 문장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역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경(卿)은 스스로 문장에 능한 일로 3장원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맹후는 마침내 방의 끄트머리에 합격하였소.” 하며, 임금이 농으로 공에게 말씀하기를, “과연 공의 말과 같이 맹후가 ≪경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하오.” 하였다.

신묘(辛卯)년 봄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을 논의하여 ≪공에게≫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 교서(敎書,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의 대략적인 내용에,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바치는[위지(委質)] 일은 신하(臣子, 臣下)가 임금을 섬기는 까닭이요, 덕(德)을 숭상하고 공(功)에 보답하는 것은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는 까닭이다. 이는 실로 천하의 공통된 도리이고 국가에서 마련한 좋은 법규이다. 오직 경의 학식과 도량은 넓고 크며 타고난 성품은 영특하였다. 정미롭게 연마한 성리학(性理學)은 도학의 근본과 연원(淵源)이 있었으며, 발휘하는 문장의 재능은 수하(手下)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3차례 연달아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하여 한 시대에 명성을 누렸다.
첫째로 난파(鑾波, 波는 坡의 오기)에 뽑혀 들어가 경학(經學, 경서[經書]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오랫동안 임금을 시종하였으니, 그는 실로 경륜(經綸) 있는 큰 그릇(큰일을 할 만한 인재)이요. 사화(詞華, 화려하게 꾸민 시나 문장)로 인한 야트막한 명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두루 역임한 관직으로 성대한 명성과 덕망이 있었다. ≪도성을≫ 나가 방면(方面)을 다스릴 때에는 홀아비와 과부가 그의 은혜를 생각하였으며, ≪서울[京兆]에≫ 들어와 한성부(漢城府)의 판윤(判尹, 한성부의 의뜸 벼슬)을 맡았을 때에는 간호(奸豪)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였다. 훌륭하게 보좌한 지모는 합당한 암랑(巖廊, 의정부의 별칭)의 그릇이다. 나같이 충묘(忡眇, 沖渺의 오기. 나이가 어리고 사리에 어두움)한 ≪짐이≫ 비기(丕基, 큰 왕업의 터전)를 얻어 지키고, 국가가 아휴(迓休, 복록[福祿]을 누림)한 까닭을 생각하니, 실로 경의 공로로 독락(篤樂, 대단한 즐거움)을 힘입었으며, 가적(嘉績, 훌륭한 공적)을 이미 힘써 이루었으니 어찌 포율(褒律, 포상하는 법)을 감히 더디게 하리오.” 하였다.

세조(世祖)는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두세 번의 훈맹(勳盟)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하였소? 하지만 경은 반드시 다른 날[他日, 후일]에 공신이 될 것이요”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과연 징험(徵驗)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477[성종 8]) 2월 8일 정축에 공이 졸(卒)하니, 향년 63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관아(寬雅)하고 마음을 다잡음이 굳고 확실하였다. 평상시에는 말씀이 빠르거나 낯빛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다. 자손들이 설령 과실(過失)이 있더라도 조금도 목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성품이 또 강정(剛正)하여 구구하게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자제(子弟)들을 경계하되, “재상(宰相)의 자제들은 나이가 젊고 기상이 날카로워 잠깐 사이에 좋은 관직을 얻게 되면, 갑자기 부형의 세력을 끼고 관직을 조심스럽게 지키지 아니하다가, 드디어 어떤 법에 저촉되어 부형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몹시 옳지 않은 일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고 출세하여 너희 부형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성품은 강의(剛毅)하고 엄중하지만 친한 벗들과 온종일 익살스레 실없는 말을 하고, 일찍이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평생에 청신(淸愼)으로 뜻을 세우고 스스로 산업을 다스리지 않기로 하였다. 자제를 훈계함에 ‘반드시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지위가 신하로서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자신이 세상을 떠난 날에는 염빈(斂殯) 등의 여러 일을 치름에 있어 오히려 금전이 넉넉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자상하여 종족 중에 빈핍(貧乏)한 사람이 있으면, 한결같이 모두 구제해 주었다. 누이동생이 집이 가난한데다 일찍 세상을 떠나니, 그의 두 딸을 거두어 집에서 양육하였으며, 성장하여 시집보낼 때에 이르러서도 한결같이 친자식과 똑같이 하였다. 아들 장령공(掌令公)이 세조 때의 전강시(殿講試)에 통서(通書)로 합격하여 특명으로 관직을 제수(除授)하니, 공이 ≪임금께≫ 나아가 아뢰기를, “이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린 때라. 아직은 유업(孺業, 儒業의 오기)에 힘써야 하므로, 직무를 맡아 유업을 폐지하는 일이 온당하지 않으니 제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세조는 이르기를, “만일 그가 의지가 있으면 공무를 보는 겨를에도 족히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마침내 원구서(圜丘署)의 녹사(錄事) 벼슬에 제수하였는데, 공은 오히려 기뻐하지 않았다. 공은 식견이 고명(高明)하고 의론(議論)이 경(經)에 근거한지라. 그가 일을 처리하고 의혹을 해결하는 데 확연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세조께서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500년 왕자(王者)가 일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有名)한 사람이 나온다고 하였으니, 소위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경이 아니면 과연 누구이겠소?”라고 하자, 공이 자리를 피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신같이 우매한 자가 어찌 감히 여기에 해당이나 되리까?” 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경은 분명 명세지재(命世之才, 한 시대를 바로잡아 구원할 만한 인재)일 것이오.” 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 같은 불녕(不侫, 재주가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겸칭)이 임금의 알아주심을 잘못 입어 은총이 이렇게까지 후하지만, ≪저는≫ 보답을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오의 잘못에 대해서는 신에게 이것이 없으리라고 기필(期必)할 수 없습니다만,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잘못인 줄 알면서 감히 그 일을 행하는 것, 신은 실로 이런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기예에 있어서 능통하지 못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 만년에 활쏘기[弓矢]를 익히는 데도 역시 볼 만하였다. 세조께서 일찍이 군대를 사열(査閱)할 적에 작은 과녁을 100보(百步)의 밖에 세워두고 공(公)에게 명하여 홍윤성(洪允成)과 더불어 짝을 이루게 하고 공이 화살 3발을 쏘아 3발을 모두 적중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성은 무(武)로써 자신만만했는데 지금도 그러하오? 나는 이아무개[李某]와 짝을 이루어 쏘아서 윤성의 수치를 씻어주려고 하는데, 공 또한 밑질 바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세조는 크게 덧붙여 칭찬하며 말하기를, “유자(儒者)를 도모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경이≫ 사복시(司僕寺)를 맡아 거느리라.”고 명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한 후에, 유(孺, 儒의 오기)를 높이고 문치(文治)를 숭상하며 학문을 일으키는[興學, 또는 학교를 세움] 데 유의(留意)하였다. 특별히 공에게 분부하여 “두세 명의 유로(孺老, 儒老의 오기)들과 성균관(成均館)에 둘러앉아 유생(儒生)들을 장려하라.”고 하자, 공이 분부를 받들고 스스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비록 번거롭게 교회(敎誨)하지 않아도 훈도(薰陶)가 점차 스며들어 인재가 배출되고 문풍(文風)이 점점 떨쳐졌다. 만년에는 복록(福祿)은 높고 관직은 한가로움에 오직 시(詩)와 술을 벗 삼아 스스로 즐기었다. 집이 북녘 벽송정(碧松亭) 위에 있어, 골이 깊고도 깊숙하며 시내가 맑고 차가워 매양 좋은 때와 길한 날에는 동중(洞中)에 사는 노인들과 지팡이 짚고 늘어진 걸음으로 혹은 시를 읊거나 술잔을 기울이다가 해가 저물면 얼근한 취기로 돌아오니,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신선이라고 일렀다. 또 정원 안에 못을 파고 그 못에 연(蓮)을 심었다. 그 위에 정자를 짓고 곁에는 온갖 꽃들을 심었으며 이름을 ‘계일정(戒溢亭)’이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안책(岸幘)하고 편안히 앉아 아침저녁으로 시가(詩歌)를 읊으며 세상 걱정을 잊은 채 소일하고 지냈다. 공이 복록을 누리고 천명(天命)을 마침으로써 남들이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戒溢] 이를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조정(다섯 임금)을 받들어 섬겼던 37년 동안 부지런과 근신(謹身)으로 법도를 지켜 과실을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생 동안 한 가지 일도 법사(法司)에 규찰된 바 없었고, 사람들 역시 손가락질하며 시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덕을 갖춘 군자(君子)였다.

7월 12일[七月十二日] 병술(丙戌)에 새 법령[新法]을 들었다.

처음 원세개(袁世凱)가 변고가 있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대도독(大都督)인 이홍장(李弘張, 李鴻章의 오기)의 질부(姪婦)는 일본 임금[倭酋]의 질녀이다. 원세개가 홍장의 막하(幕下)에서 그의 지휘 통제[節度]를 받고 있는데, 원세개가 왜놈을 토벌할 때에 적은 군사로는 능히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드디어 이홍장에게 전보(電報)로 아뢰기를, “조선은 연경(燕京, 北京)의 요충지이므로 만약 이곳[조선(朝鮮)]을 잃는다면 우리 청나라가 위태롭습니다. 군사를 더 파견하여 일본군 토벌하기를 요청합니다.” 하였다. 이홍장은 그의 질부와의 관계로 인하여 전보로 답하기를, “군사는 숫자가 많은 데 있지 않고 방법과 책략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하고 끝내 ≪군사를≫ 더 파견할 의사가 없었다. 원세개는 드디어 본국 정부(政府)에 전보를 쳤다. 그러자 정부에서 이홍장에게 군사를 더 파견하라고 명하였으나, 이홍장은 드디어 원세개의 죄를 엮어서 보고하였다. 이에 청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염찰사(廉察使)를 파견하여 그 내막을 탐지하게 하고 명하기를, “잘못[曲]이 도독(都督, 이홍장을 칭함)에게 있으면 그를 참(斬)할 것이요, 잘못이 원대인에게 있으면 역시 그를 참할 것이다.” 하니, 원세개는 그 명령을 듣고 즉시 ≪북경으로≫ 달려갔다. 이날 왜놈들이 대궐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들은 병기를 빼앗기고 임금(고종[高宗])은 심궁(深宮, 깊고 그윽한 宮中)에 갇혔다. 흥선대원군[國太公]이 비록 ≪나랏일을≫ 주재(主宰, 主張)한다고 하나, ≪왜놈이 시키는 대로≫ 머리를 끄덕여 명령을 받을 따름이었다. 왜놈은 우리나라의 국법을 고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一.적실(嫡室, 本妻)과 첩(妾)이 모두 자녀가 없을 때에는 후사(後嗣, 제사를 받들 아들)를 세워 부자(父子)의 천륜(天倫)을 바로잡는다.

一.남녀의 조혼(早婚)을 금지하는 일은 요절(夭折)하는 싹을 없애려는 것이다.

一.청상과부[孀婦]가 재가(再嫁)하려고 하는 사람은 재가하게 하고, 떠나지 않고 수절(守節)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절개를 지키게 하는 것은 ≪생활에≫ 화기(和氣)를 돌게 하는 것이다.

一.인신(人身)의 매매(賣買)를 금하는 것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一.양반(兩班)과 상민(常民))을 막론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등용(登用)하는 것은 인재를 모두 골라 쓰는 정책이다.

一.부세(賦稅)에 결세(結稅, 1결은 100짐)를 부가(附加)하는 것은 1년 동안에 드는 나라의 씀씀이(國用, 國費)대로 300만을 넘지 않게 한다.

一.의복 제도[衣制]를 변경하되, 선비의 평상시차림은 검은 갓[漆笠]에 실띠[絲帶]를 매고 주의(周衣, 두루마기)만 입으며, 제사(祭祀) 때에는 도포(道袍)를 입는다.

대개 그 절목(節目)이 이와 같았는데, 이 법령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몹시 통탄(痛歎)하게 하였다.

7월 13일[七月十三日] 정해(丁亥)에 영남(嶺南)에서 사람이 왔다.

충주(忠州)의 갈마곡(渴馬谷)에 사는 이생(李生, 이아무개)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붓을 팔려고 영남지방으로부터 왔다. 그에게 거기서 보고 들었던 소식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대구(大丘, 大邱) 한 지역도 큰 가뭄으로 논에 모내기를 아직 못한 곳이 절반도 안 된다고 하였다. 문경(聞慶)에 도착하니 왜놈 몇 천 명이 진안(陳安)에 진을 치고 소 70여 필을 사들이는데, 값을 넉넉하게 주고 샀으며, 심지어 흐르는 물을 마시고도 역시 돈을 주고 가더라.”고 하였다. 종종 벌거벗은 몸으로 인가에 틈을 보고 들어갔는데 주인이 성내어 꾸짖으면, “요즘 너희 임금도 우리 수중(手中)에 있어 마음대로 못하는데, 하물며 너희들이 무슨 힘을 믿고 말하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흩어져 떠나버렸다. 밤이 되어 잠잘 때에는 왜놈들이 모두 흩어져 산봉우리로 올라가 혹은 자고 혹은 망을 보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모여든다. 그 정상[情勢]이 이와 같으므로 사람들이 그 내막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전봇대와 철삭(鐵索, 철사로 꼰 줄 즉 전선)이 튼튼하지 못하여 너무 약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아무리 약하더라도 석 달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다. 왜 하필 석 달이냐고 또 묻자, “3개월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알 수 있을 터인데, 다시 무얼 묻느냐?”고 말했다.

왜놈은 조선으로 나올 때부터 팔도(八道, 全國)를 두루 찾아다니며 도로와 산천을 모두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또 우리나라 말 배우기에 힘쓰느라 매양 사람들에게 수작(酬酢)을 걸어 말하다가 모르는 말을 들으면, 즉시 그 말을 적어 방언(方言, 사투리)으로 구별하였다. 모든 성읍(城邑)에 이르면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유리경(琉璃鏡, 사진기계)으로 성을 향하여 ≪사진을≫ 찍어서 곧바로 어느 읍성이나 그려내었다. 무릇 성 안에 있는 꽃이나 버드나무, 인물 등을 모두 하나라도 어그러져 앞뒤가 맞지 않거나 빠뜨림이 없었다. 그리고 뒷간에 갔던 여자가 대변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발을 들어 대청마루에 오르면서 양손으로 바지 끈을 묶는 모습까지도 그려냈다. 따라서 그 조화(造化)의 변고는 아주 옛날 천황씨(天皇氏) 이후로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진안(陳安)의 근방에는 왜놈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만 여 명이나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난리는 과연 별 난리라고 할 만하다. 난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몸을 팔아 남 대신 전장(戰場)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당초에 전주[完城]에 있는 ≪동학군(東學軍)을≫ 토벌할 적에 첫 번째로 등짐장수[負商] 중에서 대부분 뽑아 보냈는데, 뽑힌 자들이 사람을 사서 자기 대신 전장에 나가게 하였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였다.

7월 14일[七月十四日] 무자(戊子)에 동네 여러 사람들과 민보(民堡)의 처소를 구경하였다.

1개월 동안에 인심(人心)과 세태(世態)가 지난날과 크게 달라져 관아(官衙) 안에서 잡기(雜技)가 어지럽게 일어나지만, 인목(人牧, 지방의 목사(牧使))이 금하지 못하였다. “접주(接主)인 성두한(成斗漢)은 후일에 서울[京師]에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성두한은 대개 일개의 우매한 백성이었는데도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니, 이 역시 천운(天運)인지 알 수가 없다.”

성안마을 산내(山內)에 동학(東學) 무리 1천여 명이 모여 있는데, 성언(聲言)하기를, “앞으로 왜놈 무리들이 이동하여 이 근방에 가득 깔릴 것이다. 그러므로 인접(隣接)해 있는 여러 동네 곳곳에 보루[民堡]를 정하여 쌓고 있으며, 이 동네 역시 북산(北山) 위에 보루를 쌓는다.”고 하였다. 그 산은 높고 험하여 한 사람이 창을 메고 지키면 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 당초에 임금이 초토사(招討使)인 홍계훈(洪啓薰)을 보내어 전주의 도적[完賊, 전주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초토사가 암암리에 세작(細作, 군중에서 몰래 적을 정탐하는 사람)을 보내어 도적 속에 들어가 정탐하게 하였다. 수괴가 갑자기 영을 내려 모두 황건(黃巾)을 쓰라고 하자, 이미 일제히 다 ≪황색 두건을≫ 썼는데, 세작은 두건이 없었다. 수괴가 ≪세작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주장(主將)에게 가서 고하여, 다시는 간사한 꾀를 쓰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그 후에 초토사가 황색 두건을 주어 다시 그를 보냈다. 수괴가 또 영을 내려 모두 청색 두건을 쓰라고 하니, 군졸들이[下卒] 그 말에 따라 모두 청건(靑巾)을 썼는데, 세작만 청색 두건이 없었다. 수괴가 ≪세작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다시 돌려보낼 테니 너의 주장에게 아뢰어 다시 병서(兵書)를 배우고 오라고 하여라.” 하였다. 초토사가 드디어 다른 계책을 써서 그를 쳐 평정했으나 마침내 수괴를 잡지는 못했다. 개골창에 죽어 있는 사람의 머리를 몰래 가져다가 장계(狀啓)를 올려 수괴의 목을 베었다고 말했다. 그의 병정들은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은가락지 등의 재물을 약탈하여 허리띠에 가득 꿰어 차고 서울로 올라갔다. 전라도 전체가 먼젓번에는 도적들(동학농민군)에게 약탈당하고, 또 병정들이 재화(財貨)를 비로 쓸듯이 빼앗아갔다. 그로 인해 곡식을 파종(播種)하지 못하고 ≪양민(良民)들이≫ 드디어 도적이 되어 잠식(蠶食,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이 점점 먹어들어감)하여 올라온다고 하였다.

○ 그때에 “청나라 장수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물을 건너 저자로 돌아가는데, 왜놈 무리가 그것을 보고 추격하니, 청나라 장수가 채찍질을 가하여 나는 듯이 달려갔다. 왜놈이 즉시 엎드려 추격하여 전곡(田穀) 속에서 총을 쏘아 그의 다리를 명중하니, 청나라 장수가 즉시 검을 휘둘러 충돌하며 빨리 달려서 갔다.”고 했다. 시골사람[野人]이 또 말하기를, “원세개[袁大人]가 곧바로 동래(東萊, 釜山에 있는 지명)로 달려가 왜관(倭關, 倭館의 오기)을 격파하니, 문경에 있는 왜진(倭陣)이 갑자기 진을 풀고 갔다.”고 하는데, 이는 옛날 손빈(孫臏)이 위(魏)나라를 치기 위하여 달려갔던 계책과 비슷하여, 더욱 이치에 맞는[近理] 일이지만 아직은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낭설(浪說,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다.

7월 15일[七月十五日] 기축(己丑)에 단양(丹陽)에 사는 지상인(池喪人, 상중[喪中]에 있는 지아무개)이 서사(書社)에 찾아왔다.

지상인이란 사람은 원영(源永)의 아버지요, 원영은 성재(省齋)의 문인(門人)이다. 그는 자못 재주가 있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 산수(算數)에 밝아 5, 6장(五六章)을 풀어내었다. “산수는 대개 9장(九章, 구장산술[九章算術])인데, 첫째는 방전(方田, 논밭의 측량법)이요, 둘째는 속미(粟米, 米布의 오기. 미전[米錢] · 교역[交易] · 매매산[賣買算])요, 셋째는 쇠분(衰分, 귀천 혼합법[貴賤混合法])이요, 넷째는 소광(少廣, 평방[平方] · 입방[立方])이요, 다섯째는 상공(商功, 공력[工力] · 공정[工程]의 산법)이요, 여섯째는 균수(均輸, 주거[舟車] · 인마[人馬]의 계산법)요, 일곱째는 영뉵(盈朒, 안분비례[按分比例])이요, 여덟째는 방정(方程, 방정식[方程式])이다. ≪아홉째는 구고(勾股, 삼각법[三角法])≫이다.”

양형(量衡, 度量[길이를 재는 ‘尺’과 양을 되는 ‘升’과 衡(저울질)]) 및 탁지(度智, 智는 支의 오식)의 나눔이 몹시 밝아 털끝만치도 어그러지지 아니한다. “『산학지남(筭學指南)』에 이르기를, “황종(黃鍾)에서 양(量)이 나왔고 황종의 관(管)은 그 길이와 넓이로 거서(秬黍, 껍질이 검은 기장)의 중자(中者, 중간 크기)를 담는데, 1200입(粒)이 1작(勺)이 되고, 10작이 1홉(合)이 되며 10홉이 1승(升)이 되고 10승이 1두(斗)가 되며 10두가 1곡(斛)이 된다. 그리고 황종은 형(衡)을 낳는데, 황종이 담는 1200서(黍)가 1작(勺)이 되고 무게는 12수(銖, 100서[黍])가 되며, 양작(兩勺, 2작)인 24수가 1냥(兩)이 되고, 16냥이 1근(斤)이 되며, 10근이 1균(鈞)이 되고, 4균이 1석(石)이 된다. 그리고 황종은 도(度)를 낳는데, 황종의 관은 그 길이로 거서(秬黍) 중자의 90입(粒)을 쌓는데[積], 1입이 1푼[分]이 되고 10푼이 1촌(寸)이 되며 10촌이 1척(尺)이 되고 10척이 1장(丈)이 되며 10장이 1인(引)이 된다. ”

어떤 사람이 노형(老兄)에 대하여 묻고 이름을 유림(孺林, 儒林의 오기)에 천명(擅名)하여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하므로, “이같이 그 젊은 나이에 현달(顯達)하였는가?” 하니, 원영(源永)이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입니까? 돌아보건대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서 부질없이 허명(虛名)만 얻은 까닭은 다른 게 아니라 가정의 교훈을 일찍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때 처음 천자문(千字文)을 받아 종일 글을 읽었으나, 스스로 싫어하지 않고 배고플 때 먹는 밥과 목마를 때 마시는 물과 같이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였습니다. 7, 8세 때 문리(文理)를 대략 통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부터 물이 샘솟아 산을 흘러나와 막힘이[壅遏] 없는 것같이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섭렵(涉獵)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일러 재주가 있다고 하였으나, 나는 실상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재주가 없었습니다.” 이때 그의 아버지가 서사(書社)에 이르러 당세의 일을 논하기를, “우리 조선은 비록 동이(東夷)라고 칭하지만 오랜 옛날부터 예의(禮義)를 숭상해왔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려고 한 일은 모두 조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아조(我朝, 우리 왕조, 곧 ‘朝鮮’을 칭함)에 이르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진선(盡善, 지극히 착함)하고 진미(盡美, 지극히 아름다움)하여 다시 더 보탤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같이 그렇게 유약(柔弱)하여 딴 사람(외국인)에게 제재를 받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인의(仁義)를 숭상한 나머지 거기에 가려진 것이 유약이요, 형벌을 사용한 나머지 거기에 가려진 것은 포악(暴惡)이다. 그 때문에 주(周)나라는 유약함 때문에 망하고, 진(秦)나라는 포악함 때문에 멸망했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통의(通誼, 通義, 보편적으로 통하는 불변의 도리)이다. 또한 사이(四夷, 즉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중에서 조선만큼 강대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막강할 때에는 비록 수 양제(隋煬帝)의 위세와 당태종(唐太宗)의 영무(英武)함으로도 능히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도리어 자그마한[최이(蕞爾)] 일본(日本)과 보잘 것 없는 왜놈의 손아귀에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이 어찌 애통(哀痛)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지 못한 소치(所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공명(孔明, 諸葛孔明)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왜 그런가 하면 대저 가히 할 만하기도 하고 가능하기 어려울 때를 당해서도 힘써 정미롭게 해나간다면, 하늘이 부지(扶持)하여 안전케 해주고자 할 것이므로,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국운(國運)이≫ 크게 비색(否塞, 꽉 막힘)한 것은 실은 연전에 황묘(皇廟)를 철훼하고 서원(書院)들을 파철(罷撤)한 때로 말미암은 일이다. 마치 그릇을 붙들어 잡은 사람이 이미 의지할 데를 잃은 처지와 같으니, 어찌 다시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으리오.

오호라!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그 중국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은, 그 당시에 어찌 제갈공명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있었으랴? 천하의 큰 재능으로 천하의 영명(英明)한 임금을 만나서 천하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행하였으나, 천하를 능히 호령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천운(天運)이 떠났기 때문이요, 영웅에게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오늘날 그런 군주가 없고 그런 신하도 없는데다, 또 그러한 기수(氣數, 천운)의 소관(所關)임을 어찌하리오. 이것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비록 제갈공명이 있더라도 참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7월 16일[七月十六日] 경인(庚寅)에 6월 27일의 문적(文籍, 朝報, 정부[政府]의 관보[官報])을 보았다.

각사(各司)의 관명(官名)을 폐지하고 다만 아문(衙門)이라고 명칭하였다. 내무아문(內務衙門)은 호조(戶曹) 등이 속하고, 탁지아문(度支衙門)은 형(刑, 刑曹) · 한(漢, 漢城府) · 의금(義禁, 義禁府) · 좌우 포청(左右捕廳)이 속하고, 학무아문(學務衙門)은 각국 학어(學語, 외국말을 배움) · 의정부(議政府) · 이조(吏曹)가 속하고, 외무아문(外務衙門)은 각국의 사무가 속하고, 군무아문(軍務衙門)은 병조(兵曹)가 속하고, 공무아문(工務衙門)은 기계와 전환(典圜) 등이 속하고, 농상아문(農商衙門)은 전답(田畓)과 동무(冬務, 겨울에 힘쓰는 일)가 속한다.

또 각 조목(條目)은 다음과 같다.

一.특명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을 열국(列國,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라고 선포할 일.

一.광서(光緖, 淸 德宗)의 연호(年號)를 폐지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세울 일. 후일에 ‘건양(建陽)’이라고 하였음.

一.문무관의 높고 낮은[文尊武卑] 서열의 차별을 폐지하고 다만 품계에 따라 차별을 정할 일.

一.도지(賭地, 소작료)와 뇌물(세금 등)을 거둬들이는 것, 사물(私物)이나 관물(官物)을 토색(討索)질하는 것, 또한 호소할 데 없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을 다루는 것, 체포한[捕捉] 사람 등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관부(官府)나 사가(私家)에서 ≪법에 의하여≫ 신중하게 처결(處決)할 일.

一.부모(父母), 처자(妻子), 형제(兄弟), 친척(親戚), 지구(知舊, 오래 사귄 친한 벗) 사이에 연좌법(連坐法)을 폐지할 일.

一.거상(居喪)하는 제도를 고쳐서 비록 상중(喪中)에 있다 하더라도 공무(公務)와 사삿일(개인일)을 하여도 무방할 일.

一.승려(僧侶)가 서울(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금(禁)하는 법령을 폐지할 일.

一.모든 국사[經國]에 관계되는 일은 비록 천민(賤民)이라도 진실로 의견이 있는 사람은 의당 당국자(當局者, 國機]에게 상서(上書)할 수도 있고 대면(對面, 면회)하여 논의할 수 있게 할 일.

一.의복제도(衣服制度)는 갑신년(甲申年)의 예(例)에 따라 검은색 옷을 숭상할(입을) 일. 그 밖의 것은 위에 이미 기록하였다.

 袁大人討朝鮮詩曰
 爾本無家依我屋
 我屋旣依穿鑿何.
 固知爾本無他計
 我家傾時爾無家.
 顧爾蒼生聽我說
 紛紛疑懼欲何之.
 紛紛道路非仙界
 處處名區世亦知.
 死病其何傷水土
 生方無奈有寒飢.
 在軍日聽東西事
 渠自遑遑作亂離.

 원세개(袁大人)가 조선을 토벌할 때에 지은 시에 이르기를,
 “너흰 집이 없어 우리 집에 의지했는데,
 우리 집에 의지했거늘, 왜 천착하는가.
 너흰 본디 딴 계책 없는 걸 알았고,
 우리 집이 기울 때 너흰 집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창생(백성)들은 내 말 들어라.
 시끄럽게 의구(疑懼)하며 어디로 가려는가.
 어수선한 도로 신선 경계 아니지만,
 곳곳이 명승지임을 세상 모두 알도다.
 죽을병으로 어찌 수토(水土)에 손상되었나.
 사는 방도에는 추위와 배고픔 늘 따르네.
 군중(軍中)에서 날마다 동서쪽 일 들어보면,
 저들 스스로 갈팡질팡 난리 일으킨다네.”

○ 귀양 보낼 장소를 정하였는데, 민치헌(閔致憲)은 홍원현(洪原縣, 咸鏡道)에, 영준(泳駿, 민영준)은 임자도(荏子島, 靈光郡. 지금의 新安郡)에, 응식(應植, 민응식)은 고금도(古今島, 康津縣. 지금의 高興郡)에, 형식(炯植, 민형식)은 녹도(鹿島, 興陽縣. 지금의 고흥군)에, 김세기(金世基)는 영양(英陽, 慶尙北道)에 각각 귀양보내어, 4흉(四凶)을 풀어주었다.

○ 이날 공곡(孔谷)에 사는 신 선생(申先生)이 참외 한 수레를 싣고 와서 보리 9말[斗]과 바꾸어 갔다. 감역댁(監役宅, 휘암(徽菴), 이주승(李胄承)의 집)에서 서울에 보냈던 하인이 돌아왔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저 주서댁(注書宅, 휘암[徽菴]의 숙부[叔父]인 이동재[李東宰]의 집)이 서울에서 50리쯤 떨어진 풍양(豐壤, 양주의 별칭) 땅에 아직 머물러 계시는데, 거기에 딸린 식구[家眷, 家率]가 70여 명으로 하루에 7, 8두의 식량(쌀 등의 곡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주서장(注書丈)이 저(하인의 자칭)를 독촉해 보내면서 이르시기를, “지금 이 사변(事變)은 헤아리기 어려워 잠깐 사이에 어떤 사태가 생길지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편지에 다들 말하기를, “어느 날 다시 가까운 서신을 받아볼지 모르겠다.”고 하니, 참으로 눈물을 흘릴 노릇이다.

7월 17일[七月十七日] 신묘(辛卯)에 일가인[族人] 평숙(平叔)이 절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평숙이 그의 형 기중(紀仲)을 따라가 성주암(聖注菴)에서 글을 읽었다. 이때에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귀가(歸家)하기 3일을 앞두고 이 편지를 썼다고 했다.

7월 18일[七月十八日] 임진(壬辰)에 이종(姨從)인 정운남(鄭雲南)이 찾아왔다.

예전에 족형(族兄)인 경안(敬安, 정경안)이 세상의 시끄러운 일 때문에 덕면(德面)으로 가기 위하여 원현(遠峴)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 종매(從妹)의 남편인 정운남을 만나보고 서로 동반하여 왔다. 그리고 친구인 정경오(鄭景五) 역시 왔는데, 경오는 정운남의 족형으로 가주(佳洲) 삼종형(三從兄)의 고모부이고, 큰댁[大家] 삼종질(三從姪)의 처남이니, 대저 고갈(苽葛) 같은 벗이다. ≪정경오가≫ 지금 비록 최마(衰麻, 부모의 거상) 중에 있으나, 그의 누이동생을 한번 만나려고 온다기에 나도 조문하러 갔다. 정경오가 말하기를, “내 비록 상중(喪中)에 있지만 난리(亂離)가 나기 전에 누이동생을 한번 보려고 왔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의 시사(時事)를 가히 헤아릴 수 없으니, 바로 이 골육(骨肉)간에 서로 이별하는 때이네. 어버이 상중[執喪]에 출입하는 것은 조그만 예절이요, 골육(骨肉)간에 정리(情理)를 펴는 일은 천리(天理)이네. 그 작은 예절에 구애받기보다는 인정(人情)을 펴시게. 차라리 예절을 어길지언정 인정을 펴는 일이 어디에 손상되리요?” 하였다.

7월 20일[七月二十日] 갑오(甲午)에 기중(紀仲)이 성주암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 동안에 『소학차기(小學箚記)』를 저술하였는데, 이날 편지를 써서 여러 승려에게 주었다. 복평(福坪)에 사는 정경한(鄭敬翰)과 탄지(炭枝)에 사는 임은칠(任銀七)과 더불어 옛날에 창업(創業)하고 중흥(中興)했던 임금을 담론(談論)하다가 청나라 임금[主汗]에게까지 언급하였다. 또 당세(當世)의 천하 대세(大勢)를 들어 이야기하였는데, 그 풍류의 고상한 운치가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었다고 했다.

○ 이날 들으니 안보(安保) 왜진(倭陣) 600~700명이 있었는데, 동래(東萊)로부터 내려온 자들이 연달아 뻗쳐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이따금 서로 흐느껴 운다고 하니, 뜻하건대 저 무리들이 자기 고향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그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며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아! ≪여기는≫ 병사가 목숨을 거는 땅인데도 저들이 우리나라의 토지를 엿보고 만 리 바닷길을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렵게 건너왔다. 큰 관(館)과 집을 지어 장구한 계획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마침내 좌임(左衽, 오랑캐 옷을 입게 됨)을 하고 삭발(削髮)을 당해야 되겠는가? ≪아니,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삼척동자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왜놈을 미워하며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고 싶어 하니, 이는 그 백성들을 잃은 것이다. 그 백성들을 잃은 자는 그들의 마음을 잃은 것이니, 백성들의 마음을 잃고서 나라를 얻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씹어 먹고 싶어 하는 백성들로 그들을 몰아내려면 그 누구와 더불어 해야겠는가? 하물며 우리나라는 예의(禮義)가 있는 나라인데, 왜국(倭國)이 ≪우리에게≫ 절대 그럴 리 만무하다. 종당에는 천하의 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왜놈들을≫ 모두 무찔러 죽여 씨도 남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7월 23일[七月二十三日] 병신(丙申, 丁酉의 오기)에 동학도가 신당시장(新塘市)에 모였다.

이때에 동학이 크게 일어나니, 시골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새로 동학에 많이 가입하여, 원수를 갚거나 금전(金錢)도 거두어들여 마음먹은 대로 뜻을 이뤘다. 심한 자는 남의 불알[陰囊]까지 까버렸다. 저들은 날마다 일상적으로 응접(應接)하는 때에 매번 하늘에 고한다. 심지어 기침을 하거나 뒷간에 소변보러 가는 사소한 일들도 다 하늘에 고한다. 그 이른바 초학문(初學文, 초기에 배우는 사람의 주문)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願爲大降)’이라는 18자이다. 혹시 술법(術法)을 쓸 때에는 갑자기 주문(呪文)을 외우고 개구리처럼 뛰는 모양이 가장 볼 만한 광경인데, 이를 ‘강신(降神)’이라 하였다. 그들은 모두 허리춤에 ‘전내패(奠乃牌)’를 차고 있다. 새로 들어오는[入道] 사람은 반드시 예물을 바쳐야 하고[執贄, 폐백을 바치고 제자가 되는 것], 서로 부를 때에는 반드시 접장(接長)이나 도인(道人)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접주(接主) 이하는 육임[六任]을 두었는데, 방(方)마다 이와 같았다. 그의 제자가 선생에게 묻기를, “이것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니, “가히 한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고 답하자, 또 묻기를, “오래오래 하려면 다만 높이 뛰는 것이 기술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초학문을 잘 익히면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가지[獵等, 躐等의 오기] 않아도 다섯 가지 기술이 있으니, 이것에 따라 가르쳐 줄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자, 산내(山內, 성안)와 산외(山外, 성 밖)에 무릇 6,000명이나 모였으니, 대개 한말(漢末) 때 장각(張角)장로(張魯) 같은 무리들이다. 이때에 300명이 신당시장[新塘市]에 모였는데, 사람들이 감히 ≪선생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모두 숨을 죽이고 두려워 엎드렸다. 혹자가 “그들에게 재미(滋味)가 어떻소?”하고 물으니, “도무지 재미가 없다.”고 하였다. 또 몇 가지 기술을 배웠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아직 배우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소.” 하니, 선생의 말씀으로는, “먼저 다섯 가지 기술을 배운 뒤에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기술이 어떤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을 뿐이라.”고 했다. 대개 동학을 한 사람들은 부유한자는 재물을 모두 탕진하였고 가난한자는 얻어먹는다. 처음에는 호남(湖南)의 무리들이 많이 모였으나 시일이 오래될수록 날마다 떠나는 자들은 100명이고, 들어오는 자는 10명이라고 하였다. 후에 단양(丹陽)의 이정의(李正儀)가 동학도를 토벌하다가 오히려 패배당했다. 충주(忠州)의 서상무(徐相懋)가 의병을 일으켜[倡議, 倡義의 오기] 자못 공로가 있었지만, 대저 왜놈들이 동학군을 흩어지게 하였다. 이정의는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처음에 토벌군을 따라가 전주에 있는 동학군[完賊]을 토벌한 사람이다. 그 후 병신년(丙申年)에 나는 그를 만나 사귀었다.

7월 24일[七月二十四日] 정유(丁酉)에 기중(紀仲)을 만났는데 성주암(聖注菴)에서 쓴 편지를 여러 승려에게 주었다.

월악(月岳, 산 이름으로, 충주(忠州)의 동쪽에 있다)의 북쪽에 대덕산(大德山)이 있는데, 봉우리가 빼어나고 골짜기가 깊으며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졌다[叢籠, 葱蘢의 오기]. 그 가운데 자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이름이 ‘성주암(聖注菴)’이다. 내가 일찍이 경인(庚寅)년 겨울 그곳을 지나가는 길에 한 번 관람하였는데, 소쇄(蕭灑)하고 안락하고 편안하여 여산(廬山)에 유람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산방기(山房記)에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여산을 유람하고 아직 보지 못한 글을 모두 읽는 것이다.” 하였다. 이번 여름에 우연히 좋은 주인인 보문(普門)을 만났는데, 계군(季君, 상대방의 아우) 및 집우(執友) 한 사람과 동자(童子) 두 명과 더불어 와서 더위를 피하였다. 응권(應權)과 경호(瓊鎬) 두 승려 또한 역시 본래 살면서[本居, 원적(原籍)] 함께 머무른 사람들이다. 이에 여럿이 살면서 문란하기 쉬울까 근심하여 서로 자뢰(資賴)하여 유익(有益)하기를 기약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유희(遊戱)하고 경쟁하는 습관을 버리고 각각 문자로써 일삼게 하였다. 아침저녁 사이에 송독(誦讀)하는 소리가 자못 양양(洋洋)하여 들을 만하였다. 그러나 오래 들을수록 서로 익숙하여 단속이 점점 해이(解弛)해져 일상적으로 사물을 접할 때에 더러는 서로 자기를 낮추지 않았다. 내가 때에 따라 사귀는 도리를 말하여 깨우쳐 주고 사리(事理)를 논하여 분석해 주면 모두 듣고 받아들였다. 또한 석연(釋然)하여 의심하고 막히는 기색이 없었으니, 어찌 그리 받아들이는 말이 쉬운 것인가? 대개 세 사람은 본래 모두 선한 남자[善男子]인데, 혹 어려서 길을 잘못 들거나 혹은 장성하였으나 곳을 잃고 사문(沙門)에 유락(流落,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삶)하였다. 하지만 선도(善道)로써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광탕(曠蕩)한 데로 나아가 이것을 잃어버린 소치이다. 아, 하늘이 이 백성을 냄에 상도(常道)를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양심이 있지 않음이 없건마는,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골몰(汨沒)한다.

만일 이미 능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그 힘을 이룬다면,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무릇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도리는 능히 참는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이다. 저 사람이 말 한 마디만 해도 성난 눈으로 서로 눈총주고, 한 가지 일이라도 쌓일 때 불평하는 사람은 모두 서로 참지 못한 소치이다. 옛사람의 말에,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 침이 마르기를 기다려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그 마음 씀이 너그럽고 큰데 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이 이런 마음으로 남을 접(接)하면 비단 어지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일을 공경하여 서로 도와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내가 두어 달 사이에 그 마음을 살피고 그 심정을 통한 것이 가히 익숙하다 하겠다. 서로 이별할 때에 만일 ≪권면(勸勉)하는≫ 한 가지 말도 주는 일이 없으면, 역시 서로 친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이에 권면을 이루게 하였다. 만일 이로 인하여 힘을 써서 이학(異學, 異端의 학문)을 버리고 경(經,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상도[常道])으로 돌아오며, 어둠을 등지고 밝은 데로 향한다면, 이것을 ≪나는≫ 마음속으로[區區] 바라는 바다. 내가 이 한 편(篇)을 살펴보건대, 다만 7절(七節)에 그쳤지만 그 명맥(命脉)이 관통하고 권면하는 뜻이 극진하였다. 대개 ‘여럿이 살면 어지럽기 쉬운데 서로 자뢰하여 보탬이 있었다. 군거이난(群居易亂) 상자유익(相資有益)’한 것이 한 편의 강령(綱領)이요, 그 아래 ‘인(忍)’자가 이에 어지럽지 않고 유익함을 이루는 까닭이다. 따라서 제6절은 ‘다만 어지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일을 공경하여 서로 돕는다’는 말로 ‘어지럽기 쉬우니 서로 자뢰해야 한다’는 말을 응하였으니, 이는 문장을 짓는 묘미이다. 혹 다른 사람이 문장 짓는 것을 관찰해 보면,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열매는 맺었지만 익지 않은 것이 있으니, 대저 문장 짓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기중(紀仲)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문장 짓는 일은 반드시 한창여(韓昌藜, 당나라 한유[韓愈])와 같이 하여야 이에 가(可)하오. 한창여의 글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싫증이 나지 않으니, 대개 그 스스로 원기(元氣)가 혼혼(渾渾)하게 있음인가? 그 유래(내력)가 평이함이다. 비유컨대 옥토(沃土) 중에 좋은 댓줄기[竹莖]가 밤낮으로 휴식함과, 우로(雨露)의 윤택함을 입고 뻗어 올라가는 저 왕성하고 튼튼한 기운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육일[六一居士,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별호]의 문장은 곱고 아름다운 갖가지 자태가 있어, 마치 아름다운 화초(花草)가 봄바람의 화기 속에 난만(爛漫)한 빛을 자아내는 것과 같다. 그 형형색색 천만 가지의 부드러운 자태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한다.

증남풍(曾南豐, 증공[曾鞏])의 문장은 회호(回護, 잘못을 덮어주거나 변호함)하고 험하고 높은 것이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함이, 마치 구부러진 고목이 척박한 층층 절벽 위에 우뚝 서 있어, 아무리 더위잡고 오르려고 해도 부딪쳐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반드시 말하기를, “제가(諸家)들의 문장이 모두 한창여의 범위(範圍) 안에 들어 있다.”고 이를 뿐이다.

7월 25일[七月二十五日] 무술(戊戌)에 청인(淸人)이 왜군과 더불어 평양(平壤)에서 전투하였다. 문적(文蹟, 문서와 장부, 文簿)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듣고 기록한 글자일 뿐이다.

당초에 임금이 김만식(金晩植)으로 평양감사(平壤監司, 평안감사의 오기)를 삼고, ≪그에게 분부하기를,≫ “그대는 서울에 와 있는 서병(西兵)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내려가라.”고하였다. 그 지방에 도착하자, 서민들(西民, 西道 백성)이 그를 막아 거절하며 말하기를, “이 감사(김만식을 칭함)는 왜놈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감사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도의 관찰사[本伯]인 민병석(閔秉錫, 閔丙奭의 오기)에게 이르기를, “합하(閤下)께서는 동요하지 말고 아랫사람들이 여쭈는 대로 머리만 끄덕여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에 모두 용맹스럽게 떨쳐 뛰어가며 서로 말하기를, “임금의 칙서가 있고 없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평안도 지역 일대에는 왜놈들을 씨도 없이 모두 무찔러 없애야 합니다.” 하고 즉시 돌멩이로 싸웠다. 기민(箕民, 평안도 백성)은 서쪽 지방으로 금기(金氣, 금의 기운)가 나오는 곳이라.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반드시 돌멩이를 지게문에 매달아놓는다. 출입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마를 맞힌다. 그러므로 조금 성장하면 ≪이마가≫ 금석(金石)보다도 강하여 나무를 부딪혀 튕기면 차라리 나무가 파손될지언정 머리(이마)가 상하지 않는다. 거의 장성할 때에는 강하고 사나움이 비할 데 없고 석전[石戰]에 길들여진다. 그들이 서로 튕길 때면 반드시 머리를 싸매고 정강이를 묶고서 대전(對戰)을 하며, 상대자에게 일러, “눈썹 사이를 맞힌다.”고 하면 그 말과 같이 맞히고, “가슴을 맞힌다.”고 하면 역시 어긋나지 않았으니 그 수법이 이러했다.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통으로 여기며, 꼭 이김[必勝]으로 마음을 삼고 본래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

예전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병사는 서북사람을 쓰라[兵用西北]”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지금 왜놈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할 때에, 청나라사람들이 마침 나와서 세력을 합쳐 왜놈에게 항전(抗戰)하니,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이에 왜놈이 청인과 더불어 화친을 열고 싶어 하였으나 청인이 허락하지 않았다.

○ 처음에 민병석이 평안도 관찰사[箕伯]가 되었을 때, 절절(折節)하고 글을 읽을 때에 전우(田愚)가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전우의 제자가 되었다[執贄]. 그의 답장에 이르기를, “그것을 받아들이면 염치를 손상하고, 그것을 물리치면 불공(不恭, 공손하지 않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평안도의 전역에 문채와 바탕을 갖춘 문학선비들이 많다는 것이 팔도(전국)에 소문이 났다. 또 법령대로 백성을 다스려 한 사람도 범장(犯贓)하지 않으므로, 서도(西道)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았다. 대개 민병석의 생각에는 민씨(閔氏, 척족세력인 민씨)의 세력이 중외(中外, 조정과 지방)에서 기울게 되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글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 후 민씨가 실패할 때에 이르러 ≪민병석은≫ 유독 유배된 죄수를 면하였으니, 이 역시 이기려고 기를 쓰는 마음[勝氣, 강성한 마음]을 두려워해서 인가. 그러나 당(唐)의 무유서(武攸緖,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조카)와 민(閔, 민병석을 칭함)은 일찍부터 ≪관직에서 물러나≫ 아름다움을 오로지 간직했다.

○ 어떤 사람이 동래(東萊)와 울산(蔚山)의 왜놈이 처자식을 거느리고 피란한 자들이 많으므로 그들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너희 나라를 놔두고 이 어지러운 나라에서 피란하는가?”하니, 왜놈이 대답하기를, “지금 우리나라는 군사를 징발하여 청나라사람을 치는데, 그 수효가 몇 천인지 몇 만인지를 알 수가 없다. 만약 본국(本國)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군정(軍丁)에 뽑혀 충당될 것이니, 그것을 면할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 당초에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이 국사(國事)를 맡아볼[監國]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능력 있게 해내기를 바랐다. 이윽고 모두 쓸모없는 사람들을 들어 쓰고, ≪본인이≫ 기쁠 때에는 상(賞)을 내리고 성이 나면 벌을 주었으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승진시켜 주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내쫓았다. 이 때문에 온 나라의 고을 원[邑倅]을 일제히 다 교체하고 자기에게 아첨하고 좋아하는 인척(姻戚)을 뽑아 등용하였다. 이에 인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식자(識者)들은 모두 그가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왜추(倭酋)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나무와 기름을 가지고 궁궐을 에워싸고 쌓되, 사이에 간간히 건초(乾草)를 섞었다. 평양(平壤)이 소란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든 무리가 그쪽으로 달려가고 서울에 남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다만 게이스케는 궁궐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안동(安東)에 사는 도우탄(屠牛坦, 소 잡는 백정. 쇠백정)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휘하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날로 더욱 많아졌다. 도우탄이 말하기를, “만약 내가 맹주(盟主, 맹약을 맺는 단체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요, 재주와 지략이 맹주가 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그를 존중하여 받들 것이오.” 하였다. “필시 대답한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자세히 알지 못한다.” 드디어 대중을 모아 놓고 약속하기를, “만일 청나라 병사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서울에 이르러 패배해 달아나는 왜놈들을 뒤쫓는다면, 왜놈들은 반드시 조령(鳥嶺, 새재)을 넘어 달아날 것이다. 이때 우리 군사가 그들을 맞아 급히 돌격하여 주살(誅殺)해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군이 혹시 안동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일일이 그들을 죽이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군중들이, “옳소” 하고 대답하였다.

7월 26일[七月二十六日] 기해(己亥)에 면화(綿花)를 따면서 시물(時物, 철따라 나는 농작물이나 먹을거리)이 변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면화로써 말하는 것은 이 역시 끝에 가서 다시 합한다는 한 가지 이치를 위한 본받음이다.”

이날 면화를 따다가 날이 저물어 이에 돌아왔는데, 대저 이 밭은 몹시 척박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금년 같은 큰 가뭄에도 지금 오히려 면화를 딸 수 있다. 이 면화는 지난 음력 3월 18일에 갈아 파종했으니, 오늘까지 무릇 134일이 되었다. 지난날 갈아서 파종하던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어제 있었던 일 같은데 지금 이렇게 면화를 따고 있다. 아,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구나.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선행(善行)을 하느라고 날짜가 부족하고 악(惡)한 사람은 악행을 하느라고 역시 날이 부족한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었다. 대개 착한 사람이 선행을 하면서 유독 날짜가 부족한 것은 그 인생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더욱 선행할 것을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요, 악한 사람은 악행을 하면서 또한 오직 날이 부족한 것은 그 인생이 얼마 되지 않음을 탄식하는 것이다. 이에 이르기를, “하루는 두 번 다시 오기 어렵고 한창 때의 나이는 거듭 돌아오지 않는데, 드디어 방탕한 지경에 들어가 그 근심하고 한탄하는 까닭은 비록 동일하지만, 그 선과 악을 행하는 까닭은 거리가 매우 멀도다.

경계하여 분발하게 하는 글[警發篇] “그때에 무더위로 술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흐리고 태만(怠慢)한 기분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글을 지어 스스로 깨우친다.”

옛날에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우(大禹) 같은 성인(聖人)도 이 촌음(寸陰, 짧은 시간)을 아꼈는데, 보통사람[衆人]들에 있어서는 마땅히 짧은 시각[分陰]도 더욱 아껴야 한다. 어찌 다만 편안[安逸]히 놀고 술에 몹시 취하여, 살아서는 당시에 유익함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명성(名聲)이 없을 것이니, 이는 스스로 자신을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사업과 공명정대한 기운[正氣]이 분명히 역사책에 실려 있어 백세(百世) 후에 본 사람들이 경계하여 분발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도공(陶公, 도간을 이름)과 같은 사람은 가히 살아서는 당시에 유익하고 사후에는 명성이 있으니 천지간(天地間)에 헛되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조중봉(趙重峰, 趙憲)이 밤중에 탄식하기를, “하늘이 남자를 내는 것은 대저 어찌 우연한 일이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충직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일월(日月)을 관통하여 만대(萬代)의 충신과 의사(義士)를 격동(激動)시켰으니, 조공(趙公) 같은 사람은 우연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나의 일가인 기중(紀仲)이 또 일찍이 말하기를, “대저 사람이 사물과 더불어 크게 다른 이유는 오행(五行)의 정영(精英)한 기운을 받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을 간직하고 천지 사이에 단 한 번 태어난 것이니, 어찌 두 번 태어날 리가 있으리오. 단 한 번 태어난 몸으로 한평생의 세월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리오? 옛날 군자(君子)는 여기에서 본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살아생전에는 성취한 일이 있었고, 그의 사후에는 명성이 후세에까지 들렸다. 이것이 하늘이 사람을 내어준 본뜻이요, 사람이 세상에 나와 사는 본분(本分)이다. 보통사람들은 어리석어 정영한 기운을 받아 단 한 번 태어난 몸으로 일생을 지내는 동안에 그가 살아서는 뚜렷이 한 일이 없고, 그의 사후에는 명성이 들리는 것이 없다면, 이는 천지 사이에 걸어다니는 송장과 달리는 귀신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람을 내어준 본뜻이며 사람이 세상에 나와 사는 본분이리요? 그러므로 이에 몸을 수양하고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 항상 조심하고 공경함에 날짜가 오히려 부족할 터이니, 기중(紀仲) 같은 사람은 일생 동안에 뚜렷이 한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오호라, 이 여러 군자들은 다 능히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공부와 학문하는 도(道)가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본래 재주가 무디고 기질(氣質)이 탁한데다 또 물욕(物慾)에 가리어, 오늘 들은 것을 내일 기록하기 어렵고 아침에 하려고 했던 일이 저녁에 이미 해산(解散)되고 마니, 스스로 유약하고 우매(愚昧)하여 성취한 일이 없는 줄을 안다. 그러나 만분의 일이라도 가망이 있는 중요한 점은, 남이 한 번 할 때 나는 백 번 노력하고, 남이 열 번 할 때 나는 천 번 노력하는 이 한마디[一節]의 공부에 있다. 만일 말하기를 내 몸이 능히 인(仁)에 거(居)하고 의(義)를 말미암지 못한 것은 힘이 부족하여 스스로 선을 그은 것이니, 이는 또 하나의 염유(冉有, 염구)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 공자께서 이른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이라”하셨고, 맹자(孟子)는 슬퍼하고 탄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그 할 일이 많을 것이니, 만일 대저 묘연(眇然, 약소하거나 미세한 모양)히 좁쌀[稊米, 작음의 비유] 같은 몸이 하늘의 밝은 명[明命]을 받아 본심을 보존하고 착한 성품을 길러내어, 그 오래됨에 이르러선 여유작작하고 효효연(囂囂然, 자득하여 욕심 없는 모양)하여 아무리 말 천사(千駟)를 붙여 주는 한위(韓魏)이더라도 스스로 불만족(不滿足)스러워 이에 부귀(富貴)하여도 넘치지 않고 빈천(貧賤)하여도 절개를 옮기지(굽히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그 얼굴빛에 나타남에 덕스러운 기운이 몸에 가득하고 이목(耳目)과 손발이 말하지 않아도 남의 고량(膏粱, 살진 고기와 좋은 음식)과 문수(文繡, 곱게 수놓은 옷, 직물)에 비유할 만하며, 원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성인의 능사(能事)이다. 만일 대저 총명한 재주와 지혜로써 임금의 조정에 서서 도리(道理)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함이,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고 구름이 용(龍)을 따라가듯이 한다. 어진 이를 선발하고 허물 있는 사람을 빼내버리며, 답답하고 막힌 데를 소통하게 해야 한다. 천하의 지혜를 모아서 ≪임금의≫ 총명을 도와주고 천하의 마음을 순하게 하여 교령(敎令, 임금의 명령)을 베푼다면, 어찌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누가 함부로 난(亂)을 일으키리오? 그런 후에 형벌로 간궤(姦軌, 법을 어기고 난을 일으킴)한 자의 담(膽)을 부수고 덕교(德敎, 도덕과 선행의 교훈)로 서민들[衆庶]의 마음을 감화시킬 것이니, 이것은 요순(堯舜)이 그 백성에게 임금 노릇한 것이요, 이는 천민(天民)의 능사이다. 만일 대저 소방(疎放, 구애 없이 마음대로 함)하여 얽매이지 않고 세상일을 내버려두며[遺落], 결연(決然)히 놓아버리고 천하의 장관(壯觀)을 구한다. 대우(大禹)의 옛 자취를 찾으며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이 남긴 자취를 찾아 개연(慨然)히 천만고(千萬古)와 천만 사람의 지나간 자취와 남은 터를 생각해보면, 나의 마음과 눈을 쾌활하게 하고 나의 가슴[胸襟]을 쇄락(灑落)하게 할 것이니, 이 역시 대장부(大丈夫)의 능사이다.

슬프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저와 같이 일이 많고 저렇게 골몰하며, 비루(鄙陋)하게 형기(形氣, 형상과 기운)에 부림당하여 한결같이 온편(穩便)한 땅을 찾아보지만, 생을 마칠 때까지[沒世, 一生] 이름이 알려짐이 없어도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은 만물(萬物)과 다르다고 하지만 만물과 함께 돌아가는[同歸] 것이요, 초목(草木)과 다르다고 하지만 초목과 같이 썩는[同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대저 비상(非常, 보통과 다름)한 일은 비상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억지로 해서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또한 딴 사람에게 미룰 수 없는 것이요, 스스로 하등(下等)의 지위에 처한 것이다. 스스로 하우(下愚, 기질이 변치 않는 어리석은 사람)가 아니면 오히려 능히 어리석음을 변화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까닭은 무엇인고?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사람의 용모는 가히 추(醜)함을 변화하여 아름답게 할 수 없고 근력[膂力]은 가히 약(弱)함을 변하여 강하게 할 수 없으며, 형체는 짧은 것을 변화하여 길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이미 정해진 본분이라. 가히 고칠 수 없지만, 오직 심지(心志, 마음에 지니는 의지)는 가히 변화할 수 있다. 이 마음은 허령(虛靈, 사심[邪心]이 없이 영묘[靈妙]함)하여 타고난 성품에 구애받지 않는 까닭이다.”『격몽요결(擊蒙要訣)』 입지장[立志章]) 하였다. 나의 심지를 견고하게 하고 나의 기습(氣習, 기질과 습성)을 끊어서 한 번 뛰어올라가 엎드려 하등인(下等人)이 되지 않고, 상등인(上等人)의 일을 힘껏 구한다면 어찌 밝고 강한 이치가 없으랴? 만일 동쪽으로도 갈 수 있고 서쪽으로 갈 수 있는 마음으로써 길이길이 지을 것 같은데도 짓지 못한다면, 서경(書經)에서 이른바 “약(藥)이 어지럽지 않으면 그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문득 다리를 세우는 곳이니, 그 점점 나아가는 공부는 하루아침에 날카롭게 전진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요, 능히 지구(持久)하게 변함없이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 비유컨대, 쇠붙이를 단련하는 사람은 불로 녹이고 물로 담금질하며 망치로 두드려서 가히 보배가 되는 데 이른다. 곡식을 심는 사람은 그 뿌리를 튼튼히 하고 흙을 북돋우며 풀을 제거하여 가히 무성한 데 이르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 공(功)을 백배나 힘써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다. 지금 매양 이 이치를 생각해보면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이 길게 한숨짓고 짧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과 왜놈들은 창을 메고 동도(東徒)는 내란(內亂)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럽고[紛紛] 인심이 두렵고 불안하여[惶惶] 말 한마디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한 걸음도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말을 하고 걸음을 걷는 것도 그 재앙 빛이 눈썹에 떨어질까 두려워 몸 놀릴 곳조차 알 수가 없다. 호랑이 꼬리와 봄철의 얼음[春氷]같이 그 위태로움을 비유할 데가 없다. 바로 이것이 군자가 경서(經書)를 안고 읽을 때요, 호걸이 검(劍)을 짚고 서 있을 때이다. 비록 한 가지 재주의 이름이 있더라도 진실로 등용되어 성공하고 싶지만, 돌아보건대 나는 재주가 부족하고 마침 이 때를 만나 가슴 속에 한 가지 계책도 간직한 것이 없다. 다만 스스로 마시고 스스로 먹으며 낮에는 졸고 밤에는 잠자는 처지이니, 이는 곡식을 축내는 좀벌레가 아니랴? 이는 불난 집의 들보에 사는 제비가 아니랴? 대저 세상일이 이와 같이 혼미(昏迷)하여 앞날을 알 수 없으니 염연(恬然, 편안하고 조용한 모양)히 편안한 것이 옳은가? 때는 가을에 장맛비가 처음 개어 서늘한 가을 기운이 들녘에 들어오니 시물(時物)이 바뀜을 느끼고 사변(事變)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염려한다. 도공(陶公)과 여러 군자들의 말을 생각하여 격려(激勵)하고 스스로 경계를 삼는다.

7월 28일[七月二十八日] 숭정 오갑오(崇禎五甲午) 7월 28일 신축임인(辛丑壬寅)에 연성 후인(延城後人) 이면재(李冕宰)는 쓰노라.

내가 금년 여름에 강목(綱目, 주자강목)을 읽었는데 때가 어지럽고 시끄러워 끝마치지 못한 것은, 역시 아홉 길 산을 쌓는 데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한 탄식이 없지 않다. 이때를 당하여 날로 듣지 못했던 일을 들으니, 만일 문자로 기록하지 않으면 이후에 어떻게 이 사실을 아리오? 이 때문에 사무가 한가한 틈을 타 갑자기 붓을 잡고 기록한 의미가 이 역시 노는 것보다 나은 일이겠지. 무릇 이 글을 짓는 것이 스스로 강목을 모방하려 하였으나, 능하지 못했다고 이를 것이다. 다만 벼리[綱]를 베풀고 조목[目]을 베풀어 법을 삼은 것은, 대개 강은 근엄하고자 한 것이요, 목은 자세히 갖추고자 한 것이다. 그 범례의 조목 진열을 왼편과 같이 붓을 잡고 문자를 기록한 의미를 드러낸 것은,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一. 무릇 일기(日記)에 강과 목을 베푼 것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모방한 까닭이다.

一. 무릇 들은 일을 기록하고 본 일을 기록한 것이 비단 자신의 일에 관계된 것을 썼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과 동업한 것도 썼다.

一. 무릇 옛날과 지금의 글 중에 가히 항상 읽어도 싫증나지 않은 글은 모두 베껴 써서[騰抄, 謄抄의 오기] 잊지 않으려고 한 것은 옥산(玉山)에서 강의(講義)했던 ‘대학설(大學說)’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一. 무릇 국가의 일은 대략 들었던 바의 문적(文蹟)에 의하여 또한 쓴 것은 당시의 소식을[時毛] 밝히고자 한 것이요, 오직 일이 이미 지나간 후에 들은 소문은 권점(圈點, 동그라미) 아래 ‘初(초)’자를 써서 앞뒤를 구별하였다.

一. 무릇 사람의 착한 일이면 그것을 기록하고 악한 일이면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악한 일을 숨기고 착한 일을 드러냄을 주장한 것이다.

오른편 일기의 범례(凡例)는 이는 의당 책머리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래(뒤편)에 있어서 그 체제를 잃었지만, 진실로 뜻에 해로움이 없음인저.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것이 있는데, “백 번 외는 것이 한 번 짓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짓는 글 역시 이치가 들어 있고 체제(體制)를 갖춘 뒤에야 가히 유익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글을 더 지을수록 마음은 더욱 황량(荒涼)해질 것이다.

주석
신당(新塘) 중원군(中原郡) 살미면(乷味面) 무릉동(武陵洞)이다.
목사(牧使) 관찰사(觀察使) 밑에서 지방의 목(牧)을 다스리던 정3품 외직문관(外職文官)으로 병권(兵權)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청군은 왜군이 충주의 가까운 곳 일본군은 1894년 5월 부산과 인천으로 군대를 진주시킨 뒤 요지에 병참소(兵站所)를 설치하고 전선을 가설했는데, 충주 가흥(可興)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괴산의 수안보에 병참소를 두었다.
해랑적(海浪賊) 해적. 중국 연해에는 무수한 해적이 출몰했는데 포악한 수군을 동원해 이들을 격파했다. 산동반도와 황해 일대에는 왜의 해적도 출몰했다.
대(大)’자를 붙여 1894년 6월 개화정부에서 국명인 조선 앞에 대자를 붙여 ‘대조선’으로 부르게 한 조치를 두고 하는 말. 일제는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조선을 청의 간섭에서 배제하려는 뜻을 지니고 황제의 자주국을 표방하게 했다. 대한제국의 호칭도 이 관례를 따랐다.
저헌(樗軒) (1415~1477) 이석형(李石亨)의 별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저헌집(樗軒集)』등이 있다.
나의 토지에서 나는 산물 왕조시대 ‘率土之濱 莫非王土’라고 하여 국토를 왕토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옷과 먹을거리를 임금의 것 또는 임금이 준다는 의식이 있었다.
진작(進爵) ① 진연(進宴) 때에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는 일. ② 제사 때에 술잔을 올리는 일을 말한다.
배맹후(裵孟厚) (1448~147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재지(載之). 1475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훈상(勳賞)을 받았다.
3장원(三壯元) 삼장장원(三場壯元). ‘三場壯元’은 과거(科擧)를 볼 때에 초시(初試) · 복시(覆試) · 전시(殿試)의 시험에 매번 첫째로 합격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예물을 바치는[위지(委質)]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예물을 바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죽은 꿩을 예물로 쓰는 것은 임금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난파(鑾波, 波는 坡의 오기)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한림원(翰林院)을 옮겼던 자리. 따라서 한림원이나 한림학자를 말한다. 한림원은 고려 때에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던 관청. 조선 시대에는 ‘예문(藝文館)’으로 바뀌었다. ‘翰林’은 예문관 검열(檢閱)의 별칭이다.
방면(方面) ①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고 방어를 책임지는 요직(要職)을 말한다. ② 관찰사(觀察使)가 다스리는 행정구역을 말한다.
훈맹(勳盟) 조선시대에, 임금과 공신(功臣)이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단결을 맹세하던 일을 말한다.
통서(通書) 중국 북송(北宋) 중기 송학(宋學)의 시조였던 주돈이(周敦頤)가 쓴 책. 원래 이름은 『역통(易通)』으로, 『역경(易經)』과 『중용(中庸)』에 의하여 도덕을 역설한 책이다.
홍윤성(洪允成) (1425~1475)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수옹(守翁), 호는 영해(領海).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고, 1460년 모련위(毛憐衛)에 침입한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였다.
훈도(薰陶) 덕(德)으로써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道德)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함을 말한다.
안책(岸幘) 두건(또는 冠)을 뒤쪽으로 젖혀 써서 이마를 드러냄. 곧 태도가 소탈하거나 예모(禮貌, 예절에 맞는 모양)에 구애받지 않음을 말한다.
본국 정부(政府)에 전보를 쳤다 최고 사령관은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이었으므로 이 사실은 낭설이다.
염찰사(廉察使) 조선 시대에 염찰(廉察, 염탐)을 목적으로 지방에 파견하던 벼슬아치를 말한다.
왜놈들이 대궐을 침범 1894년 6월 일본군과 오오토리 공사가 경복궁을 강점하고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기무처를 발족시켰다. 이때 일시 흥선대원군을 등장시켰다. 이를 경복궁 강점이라 한다.
결세(結稅, 1결은 100짐)를 부가(附加) 세율을 올리지 말고 예산에 따라 결정하는 것.
전봇대와 철삭(鐵索, 철사로 꼰 줄 즉 전선)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농민군을 토벌하면서 요로에 전주를 세우고 전선을 가설해 무선을 통한 통신 업무를 보았다.
천황씨(天皇氏) 중국 태고시대(太古時代)의 전설적인 인물. 3황(三皇)인 천황씨(天皇氏) · 지황씨(地皇氏) · 인황씨(人皇氏)의 으뜸으로, 12형제가 각각 18,000년씩 왕 노릇을 하였다고 전한다.
민보(民堡) 민보군. 보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을 의미하는데 농민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방어시설을 갖추고 대비하였다. 이를 관군과 구별해 민보군이라 했다. 수성군(守城軍)이란 명칭도 있었다.
장계(狀啓) 감사(監司) 또는 임금의 명을 받들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글로 써서 임금에게 올리던 보고서를 말한다.
왜관(倭關, 倭館의 오기) 조선시대 일본인들의 접대나 숙박 및 이들과 통상을 도모하기 위해 남해(南海)의 개항장과 한양(漢陽)에 설치한 관사(館舍).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인과 조선인 상인 사이에 무역이 행해졌는데, 왜관무역은 1876년(고종 13)에 강화도조약으로 부산 · 원산 · 인천이 개항되고 근대무역체제로 전환될 때까지 계속되어 대왜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원세개가 왜관을 격파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인 낭설이다.
손빈(孫臏) 생몰년 미상.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병법가(兵法家).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쓴 손무(孫武)의 후손. 방연(龐涓)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 병법을 배웠다.
서사(書社) 책을 읽고 시를 짓는 모임을 말한다.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21~1893)의 호. 유중교는 척사위정의 기수인 이항로와 김평묵의 제자.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한 척양척왜를 내걸었다.
구이(九夷) ① 고조선(古朝鮮)의 다른 이름으로, 중국의 동쪽에 있는 이민족(異民族)을 총칭한 말이다.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등을 이른다. ② 현도(玄菟), 낙랑(樂浪), 고려(高麗), 만식(滿飾), 부경(鳧更), 색가(索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를 말한다.
황묘(皇廟)를 철훼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구원병을 보내준 은의를 기리기 위해 1704년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해 신종황제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황제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는데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철훼했다.
서원(書院)들을 파철(罷撤) 흥선대원군은 서원이 당쟁과 비리의 소굴이라 하여 1864년, 전국에 47개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버렸다.
아문(衙門) 탁지아문-농상아문; 종래의 행정기간 조직인 6조를 10아문(衙門)으로 개편했다.
민치헌(閔致憲) (1844~1903) 본관은 여흥(驪興). 조선 말기의 문신. 1894년 고부(高阜,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전국적으로 비화(飛火)될 즈음, 지방관인 경주부윤(慶州府尹)의 외직에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발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민씨척족(閔氏戚族)들이 유배형을 받을 때, 그해 6월 홍원현(洪原縣)에 정배(定配)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응식(應植, 민응식) (閔應植;1844~?) 자는 성문(性文).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長湖院)의 집을 민비(閔妃, 明聖王后)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을 열었다. 수구파를 형성하여 원세개(袁世凱)의 세력을 업고 개화파(開化派) 타도에 앞장섰으며,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에게 자객(刺客)을 보내어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형식(炯植, 민형식) (閔炯植;1859~?) 조선 말기의 친일문신(親日文臣).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충주(忠州)로 피신할 때 호종(扈從)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수립되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에 의하여 남작(男爵)이 되었다.
김세기(金世基) (1852~190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有). 1894년 6월에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민란을 유발했다는 책임을 물어 유배되었다. 1895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나 전라남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5년 2월 전라남도 순찰사인 안종덕(安鍾悳)의 탄핵(彈劾)을 받아 파면되었다.
4흉(四凶) 갑신정변을 주도한 네 인물을 역적으로 몰아 부른 것.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서광범 등. 1894년 일제에 의해 개화정권이 수립된 뒤 사면되었다.
고갈(苽葛) 과갈(瓜葛)의 오류. 오이(瓜)와 칡(葛)의 덩굴은 서로 어우러져 뻗으므로 친척(親戚) 관계를 의미한다.
안보(安保) 괴산에 있는 수안보를 말한다. 이곳에 일본군 병참소를 두고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동할 때 여러 가지를 주선하기도 하고 연락업무를 맡기도 했다.
병신(丙申, 丁酉의 오기) 마땅히 ‘정유(丁酉)’가 되어야 한다. 아래 나오는 일진(日辰)들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초학문(初學文, 초기에 배우는 사람의 주문) 기본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는 초학문자의 주문이요,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8자는 강신문(降神文)인 신명을 내리게 하는 주문으로 되어 있다.
전내패(奠乃牌) 패는 증명의 나무 쪽. 전내(奠乃)의 의미는 미상이나 정(鄭)의 파자로 많이 표현된다.
육임[六任] 여섯 가지 소임으로 교장 · 교수 · 도집 · 집강 · 대정 · 중정. 집강소 기간에는 성찰(省察) · 동몽(童蒙) 등이 포함되기도 했다.
높이 뛰는 것 충청도 인내에 사는 이운규(李雲圭)는 김일부 · 최제우 등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최제우는 검무(劍舞), 김일부는 영가무도(詠歌舞蹈)를 수도의 요체로 삼았다 한다. 검무는 칼을 들고 검가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영가무도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고 뛰는 의식을 행했다.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장각(張角) (?~184) 후한(後漢) 때 거록(鉅鹿, 河北省 平鄕縣) 사람으로, 황건적(黃巾賊)의 난의 우두머리이다. 후한 말기의 종교결사로서 후대의 도교(道敎)의 원류의 하나인 ‘태평도(太平道)’의 창시자이다.
장로(張魯) (?~?) 한중(漢中)의 영주. 패국 풍(沛國豐) 사람. 자는 공기(公祺). 조부 장도릉(張道陵)이 창시한 오두미도(五斗米道, 초기 도교의 종교단체)를 계승하였다.
의병을 일으켜[倡議, 倡義의 오기] 대의(大義)를 창도함. 의병(義兵)을 일으킴을 말한다.
소쇄(蕭灑) ① 깨끗하고 상쾌함. ②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 고상함
여산(廬山)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동쪽의 린퉁[臨潼]에 인접해 있는 산을 말한다.
보문(普門) 불교의 진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을 ‘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門’이라고 한다. 보문은 보살이 일체 성덕을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에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집우(執友) ② 뜻을 같이하는 벗. ② 아버지의 친구.
양양(洋洋) ① 광대(廣大)한 모양. ② 물의 성한 모양. ③ 많은 모양. ④ 충만(充滿)한 모양. ⑤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양. ⑥ 만족해하는 모양. ⑦ 흉중(胸中)에 걸림 없이 편한 모양.
사문(沙門)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오로지 도를 닦는 사람. 곧 출가(出家)한 중을 달리 이른다.
광탕(曠蕩) ① 넓음. ② 넓고 큼. 또는 큰 은덕(恩德). ③ 너그럽게 용서함을 말한다.
김만식(金晩植) (1834~1900) 조선 말기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호는 취당(翠堂). 1880년과 1882년에는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 박영효(朴泳孝)의 부사(副使)로서 수행하였다. 1883년 8월 17일 신문발간의 책임을 맡아 박문국(博文局)을 신설하고, 그해 10월 30일 『한성순보(漢城旬報)』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서병(西兵) 평양에 두었던 기영병(箕營兵). 1894년 봄 중앙군을 전주 등지로 내려보내 농민군 토벌에 투입할 때 평양의 수비병력을 서울로 불러 경복궁 수비를 맡겼고 이들 군대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할 때 저항했다.
민병석(閔秉錫, 閔丙奭의 오기) (1858~19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시남(詩南).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척족(閔氏戚族)의 대표.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1910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1939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의 부의장을 지내는 등 친일활동을 하였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서울 광화문의 ‘고종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썼다.
석전[石戰] 서북인들은 돌로 머리를 단련해 박치기 수법을 배웠다 한다. 박치기의 유래.
청인이 허락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아산 등지에서 승승장구했고 평양회전에서 일대 승리를 하고 압록강과 요동반도까지 진출해 승리했다. 이 사실은 모두 낭설이다.
절절(折節) ① 자신을 낮춰 남을 섬김. ② 평소의 자기 생각을 바꿈.
전우(田愚) (1841~1922)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간재(艮齋).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882년 여러 관직 등에 제수를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60책), 『간재사고(艮齋私稿)』(30책) 등이 있다.
범장(犯贓) ① 관리가 뇌물을 받음을 말한다. ② 장물죄를 범함을 말한다. ‘贓物’은 부정한 수단으로 취득한 재물을 말한다.
무유서(武攸緖 당무후(唐武后, 측천무후)의 형의 아들로, 품성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었다. 그는 무후가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숭산(嵩山)에 숨어서 일생을 보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였으나, 고종이 죽고 난 후 두 황제를 거쳐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측천황제(則天皇帝)라 칭하며 16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여황제다.
군정(軍丁) ① 군사나 병졸. ② 군역(軍役)에 충당되는 장정.
국사(國事)를 맡아볼[監國] 태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국사를 보는 것을 말한다. 또는 임금의 유고 때에 권신(權臣)이나 근친(近親)이 섭정하는 것을 말한다.
도간(陶侃) (257~332) 자는 사행(士行). 장시성[江西省] 포양[鄱陽] 출생. 중국 진(晉)나라 때의 무장.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 영가(永嘉)의 난 때, 무창(武昌)을 지켜 공을 세웠고, 명제(明帝) 때는 왕돈(王敦)의 반란과 소준(蘇峻)의 변(變)을 평정하여 통군(統軍) 40여 년 동안 많은 공을 세웠다.
대우(大禹) 성은 사(姒)씨. 이름은 문명(文命). 물과 흙을 다스려 구주(九州)를 개척하여 홍수를 극복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하백(夏伯)에 봉해져 ‘백우(伯禹)’ 또는 ‘하후씨(夏后氏)’라고 불렸다.
조중봉(趙重峰, 趙憲) (1544~1592) 본관은 배천(白川). 호는 중봉(重峰).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탈환하였으며,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으로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저서로 『동환봉사(東還封事)』등이 있다.
염유(冉有, 염구) (冉求;B.C.522~?) 노(魯)나라 사람. 자는 자유(子有) 또는 염유(冉有). 화술에 능하여 상대를 부드럽게 설득할 줄 알았으며, 유능한 행정가이자 용맹스런 장수였다. 나중에 공자(孔子)를 떠나 계씨 밑으로 들어갔는데, 세금 제도로 공자와 계씨가 의견이 맞섰을 때 계씨를 도와주다 스승인 공자에게 이단으로 공격당했다.
한위(韓魏) 진(晉)나라의 경(卿)인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의 집안으로, 대대로 부귀(富貴)를 누리는 명문세가(名門勢家)를 말한다.
천민(天民) ① 천리(天理)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곧 현인(賢人)을 이른다. ② 보통 사람을 칭한다. 평민(平民). ③ 하늘이 낸 백성.
사마천[司馬遷] (B.C.145?~B.C.86?)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며 천문관. 자는 자장(子長). 용문(龍門, 韓城縣) 출생. 『사기(史記)』의 저자.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이다.
쇄락(灑落) ① 흩어져 떨어짐. ② 마음이 소탈하고 대범함. ③ 마음이 잘 융화됨.
대장부(大丈夫) 기개(氣槪)와 절조(節操)가 있으며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말한다.
봄철의 얼음[春氷] 봄철의 얇은 얼음. 아주 위험하거나 없어지기 쉬운 사물을 비유하여 말한다.
이면재(李冕宰) 본관은 연안(延安). 조선 말기에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 북노리(지금의 한수면 북노리)에 살았던 선비. 동학농민군에 관한 『갑오일기(甲午日記)』등을 쓴 저자임. 저자의 연대와 이력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다.
강목(綱目, 주자강목) (朱子綱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으로, 『통감강목(通鑑綱目)』또는 『강목(綱目)』이라고도 한다. 주(周) 위열왕(威烈王) 23년(B.C.403)에서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6년(959)까지의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을 주자(朱子)가 59권의 강목체로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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