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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정운경가 동학고문서
일러두기

동학을 물리친 사실을 적은 일기[日記 斥東事實]

읍(邑)의 동쪽 10여 리(里)쯤의 현곡리(玄谷里)에 이성종(李聖鍾)이란 자는 바로 성두한(成斗漢)의 조카사위인데, 현곡리에 접(接)을 설치하였다. 그 사람됨이 사납고 교만하여 여러 가지 악행(惡行)이 당시의 ○○배(○○輩)보다 더하였고, 요사(妖邪)와 음모가 두한(斗漢, 성두한)보다 갑절이나 되었다. 또한 이주팔(李周八)이란 자는 바로 성종(聖鐘)의 숙부(叔父)이다. 두한이 포학(暴虐)을 자행하고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것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의지하였다. 그밖의 경내(境內)에 접소(接所, 동학이 각 지역에 설치한 조직)라고 하는 것은 요괴(妖怪)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그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명목상 접(接)을 설치한 것으로 애초에 저들의 음모를 알지 못했으니,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서면(西面)의 선비 정운경(鄭雲慶)은 성두한의 음모를 알고 그것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고 분노하였다.

9월 3일에 안교관(安敎寬)·어윤승(魚允升)·권진(權璡)·엄성오(嚴星五) 등과 상의하여 사통(私通, 통문)을 내었다. 그 통문(通文)에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바닷가 외진 곳에 땅이 협소하더라도 소중화(小中華, 중화의 문명을 보존한 작은 나라)로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불리는 것은, 인륜(人倫)이 위에서 밝고 교화(敎化)가 아래에 행해져서 읍(邑)마다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에 비유되고, 그 도(道)는 모두 정자(程子, 程顥와 程頤)와 주자(朱子, 朱熹)를 스승으로 삼기 때문이다. 병자(丙子, 1876)년의 화의(和議)와 갑신(甲申, 1884)년의 변고에 인륜이 끊어지고 풍속이 무너져서 3천리 문명(文明) 국가가 대역(大逆, 역적)에게 망하려 하고, 오백년 동안 교화(敎化)를 입은 백성이 모두 어육(魚肉, 짓밟혀 결딴이 남)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진실로 병이지심(秉彛之心,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떳떳한 법도)을 가진 자라면 어찌 편하게 앉아서 그것을 보겠는가?

『춘추(春秋)』(공자가 지은 책)에,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는 사람마다 잡아 죽이되 사사(士師, 禁令과 형벌을 맡은 관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서 조금도 의심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은 안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입을 다물어 말을 하지 않고, 밖으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두려워서 거론하지 않는다. 여러 임금들이 키워 남긴 은택이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한 근래에 동학(東學)의 무리가 이름을 의병이라 하고, 겉으로는 척화(斥和)를 의탁하고 안으로는 반역을 도모해서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해치며, 국가의 무기를 훔쳐 반역의 정형(情形)이 이미 드러났으니 어찌 통분을 견디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필부(匹夫, 보통 사람)지만 임금의 교화를 입은 사람들이다. 매우 화가 나서 힘이 적고 모자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에 통문을 낸다. 바라건대 여러 유생들은 일제히 모여 의리(義理)를 강구하여 밝히고, 저 역류(逆流, 반역의 무리)를 쓸어 버려 무너진 기강(紀綱)을 부지(扶持)하고 종사(宗社, 종묘사직)를 편안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고 하였다.

9월 6일에 정운경(鄭雲慶)과 권진(權璡)이 읍에 들어가서 먼저 일을 맡은 아전 몇 명을 만나 동도(東徒)를 물리칠 계획을 말하고, [동헌에] 들어가서 지부(知府, 수령)를 뵙고 동도를 물리칠 방책을 아뢰었으나 수령이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물러나서 유생 허만(許樠)과 서로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수령이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의 효유문(曉諭文)을 받들어 직접 마을을 다니며 소상하게 대면(對面)해서 타일렀으나 아! 저 비도(匪徒)는 오히려 뉘우칠 줄을 몰랐다.

9월 18일에 허준(許焌)이 그 이웃 마을의 유생들과 먼저 봉기(蜂起)를 하였고, 정운경 등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한밤중에 현곡(玄谷)에 이르러서 접소(接所)를 부수고 불태웠다. 그들의 거괴(巨魁, 큰 우두머리) 4명을 잡아 본 현(縣)의 수령에게 바쳤으나 수령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들은 바로 이성종(李聖鍾)·이주팔(李周八)·박명수(朴命秀)·김창후(金昌后)이었다. 이 네 명의 적(賊)들은 사람들을 모아 험준한 곳에 근거하여 여러 가지 나쁜 일을 저질렀는데, 그 끝이 없었다. 그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 중에 상찬(賞讚)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에 경내의 접소(接所)라고 하는 것이 모두 불에 타고 파손되었다.

9월 20일에 각기 해산하여 집에 돌아갔다.

아! 한 번 이기거나 한 번 지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흔한 일이다. 이때에 두한(斗漢)의 무리들이 일본군에 쫓겨 단양(丹陽)에 피해 들어와서 마을을 불 지르고 바로 관아를 침입하였다. 수령 송병필(宋秉弼)이 도망을 가니, 읍(邑)의 마을을 짓밟고 무기를 빼앗아 제천(堤川)으로 진군(進軍)하였다. 제천수령 김건한(金健漢)이 마침 순영(巡營, 감영)에 가서 관아를 비운 틈에 창고의 무기를 어려움 없이 가져가서 적의 기세가 더욱 대단해지고 사람들이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9월 22일에 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어 경내(境內, 永春)를 침범하러 왔는데, 작은 읍의 형세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수령 박주진(朴周鎭)이 가까운 아전 몇 명과 함께 강을 건너 도망을 갔다. 다시 무기를 빼앗아 아전들의 집을 파괴하거나 마을 사람의 집을 불태웠고, 재물과 비단 및 옷 등의 물건을 빼앗아 관동(關東)으로 들어갔다. 끝내 임금의 군대와 일본군에게 토벌을 당했으나 그 거괴(巨魁)를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주석
화의(和議) 강화에서 맺은 한일수호통상조약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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