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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정운경가 동학고문서
일러두기

우리 조정이 천명(天命)을 받은 지 500여 년 동안 여러 임금이 키워 준 은택을 두텁게 받았고, ……(독해 불능)…… 커다란 집에 비단방석 위에서 계옥(啓沃)하고 보필하며, 요순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주(州)와 향(鄕)의 학교 안에서 읽고 익히며, 악기를 타고 노래하는 것은 오직 공자(孔子)를 배우기를 원하여 문물이 빛나고 번성하였기에 평소에 소중화(小中華)로 불렀다. 태평성대가 오래되어 그 사이에 재앙이 싹을 틔웠다. 지난 경신(庚申, 1860)년에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가 멋대로 반역의 마음을 품어, 도참(圖讖, 앞날의 길흉을 예언하는 술법)을 주장하며, 하늘의 책[天書]이라고 부르고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무리를 모아 난리를 일으켰다.

다행히 말없이 도와주시는 조종(朝宗)의 영령(英靈)에 힘입어 큰 우두머리는 죽였으나 강아지풀[稂莠, 나쁜 무리들]은 없애지 못하였다. 그 남은 무리들 중에 최시형(崔時亨, 동학의 2대 교주) · 강시원(姜時元) · 유시헌(劉時憲) · 김시찬(金時贊) · 전시명(全時明) · 김중삼(金仲三) · 성두한(成斗漢) · 김선달(金善達) 등은 성명(姓名)을 바꾸고 사방으로 몸을 숨겨 동학도인(東學道人)이라고 칭하며 ≪사람을≫ 선동하고 꾀어 주문(呪文)을 주니 인민(人民)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내치지를 못했고, 조정은 감싸서 타이르며 토벌하지 않았다. 완악한 저 비류(匪類)는 이것을 믿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며 편하게 거괴(渠魁)를 위하여 대궐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1~2명의 신하가 상소를 올려 잡아서 다스리자고 하였으나 임금께서 저들도 조종(朝宗)이 기른 백성으로 특별히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잘 타일러서 그만두고 떠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뉘우치지 못하고 보은(報恩)에 모여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었다. 순무사(巡撫使) 어윤중(魚允中)도 임금의 어질고 아끼는 마음을 알아 토벌하여 죽이는 일을 하지 않고 다만 어루만져 다독거리는 일만 하였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난폭한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아서 횡포가 날로 심해졌다. 올 봄(1894년)에 마침 고부민란으로 인하여 기세를 타서 난리를 일으키니 관리(官吏)가 막지 못하여 인민(人民)이 흩어졌다. 이에 임금께서 크게 화를 내어 군대를 일으켜서 정벌을 하니, 동쪽으로 도망을 가고 남쪽으로 달아나서 모두 토벌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나라에 일이 있어 토벌을 나간 신하가 군사를 돌려 바로 돌아오니, 저들이 그것 때문에 다시 ≪사람들을≫ 모았다. 아! 저 최시형과 성두한의 무리는 때를 얻었다고 여겨 사방에 접(接)을 설치하고 공갈과 협박으로 사람마다 입도(入道)하게 하였는데, 입도한 자는 높여 주었고 나간 자는 학대하였다. 다른 사람의 돈과 곡식을 빼앗고, 남의 산소를 팠으며 남의 집을 불 지르고 남의 아녀자를 겁탈하였으며, 말·노새·총·창 등의 물건을 빼앗았고, 마침내 장리(長吏, 수령)를 죽이고 무기를 훔치는 데에 이르렀다. 겉으로 척화(斥和, 조약을 반대한다)를 의탁하고 은밀히 반역을 도모해서 반란의 정형(情形)이 이미 갖추어졌다.

임금의 나라에 나서 쌀을 먹고 비단옷을 입은 자라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겠는가? 주관(周官, 周禮)의 법에, “잘못된 도(道)로 사람을 미혹하면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춘추(春秋)』(공자가 지은 책)의 필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잡아 죽이되 사사(士師, 형벌과 금령을 맡은 관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있어 죽이는 것이 마땅하고 의리에 있어서도 죽여야 한다. 우리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성(德性)을 특별히 베풀어 글로 타이르고 반복하여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접(接)을 그만두고 안도(安堵, 사는 곳에서 평안히 지냄)하게 하였는데, 진실로 반 푼 정도의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을 지녔다면 누구나 보고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역류(逆類)는 도리어 크게 떠벌려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일본인이 한 것이고 국태공이 명령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행패를 저지르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자가 있었겠는가?

본 읍의 선비인 정운경이 의리상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허준(許焌) 및 권진(權璡) 등과 몰래 연락하여 유생을 모아 경내(境內)의 접소(接所)를 불태우고 거괴(巨魁) 4명을 죽였다. 그리고 바로 각자 돌아갔다. 이때에 성두한(成斗漢)의 무리가 일본군에게 쫓겨 단양으로 피해 들어와서 단양의 무기를 빼앗아 제천으로 들어갔다. 다시 군기(軍器)를 빼앗으니 적의 기세가 점점 횡포해졌다. 네 갈래로 군사를 나눠 본 읍의 경계(境界)를 침범해 오는데, 유생의 맨손, 빈주먹으로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는가? ≪저들이≫ 정운경의 집을 부수고 허준의 집을 불태웠으며, 연이어 10여 채의 집이 파괴되어 부녀자가 도망을 가고 피해가 매우 심했다. 끝내 현(縣)의 아전을 핍박하여 무기를 빼앗는 데에 이르렀으며 파괴된 아전들의 집이 5채나 되었다. 일개 읍으로서 감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다시 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의 3개 읍의 무기를 빼앗고, 평창에 주둔하여 군사를 풀어 사방을 약탈해서 거두어들이니 지나가는 곳마다 전멸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사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찾아내어 잡고 토벌케 하였다. 일본군이 뒤를 이어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거처를 불태워서, 대군(大軍)이 이르는 곳마다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는 탄식이 없는 데가 없었다. 이 영춘(永春) 일개 읍의 백성이 모두 귀화하고, 다행히 죽음을 면하는 지경이 된 것은 정운경과 허준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동도(東徒)를 물리친 힘이 아니겠는가?

주석
계옥(啓沃) 나의 마음을 열어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곧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에게 고한다는 뜻이다.
최시형(崔時亨, 동학의 2대 교주) 원문에서 최시향(崔時享)으로 되어 있으나 최시형을 말한다.
대궐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 계사년 곧 1893년 2월 소수(疏首) 박광호 등이 광화문 복합 상소를 한 일을 말한다.
보은(報恩)에 모여 계사년 곧 1893년 3월에 벌인 보은취회를 말한다.
신하가 군사를 돌려 바로 돌아오니 홍계훈이 장위영병을 이끌고 전주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서울로 귀환한 사실을 말한다.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는 탄식 옥석구분(玉石俱焚). 무고한 사람들이 구분되지 않고 함께 희생을 당하는 사태를 두고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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