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松湖, 호) 권공(權公)의 이름은 진(璡)이고, 자(字)는 진옥(進玉)이며, 안동(安東, 본관) 사람으로 태사공(太史公)의 후손이다. 옛날 신라와 고려 때에 명성이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조선에 들어와 마애공(磨崖公)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예(輗)이다.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변고를 맞아 상소를 올려 그들을 배척하였고, 그 뒤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낙동강 가에 물러나서 다시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의복)을 입다가 죽었다. 임금의 명에 따라 소나무를 읊은 시가 있는데, 그 시구(詩句)에, “높이 솟은 꼿꼿한 줄기 석문(石門)에 그늘을 지우고, 추운 날씨에 동량(棟梁, 대들보)의 몸을 지킨다.”고 한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공의 절개로 여겼는데, 바로 공의 10대 조상이다.
마애공 이후에 2대(二世) 뒤의 선조는 이름이 극(言亟)인데, 임진왜란 때에 주부(主簿)로서 충무공(忠武公, 시호) 이순신(李舜臣)에게 종사(從事)하여 충무공이 순절(殉節)하는 날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니 그 절개가 탁월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 당시 절개를 표창하는 날에 누락되었다가 지난 임진(壬辰, 1892년을 가리키는 듯)년에 비로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어찌 앞에서는 형적이 인멸되었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것인가? 앞서 없어진 것은 그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등문(登聞,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보고하는 것)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중에 드러난 것은 하늘의 이치가 존재하여 뛰어난 절개를 끝내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公)에게는 8세 조상이 된다.
공의 품성은 온화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낯에 드러내지 않았고, 비록 공부에 뜻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 의지할 수가 없었다. ≪벼슬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어 공거문(公車文, 과거공부)에 힘썼으나 운명이 많이 어긋나서 여러 번 과거시험에 낙방을 하였다. 뒤늦게 크게 깨달아 산에 들어가서 문을 걸고 애초의 계획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비(東匪)가 창궐하는 때를 만나 정운경(鄭雲慶) 및 허준(許焌) 등과 통문(通文)을 내어 유생을 모아 경내(境內)의 동도(東徒)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거괴(巨魁) 4명을 죽인 뒤에 돌아왔다. 언제나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다. 을미(乙未, 1895)년의 변고에 동지(同志)들과 오랑캐나 짐승이 되지 않기로 맹서를 했으나 계책을 낼 줄 몰라 강개(慷慨)하여 흐느끼기도 하였다.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일으켜 따라가서 소모관(召募官) 서경암(徐敬菴)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영남과 호남 지역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다. 풍기(豊基)의 의병이 패했을 때에 마침 친척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패배한 소식을 듣고 갑자기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 주장(主將, 대장)이 반드시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지 않고 순절할 터인데 내가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고 한 뒤에 마침내 병든 몸을 말에 의지하여 바로 싸움터로 나아갔다. 저들에게 잡혀 적을 꾸짖고 죽었는데, 그 날이 바로 병신(丙申, 1896년)년 4월 20일이었다. 저들처럼 완악한 자들이 그가 죽음에 직면하여 두려운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진정 의로운 선비임을 알아 풍기읍의 사람으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게 하였는데, 군대에서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죽은 자는 그 집안사람을 기다려서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모셔 가서 장사를 지내는 것)을 하게 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에 감동을 한 것이 아닌가?
공에게는 자식 1명이 있으나 아직 어리고 조카가 있으나 너무 가난하였다. 선비 정해훈(鄭解薰)은 일찍이 공에게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인데, 공의 문인(門人)에게 통문을 내어 재물을 모아 고향에 모셔 온 날이 바로 이 해 10월 11일이었다. 그 뒤에 의병이 동쪽으로 들어가고 북쪽으로 가서 공의 죽음을 아는 자가 1명도 없었고, 지금 5년이 지나서는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공이 평소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공부에 부합되는 것인가?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남에게 있지 어찌 공에게 있겠는가? 또한 주부공(主簿公, 공의 8대 선조)의 앞서는 형적이 인멸되었다가 나중에 드러난 것과 같은 사례를 보는 것이 아닌가? 친구 정운경(鄭雲慶)이 대략 소문을 적어 입언군자(立言君子, 후세의 훌륭한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