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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해영비요전말
일러두기

1894년 10월 초6일 [甲午十月初六日]

동학의 무리 수 만명이 해주의 서쪽 취야시(翠野市)에 모였다고 하니 호막(戶幕) 이명선(李鳴善)과 수교영리(首校營吏)를 보내어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무리들이 민폐가 되는 몇 가지 사항을 글로 써서 단자(單子)를 올렸는데, 그 중에 “동학의 무리를 금지하는 명령을 완화시키고 묻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말이 있었다. 민폐(民弊)와 읍막(邑瘼)은 지금 통렬하게 개혁하겠으나 동학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명령으로 이미 금지하여서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물러나 흩어져 생업에 종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각자 말없이 물러나 흩어졌다. 그런데 □□□□에 이르러 흩어진 자들이 다시 모여서 먼저 강령현(康翎縣)으로 들어가 수령을 모욕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해주감영에 들어왔다.

일이 매우 급박한 가운데 영속(營屬)중에 내통한 자들이 모두 일시에 들어와 공당(公堂)을 부수고 마구 총을 쏘아 무기를 빼았고 각종 문서를 태웠다. 중군(中軍)·판관(判官)·막비(幕裨) 등이 모두 묶여 구타를 당했고, 순찰사(巡察使) 역시 잡혀서 하당(下堂)으로 끌려왔는데 머리와 팔뚝 그리고 다리에 상처를 입어 해괴망측 했다. 또한, 심하게 약탈을 당해 고을의 창고와 백성들의 재산이 한꺼번에 텅비어버렸다. 순사(巡使), 감사가 영노(營奴)의 보호를 받아 영노청(營奴廳)을 빠져나왔는데 책과 환구(宦具), 의복과 수구(壽具) 등이 다 없어졌고 다만 보존한 것은 도장과 허리띠와 금궤뿐이었다.

동학무리들이 사방에서 지켜 물샐 틈이 없었다. 보고해야 할 일이 매우 급하지만 형세상 어찌할 수가 없어 틈을 타 몇 줄의 편지를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보내니 본가에 전하여 열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심부름하는 아이가 돌아올 때에 절대 성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곧바로 금천병참(金川兵站)으로 가서 ≪편지가≫빨리 도달할 수 있도록 청하게 하였다.

초 5일 [初五日]

1명의 영리가 □□□□□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들으니 갑자기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밤을 무릅쓰고 황급하게 초 4일에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해주영에서 묶어 보낸 편지를 보고 금천으로 향하여 사람을 모아 한문과 한글로 써진 방을 성안의 길가에 몰래 붙였다. 또 격서를 도내(道內)의 여러 고을에 전했다”라고 하였다.

방시문 [榜示文]

해주성 안에 적비(賊匪)들에게 유시하노라! 아아, 어찌 차마 이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너희 역시 이성(彛性)의 법칙을 거칠게나마 가지고 있으면서 분수를 넘어 기강을 어기고 윤상(倫常)이 어지럽혀진 것이 이렇게 심하겠는가. 우리나라가 숭상하는 학문은 곧 요순(堯舜)·문무(文武)·주공(周公)·공맹(孔孟)의 도이다. 500년 조종이 숭정벽이(崇正闢異)하여 교화하기를 깊은 인(仁)과 후덕한 은택(恩澤)이 또한 물들어 습속이 되었다. 이른바 동학의 학문이라는 것과 도(道)라는 것은 곧 괴이하고 허튼 소리이며 미쳐서 미혹하는 소리이니 윤리도 없고 조리도 없으므로 이미 우리의 도가 아니다.

오호라 어찌 차마 너희들을 이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대신과 많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직분을 수행함에 분발하고 힘을 쓰며 대개 나라를 바로 세우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좋은 방법을 강구하여 개혁하기를 모조리 쓰지 않는 방법이 없었다. 아! 양호(兩湖)의 비류(匪類)들이 위세를 떨쳐 모질게 구니 임금께서 성을 내시고 온 조정이 근심하여 분하게 여기니 이에 원수(元帥)에게 관아를 설치하고 장수에게 정벌토록 명령하였다.
양호의 부근에 장수가 도착하여 모두 파죽지세로 적을 와해시키니 혹 배도(背道)하거나 귀화하여 군사를 풀고 애걸하면서 길옆에 엎드려 있는 자들을 용서해 주었다. 포로를 잡아 바친 우두머리에게는 관직을 주고 포상하였고 모여 복종하지 않는 자는 총칼로 죽여 들판에 시체가 쌓였다. 또한 충의지사를 곳곳에서 불러 모아 승전보가 눈처럼 흩날리고 적(賊)의 형세는 날로 무너졌다.

보은(報恩)의 최시형(崔時亨)은 형벌이 두려워 도망가 숨었고 남은 무리 10만은 짐승처럼 흩어지고 귀순할 따름이라는 등의 말을 너희들은 어찌 듣지 못하였는가. 오호라 너희 무리를 이에 비유하겠는가.

본도(本道), 황해도의 관찰사(觀察使)는 곧 나의 부친이다. 나이가 80에 가깝고 힘이 아직 강하여 조정에서 늙었다고 물리치지 않아 중한 임무를 맡아 험난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다. 백발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어 감영에 일을 본 지 10년 이래로 가렴조(加斂條) 일체를 감해준 것이 75,000금(金)이었고 여러 읍에서 더 거둔 세금을 바로 철저하게 조사하고 아울러 깨끗하게 혁파하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어찌 알지 못하는가.
지금 총을 쏘고 돌입하여 무기를 실어가고 선화당(宣化堂)을 부숴 문서를 태우고 판관과 중군과 막비를 끌고 다니며 못하는 짓이 없고, 순상(巡相)을 끌어내어 칼과 몽둥이를 교대로 가하여 중상을 입어 피가 흐르고 곤욕과 협박이 끝이 없었다. 순상(巡相)이 어찌 너희들을 저버려서 거리낌 없이 국조(國朝)이래 없었던 괴이한 난동을 부릴 수 있는가.

오호라! 너희 무리들은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부모님의 곁을 떠난지 30삭(朔)이나 되었다. 어렴풋이 해주의 변을 듣고 황급히 올라오느라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밤새 도착하여 이같이 망측한 변괴에 대해 듣기 시작하니 너무 놀라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듣자하니, “너희들이 우리를 개화당으로 여겨 죽이려고 생각한다”라고 하니 아! 이 또한 괴이하구나. 나는 떠들썩하게 쟁론할 수는 없지만 비록 이번에 성에 들어가더라도 생각컨대 우리 부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너희들 손에 죽어 불충불효의 혼이 될 것 같다.

오호라! 너희 무리가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조정에 보고하려 돌아갈 때에 조정에서는 황해도가 적의 손에 들어간 것을 반드시 부당하게 여겨, 하루도 되지 않아 경군(京軍)을 모아서 크게 진멸할 것이니 경군이 올 때에 너희들이 과연 흩어지라는 명령에 대항하고 저항할 수 있겠는가. 당초에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백성들을 협박하여 무리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산사람이 죽음의 길을 찾게 한 것이다.
지금 만약 행동을 고치고 선(善)을 따라 병사들을 풀어주고 농사짓게 돌려보내준다면 이는 죽은 사람이 살길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너희에게 살길 한 가지를 가리키니, 곧 순상(巡相),에게 사죄하고 우두머리 몇 명을 잡아 바치고 나서 각자 흩어져 양민이 되고 위협에 못이겨 무리에 끼었다면 마땅히 한결같이 사면될 것인데 만약 한결같이 잘못된 것을 따라 미혹된 것을 알지 못하고 용과 뱀같이 위험한 무리가 된다면 필경 옥과 돌을 같이 불사르는 꼴이 되어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할 것이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오호라! 너희들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살아서는 무뢰의 도둑이 되고 죽어서는 불의한 혼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각각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들도 혼자 무슨 마음이겠는가. 너희들도 또한 사람이니 부모를 떠나고 조상의 묘지를 버리고 처자와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즐거움이 없이 서로 들판에 서리와 눈을 맞으며 겉으로는 난폭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공포에 떨며 큰 죄를 달게 지으니 어찌 하자는 것이냐. 너희들은 내말을 믿고 마음을 바꿔 일을 도모하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그 일에 대해 말이 여기까지 미치니 소리가 떨리고 기가 막힌다. 오호라 너희 무리가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 정헌시(鄭憲時)가 혈서로 쓴다. 12월 4일

격문에 이르기를 “해서 지방의 여러 고을의 현명한 관리들과 감영이 한 가닥의 올과 같으니 □□ 삼가 바라건대 여러 제위께서 힘을 합쳐 병사를 모으고 빠르게 모여 한결같이 감영의 위험을 구하고 우리 부친의 어려움을 구해 주십시오. 정헌시가 피눈물을 흘리며 급함을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각각 거느린 포수 몇 십명이 가까운 읍의 경우 초 10일에, 멀리 떨어진 읍의 경우 12일 안에 성외에 도달하고 각각 아무개 읍의 관군이라는 표를 내어 기호로 삼으시오. 아마도 일본병사가 막을 걱정이 없으니 헤아려 속히 갖추어 주시오≫

초 6일 [初六日]

적괴(賊魁) 임종현(林宗鉉)이 몇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용서를 빌고 선화당에 돌아가 일을 보기를 청하고서 그 무리가 나갔다라고 운운하므로 답하기를, “전에 없던 변을 만나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처분을 기다려야 하니 선화당에 되돌아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너희들은 물러나라”고 준엄하게 물리쳐 보냈다.

초 7일 [初七日]

적의 무리가 왼쪽의 성중에서 노략질을 해 거의 다 없어졌고 이어서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태연하게 성을 빠져나갔다. 무리를 동서로 나누어 마을에서도 노략질을 하고 사라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계본(啓本)을 작성하였다. ≪전에는 길이 막혀 상세히 아뢸 수가 없었다≫

초 8일 [初八日]

편지를 보니, “가아(家兒)가 탁영대(濯纓臺)에 있다”라고 쓰여 있고 “내일 성으로 들어온다”라고 한다. 영(營)의 관속들이 점점 나타났다.

초 9일 [初九日]

가아가 도착하여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상처는 다행히 없었는데 팔과 다리는 아직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초 5일에 체직되었다”라고 하니 감격함이 크다.

초 2일 정부의 초기(草記)에, “해영(海營)에 이제 동비(東匪)가 난리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관찰사의 장계가 없지만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놀랍습니다. 순무영(巡撫營)에 명령해서 빨리 그 도의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에 신칙해서 계획을 세워 섬멸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초 4일의 정부 초기(草記)에, “해영 비적(匪賊)들이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은 갈수록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방관이 진실로 백성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두 가지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어찌 전에 없는 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변란이 생긴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이에 치계(馳啓)도 하지 않았으니 또한 지극히 해괴하고 경탄스럽습니다. 황해감사 정현석(鄭顯奭)을 우선 견책하여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고 그 대신에 관서선유사(關西宣諭使) 조희일(趙熙一)을 임명하며, 해주판관(海州判官) 이동화(李同和)도 파직해 쫓아내고 그 대신에 연안부사(延安府使) 이계하(李啓夏)를 임명하여 빨리 부임지로 내려가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일본군 소위(少尉) 스즈키(鈴木彰)와 통역관 스미노(住野嘉吉)가 거느린 70여명의 병사들이 금천으로부터 평산(平山)을 지나 황해감영에 도착하여 본부(本府)의 공해(公廨)에 주둔하게 하고 노고를 치하하고 음식을 먹인 후에 동학군의 난리에 대한 전말을 상세하게 장계를 올렸다. □시에 관청의 관속 중에 동학도들과 내응하여 난리에 참가한 자들이 비록 범한 일이 없더라도 모두 흩어지고 백성들도 난리를 겪어 또한 도망간 사람이 많아 감영 주변이 거의 비었다. 이에 관속들과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불러 모이게 하여 나타난 사람들에게는 물금체(勿禁帖)와 개인지(盖印紙), 도장을 찍은 종이를 나눠 주어 한결같이 용서해주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한편으로는 교졸(校卒)을 모집하여 근처에 몰래 숨어든 비류(匪類)를 검문하여 잡아들였다. 이에 관속들이 모두 나타났고 거주하는 백성들을 일일이 점고해 보니 또한 집을 떠났던 백성들이 돌아왔다. 또 명의소(明義所)를 설치하여 영(營)과 부(府)로부터 유림(儒林)·이교(吏校)·농상(農商)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을 기록하여 책자를 만들어 안상(案上)에 두니 여러 명이 모두 먼저 기록되기를 다투었다. 안정되었다고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

11일 [十一日]

적당(賊黨)의 접주 3명을 잡아 효수하여 경계한 후에 아뢰기를, “강령의 무기를 빼앗기고 공당(公堂)이 부서지고 문서가 타 없어진 일을 장계로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12일 [十二日]

선화당과 각 공해(公廨)를 고치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일이 급하여 영(營)의 이교청(吏校廳)에 나아가 채리전(債利錢)을 동서의 부노(父老)들에게 나눠주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3일 [十三日]

평양에 주둔한 일본병사들이 신천(信川)으로 진격하여 적 수십명을 살해하였다라고 들었다. 또 듣기를 “강령에 주둔한 적이 아직 많으니 편비(褊裨) 박봉원(朴鳳元)을 보내어 교졸 50명을 거느리고 검문하여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니 파견된 일본 병사들이 서쪽 취야 앞까지 나아갔다”라고 한다.
송화현(松禾縣), 문화현(文化縣), 평산부(平山府), 조니진(助泥鎭), 오우진(吾又鎭), 용매진(龍媒鎭)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어 순서대로 장계로 올렸다.

14일 [十四日]

성가퀴의 담이 무너져 내린 곳이 4~5군데나 되어 모군(募軍)을 시켜 돌을 지고 가서 쌓게 하고 □□의 밖은 물이 흘러 밤에 얼어버리니 다른 성(城) 아전과 백성들을 불러 알리고 굳게 맹세하여 밤낮으로 지켜 엄히 경계하게하고 밤이면 횃불을 모아 밝히고 가아를 시켜 노궤(勞饋)를 지키게 하는 것을 날마다 되풀이 하였다. 임무교대하는 것이 급하므로, 새로 임명된 감사가 평양에 있어 새로운 감사를 맞이하는 이예(吏隷)를 보냈으나 길이 막혀 심히 근심스럽다.

적괴(賊魁) 임종현(林宗鉉), 성재식(成載植), 이용선(李容善) 등 3사람 외에 협박으로 따른 사람은 처벌하지 않고 병기를 풀고 집으로 돌려 보내지만 우두머리를 잡아 보낸 자는 계문하여 상을 주게 할 것이란 뜻을 여러 고을에 관문을 돌리고 경내(境內)의 길가에는 한문과 한글로 게시하였다. 장연부(長淵府), 신천군, 장수산성(長壽山城), 수양산성(首陽山城)이 모두 적에게 공격을 당해 함락되었고 신천의 첩보에 “신천군의 포수 노제석(盧濟石)이 70여명을 모아 비류(匪類) 18명을 쏴 죽였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였다.

사유를 갖추어서 계를 올리는 것이 ‘포상한다는 뜻’에 합당하므로 글을 지어 발송하였다. 듣건대 “도내의 유생들이 유임을 원하는 일로 조정에 가서 호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내려와서 다시 올리자고 회의 하였다”라고 하니 군교를 보내어 엄히 금지하였다.

15일 [十五日]

옹진수영(瓮津水營) 또한 적변(賊變)을 만나 수사(水使)가 중상을 당해 사유를 갖춰 치계(馳啓)하였다. 모령(募領), 소모의 책임관 박봉원의 교졸, 그리고 일본 병사가 강령에서 적을 만나 싸워 1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였는데 그 중에 2명은 일본 장교가 살려주라고 하므로, 한양으로 보내고 나머지 11명과 영교가 잡은 1명은 목을 효수 경계하고 보고하였다.

□시에는 여러 고을에서 위세를 보고 적당(賊黨)이 곳곳에 개미처럼 주둔하고 있다가 무너지니 인수인계하기 전에 성을 보전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총을 모으고 화약을 은닉한 자를 군정(軍丁)으로 불러모아 후한 음식으로 대접하고 의리로 깨우쳤다. 그래서 감영 아래에 100여명의 건장한 장병들이 총쏘는 것을 연습하고 총을 쌓아 놓았다.

적(賊)중에 가장 행동이 흉악한 백우배(白佑培)를 일일이 조사하여 체포하고 효수하여 경계한 후에 치계(馳啓)하였다. 일본 병사가 강령에서 돌아왔다.

17일 [十七日]

전후로 조사해서 찾아낸 무기 중 조총 481정, 화약 540근, 납탄환 2,300개, 신설한 포군 ▣백명의 일과 연안부 또한 적에게 습격을 당한 변에 대해 보고하였다.

19일 [十九日]

신천수령이 첩보를 올렸다.
“감영에서 임명한 의려장(義旅長) 신천군 진사 안태훈(安泰勳)이 포군 70명, 장정 100여명을 모집하였고 총으로 적을 쏘아 죽인 영장(領將) 3명과 습득한 조총, 환도(還刀), 갑주(甲冑)를 올려 보냈다”라고 전한다.
안태훈이 기특한 공훈을 세웠으니 진실로 극히 가상하여 격려하고 포상하는 것이 합당하니 본도(本道), 황해도 소모관(召募官)에 임명하는 것을 임금께 상주하여 분부를 받아 처리할 뜻으로 아뢰었다. 또 은율현(殷栗縣)의 변에 대해 보고하였다.

20일 [二十日]

비류가 약탈하여 마을에 쌓아둔 곡식은 조사해서 영속(營屬)과 포병의 급료로 나누어 주었다. 듣자하니 “해주의 죽천(竹川)에 비류 5,000여명이 웅거하고 그 괴수는 최서옥(崔瑞玉)이다”라고 한다. 유생 김리현(金履鉉)으로 하여금 전령(傳令)을 가지고 가서 충신과 역적, 화(禍), 복(福)을 유시하게 하고 또한 편지를 써주어 이득과 손해를 상세히 하여 귀화하게 하였다. 공을 세워 죄를 용서해주는 뜻을 단기(單騎)를 보내 알렸다. 포군(砲軍)에 응모하는 자가 하루에 200명이 되는데 경군(京軍)의 차림을 모방한 전립(氈笠), 과의(黑衣)를 만들어 지급하고 영장을 2사람 임명하여 훈련시키고 나장청(羅將廳)의 직소(直所)를 지정해 직접 가서 점검[點閱]하고 소를 잡아 음식을 나누어 주어 위로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데 힘쓰게 했다. 듣건대 “적비(賊匪) 몇 천명이 다시 해주의 서쪽 경계인 취야에 모여 있어서 연달아 정탐을 보냈다”라고 한다.

21일 [二十一日]

배천군(白川郡)의 적변(賊變)을 빨리 아뢰었다. 듣자하니 강령현의 적비(賊匪)가 다시 그 읍으로 들어가 400여 호(戶)를 태우고 돈과 곡식을 빼앗았다고 하니 사유를 갖춰 빨리 보고하였다.

22일[二十二日]

유생 김리현(金履鉉)이 죽천으로부터 돌아와서 최서옥(崔瑞玉)의 답장을 바치니 “잘못을 깨닫고 며칠 안에 해산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다행이다.

23일 [二十三日]

새벽에 모집한 포군 100명과 일본 병사 50명이 취야로 진공하여 적과 서로 섞여 싸웠다. 적도(賊徒)가 패하여 도망가니 총을 쏴서 11명을 죽였고 ▣을 생포하였다. 말 33필, 소 4필, 화약 500여근, 조총 5자루, 환도 5자루, 연환 5,000개, 총 10자루, 깃발 3면을 가지고 돌아왔고 사유를 갖춰 빨리 아뢰었다. 군사들이 돌아올 때에 가아를 서문(西門) 밖으로 내보내어 위문하며 맞이하였고 악공을 불러서 승전보를 앞에서 인도하고 들어와서는 음식을 베풀었다. 탄약과 총알이 떨어져서 근처 고을에 은밀히 관문을 보내어 실어가지고 오게 하였다. 금천수령이 화약 1,000근, 납총알 5,000개를 짐바리로 실어보냈으니 위급한 때를 대비할 수 있었다.

24일 [二十四日]

일본군이 생포한 적과 소와 말을 호송하였는데 모두 연안부로 향하는데 매우 소홀했다. 편지를 송영(松營), 개성에 보내어 송도병참에 있는 병사들이 와서 돕게 하여 이로부터 더욱 경비를 강화하였다. 탐문하여 보니 적비(賊匪) 수 만명이 모두 해주의 서쪽 300리 안현(鞍峴)에 모여 있다고 한다. 계속해서 정탐하니 그 무리가 일본 병사들이 감영을 비운 틈을 타서 성을 침범하고자 한다고 한다.

25일 [二十五日]

삼경(三更), 오후 11~오전1시 무렵에 포군 200명을 안현으로 향하게 하여 적을 만나 맞받아 쳤는데 단지 2명을 사로잡았다. 밤이 깊어 싸우지 않고 진영에 머물렀다.

26일 [二十六日]

성첩(城堞)을 지키라고 엄히 명령을 내렸다. 각 성문에 기찰포교를 두고 평범한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 오면 내력을 자세히 묻고 만약 수상하면 즉시 명하여 가두고 아울러 한사람도 성 밖을 나가게 허락하지 말고 한편으로는 연안(延安)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주둔지역에 알려 빨리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사실은 극비여서 영속들 가운데 아는 자가 없었다.

27일 [二十七日]

성을 나가 주둔하던 포군이 돌아 왔는데 적의 형세가 커서 적을 꾀는 계책을 쓰고자 하였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무렵에 적 300명이 새로 모집한 산포수를 앞에 세워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산과 들을 가득 채우고 멀리서 말을 몰며 진격하였고 성의 서쪽 선산(仙山) 연하동(烟霞洞) 등지에 모였다.
성밖 장당현(將堂峴)에 바짝 진군하여 성을 내려다보니 양쪽 길에 불을 질러 성밖의 민가 40여호에 불길이 번졌다. 눈 아래의 타들어가는 기세를 보아하니 장차 성이 모두 타버릴 것 같았다. 이에 성문을 굳게 닫고 사졸들을 독려하여 성가퀴 위에 돌덩이를 많이 모아두었다. 중군(中軍)과 막비(幕裨)을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으로 나누어 지키게 하고 서성(西城)은 가장 요해처이므로 가아로 하여금 무리를 단속하게 하였다. 서성(西城)을 지키며 접전할 때에 일본병사 60여 명이 동문으로 부터 들어왔는데, 적배(賊輩)들은 단지 일본 병사들이 나간 것은 들었으나 일본병사들이 들어온 것은 모르고 이 틈을 타서 갑자기 일어나서 성을 도륙하고 악독을 부리려고 한 것이다. 가아(家兒)로 하여금 나가서 일본병사를 맞이하게 하고 분대를 지휘하게 하여 한 갈래는 남문을 거쳐 나가게 하고 한 갈래는 서문을 통해 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감영의 포수 200여명과 영속(營屬)과 민인(民人)들에게 각자 창과 몽둥이를 지니게 하여 서로 섞여 나가고 성첩 위의 민인들에게 고함을 쳐 기세를 북돋우게 하였다. 전투가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이르자 적의 기세는 꺾였고 우리는 기세등등했다.

산포수 20여명을 포살하였고 15명을 사로잡았고 나머지 무리는 패하여 도망갔다. 30리를 추격하니 짐승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더 이상을 수가 없었다. 날이 또한 저물어 양군(兩軍)이 모두 개선해 돌아오니 사유를 갖추어 빨리 보고하였다. 일본병사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동학당의 우두머리는 잡지 못하고 일본군을 빠르게 보탠 후에 소탕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글을 만든 계본에, “그날 밤 영속과 부로(父老)들이 모두 하례를 드리는 날에 모여 오늘 일로 거의 성 전체가 타버릴 뻔했으나 하늘이 도와 적은 숫자로 많은 무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들은 한사람도 다친 자가 없었으니 진실로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답하여 이르기를, “관직을 교대(交龜)하기 전에 성을 지키고 또한 적을 많이 죽였으니 군민(軍民)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일 뿐 아니라 나라의 큰 복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노고를 치하하였다. 새로 오는 감사의 편지를 보니 “25일에 황주(黃州)의 경계에 도착하고 30일에는 감영에 도착해서 임무교대식을 행한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28일 [二十八日]

사로잡아 적을 중군(中軍)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동학도의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노획했는데 즉 도록(都錄)이었다. 임종현(林宗鉉)을 접사(接司)로 성재식(成載植)을 강령으로, 이용선(李容善)을 안악(安岳)으로 최득수(崔得秀)를 판▣(判▣)로 모(某)를 중군(中軍)으로 모(某)를 모졸(某卒)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모두 그 가운데서 나왔는데 이는 모반하는 것이다≫
대개 그날에 성 가까이에 있던 적들은 가볍고 중함을 논하지 말고 모두 중형을 시행해야 하나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또한 옥석(玉石)을 모조리 태우는 폐단이 있을까 걱정되니 붙잡은 적(賊) 가운데 10놈은 억지로 협박해서 따른 것에 불과하니 특별히 풀어주었고, 포수 5놈은 일일이 사실을 자백하여 아울러 처단한 후에 사유를 갖춰 보고하였다.

30일 [三十日]

인수인계 하는 날에 새 감사를 맞이하는 접대를 맡은 영속의 사사로운 통문을 받아보니, “새 감사가 재령(載寧)에 도착했는데 비도(匪徒)가 둘러싸서 가마를 위협하여 10리를 돌아서 갔습니다. 총으로 마부 2명을 죽이고 총을 쏴서 신임감사를 위협하면서 감영에 도착해서 다시는 잡아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는데 다짐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후에야 새 감사를 풀어주었으니 이 때문에 1일에 임무교대를 합니다”라고 한다.

주석
중군(中軍)·판관(判官)·막비(幕裨) 판관은 각 감영(監營)·유수영(留守營) 및 큰 고을에 둔 종5품 벼슬을 말한다. 중군은 지방군사지휘관, 막비는 감사 등에 딸려 비서일을 보는 관원, 비장이라고도 한다.
순찰사(巡察使) 당시 감사인 정현석(鄭顯奭)을 말한다.
수구(壽具) 염습할 때 쓰는 옷, 베개, 이불 등을 통칭한다.
나의 부친 정현석의 아들인 정헌시(鄭憲時)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지원군 동원에 나섰다. 이 효유문은 정헌시가 지어 돌린 것이다.
가렴조(加斂條) 일정한 규정외에 여러 명목으로 더 거두는 잡세를 말한다.
가아(家兒) 자신의 아들을 일컫는 말로, 정현석이 사실을 기록하였으므로 자신의 아들을 가리킨다.
물금체(勿禁帖) 통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증빙문서로 관의 도장을 찍어 나누어 주었다.
채리전(債利錢) 환곡 등 채무의 이자로 받은 돈을 말한다.
편비(褊裨) 각 영문(營門)의 부장(副將)을 말한다.
안태훈(安泰勳) 의사 안중근의 아버지로 대지주로 농민토벌군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소모관(召募官) 소모사의 지휘를 받아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관직을 말한다.
나장청(羅將廳) 군아(軍衙)의 사령 중 하나를 말한다.
송영(松營) 개성에는 직할시격인 경기도 광주, 수원, 강화도와 함께 송도유수영을 두고 유수수를 배치하였다.
모졸(某卒) 卒은 수령을 뜻하는 倅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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