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록
장위영 영관은 18일 연기(燕岐)에서 유숙하면서 전진할지 말지 명령을 기다렸으며, 경리청 전 영관인 서산군수는 18일에 공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잠시 20리쯤 물러나 모로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비도가 출몰하는 상황은 공주·유성(維城)·대전(大田) 등의 지역과 청주의 관군이 패전한 곳에 또 수 천 명이 모여 있습니다. 이제 막 장위영 영관에게 공문을 보내어서 이 지역 근처로 전진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주 경천점은 《동학농민군들이》시도 때도 없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여 바야흐로 노성의 창고에 있는 쌀을 실어내어 경천점에 운반해 오는 것으로 봐서 주둔할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은진(恩津)·노성 사이의 일은 소문으로 들은 것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동학농민군들이 저희들끼리》며칠 점고(點考)해 보니 빠져 나간 자들이 몇 천 명쯤 된다고 하고, 날씨는 춥고 먹을 것은 적으니 스스로 도망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합니다. 또 들으니 서로 싸우다가 죽이는 경우도 있어서 앞장 서는 것을 싫어하고 피하여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