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同日]
출정한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竹山鎭) 토포사(討捕使) 이두황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동도가 충주(忠州) 무극(無極)장터에 모였다고 하여 토벌하기 위하여 이달 9일 미시 경에 죽산부로부터 출발해 행군을 하여 30리쯤 가서 음죽(陰竹) 돌원점(乭院店)에 이르러서 유숙하였습니다. 다음날 10일에 20리를 가서 무극에 도착하여《동학농민군들의》거취를 탐색하여 알아보니 그 무리들이 괴산(槐山)으로 옮겨 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20리를 행군하여 음성현(陰城縣)에서 유숙하면서 저들의 소식을 또 탐문해 들어보니 저 무리들이 괴산의 한 성을 불살라 함락시키고는 곧바로 청주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미 순무영으로부터 청주에 가서 지원하라는 전령을 받았고 또 동도가 청주로 옮겨 모여 있다고 하기 때문에 지원하고 토포하기 위해 11일에 출발하여 청안현(淸安縣)에서 유숙하고 그 다음날 12일에 40리쯤 가서 청주성에 도착해 보니 경리청의 병사들이 먼저 도착해 있어서 함께 유숙하고 회의를 하여 계획을 정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13일 진시 경에 본 진영이 경리청·진남영(鎭南營) 장졸들과 함께 행군하여 보은 장내리(壯內里)에 있는 동도의 소굴을 향해 가다가 40리 정도 떨어져있는 미원점(米院店)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먹은 후에 경리청의 장졸들은 그대로 미원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뒤에서 호응하기로 하였습니다.
본 진영과 진남영 장졸들은 곧 행군하여 오경(五更, 오전 3∼5시) 즈음에 30리쯤 거리에 있는 보은의 구현령점(龜峴嶺店)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고개 길은 험하고 골짜기는 깊숙하고 또 한밤중이어서 적들의 실정을 예측할 수도 없어서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고 밤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 날 14일 새벽에 고개를 넘어서 아침을 먹은 뒤에 진남영 병사들은 곧바로 보은읍(報恩邑)으로 가서 주둔하였고, 본 진영의 장졸들은 곧바로 장내리로 들어가 보니 동도는 이미 이달 11일에 청산(靑山)·영동(永同) 등지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형세를 점검해 보니 비류가 머물고 있던 임시 막사가 400여 개가 되었습니다.
그곳 마을의 가구 수는 200여 호(戶)였는데 온 마을이 이미 다 비었고, 몇몇 남아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군대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또한 이미 산으로 모두 도망갔습니다. 온 마을을 수사하여 3놈을 잡아서 즉시 처단한 뒤에 임시막사와 집들을 다 태우고 소굴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은읍에 도착하여 보니 3개 진영의 장졸들이 모여서 주둔하여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밤새 말을 달려 왔더니 사람과 말들이 모두 피곤하여 하루 쉬고, 그 다음 날 16일에 청산·영동 등지를 향해 출발하여서 30리를 가서 회인현(懷仁縣)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6일 유시 경에 청주병영에서 온 전령의 내용에, “지금 남적(南賊,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올라와서 노성·논산(論山)에 진을 치고 머물러 있는데 형세가 크다고 한다. 순영(巡營, 충청감영)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고 또 《순영에서》보고하여 요청해왔기에 신속히 군대를 돌려 오늘 중으로 가서 보호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술시 경에 도착한 충청도 감영의 관문 내용에, “전라도의 비류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은진을 침범하였는데 우리 감영의 사태가 경각에 달려 있을 정도로 위태롭다. 공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지원하여 함께 나라 일을 구제할 의리를 보존하게 해 달라. 귀 진영의 병사들이 우리 감영에 출동하게 할 뜻을 방금 막 보고하였는데, 만약 시간만 끌고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법이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지원하기 위해 그 다음 날 17일에 회인현에서 출발하여 60리 쯤 가서 공주 부강점(芙江店)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밤 해시 경에 계속해서 도착한 충청감영의 공문 내용에, “귀 영관이 거느린 군대가 본 충청감영으로 출동한다는 뜻을 이미 두 차례 보고하였고 아울러 도순무영에도 보고하였으니 반드시 허락을 얻을 것이다. 즉각 길을 빨리 걸어 행군하여 감영에 도착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 다음날 18일에 행군하여 30리 쯤 가서 연기 봉암동(鳳岩洞)에 주둔하여 유숙하였는데, 그곳 마을에서 공주와의 거리가 40여 리가 되기에 명령을 기다려 나아가거나 머무르겠다고 충청감영에 보고하였고, 회답을 기다리면서 머물러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보고합니다.
제(題): 장졸들이 여러 날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탄식할 일이나 고달픔과 괴로움을 면했다 하니 지극히 다행스런 일이다. 보은의 적의 소굴을 소탕한 것과 3놈을 죽인 것도 또한 매우 가상한 일이다. 청산·영동의 비류를 쫓는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은 대단히 비통하고 분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 진영의 실수가 아니며 또 놓친 무리들이 멀리 도망칠 수 있겠는가? 다음부터의 방략은 본 진영의 담당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어제 금영에서 보낸 공문에 따라 명령한 바가 있고, 심지어 임기응변하라는 명령도 실제 먼 곳에서 헤아림이 미칠 수 없으니 알아서 편의대로 거행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