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同日]
경리청 부영관 겸 안성군수가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달 24일 대교에서 돌아와 공주목에 주둔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그 날 술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미처 주둔하지도 않았는데 곧 명령을 받고 군수는 대관 조병완과 더불어 1개 소대를 거느리고 금강 나루터를 굳게 지켰습니다. 참령관 구상조가 참모관 이상덕·이윤철·신효식·황승억, 대관 이상덕,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장대규(張大奎)와 함께 1개 소대를 거느리고 봉수현(烽燧峴)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25일 인시 경에 또 명령을 받았는데 그 내용에, “서산군수 성하영이 적들과 웅치(熊峙)에서 서로 대치한 지가 이미 이틀이 되었는데, 적의 형세가 매우 대단하여 소홀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길을 나누어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수는 다만 20명만을 머물게 하여 전과 같이 굳게 지키게 하고, 대관 조병완으로 하여금 군수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에서 그 오른쪽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참령관 구상조는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일본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을 지나 그 왼쪽을 공격하였으며, 서산군수 성하영은 앞을 향해 적을 맞아 공격하였는데, 적들의 형세가 과연 듣던 바대로 산과 들에 두루 흩어져 있어서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바 추장(酋長)인 전봉준이란 놈은 가마를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 깃발을 날리고 뿔피리를 불고 벌떼처럼 몰려오니, 세 갈래 길로 진군한 병사가 반나절을 힘껏 싸우고도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에 이르러 총살한 자가 70여 명이고, 생포한 자가 2명이었고, 무기를 빼앗으니 이에 적들의 형세가 점점 꺾여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서 들판을 건너 바라보이는 시야산(時也山)의 비탈에 모여 진을 쳤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며 병사도 또한 피곤하여 마구 공격하기가 어려웠기에 군사를 수습하였습니다. 오경 즈음에 모든 적들이 어두운 틈을 타서 남쪽으로 30리쯤 되는 경천점으로 달아났습니다. 조금 이겼다고 방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에 각별히 단속하여 여전히 굳게 지켰습니다. 총살하거나 생포한 숫자와 빼앗은 무기는 수정하여 책으로 엮어서 보고하거니와 두 차례 싸움에서 우리 군대는 하나도 손해를 입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다행입니다.
제(題): 장졸 이하가 탈진하고도 앞으로 나가 이러한 큰 승리를 얻은 것은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즉시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보고를 전하여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도록 하고, 조금 적의 형세를 꺾었다고 잠시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니 방어하고 망보는 것을 각별히 타일러 단속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