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同日]
선봉진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24일 금영에서 적들이 10리쯤으로 임박해 왔다는 급한 보고를 듣고 길을 빨리 달려간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날 신시 경에 금강 장기진(將旗津)에 도착하여 부(府)에 들어갈 겨를도 없이 납교(蠟橋) 뒷 봉우리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바라보니 적들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 깃발을 늘어서 세워 놓고 수십 리의 산꼭대기에 흩어져 들쑥날쑥한 것이 병풍을 에워싼 것 같고, 거리가 1리 쯤 됩니다. 그 사이에 하나의 큰 냇물과 하나의 큰 들이 있는데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고 형세상 나아가 싸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우금치(牛金峙)·금학동(金鶴洞)·효포봉(孝浦峰)·납교 뒷 봉우리와 동쪽의 산성 요해지 각처에서 망을 보면서 지키게 하였습니다.
25일 날이 밝으려고 할 때 선봉이 통위영 영관 이하 2개 소대를 통솔하여 병사를 나누어 진을 쳤는데 형세가 가볍게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세하게 적의 형세를 보니 이른바 저들의 주력부대가 효포봉 너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통위영 부대의 건너편에 주둔해 있는 비적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는 적입니다. 납교 뒷 봉우리의 앞과 효포봉을 지키는 곳과의 거리가 남북으로 가로질러 펼쳐져있는데 수십 리가량 되었으며, 연이어 뻗혀 있어서 단지 한 곳을 따라서 진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효포 등지에 명령하여 각 진영을 방어하여 즉시 진격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각 진영을 독려하여 한꺼번에 진격해 나갈 때에 통위영 대관 신창희(申昌熙)·오창성(吳昌成), 교장 김상운(金相雲)·박상길(朴相吉)이 용맹을 떨치고 격분하여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포(砲)를 쏘면서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곧바로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대포를 마구 쏘고 갑자기 습격해 죽이니 적이 탄환에 맞아서 죽은 자가 50∼60명이 되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적들의 앞에 있는 부대가 한번 꺾이어 봉우리 꼭대기로 물러나 올라가니, 늘어서서 망을 보던 적들이 모두 언덕 아래로 내려와 도망갔습니다. 날이 또한 저물어 전과 같이 군사를 수습하여 방어하였습니다.
이날 유시 경에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문 내용에, “24일부터 25일 진시 경에 이르기까지 적들과 대적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적들과 서로 싸운 것이 이미 이틀이 되었는데도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기에 대관 윤영성·백락완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지휘하여 세 갈래에서 협공하여 싸운 지 반나절 만에 총살한 자가 수십 명이 되는데 저 놈들이 비로소 도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승세를 틈타 추격하여서 대포 2좌(坐) 및 총(銃)·탄약·깃발 등의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높은 봉우리 꼭대기로 도망하였습니다. 겨우 격퇴시킬 때에 선봉진으로 달려가 지원하라는 명령을 삼가 받들고 즉시 대관 백락완으로 하여금 1개 소대를 거느리고 달려가도록 하였고, 또한 이미 적당을 격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 무리들이 지척의 산 정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보였으나 군수가 거느린 군대가 지금 나흘 낮밤을 싸우고 잠시도 쉬지 못하여 병사들의 힘이 다해서 과연 싸움에 임하여 힘을 쓰기가 어려우니 죄송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처분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간에 도착한 안성군수 홍운섭의 보고문 내용에, “이달 24일 대교에서 돌아와 공주목에 주둔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그 날 술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미처 주둔하지도 않았는데 곧 명령을 받고 군수는 대관 조병완과 함께 1개 소대를 거느리고 금강 나루터를 굳게 지켰습니다. 참령관 구상조가 참모관 이상덕·이윤철·신효식·황승억, 대관 이상덕,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장대규와 함께 1개 소대를 거느리고 봉수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25일 인시 경에 또 명령을 받았는데 그 내용에, ‘서산군수 성하영이 적들과 웅치에서 서로 대치한 지가 이미 몇 일이 되었는데, 적의 형세가 매우 대단하여 소홀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길을 나누어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수는 다만 20명만을 머물게 하여 전과 같이 굳게 지키게 하고, 대관 조병완으로 하여금 군수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에서 그 오른쪽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참령관 구상조는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을 지나 그 왼쪽을 공격하였으며, 서산군수 성하영은 앞을 향해 적을 맞아 공격하였는데, 적들의 형세가 과연 듣던 바대로 산과 들에 두루 흩어져 있어서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바 추장인 전봉준이란 놈은 가마를 타고 일산을 펴고 깃발을 날리고 뿔피리를 불고 벌떼처럼 몰려오니, 세 갈래 길로 진군한 병사가 반나절을 힘껏 싸우고도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에 이르러 총살한 자가 70여 명이고, 생포한 자가 2명이었고, 무기를 빼앗으니 이에 적들의 형세가 점점 꺾여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서 들판 건너 서로 바라보이는 시야산 기슭에 진을 쳤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며, 병사도 또한 피곤하여 마구 공격하기가 어려웠기에 군사를 수습하였습니다. 오경 즈음에 모든 적들이 어두운 틈을 타서 남쪽으로 30리 쯤 되는 경천점으로 달아났습니다. 조금 이겼다고 방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에 각별히 단속하여 여전히 굳게 지켰습니다. 총살하거나 생포한 숫자와 빼앗은 무기는 책으로 엮어서 보고하거니와 두 차례 싸움에서 우리 군대는 하나도 손해를 입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다행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형세가 저와 같이 크고 우리 관군은 여러 곳을 나누어 방어하고 있기에 형세가 모두 고립되었으나 장졸 이하의 각 부대 병사들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힘을 떨쳐 전진하여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모두 다 섬멸시키지는 못했으나 적들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아서 감히 날뛰지 못하게 하고 후퇴하여 자취를 숨기게 하였습니다. 적의 목을 벤 것이 적지 않고, 무기를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대포를 빼앗아 온 것은 더욱 가상한 일입니다.
그 다음날 점심 때쯤 경리청의 병사 12명이, 나머지 무리들이 모여 주둔해 있는 것을 멀리 보고는 은밀히 갑자기 가서 허술한 곳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적도(賊徒)가 놀라 달아나 흩어져서 회선포 1대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고립된 군대로 적 소굴의 배후를 습격할 수 있었는데, 이미 이것은 가상한 일이기에 당장에 격려하는 상(賞)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위에 말한 대포를 빼앗은 경리청 병사 12명에게는 은전(銀錢) 1푼씩을 시상하였습니다. 각 군영 이하의 흩어진 병사들은 각 처로 진영을 나누었는데 적은 숫자로 많은 무리를 대적할 때에 한 사람도 다친 자가 없으니 이것은 실로 임금님의 덕화가 미친 바입니다. 삼가 기쁨과 다행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각 부대가 적을 사살한 수효와 빼앗은 노획한 물품의 실제 숫자를 하나하나 책으로 엮어서 위로 올려 보내는 사정입니다.
제(題): 보고문이 도착하였거니와 전후로 두 번 이김에 적에 대한 군사들의 의기와 병사들이 힘을 쓴 것은 지극히 가상한 일이다. 경리청 병사들이 회선포를 빼앗아 온 것은 특별히 세운 공로이니 모두 가상한 일이다. 책으로 엮어서 올려 보내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