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同日]
출진한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 토포사가 보고합니다. 이달 초 7일에 해미에 주둔해 있는 적을 격파한 뒤에 군수품을 책으로 엮어서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남은 적들 가운데 도망하여 달아난 자가 다시 그곳 읍의 서북쪽 기슭의 옛 산성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산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가운데는 평지를 이루고 있어 여러 사람을 수용할 수 있기에 즉시 2개 소대를 파견하여 대관 윤희영(尹喜永), 별군관 조편(趙翩)·윤지영(尹摯榮), 교장 추광엽(秋光燁)·박성희(朴聖熙)·장세복(張世福)·오순영(吳順永)·이경진(李景振)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가서 그 성을 격파하고 적을 찾아냈습니다.
그 안에 지은 임시막사 40여 곳에 흩어져 있는 무기가 매우 많았습니다. 또 남아 있던 적 400∼500명이 성의 남쪽 10리쯤 되는 저성(猪城)을 향하기에 《이들을》차지하고 지키고자 또 1개 소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별군관 이겸래(李謙來), 교장 김대유(金大有)·최기성(崔基成)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뒤를 쫓게 하여 잇달아 사살하고 온 부대를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혹 병사가 피로할까 염려되어 즉시 군사를 거두어 밤을 지내고, 다음날 또 정탐하는 자의 말에 따라 참령관 원세록(元世祿) 휘하의 부대를 나누어서 대관 윤희영·이규식(李奎植), 교장 이경진·양기영(梁基英)·최기성·홍선경(洪善敬)·김인선(金仁善)이 별군관 윤지영·김광수(金光洙)와 더불어 해당 1중대 병사를 거느리고 서산 땅으로 가서 순찰하였는데, 1개 대적(大賊)의 소굴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바로 서산의 매현(梅峴)으로 《형세가》높고 가운데는 둥글었습니다. 또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주변에 깃발을 꽂아 놓고 적의 무리들이 가운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둠을 틈타 몰래 서산읍(瑞山邑)에 들어가 잠시 쉬고 황혼녘이 겨우 지남에 밥짓는 사람이 밥을 먹으라고 말하는데 혹시라도 기미가 누설될까 염려되어 밥도 먹지 않고 곧바로 적에게 달려가서 뜻하지 않게 나가 함성을 지르며 포위하여 포를 쏘았습니다. 적도 또한 대항하여 날아오는 탄환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대포를 자주 발사하였고, 한편으로는 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격하기도 하면서 1시간쯤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는지 적들이 주둔한 산꼭대기에서 화약에 불이 붙고 큰소리가 나면서 하늘과 땅이 뒤집혀지고 쪼개졌습니다. 적의 무리 수천 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달아나는데 좁쌀이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병사도 또한 한바탕 놀라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곧 수백 보를 추격하고 흩어진 무기를 수습하고 읍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 뒤에 옛 수령이 죽음을 당한 곳을 찾으니 바로 읍밑의 율장촌(栗場村)이었습니다.
즉시 그 곳을 도륙하고 그대로 군대를 돌려 해미성으로 돌아오니 닭이 세차례 울었습니다. 접전하여 사살한 것은 밤이 어둡고 길을 재촉해야 했으므로 헤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포로는 옷의 등에 모두 적의 표시가 있어서 전혀 의심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공초도 하지 않고 즉석에서 총살한 자가 23명이 되고, 노획한 군수품은 다듬어 책으로 엮어서 보고합니다.
홍주에 머물러 있는 일본군 장교 아까마쯔 고쿠보(赤松國封)가 보내온 공문에, “공주가 위급하니 각 부대를 모아 일제히 남쪽의 적을 토벌하라”는 말에 따라 부득이 나머지 적을 놓아두고 날이 밝을 때를 기다려 행군하여 홍주읍에 도착하여 주둔하였고, 날짜를 정하여 공주로 급히 나갈 계획입니다.
제(題): 위에 보고하려는 책은 받았다. 비도를 차례로 토벌하고 군수품을 많이 빼앗는데 힘을 다해 큰 공을 세운 것은 진실로 매우 기쁘고 감탄스럽다. 적의 목을 베어 깨끗이 소탕하지 못하여 비록 뒷날의 염려가 있으나 그것은 그 지방의 책임이다. 앞의 지령에 의거하여 지원하도록 할 것이며, 서산의 적이 스스로 불 지르고 스스로 멸망한 것은 신과 사람이 모두 그들을 미워한 이치를 볼 수 있으니 지극히 기특하고 다행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