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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순무선봉진등록 巡撫先鋒陣謄錄
일러두기

11월 15일 [同日]

괴산군수가 보고합니다. 도착한 진영의 감결의 내용으로, 공고문 2통을 한문과 언문으로 번역하여 깨우쳐 준 뒤에 곧 백성들이 모두 알도록 붙였습니다. 본 읍은 일찍이 동학에 물든 무리가 없었는데, 금년 8월 이후로 먼 지역의 동도가 혹은 현혹시키는 말로 달래고 혹은 위엄있는 형벌로 핍박하여 강제로 동도에 들어간 자가 간혹 있었지만 한결같이 대원위(大院位, 흥선대원군)께서 효유문을 선포한 이후로 이미 모두 귀화하였습니다.

갑자기 이달 26일 다른 곳의 동도배 수천 명이 본 읍에서 도회(都會)한 일이 있었는데 곡식과 돈을 모두 빼앗겨 남은 것이 없으며, 방자하게 관에 들어와 무기를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관속들과 귀화한 백성들이 곧 일시에 떨쳐 일어나서 괴수 백창수(白昌壽)·우현관(禹顯觀)을 붙잡아서 관가의 뜰에 묶어 놓으니 나머지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삼가 순영의 공문에 의거하여 모두 즉시 처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후부터는 동도배가 청주의·청천(靑川)과 충주 무극 등지에 모여서 기필코 본 읍을 짓밟고자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므로 온 경내의 사람을 모아서 교졸과 노비를 단속하여 연일 엄히 경계하여 갑자기 생기는 변고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0월 초 6일에 이르러 동도배 수만 명이 양쪽 길로 나누어 경내에 어지럽게 들어왔습니다. 때마침 일본 병사 25인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북쪽에서 온 동도들은 일본 병사를 보고 대적하였고, 남쪽에서 온 동도들은 읍의 사람들이 나와서 대적하니 《동학농민군들은》많고 읍의 사람들은 적어서 대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쪽에서 싸움이 불리하고 북쪽에서도 또한 패하여 일본 병사 1명이 죽고 읍의 관속 및 부락민 중에 죽은 자가 11명이 됩니다. 창에 맞고 총에 맞은 중상자는 30여명이며, 읍 아래 5개 동네의 민가가 불에 탔는데 탄 집들은 모두 500여 호가 되었습니다. 관아의 각 건물도 모두 부서지고 오직 객사(客舍)만 우뚝 혼자 남았습니다. 무기·집기[汁物]·문서 등이 모두 불에 탔고, 환곡 40석·공전 8천여 금(金)을 잃었습니다. 민가의 개인 재산 백만 가량을 헤아리고 소·말 4∼5필에 싣고 청주의 청천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화를 겪은 뒤에 읍의 형세와 백성들의 마음은 추운 겨울의 대한(大寒)의 시기를 당하여 살 길이 전혀 없어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니 보기가 참담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일이 비록 이리 오래 되었으나 군사의 일에 관계됩니다.

제(題): 비록 무리들이 경내를 지났으나 일본 병사와 장정 및 읍속(邑屬)들이 피해를 입고 다친 것과 관사와 민가가 혹독하게 화를 입은 소식을 들으니 매우 놀랍다. 서울 병사들이 한번 지나감에 조금 위축되었으나 저들 괴수를 아직 죽이지 못한 것은 이미 통한스럽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이르러 우선 자리를 잡고 살 곳을 정하는 방법을 아직 별도로 조처하지 못했으니 실효가 있기를 바라기 어려우니 갑절로 백성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이다. 마땅히 이것을 전달해 보고할 것이다.

주석
대원위(大院位,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존호로, 흔히 대원위 대감이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은 임금의 생부라 하여 대원군이라 불렀으나 이를 더욱 높이는 호칭으로 대원위라고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명의로 농민군들이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전국에 띠웠으나 위장술이라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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