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同日]
선봉진이 보고합니다. 출진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이달 15일에 논산의 적을 격파하고 16일에 노성읍에 돌아온 연유와 홍주를 출발한 이후 처결한 동도들의 성명은 책자로 작성하여 17일에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18일에 전령으로 인하여 노성에서 도로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논산 황화대 위에 도착하여 막사를 짓고 밤을 지냈습니다. 19일에 일본군 장교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로 황화대로부터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은진 한곡에 주둔하여 숙박하고는 그대로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
21일에 또다시 일본군 장교의 지시로 부대 가운데 잡아 가둔 유구의 도집강인 오정선과 그 나머지 동도 20놈을 나란히 일본군 장교의 진영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군 장교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로 본 진영에 있는 100명의 병사들을 나누어 일본군 장교 아까마쯔 고쿠보에게 맡겨 석성에서부터 보령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나아갔습니다. 참령관 원세록이 거느린 부대 가운데 180명의 병사는 해당 소좌와 더불어 은진현에 체류하였고, 직접 이끄는 2개 소대는 용안에서부터 함열을 따라 익산읍·삼례역 등지에 이르러 일본병사와 회합하기 위해 이달 21일에 용안현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뒤를 이어 일의 상황을 계속 급히 보고할 계획이며 일본 진영이 체포하여 압송한 동도들의 성명은 책자로 작성하여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5일에 도착한 장위영 참령관 원세록의 보고 내용에, “이달 21일에 은진현에서 일본군 대대장의 지휘에 따라 교장 최기성·김인길이 병사 100명을 거느리고 석성·보령 등지로 파견되었고, 22일 밤 동트기 전에 일본군 대대장의 지휘로 삼례로부터 부대가 행군하였습니다. 대관 윤희영이 병사 100명을 거느리고 먼저 만마관현에 이르러 방어하였고, 대관 김진풍이 병사 100명을 몸소 거느리고 잇달아 용두현에 부대를 이동시켜 방어하였습니다. 적들의 정황을 정탐하여 들으니 23일 오후에 적도 수 삼 천 명이 전주성으로부터 도망하여 금구·원평 등지로 돌아왔다고 하므로 일본의 주력부대를 기다려서 24일 진시 경에 전주성에 같이 들어가 주둔하고 숙박하였다는 사정을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별히 더욱 정탐하라는 회답을 써서 내려 보냈으며, 일본 진영에 압송한 동도들의 성명 책자는 베껴서 위에 올립니다. 이러한 사정을 보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