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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순무선봉진등록 巡撫先鋒陣謄錄
일러두기

12월 12일 [同日]

서산군수 성하영의 진영에 있는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이 보고합니다. 한산·서천 등의 비류를 토벌하여 평정한 사정은 서산군수의 보고로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달 초 2일에 군수는 부임하기 위해 경리청의 군대를 거느리고 비인·남포 등으로 방향을 바꿔 나아갔고, 참모관과 별군관은 선봉의 본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천 송동(松洞)으로 길을 나누어 출발하였습니다. 지나는 길의 형편을 각별히 탐색하여 보니 비류 가운데 패하고 흩어진 나머지 무리가 왕왕 소란을 피워 혼자로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산군수와 충분히 상의하여 의견을 정하고 경리청의 병사 20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당일 유시 경에 한산읍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그대로 유숙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하나 타이르고 위로하고 어루만졌습니다.

그 다음날 초 3일 부대를 옮겨 나루를 건너기 위해 한산의 죽산 나룻가에 도착하니 한산의 백성 수백 명이 “함열·웅포(熊浦)의 비류가 와서 한산성을 함락하고 마을을 불태웠기에 어쩔 수 없이 이 경군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알아보아야겠다”고 하면서 다투어 배를 타려 하기에 하나하나 금지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웅포의 앞 바다에 도착하니 그 포구의 백성들이 이 배가 정박하려는 것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배를 정박하고 여러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한산의 보부상과 웅포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잡아들인 자는 바로 한산읍을 불지를 당시에 앞장서서 변괴를 저지른 최득용(崔得用)이었습니다. 그를 조사하여 일의 실정을 알아내고는 당장 그 자리에서 처결하였으며 이어서 함열읍을 향해 가서 거기서 무사히 유숙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초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지나는 길에 읍 가까이 있는 상와촌(上瓦村)에 들렀습니다. 본디 그곳은 비류의 소굴인지라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수십 명을 붙잡아서 하나하나 캐물었으나 모두 선량한 백성이었기 때문에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이른바 비류의 위세를 믿고 따른 천귀돌(千貴乭)은 막 은신하였다가 붙잡혀서 자복했을 뿐만 아니라 중론(衆論)에 죄상이 밝혀졌기 때문에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익산의 경계에 도착하니 좌우로 수십 리나 되는 울창하고 빽빽한 송림에서 연달아 총소리가 나는데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인 듯 했습니다. 그러나 미약한 병력으로 정탐할 수가 없어 서둘러 익산읍에 이르러서 속사정을 정탐하니, 익산읍 미력면(彌力面, 彌勒의 오식)의 거괴 오경도(吳敬道)가 지금껏 출몰하며 혹 스스로 기포한다고 하기 때문에 익산군수(益山郡守)에게 명하여 이교와 병사 5명을 같이 내보내었으되 오(吳)가란 놈은 또한 이미 도망쳤고 그놈의 포사(砲士) 7명을 붙잡았습니다.

그 가운데 최영환(崔永渙) 등 3놈은 비록 같은 나쁜 놈들이라고 하지만 억지로 《동학농민군에》끌려들어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최학선(崔學仙) 등 네 놈은 익산읍이 무기를 탈취당할 때에 총을 가지고 변괴를 저지른 장면을 여러 사람이 목격하였다고 하므로, 또한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많은 백성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거리에서 총살하였습니다. 그들이 빼앗아간 무기는 저들이 사는 집 뒤에 묻어 두었다고 하므로 즉시 찾아오도록 익산읍의 공형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죄인 여섯 놈은 즉시 진영 앞으로 압송하여 대령하는 것이 마땅하였지만 앞길이 멀고 비류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탈취당할 염려가 없지 않기에 스스로 판단하여 처결하였사오니 지극히 황공합니다.

이달 초 6일 미시 경에 완영에 도착하여 우선 머물러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보고 드립니다.

제(題): 각처의 비류를 토벌하여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통쾌하다. 마땅히 상부에 보고하겠다.

좌선봉진이 보고합니다. 장성에서 출발한 사정을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행군하여 40리를 가서 북창참(北倉站)에 도착하여 아무 사고 없이 숙박하였고 초 10일 진시 경에 출발하여 신시 경에 나주목(羅州牧)에 도착하여 아무 사고 없이 숙박하였습니다.

초 7일에 발송하여 초 9일에 도착한 전라병영의 공문 내용에, “비류가 장흥을 함락한 사정은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이어 동태를 탐색하여 보니 비류가 장흥부사를 총살하고 이어 시체를 불로 태웠으며 총검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여 시체를 쌓아 놓은 것이 산과 같고 피가 흘러 방아공이가 뜰 지경이니 피비린내 나는 악취가 온 성안에 가득하며 각 관아 건물과 인가는 모두 불에 타고 다만 객사만 남았습니다.

초 6일 사시 경에 벽사역의 뒤 고개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미시 경에 다시 장흥과 강진의 본영 접계인 사인점 앞들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본영과의 거리가 10여 리에 불과한데 《동학농민군이》흉특한 말을 큰 소리로 말하고 낭자하게 선전하여 동에서 말하고 서쪽을 공격함이 과연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계책이 없고 위급한 화는 급박하게 닥쳐옴에 어찌 두렵고 위급하지 않겠습니까? 장흥부사가 피살됨에 관인과 병부도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공형도 함께 죽어 일을 보는 사람이 없고 온 성 안이 텅 비었으니 공문이 더딘 것도 강하게 책망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저들과 상대할 군사가 같은 시각에 없으면 본 병영이 없어지는 환란을 서서 기다리는 형국이 될 것이니 귀 진영에서 특별히 속히 지원하여 본 병영을 온전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차례로 도착한 공문 내용에, “저 무리가 사인점 앞들로 이동 주둔한 연유는 아까 이미 급히 공문을 보내었습니다. 비류들이 오늘 사시 경에 강진현에 침입하여 인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사살하고 칼로 찌르니, 《이곳 백성들이》울고 도망치는 일을《강진현에서》보발로 급히 보고하여 왔습니다. 저들이 곧바로 본 병영을 도륙할 것임은 보지 않아도 명백하여 화가 곧 닥쳐올 것임에 다시 급히 공문을 보내니 귀 진영으로부터 서둘러 정예 군대를 출동시켜 밤낮 없이 달려와 지원하여 본 병영을 보전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초 8일에 발송하여 초 10일에 도착한 공문 내용에, “비류가 강진현을 침입한 사정은 어제 이미 파발마로 급히 공문을 보내었거니와 비류가 어제 축시 경에 각처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현재 세 갈래 길로 병영을 침입하려 합니다. 그런데 장흥과 강진이 함락되어 군대를 징발할 길이 없으므로 영암군에 포군을 징발하는 명령을 내리고 파발마로 재촉하기를 이미 8,9차례나 하였는데도 기롱만을 일삼고 서둘러 보내지 않으니 성을 잃을 염려가 당장에 닥쳐 있습니다. 영암군수의 소행을 살펴보건대 어찌 놀랍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바야흐로 장계하여 처리할 것이거니와 만약 귀 부대가 맞서서 응대하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변고를 서서 기다리게 되니 특별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초 10일에 발송하여 11일에 도착한 공문 내용에, “지금 비류 수천 명이 관군보다 먼저 이미 성 아래에 이르렀으니 급박함이 목전에 닥쳤습니다. 밤낮없이 와서 구원해서 본 병영을 온전케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강진현감의 공문 내용에, “이달 초 7일 진시 경에 동도 만여 명이 각기 장흥부로부터 내려와서 사방에서 갑자기 침입하여 성을 함락하고 인가에 불을 질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며, 장교·이서·별포(別砲)·수성군과 성에 가득한 백성들이 적에게 사살되고 도륙되어 살아 도망친 자가 거의 없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맡은 바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였으니 황공함과 두려움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계속하여 일본 진영에 통보하여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에 따라 세 갈래로 군사를 출동하였는데 대위 이시구로 고세이(石黑光正)는 그의 부하 1개 소대와 2개 분대·교도중대 2분대를 거느리고 영암 땅으로 나아가고, 제 1중대 1소대와 통위영의 군사 30명은 능주(綾州) 땅으로 나아가고, 히라기 중위는 그의 군사와 교도소의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장흥 땅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군사의 수는 모두 일본군의 진영에서 총괄하여 통솔하였기 때문에 정확히 지적하여 보고하지 못하오며, 선봉진은 휘하의 남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시 경에 60리를 행군하여 유시 경에 무안읍에 도착하여 아무 사고 없이 숙박하고 군대에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보고 드립니다.

제(題): 보고가 도착하였거니와 일의 상황을 계속해서 급히 보고하라. 1895년(乙未) 정월 초 4일에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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