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同日]
함평현감이 보고합니다. “동학의 거괴 이화진, 접주 김경오·이춘익·노덕휘·이자면·이곤진·김성필·김인오·김성서·김치오·정곤서·김경선·윤경욱 등 14명을 잡아서 총살하고 이화진의 수종인 조병묵·서우순·김문조·이응모·김봉규·박준상 등 6명은 격식을 갖추어 엄히 가두고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보고를 드린바 있습니다. 그에 대한 사또의 회답에, “열네 놈을 처형한 일은 마땅히 위에 전달하여 보고하겠다. 가두어 둔 6명은 심문하여 공초를 받아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죄인 6명을 엄히 심문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 조병묵이 아뢰기를, “이 몸은 손불면(孫佛面) 가덕산(加德山)에서 사는데 올해 9월 이 마을의 김학필에게 동학을 전수받았습니다. 학필은 바로 이화진의 사접(私接)입니다. 나주성을 침범할 때에 나오지 않은 죄로 궐전(闕錢) 9냥을 학필에게 징수당하였습니다. 이달 초 3일 이화진이 무안 사는 배상옥(裴尙玉)에게 갈 때에도 돈 2냥을 주어야 하는데 실로 변통할 방법이 없어 끝내 따라 갔습니다. 초 4일 돌아오는 길에 이화진과 한 방에서 같이 묵다가 수성군에게 붙들렸습니다”라고 합니다.
서우순이 아뢰기를, “이 몸은 영광 도내면(道內面) 고성리(古城里)에 사는데 올해 10월에 무장 장재면(長才面) 남계리(南溪里)에 사는 오응문(吳應文)에게 동학을 전수받았습니다. 본 현의 손불면 장동(墻洞)에 사는 이화진과는 이종간이 되기 때문에 만나 보기 위해 내려 왔다가 마침 이화진이 기포하는 때를 만나 한번은 나주성을 침범할 때에 따라 갔고, 한번은 무안에 따라 갔었는데 이달 초 4일 돌아오는 길에 이화진과 한 방에서 같이 묵다가 수성군에게 붙들렸습니다”라고 합니다.
김문조가 아뢰기를, “저는 손불면 가덕산에 사는데 올해 8월 모일에 이 마을의 접주 김학필에게 동학을 전수받았습니다. 학필은 바로 삼촌이라 사사로운 정이 없지 않았으나, 기포할 때에 끝내 따라가지 않다가 지난 달 모일에 이화진이 괴롭게 독촉하는 것을 이기지 못해 부득이 이화진이 무안으로 갈 때 따라 갔습니다. 이달 초 3일에 이화진이 무안으로 갈 때에 또한 따라 갔으며, 초 4일 돌아오는 길에 이화진과 한 방에서 같이 묵다가 수성군에게 붙들렸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응모가 아뢰기를, “저는 손불면 가덕산에 사는데 올해 8월 같은 마을의 김학필에게 동학을 전수받았습니다. 이화진이 무안으로 갈 때 노자돈 200냥을 징수당하여 이를 마련해줄 길이 없어서 끝내 한번 따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화진과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붙들렸으나 달리 지은 죄는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박준상이 아뢰기를, “저는 영촌면(永村面) 비화동(飛化洞)에 사는데 금년 9월 모일에 이화진에게 동학을 전수받았으며, 11월 모일에 이화진의 지휘로 고부에 사는 부민(富民) 황경여(黃京汝) 소유의 도조(賭租)를 수색해서 가져오기 위해 해제면(海際面) 등으로 갔다가 그 면의 접주 최문빈(崔文彬)의 저지로 인해 결국 거둬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돌아오면서 거쳐오는 각 처에서 돈 50냥을 토색질해서 받아먹었습니다. 이달 초 3일 이화진이 무안으로 갈 때에 따라 갔다가 초 4일 돌아오는 길에 이화진과 함께 한 방에서 자다가 수성군에게 붙들렸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위의 조병묵·서우순·김문조·이응모·박준상 등 다섯 놈을 모두 심문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김봉규는 수성군에게 붙들릴 때에 몽둥이에 마구 맞아서 상처가 매우 심하여 먹고 마시지를 못하더니 이달 초 9일에 옥에서 죽었기 때문에 문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보고합니다.
제(題): 가두고 공초를 받아도 죄의 경중이 별달리 없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런 따위의 죄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정의 명을 받드는 의미에서 아울러 다시 제사를 내린다. 그곳 읍의 공론을 따라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