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正月二十日]
전 경리청 우참령관이 보고합니다. 대관 조병완·김명환이 병사 2소대를 거느리고 청산읍으로 출진한 것은 이미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대관의 보고 내용에, “이달 초 6일 옥천읍에 도착하여 이내면(伊內面)에서 머물렀는데 마침 눈바람을 만나서 하루 더 유숙하고, 초 8일에 대관 조병완은 충청도 감영의 길 안내인 현광일(玄光一)과 함께 병사 1소대를 거느리고 무주로 길을 떠났습니다. 대관 김명환은 참모관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병사 1소대를 거느리고 영동 서재촌(西齋村)에 도착하니 각처에서 도망한 비류가 그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에워싸고 비류 수 십여 명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삼실촌(三室村)으로 가서 비류 십 수 명을 잡았고 옥천 오정동(梧井洞)에서 십여 명을 잡아서 모두 엄히 조사하니, 영동 서재(西齋)의 접주 이판석(李判石), 접사 김철중(金哲仲), 성찰 김태평(金太平), 포수 김고미(金古味), 삼실촌의 접주 배순안(裴順安), 접주 이관봉(李寬奉), 성찰 박추호(朴秋浩), 옥천 이원역(利原驛)의 성찰 이대철(李大哲)·장명용(張命用), 포군 이오룡(李五龍), 옥천 오정동 접주 고덕현(高德賢), 접사 고원행(高遠行), 포군 고경일(高敬一) 등 13명은 모두 금산을 도륙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달 초 9일 거리에서 처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비류 50여 명은 엄히 타이르고 풀어주었습니다.
무주의 거괴로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는 이응백은 이른바 포수 5∼600명의 놈들을 거느리고 우두머리가 되어 백성을 어지럽히고 본 읍을 탕잔(蕩殘)하였으며, 비류와 뜻을 합쳐 세 군(郡)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자인데, 계책을 내어 이응백 일당을 토벌하고 초 10일 장터에 군민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처단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 집을 수색하니 조총 1자루·환도 5자루·기폭(旗幅) 1면·철갑옷 1벌·인괘(印櫃) 1좌·목도장 1개·소 2마리를 찾아왔고 그 중에 소 2마리는 두 부대에 나누어 주어 군대를 먹이고 위로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마땅히 위로 보고하여 전달하겠거니와 병사가 쉬지 못하고 노숙을 하니 몹시 한탄스럽다. 청산으로 출진한 군대의 보고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어느 지방에서 지체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