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1894년 9월 10일[甲午九月初十日]
의정부(議政府) 초기(草記)에, 어제 의안(議案, 회의에서 심의할 안건)에서 비도(匪徒, 동학농민군)가 기전(畿甸, 경기도)의 죽산(竹山) · 안성(安城)까지 침범하기에 이르렀으니 죽산과 안성의 ≪수령을≫ 모두 체개(遞改)하여 국가를 다스릴 기량이 있는 사람[幹器]을 가려 차출한 뒤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도록 하는 일로 임금의 재가를 받았는데, 죽산부사 장위영 영관(壯衛營 領官) 이두황(李斗璜)과 안성군수 경리청 영관(經理廳領官) 성하영(成夏泳)을 차하(差下, 관직에 임명함)하여 각기 거느리고 있는 병정을 인솔해 곧 내려가 서로 기맥을 통해 ≪비도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9월 11일
사은(謝恩)하고 19일에 하직 인사하고 20일에 본영(本營)에서 1개 중대(中隊)의 병정을 뽑아 신시(申時) 쯤에 길을 떠났다. 신원(新院)에 도착하여 송윤덕(宋潤德)의 집에 머물러 묵었다.
9월 21일 맑음 [二十一日晴]
묘시(卯時)에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신장신(申將臣, 申正熙)을 만나 충주(忠州)와 진천(鎭川) 두 읍에 있는 적의 형세를 탐지하고, 유시(酉時)에 용인(龍仁)에 도착하여 일본 병사 30명을 만났다. 이희두(李熙斗) · 김광수(金光洙) · 강원로(姜元魯) 3명과 함께 점사(店舍, 가겟집)에 들러 나누어 잤다. 이희두가 동도(東徒, 동학농민군) 3명을 붙잡았다. 그래서 엄한 형벌을 가하여 자세히 문초했으나, 실제 아무 죄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두 석방하였다.
당일 밤에 들어보니, “직곡(直谷)과 김량(金良) 등지에 비도의 접주(接主)와 접사(接司)가 각처에 자리잡고 살면서 그 세력이 성대하다”고 하였다. 때문에 삼경(三更, 밤 11시~오전 1시 사이)에 참령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 대관(隊官) 박영호(朴永祜), 별군관(別軍官) 이겸래(李謙來)에게 군사 100명을 인솔케 하여, 먼저 그 지역으로 보냈다. 이내 후진(後陣)을 통솔하고 야간을 틈타 뒤따라 가서 직곡에 있는 접주 이용익(李用翊)의 집을 빙 둘러싸고 동도 14명을 붙잡았다. 또 김량에 있는 이삼준(李三俊)의 집을 포위하여 6명을 붙잡았다. 이들을 압송하는 길에 양지읍(陽智邑)에 도착하였는데, 시각은 이미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22일 맑음[二十二日晴]
≪양지읍≫ 앞쪽에 있는 주점에서 아침밥을 먹은 후 본읍의 향청(鄕廳)에서 좌기(座起)하였다. ≪어제 직곡과 김량에서≫ 붙잡은 동도 20명을 일일이 취조하였다. 그 중에 이용익은 염주(念珠)와 주문(呪文)을 현장에서 장물로 발각되었는데, 그의 조카와 함께 ≪동학에≫ 미혹되어 늙어서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정용전(鄭用全)은 스스로 호접(湖接, 충청도 동학접)에 투신한지 수년이 지났다. 이주영(李周英)은 계문(戒文, 동학 계율문서)을 깊이 간직하고 있어 광혹(狂惑)이 더욱 심하였고, 이삼준은 다년간에 걸쳐 광혹이 골수(骨髓)에까지 스며들었다. 때문에 본읍 앞 큰길 왼편에서 총을 쏘아 사살함으로써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그 나머지 16명은 모두 강제로 ≪동학에≫ 교화를 당하였으나, 이미 그 도(道)를 배반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놓아 주었다. 이내 점심밥을 먹은 뒤 군사를 이끌고 죽산 땅의 백암(白巖) 장터에 도착하여 윤영중(尹永中)의 집에 머물러 묵었다.
충주의 미산(米山)에 사는 동학 대접주(大接主) 신재련(辛在蓮)이 죽산읍에 방(榜)을 붙이기를, “오늘 이렇게 모이는 일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허문숙(許文叔)을 견제하여 막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공형(公兄)들이 베껴서 보내어 주었다. 또 금영(錦營, 충청감영)에서 보낸 비관(祕關)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진천현감의 첩보(牒報, 상관에게 보내는 서면 보고서)에 ‘허문숙이 민보(民堡)라 칭하고 수 3백명을 모아 평민을 침탈하니 즉시 토벌해 체포해야 합니다’라고 한”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서찰도 들어 있었다.
9월 23일 맑음[二十三日晴]
사시(巳時)에 상관(上官)이 관사(官舍)에서 점심을 먹고 비봉산(飛鳳山) 좌우 산기슭에 진(陣)을 쳤는데, 중군(中軍)은 비봉산 가운데 기슭에 진을 쳤다.
○ 오후에 일본 병사 30명이 이희두와 함께 ≪죽산≫읍에 도착하였으므로, 묵을 곳을 정해 주었다.
9월 24일 맑음[二十四日晴]
탐문하여 알아보니, 유학당(幼學黨) 허문숙과 서장옥(徐章玉) 등 5만~6만 명은 충주의 용수포(龍水浦)에 웅거(雄據)하고, 동학당(東學黨) 신재련 등 4만~5만 명은 진천의 광혜원(光惠院)에 웅거하여 며칠 안에 서로 접전(接戰)할 태세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군관 조편(趙翩)이 ≪적의 동태를≫ 탐지하겠다고 자원하여 미시(未時)에 나갔다. 당일에 또 동도에게 다음과 같이 효유하였다. 지금 많은 백성들이 거사(擧事)한 바는 진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그런데도 마지못해서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아직 그 요령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저 일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 규정을 만드는 일은 관의 허락없이 감히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고금(古今)의 공통된 법이다. 비록 변변치 못한 사물과 자잘한 일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민중을 모아 사람을 토벌하는 일은 어떠하겠는가? 지금 동쪽에서 모이고 서쪽에 합치는 일은 한 가지도 관의 허락없이 너희들 스스로 마음대로 모이고 흩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조련(操練)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이런 일들은 관의 허락이 아니면 결단코 맘대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정아(鄭雅, 정 아무개의 경칭)와 더불어 그것이 타당한 조항인지를 한 차례 자세히 평가한 연후에, 약간의 절차를 후지(後紙, 별지)에 갖추어 보내니 열람하고 속히 돌려보기 바란다. 일이 시급한 관계로 대략 기록하여 보낸다. ≪내가≫ 마땅히 몸소 가야하지만, 참으로 군영을 떠나기가 어렵다. 참모관(參謀官) 1명을 파견하여 보내니, 이 ≪효유문을≫ 펼쳐보고 기밀에 붙여 발설하지 마라. 이와 같은 ≪나의≫ 뜻을 알고 후록(後錄)에 따라 명확히 시행할 것이며, 그러면 매우 다행이다.
一. 회민(會民) 중에 장정 1천명을 뽑아 관군(官軍)에 속하게 하여 합치는 것을 들어준다.
一. 뽑힌 장정 이외의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각자 집으로 돌아가 곡식을 수확하고 식량감을 준비하도록 한다.
一. 이미 접중(接中)에서 임무를 맡았던 사람 중에 재간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그 두령(頭領)으로 정하고 관의 약속을 들어준다.
一. 이와 같이 취급한 후에도 접인(接人) 가운데 만약 다시 지난날과 같이 민을 해치는 짓을 다시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한결같이 그 접중에서 군법으로 다스린다.
一. 여러 가지 시행할 일로 모두 타당하면, 즉시 정부에 보고하여 조항(條項)을 상의한다.
9월 25일 맑음[二十五日晴]
사시(巳時)에 군관 조편이 돌아왔다. 적의 형세를 자세히 물어보니, “적의 무리가 과연 광혜원을 점거하고 있는데, 기치(旗幟)가 정돈되어 있고 포와 검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인원은 족히 1만명 이상입니다”라고 하였다.
○ 오시(午時)에 일본 병사 30명이 별군관(別軍官) 이희두 일행 3명과 더불어 이천(利川) 땅에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나갔다.
○ 같은 날 5읍(邑) 동학 집강 신재련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죽산 관사주(官司主, 죽산부사 이두황)가 명백히 묻는 것에 대해 삼가 생각건대,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라가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르는데, 그 가르침은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의 학설(學說)로써 하고, 도 닦음은 인의와 도덕의 실행으로써 합니다. 명하는 일도 하늘이요, 본성도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이 아니면 어찌 도덕의 행실이 있겠습니까? 저는 본디 어리석은 자질로 태어나 본성을 따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삼가 마음과 행실을 닦고 매양 간절히 나라를 위해 진력하되[奉公], 단지 생업에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 민심이 많이 어그러져, 천명에 도리가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도유(道儒)들이 남접(南接)이라 하면서, 창의(倡義)를 외치고, 민중을 끌어들여 당을 모으고, 말과 군사를 거두어 평민을 침략하고, 도원(道員, 동학도인)을 살해하는 일이 그 끝이 없습니다. 그 여풍(餘風)이 경기도내에까지 불어 들어와, 새로 들어온 도유(道儒, 동학 유생)들이 도의 큰 체제를 모르고 약간 잘못 저지른 일에도 빚을 받아내고 남의 무덤을 파헤쳐 원한을 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도리가 장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조칙(朝飭, 조정의 신칙)을 받들고 스승의 교훈을 이어받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형벌을 피하지 않고 헤아리지 못하는 곳에 깊이 들어간 자들을 갖가지로 타일러서 그치게 함에 이르러서 안팎 4개 군(郡)의 접주의 무리들은 경기도내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각처에 방을 붙이고 사방 먼 데까지 널리 알려 패역(悖逆) 무리를 끊어 금지한 것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밝히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진천에 사는 허문숙이 민보(民堡)라 칭하고, 도당들을 불러 모으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남의 집을 불사르고, 재물을 탈취하고, 인명을 살육하고 있으니, 그 화를 입는 것은 오직 도인(道人, 동학도)들 뿐입니다. 이 때문에 충주 등지의 도유들이 지난번 황산(黃山)에 일제히 모였습니다.
그렇지만 도법(道法)에 서로 살육을 할 수 없기에, 보인(堡人, 허문숙 민보)을 불러 화호(和好)로써 달래고 약조를 정하여 해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아! 저 줏대 없고 사리에 어긋난 부류들이 미처 발길을 돌리지 못하여 살육이 지난 날보다 더욱 심합니다. 서촌(西村) 같은 데는 골목에 온전한 집이 없고 집에는 사는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자연히 피난하는 도원들이 무리를 이루어 각처에 도회(都會)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히 엎어지려는 새둥지의 알과 수레자국 괸 물에 있는 붕어와 같은 처지라고 이를 만합니다. 이제 곧 농사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사방의 들에 곡식이 누렇게 익을 터인데, 수확할 사람이 없는 것은 이 모두 허당(許黨, 허문숙이 이끄는 민보당) 때문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지금 삼가 엄한 하교(下敎)를 받들매, 감히 황공하여 계획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허당은 뿌리가 먼 사방까지 뻗어있어 팔역(八域, 전국 팔도)의 도인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나 각처에 모여 있고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비록 저희들 한 곳의 집회를 파할지라도, 허당의 교만하고 사나움은 갈수록 더욱 심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허당을 토벌하여 없앤다면 억만 도인들이 각기 흩어져 귀순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같은 날 ≪신재련≫ 동도에게 체문(帖文)을 보내기를, “어제 널리 효유한 것은 진실로 백성을 구제하려는 방책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보내온 글을 보니, 말에는 밝으나 일에는 어둡다. 마음 속의 계략을 자세히 잡아 계책을 분명히 말하고 남김없이 진심을 나타냈건만, 마침내 각성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잘못을 고집한 것은 필시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개탄스럽다. 이른바 허당을 속히 토벌하여 제거하려는 뜻은 이미 금영(錦營, 충청감영)에서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하였고 경기감영에서도 명령을 내렸으므로, 곧 군사를 출정하기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더불어 상의하고자 하여, 열 번의 글이 한 번의 만남과 같이 못해 ≪만나자고≫ 고시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단지 기회만을 진술하고 한 번 와서 의논하지 않으니, 일이 이미 늦어지고 있다.
내일 새벽녘에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떠날 것이다. 일을 잘 아는 사람 2,3명이 속히 와서 같이 상의하고 확정해야 한다. 만일 혹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놀라거나 의심하지 말고 중도에서 군대를 맞이하여 곧바로 ≪너희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러 ≪허문숙 민보당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進軍)할 계책을 서로 상의하려 한다. 행군하는 군사의 점심밥은 후록(後錄)에 따라 미리 대기하면 매우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9월 26일 맑음[二十六日晴]
묘시(卯時)에 음죽(陰竹)에서 온 이문(移文)에, “어제 유시(酉時)에 적당(賊黨,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관사(官舍)를 둘러싸고 군기(軍器)를 탈취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9월 27일 맑음[二十七日晴]
이 참의(李參議)가 보낸 글에 이르기를, “이천으로부터 일본군의 병참(兵站)에서 붙잡은 동도와 적당 30명을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5명은 갑자기 놓쳐버렸고 나머지 20여 명 중에 괴수 10명은 총을 쏘아 사살하고, 그 나머지는 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같은 날 오시 쯤에 안성군수 성하영이 보낸 최 감찰(崔監察)이 와서 말하기를, “안성군수가 24일 임지에 도착하여 비도 3명을 잡아 가두어 두고, 장차 그들을 참수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 신재련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넓은 하늘 아래 군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고, 온 나라의 변방이 군왕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은 곧 하늘이 낸 백성이요[天民], 도는 곧 천도(天道)이니, 진실로 이 백성이 없으면 어찌 천도가 있으리오. 대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이지만, 지금 이 팔도에 있는 도유들이 기약하지 않고도 모인 것은 진실로 난민들이 ≪동학도인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허문숙 한 사람에게만 뻗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온 나라에 연이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향응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살해가 두려워 일제히 모인 것은 부득이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의 이치는 곧 하늘이기에, ≪여기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아! 저 보당(堡黨, 허문숙이 이끄는 동학 민보당)의 살육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며 그만두려면 그만둘 수 있습니다. 실로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어찌 하늘의 벌이 없겠습니까? 이 때문에 명부(明府)의 처분이 이와 같이 정중하고 또 이처럼 명백하고 용의주도한데, 지금 이 백성들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패역 부류들을 소탕하면, 내일 도유들이 각기 가정으로 돌아갈 것인데, 보국안민 하는 곳에 어찌 1천명의 장정들이 필요하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일시에 도우며 호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9월 28일 맑음[二十八日晴]
당일 인시 무렵에 별군관 이겸래(李謙來)가 병정과 군수품을 더 요청할 작정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 같은 날 동학에게 체문을 보내기를, “어제 진천현에서 보내온 공문을 보니, 허보(許堡, 허문숙이 이끄는 민보당)가 이미 싸움에 패하여 집결해 있던 민들이 이미 귀가하였다고 하니, 이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매양 우리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살 곳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고,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먹고 자는 것을 생각하면, 낮에는 한 끼의 식사마저 배불리 먹지 못하고 밤에도 삼경까지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실로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하는 수령의 책임이다.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잠도 편안히 자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귀가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만족스러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다.
종전의 잘못은 모두 어리석어 미처 깨우치지 못하였을 때의 잘못으로 돌리고 많은 백성들과 더불어 오직 새롭게 나아가는 것만을 기약해 도모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많은 선비들을 일깨워, 의심하는 편견을 깨고 모반하는 마음을 속히 돌려 각각 그 도를 즐기고 생업을 편안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고뇌를 받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이를 깊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9월 29일 맑음[二十九日晴]
진천현감 안정수(安鼎壽)가 보낸 공문 내용에, “동도 수만 명이 갑자기 관방(官房)으로 납입하여 칼을 빼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그 괴수인 한연수(韓延洙)와 조학희(趙學熙) 2명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병정과 일본인을 넉넉히 파병하여 그들로 하여금 읍내를 지켜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2천명을 보낼 것이니 군량미를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뜻으로 진천의 공형에게 명령을 전하였다.
○ 본도(本道) 순영(巡營, 충청감영)의 감결(甘結) 내용에, “동도의 창궐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 군대의 대오를 정비하고 사민(士民)들을 불러 모집하되, 만일 ≪동학농민군이≫ 출현할 경우에는 서로의 관할구역을 따지지 말고 가서 구원해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9월 30일 맑음[三十日晴]
안성군수(安城郡守)가 보낸 공문에, “29일 술시에 양호도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에, ‘지금 듣건대, 비류(匪類, 동학농민군)가 청주성(淸州城)을 침범하였으나 겨우 이미 물리쳤다.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방자하게 쳐들어올 염려가 있다고 한다. 해당 군영은 세 갈래 길의 요충지로서 결코 부주의로 인하여 그르칠 수 없다. 본진(本陣, 兩湖都巡撫營)의 주찰(駐札)이 지방과의 거리가 120리 떨어져 있으니 청주에 가서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죽산(竹山)에 머물러 있는 진영과 서로 호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폐직(弊職,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청주로 달려가려 하는데, 귀부(貴府)에서는 어느 날 출발하시려는지? 자세히 회시(回示)해 주시오.” 하였기에 우리 부(府)에서는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을 아직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그 명령이 도달하기를 대령했다가 회합하는 방도와 출발하는 시기에 대하여, 다시 의당 공문서를 보내겠다”라는 뜻으로 관문(關文)으로 회답하였다.
○ 순영에서 보낸 감결에, “이달 25일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청도)의 비류가 근래에 들어 다시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여러 읍들이 각각 스스로 방비하고 지켜, 털끝만치라도 소홀한 잘못으로 군율(軍律)에 저촉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진천현(鎭川縣)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에, “안성과 이천의 동도 수만 명이 어제 사시(巳時)에 읍저(邑底, 邑內)의 주위를 서너 겹 에워싸더니, 맨 먼저 동헌(東軒)으로 침입하여 관사(官司, 官衙)의 우두머리 및 공형과 여러 아전, 관가 하인들을 죄다 묶은 후에, 군 창고를 부수어 병기(兵器)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하지만 본읍(本邑, 진천현)의 사세는 이미 경계를 지나가는 것으로(過境) 결정해서 병정을 내려 보내는 항목(項目)은 즉시 도로 그치게 하였기 때문에 동도들의 작란이 이처럼 흉패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몹시 경악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보고하는 바가 이와 같지만 ‘군사 보내는 일을 도로 그치라’는 뜻으로 명령을 전하였다.
○ 충주에 사는 5읍 별집강(五邑別執綱)을 맡은 신재련(辛在蓮)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이 전국 팔도에 회합하는 일은 본디 사람 목숨을 상해(傷害)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허적(許賊, 허문숙)은 비록 체포당하지 않았으나, 그 당(黨, 민보당)의 무리들이 각처에 흩어져 방을 걸고 있으므로 그들을 격파한 뒤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유시(酉時)와 술시(戌時) 쯤에 각처에 피난하는 사람들이 거꾸로 달려가 통보한 말뜻이 몹시 다급했는데, ‘허(許, 허문숙)와 황(黃) 두 적이 갑자기 괴산읍 관청에 있으면서 창고에 있는 군물(軍物)을 점고(點考)하여 내가고, 강제로 군사 무리[士衆]를 모아 방을 걸고 명령을 시행하되, 도인(道人) 1명 이상을 체포한 사람에게는 천금(千金, 많은 재물)의 상을 주고 잡아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안성(安城) 관부의 명령 시행도 그같이 하였다고 하니, 도인의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이 참혹한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주(驪州) · 진천 · 이천의 읍에서는 지평(砥平)의 맹감역(孟監役, 孟英在)이 주관하였고 안성읍과 양지현에는 본읍의 이영종(李永從)이 주관하였는데, ‘정취(情趣)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맞아 응하고, 위협하여 권세로 모집하는 일은 주된 의도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도인들을 모조리 죽이려는데 있을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그 화를 당한 사람이 어찌 억울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억만 대중들이 일시에 몹시 격분하여 함께 죽기로 굳게 맹세하여 파할 수 없는 것이 방휼의 형세와 같습니다. 도리[蚌道]에는 순리와 역리(逆理)가 있는데, 스스로 바른 길로 돌아간다면 기필코 모조리 죽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명부(明府, 수령이나 현령)가 도임한 후로 날마다 체문(帖文)을 내려 자상히 사리를 알아듣게 잘 타일렀으나, 변화가 없는 이 백성들을 밤낮으로 근심하였습니다. 아! 이 생령(生靈, 백성)들이 감히 귀화하지 않고 있으니, 난의 근본을 깊이 생각해 보면, 허물이 ≪함부로 도민을≫ 살육하는데 있습니다.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명부가 그 연유를 묘당(廟堂)에 보고하여 간악한 무리를 토벌하여 백성들을 보호한다면, 아무리 천억만 대중이라 할지라도 일시에 해산할 것입니다. 이 점을 살펴주시기를 삼가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