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맑음 [甲午十月初一日晴]
양호도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의 대략에, “요즘 듣자니, 비도 무리가 청주성을 침범하여 겨우 격퇴시켰으나 장차 다시 쳐들어올 염려가 있다고 한다. 이 전령이 도착되는 대로 즉각 화급히 보고하라. 만일 혹시라도 지체되어 기회를 놓치면, 당연히 사율(師律, 軍律)이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필요한 군수품은 이천 · 여주 · 음죽 · 양지 4개 읍의 공납(公納)에서 취하되, 이문(移文) 내용에 의하여 물품을 내주라는 뜻으로 탁지아문(度支衙門)에 공문을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10월 2일 맑음 [初二日晴]
용인 직동(직곡)과 김량 장터 두 곳에서 붙잡은 동도 이용익(李用益) · 정용전(鄭龍全) · 이주영(李周英) · 이삼준(李三俊) 등 4놈을 결과(結顆)한 일과 그 죄목을 갖추어 순영과 순무영과 군무아문에 논보(論報)하였다.
○ 대관인 윤희영(尹喜永)과 별군관인 이겸래(李謙來)가 병정 160명을 인솔하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 송파(松坡)에 있는 일본군 병참(兵站)에서 병정 21명이 내려왔다.
○ 안성군수가 보낸 이문(移文)에, “동도가 청주를 침범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본 죽산부에 주둔하고 있는 외로운 군사로는 군대를 더 첨가해 주기 전까지 경솔하게 움직이기 곤란합니다”라는 뜻으로 순무영 · 군무아문과 순영에 첩보(牒報)하였다.
10월 3일 맑음 [初三日晴]
용인 직동(직곡)과 김량 장터에서 동도들을 수색하여 체포할 때 애쓴 공로가 있는 장수와 병졸에게 우선 상을 주겠다는 뜻으로 책자를 만들어 군무아문과 순무영에 논보하였다.
○ 대관인 이규식(李圭植)과 별군관인 윤지영(尹摯榮)이 병사 150명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 당일 해시 무렵에 서이면(西二面) 도촌(陶村)에 사는 양민 이윤선(李閏善)이 시급히 알리기를, “본 면의 노루목[獐項]에 사는 우성칠(禹成七)은 본디 거칠고 사나운 사람으로 함께 동도에 들어갔는데, 우리 형제가 그 도를 배반했다고 하면서 우리 형제의 집을 허물었습니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병정을 내보내어 그를 즉시 붙잡아 와서 구금하였다.
○ 용인의 직동(직곡)에서 동도 4놈을 결과(結顆)했던 일과 음죽현(陰竹縣)에서 군기(軍器)를 분실했던 일, 그리고 진천(鎭川)의 군기를 탈취당하고 그 곳 현감이 결박당했던 일 등과 동도를 포획할 때에 맨 선두에서 애썼던 장수와 군졸들에게 포상(褒賞)을 논의하는 일 등을 순무영에 아울러 보고하였다.
10월 4일 맑음 [初四日晴]
묘시 무렵에 일본 병사 20명이 왔다가 장호원(長湖院)으로 길을 떠났다.
○ 당일 신시 무렵에, 지난 밤에 잡아와 구류한 죄인 우성칠에게 캐어 물어 범죄의 실정(實情)을 알아냈는데, 과연 그는 동학도의 거괴(巨魁)였다. 때문에 즉시 결과한 후에 ≪그 전후의 사실을≫ 낱낱이 열거하여 삼영문(三營門, 三軍門)에 보고하였다.
10월 5일 맑음 [初五日晴]
별군관 조편(趙翩)과 교장(敎長) 오순영(吳順永)이 병사 70명을 인솔하고 본읍(本邑, 竹山)의 지경인 남일면(南一面) 주천(注川) 등지로 가서 비도(匪徒, 동학농민군) 5명을 잡아와서 구류시켰다.
10월 6일 맑음 [初六日晴]
동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장리(將吏)를 파견하여 사방으로 정탐해 보니, 충주의 무극(無極) 장터와 진천의 구만리(九萬里) 장터 두 곳에 모인 자들이 몇 만명인지를 알 수 없으나, 본읍에서 그 두 지역과의 거리는 50리였다. ≪그들을≫ 토벌하여 잡기 위해 대관인 박영호(朴永祜) · 김진풍(金振豐), 별군관인 이겸래 · 윤지영(尹摯榮) 및 교장인 오순영 · 추광엽(秋光燁) · 박성희(朴聖熙) · 양기영(梁基英) · 김명산(金命山) · 송치응(宋致應)이 2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당일 사시(巳時)경에 진천의 광혜원과 구만리 등지로 출발하여 ≪동도를≫ 두루 토벌하고 체포하였다.
10월 7일 아침에는 맑았다가 저녁 때 비가 조금 내림 [初七日朝晴暮小雨]
군사를 내어 진천의 광혜원과 구만리로 보내어 ≪동도를≫ 두루 토벌하여 체포하였던 연유를 순무영과 군무아문 및 순영에 치보하였다.
○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에, “출정한 장수와 병사의 군량미와 마초(馬草, 말먹이 풀)는 경기도와 충청도 두 도신(道臣, 관찰사)이 앞뒤로 연이어 운송할 것이다. 수요의 많고 적음은 해당 군영(軍營)에서 알리기를 기다렸다가 접응(接應)할 일이다. 의정부에서 초기로 윤허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충청도와 전라도 두 관찰사에게 공문이 하달되었다. 각각 쓰이는 군량과 말먹이 콩[馬太]은 실제 계수(計數)에 따라 요청하여 쓴 뒤에, 군수로 사용한 곡물의 수량을 낱낱이 모두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어 치보하라”고 하였다.
○ 이어 도착한 전령에, “선봉장이 통위영(統衛營)의 병정 2중대를 거느리고 출발하므로, 영관(領官) 직위 이하는 그의 지휘[節制]를 받도록 하라. 혹시라도 기회를 놓쳐 군율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 이어 도달한 전령에, “대군(大軍)이 이제 출발하려 한다. 듣건대, ‘유지(有志)의 선비로 군사의 선두에서 힘을 다해 돕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니, 본 군문은 그들로 하여금 힘을 발휘하게 하라”고 하였다.
○ 출진(出陣)하는 참령관 원세록에게 도달한 전령에, “출정한 장수와 병사들의 군량과 말먹이 콩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앞뒤로 이어 운송할 것이다. 수요의 많고 적음은 해당 군영에서 알려주기를 기다렸다가 접응할 일이다. 의정부에서 초기로 윤허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두 도의 관찰사에게 공문 지시가 내려졌다. 동일한 군량과 말먹이 콩은 셈한 수효에 따라 요구하여 사용한 뒤에, 군수로 사용한 곡물 수량은 낱낱이 다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어 치보하라” 라고 하였다.
○ 또 전령에, “원세록 선봉장이 통위영(統衛營) 병정 2중대를 거느리고 방금 출발하였으니, 영관 이하는 그의 지휘체계를 따르고 혹시라도 기회를 놓쳐 군율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전령 내용에 의거하여 모두 거행하겠다는 뜻으로 보고하였다.
○ 순영의 감결 내용에, “양호도순무영의 관문에 의거하여 감칙(甘飭)하는 바이다. 본읍에서 어떠한 종류의 공곡(公穀)과 공전(公錢)을 논할 필요 없이 병정의 소대(小隊)마다 쌀 1섬[石]과 소 1마리씩을 반드시 본색(本色)으로 마련하여 바친다. 그 후의 실제 수효는 공납(公納)하는 형편에 따라 맞비겨 감한[會減] 내용을 의정부 및 해당 군영에 직접 보고하라. 또한 영문(營門)에도 알리라”고 하였다.
○ 지난 1일의 보고에, ‘군수용 돈을 집행해 쓰겠다’는 일을 탁지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題辭)에, “보고한 사실에 따라 관문을 내려 보냈다. 각 읍에서 서로 공문을 주고받으며[枚移] 군인 수효와 곡식의 수량과 날짜의 수효 등을 미루어 사용하라. 이를 일일이 구별하여 적고 책자로 꾸며 알려옴으로써 주고받을 것을 맞비겨 감(減)하는 자료로 삼을 일이다. 수확하여 건조한 곡식을 본읍에 취하여 주었던, 갑오년조[甲午條]의 세곡(稅穀, 나라에 조세로 바친 곡식) 중에도 비용을 줄일 방도를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 “본 죽산부에 주둔한 외로운 군대로는 군대를 가볍게 움직일 수 없다”는 당일 보고에 대해, 순무영은 “죽산과 안성에서 이미 그곳으로 향한 병사 수효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잇따라 지원군을 또 내보낼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 도착하면 안성과 서로 호응하고 지원하리라 생각되는데, 어찌 형세가 초라함을 걱정하는가? 군사는 수가 많은 데 있지 않고 시기를 결단하여 승리하는 데 있다. 적과 대치하여 꾀를 냄에 멀리 헤아릴 게 아니요, 청주 영으로 가려면 먼저 광혜원(光惠院)을 말끔히 하고 기회에 따라 용단을 내려야 한다. 또 큰 진을 거느린 장수가 며칠 내에 길을 떠나려면 반드시 의당 절제(節制, 지휘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 그날 자시 무렵에, 싸움터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이 진으로 돌아와 군대의 예절로 알현하고 고하기를, “소장(小將)들이 어제 영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광혜원으로 갔는데, 날이 어두워져 계속 전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여관에[店] 주둔하기 위하여 동학 무리의 형편을 몰래 알아보니, ‘며칠 전에 구만리에 있던 자들은 충주(음성의 오기)의 무극장터로 옮겨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군대를 재촉하여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과연 비도 수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쫓기기 때문에 지금은 떠나서 괴산 땅 100여리 밖에 있다고 하므로, 즉시 ≪군사를≫ 되돌려 진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10월 8일 맑음 [初八日晴]
순무영에 보고했던 일에 대하여 회답 제사가 4차례 내려왔다. 진천현의 군 병기를 탈취당한 일에 대한 서목(書目)의 회답 공문에, “계속되는 지원이 끊임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군사를 출동하여 토벌하지 않았는가? 군법이 정해져 있으니 자세히 알아 거행하라”는 것이었다. 용인의 직동과 김량 두 곳에서 동학 무리 4명을 결과했던 일에 대한 회답 제사에는, “어째서 모두 목을 베어 매달아 경계시키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음죽현의 군 병기를 분실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일에 관한 회답 제사에, “먼저 광혜원을 말끔히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대저 전투에 임하여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는 일과 동학도를 포획할 때 앞장선 장수와 병졸에 관하여 올린 첩보장(牒報狀)의 회답 제사에는, “이 뒤에 마땅히 포계(褒啓)를 올릴 것이니 그들에게 있는 힘을 다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0월 9일 맑음 [初九日晴]
당일 미시에 비도 무리를 토벌할 양으로 행군(行軍)하여 음성(陰城)과 괴산(槐山) 등지로 향하여 떠났다. 군대를 따라가는 장수와 병졸 및 아전과 장교, 각 관속(官屬)들의 성명은 따로 만든 책에 적혀 있다.
○ 안성군수가 보낸 이첩(移牒)에, “충청병영에서 즉시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폐직(弊職, 자기의 직임에 대한 겸칭)이 장차 군사를 이끌고 해당 관부(官府, 청주)로 달려가려 합니다. 귀부(貴府, 죽산부)에서는 어느 날 군사를 내어 전진하실는지, 자상하게 그 날짜를 지정하여 회답해 주시면 서로 기일을 약속하여 나란히 진군(進軍)하겠습니다. 지평현(砥平縣)에서도 역시 군사를 내어 서로 지원할 뜻이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 첩문(牒文)이 귀부에도 도달하였는지, 아울러 자세히 회답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인편에 보낸 회답 이문에, “비도들이 음성군과 괴산군에 모여 있다고 직접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날 미시에 토벌할 양으로 해당 지역으로 행군하고자 합니다. 귀진(貴陣)은 이미 진천에 있다고 하니, 또한 그곳에서 전진하여 괴산 · 음성 등지에서 회합을 기약하고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웅장하게 성원하는 바탕을 마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그날 30리를 행군하여 음죽(陰竹)의 석원(石院)에서 각 읍에 노문(路文)을 보냈는데, “친군장위영부령관 겸 죽산진토포사가 비류를 쳐서 무찌르기 위해 이달 9일에 죽산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에서 군사를 내어 전진하신다고 한다. 지나가는 각 지역에서는 전례에 따라 지공(支供)할 일이고, 맞이하러 나가서 기다리는[迎候] 등의 절차는 별도로 똑똑하고 민첩한 장리(將吏)를 정하여 미리 먼저 찾아 묻고 거행하라. 지공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재의 시세[時價]에 따라 낱낱이 지불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공전(公錢, 公金)을 논할 것 없이, 1개 읍마다 3만 냥씩 일정한 수대로 각각 그 지방의 머무는 곳[站所]에서 준비하여 기다려라. 마련해 바친 돈은 탁지아문에 서류를 꾸며 보고하여 갑오년조[甲午條]로 공납할 세금 중에서 계산하여 감해줄 것이다. 군대 규율이 정해져 있으니 따로 신칙(申飭)하여 거행한다는 뜻으로 행하(行下)하라. 그 중에서도 밤을 보낼 곳의 횃불과 군대가 건널 나루가 있는 곳의 튼튼한 배 수효는 넉넉히 준비하고 기다려라”고 하였다.
원역기(員役記)10월 장관(將官) 이하의 병정 1천 명의 이름10월 소와 말 모두 60필
그날 밤에 군진(軍陣)을 따라 온 포교(捕校) 등에게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학도를 붙잡아 들이라 하였다.
10월 10일 맑음 [初十日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어젯밤에 명령을 받든 장교와 나졸(羅卒)들이 붙잡아온 동도 17명을 진 앞으로 압송(押送)해 와서 하나하나 엄중하게 자세히 캐물어보았다. 혹은 그 도를 배반한 자가 있었고, 혹은 협박을 당하여 모임에 나갔다가 몰래 도망쳐 돌아온 자들이었다. 접주나 접사 등으로 무거운 죄를 범한 자는 1명도 없었다. 그래서 귀화시켜 본성(本性)을 돌이키라는 뜻으로 일일이 깨우쳐주고 아울러 모두 놓아 보냈다.
≪군대가≫ 즉시 출발하여 무극장터에 이르러 정탐꾼을 만나볼 양으로 먼저 괴산에 있는 군관인 윤지영(尹摯榮)에게 갔다. 사실을 대략 들어보니, ‘괴산읍의 온 성이 동도가 불을 질러 잔혹한 피해를 입었고 다친 사람도 많다’고 하였다. 저들이 곧바로 보은(報恩)으로 달려갔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이내 40리를 가서 음성읍에 도착했다. 지방관인 윤필(尹泌)이 5리 밖까지 나와 맞이하고 동헌(東軒)으로 들자고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잠 잘 곳을 작청(作廳)으로 옮겨 정하고 잤다. 내일 아침에 청안(淸安)의 길을 경유하여 곧바로 청주(淸州)로 가 지원해주려고 노문(路文)을 바꾸어 청안과 청주에 명령을 내려 알려주었다.
≪그날 밤≫ 촛불을 켜고, 이러한 사유를 순무영과 군무아문 및 순영에 치보하였다. “이달 9일 미시(未時)에 비류를 토벌하려고 행군하여 음성 · 괴산 등지로 향해 간 연유를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그날 본읍으로부터 30리 거리에 있는 음죽의 돌원점(乭院店)에 머물러 숙박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10일에는 음성현에서 머물러 잤습니다. 동학도들의 거취 상황을 탐지하여 들어보았는데, ‘이달 6일에 괴산성 전체를 불태워 파괴하고 이어 청주 등지로 향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날 청안으로 전진한 뒤 청주로 향하여 호응하여 도와줄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 여주목(驪州牧)의 공형(公兄) 등이 보낸 문장(文狀)에, “본읍에 나누어 책정한 군수전 2만 냥을 방금 배정하였으므로, 며칠 내로 수납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10월 11일 아침에 맑았다가 해질녘에 비가 옴 [十一日朝晴暮雨]
어제 삼영(三營, 순무영 · 군무아문 · 경기영)에 보낼 보고장에 대한 서류를 3차례 꾸며, 장교인 홍춘실(洪春實)에게 내어주고 죽산의 공형이 있는 곳으로 발송하였다.
○ 청안현에 도착하여 머물러서 숙박하고 당일에 행군한 거리는 40리였다. 이 고을 현감인 홍종익(洪宗益)이 보러 와서 정성껏 대접하였다.
○ 기찰포교(譏察捕校)들이 잡아들인 동학도는 송병권(宋秉權)과 곽영식(郭永植) 부자(父子)였다. 이 때문에 자세히 캐물어 조사하고 취초(取招)해 보니, 송병권은 음성 매란동(梅蘭洞)의 접주였다. 그는 이웃에 사는 박반(朴班)에게 쌀 100석을 강제로 정해 놓고 억지로 받아냈던 증서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물(贓物)과 접솔(接率)의 성명이 적힌 문건 및 정성껏 쓴 사통(私通) 1장을 함께 내주면서 저지른 범죄 사실의 전후를 이미 자백하였다. 이 때문에 그날 진시(辰時) 무렵에 그 읍 큰길 왼편에서 그를 총포로 쏘아 죽였다. 그 연유를 순영 · 순무영 · 기무아문에 치보하였으며, 기찰포교 김성련(金性連) 등에게 500냥을 시상하였다.
○ 삼영문(三營門)에 아뢰기를, “이달 10일 음성현에 머물러 숙박하고 11일 청주를 향해 출발하여 지원하러 간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그날 행군이 청안현에 이르러 머물러 숙박하였습니다. 상부의 명령을 듣고 떠나거나 머무르겠습니다. 청주병영에 치보하여 명령 내려 알려주시면, 기다렸다가 떠나던지 머무를 요량입니다”라고 하였다.
○ “친군장위영부령관 겸 죽산진토포사는 첩보합니다.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에 따라 본영(本營, 청주병영) 지원차 이달 9일 음성현에서 행군하여 지금은 청안에 도착하여 머물러 자려고 합니다. 이에 명령을 듣고 나아가던지 머무르던지 할까 하여 연유를 치보합니다”라고, 그날 신시(申時)에 청주병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안성의 병사가 어제 이미 와서 머물러 있으니, 즉시 달려와 군대를 합쳐 의논해 처리하라”고 하였다.
○ 안성군수가 보낸 이문(移文)에, “폐직(弊職)이 순무영의 지시 명령을 기다렸지만, 귀진(貴陣)에 응원하는 일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회답 공문을 즉시 보냈는데, “귀 이문을 통하여 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폐직이 순무영의 명령에 따라 비류를 토벌하려는 차에 괴산으로 향하였습니다. 음성에 도착하여 살펴 물어보니, ‘비도가 그곳에서 이미 흩어졌다’ 했으므로, 구원하러 가는 길에 지금 청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청안현에 보낸 관문에, “행진소(行陣所)에 군수용으로 쓸 엽전 6천 냥을 화급히 청주에 실어 보내되, 혹시라도 일을 지체하여 서로 간에 불화가 생기지 않게 하라. 또한 탁지아문에 보고하여 갑오년조의 공납(公納) 중에 계산하여 감할 것은 감하라”라고 하였다.
10월 12일 맑음 [十二日晴]
청안현에서 길을 떠나 즉시 청주로 향하는 길에 경리청 영관 성하영(成夏永)이 보낸 이문을 읽어보니, “전날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진군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까닭을 순무영에 모두 보고하였더니,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않고 지원을 지체한다’ 제사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 청주지역 쌍교동(雙橋洞)의 노근(路近)에 있는 산외동(山外洞)의 동장(洞長) 장사익(張士益)이 의리를 내세워 알려주었다. 그 부근 마을인 석화동(石花洞) · 관암성(官巖城) · 동성(東城) · 서성(西城) · 토산리(土山里) 등에서 각각 쌀 5,6말씩을 내어 주었다. 쌍교동에 와서 기다렸다가 ≪마을 주민들이≫ 밥을 짓고 탕국을 끓여 보내주어, 온 군대를 먹였다. 또한 남초(南草, 담배) 1매(枚) 씩을 내어 모든 사람을 접대했으니, 그 뜻이 매우 가상(嘉尙)하다. 또 10리를 가서 청주 경계의 묵방리(墨坊里)에 도착하자, 본주(本州)의 병영(兵營)에서 소를 잡고 밥을 지어 와서 온 군대를 먹였다. 초경(初更, 저녁 7시~9시)에 병영 앞 5리쯤에 이르렀다.
본영에서 초관(哨官)을 보내어 맞아들여 위로하고, 경리청에서 출진한 영관 성하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맞이하며 위로하였다. 또 본영의 장리(將吏)가 와서 전하기를, “직접 성으로 들어가는 군사는 군령에 따라 성 안으로 따라 들어가 진남영(鎭南營)에 공장(公狀)을 바치고 병사(兵使, 병마절도사)를 알현한 뒤 물러나 숙박할 곳으로 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오위장(五衛將)인 김충식(金衝植)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은 후, 본영의 영장 및 공비(工裨)가 내방하였다. 또 영관 성하영이 찾아와 함께 병영으로 나아가 적을 토벌할 형편을 논의하였다. 그 후에 병마절도사가 정성을 다하여 술을 권하였고, 각기 막소(幕所)로 돌아왔다. 아침 무렵에 기찰포교 등이 동도 4놈을 잡아 바쳤다. 따라서 정세와 상황을 조사하여 물어보니, 3놈은 협박을 받고 잠깐 따라다니다 도리어 그 도를 배반한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무죄로 밝혀져 그들을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놈은 떡과 대추 등의 건량(乾糧, 말린 양식)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가 말하길, “장내리(壯內里, 보은에 있는 장안마을)에 가서 압령(押領)할 군기의 짐을 싣고 왕래하였습니다” 했기 때문에, 체포하여 데리고 청주병영에 도착하였다.
○ 거리를 계산해 보니 50리였다.
10월 13일 맑음 [十三日晴]
삼영문에 첩보하기를, “나아가거나 머무를 생각으로 청주병영에 공문을 꾸며 보낸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방금 도착한 청주병영의 제사(題辭)에, ‘안성의 군사가 어제 이미 ≪청주병영에≫ 이르렀다. 합병(合兵)을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으므로, 이달 12일 청주성에 들어와 주둔해 잤습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아침밥을 먹은 뒤 보은 장내리에 ≪있는 동학도들을≫ 소탕하려고 청주에서 출발하여 상당산성(上黨山城)의 뒷고개[嶺]를 넘었다. 그 고개는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하고 길이 위태로우며 꼬불꼬불하였다. 또한 몹시 길고 멀어 사람과 말이 피곤하였으니, 매우 가여워 보였다. 이 재를 넘어 몇 리를 가는 길에 부모 상중(喪中)에 있는 어떤 소년을 만났다. 한 주민이 탁주(濁酒) 두 동이[二盆]를 내어 놓으며 말하길, “집 이을 때 쓰려고 마침 빚어 놓은 술이었는데, 대군이 이곳을 지나가므로 삼가 이를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선물이 풍족한 여부를 어찌 논할 필요가 있으랴? 그의 정성을 생각하면 극히 가상한지라, 군사들에게 명하여 골고루 나눠 마시게 하였다.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김은동(金銀同)’이라고 했다.
○ 40리 길을 가서 미원(米院)의 장터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적도들이 있는 곳과 점점 가까워졌다. 또한 들으니, ‘경기 · 호서의 적도가 앞길에 모두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적을 만나면 우선 알려줄 효유문(曉諭文) 1벌을 미리 작성하였는데, 이는 먼저 깨우쳐 알게 한 후에 토벌하는 의리를 보이는 데 쓰려는 것이다.
효유문(曉諭文)
“친군장위영부령관 겸 죽산진토포사 이(李)는 여러 동학도들에게 깨우쳐 알리노라.
≪너희들이≫ 9월에 보내온 편지에는, ‘만일 허문숙(許文叔)의 당을 쳐부수고 나면 뿔뿔이 흩어져 돌아갈 터라서 다시는 감히 지존(至尊, 임금을 공경하여 칭함)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 말을 믿고 허문숙의 당을 무찌르기를 기다렸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무찌른 지 며칠이 지났는 데도 오히려 해산했다는 기별이 없다. 길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을 모아 들어보니, ‘남녀가 짐을 이고지고 노인과 어린이를 부축하며 이끌고 보은에 한데 모여 도무지 서로 흩어질 낌새가 없다’고 한다. 이 무슨 소리인가? 일의 현격한 차이가 이와 같이 심한가? 의혹스러운 점이 없지 않으나, 이는 모반하려는 무슨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가?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몹시 의심쩍구나. 하지만 자상히 일러주는 일을 꺼릴 수 없어 이 벽보[揭帖]를 보여주노라.
대저 대장부가 일을 거행하려면 반드시 도량과 마음이 넓게 트여 정대(正大)함이 맑은 하늘과 밝은 해 같고, 맑게 갠 날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 같아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세상에 이름을 날려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숨기고 허황됨이 심한가. 내가 너희들에게 말 한 마디 해주려고 한다.
사(使, 이두황)는 본래 한성(漢城)의 한 무부(武夫)로, 외람되게 발탁되어 자목(字牧)의 관리로서 외람되게 토벌하여 편안케 하는 지위에 있으니, 항상 걸맞지 않은 두려움이 있을지 절실하여 오직 고개 숙여 심신을 닦는 정성에 힘썼다. 오늘날 너희들의 괴이쩍은 행위가 실로 많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따름이다. 너희들의 괴이쩍은 행위는 다음과 같다.
一. 비록 허(許, 허문숙의 당)를 무찌른다고 하였을지라도 관청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서 기전(畿甸, 경기도)의 군사라 칭한 일이 첫 번째다.
一. 도법(道法)을 거짓 훔쳐 아랫사람을 잡도리하지 못하고 선량한 이들에게 해악을 끼친 일이 두 번째다.
一. 그것으로 인하여 국과(國課, 나라의 조세)가 완전하지 못한 일이 세 번째다.
一. ≪너희들이≫ 고슴도치 털같이 많이 모이고 멧돼지처럼 돌진하여, 임금께서 밤낮없이 정사에 힘쓰심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네 번째다.
一. 도(道)는 본래 인도하여 돕고 함양(涵養)하고 교화시키되, 자연스럽게 이루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을 속이고 억눌러 협박하며 백성들에게 강요하여 죄과(罪科, 죄의 조목)에 빠지게 한 것이 다섯 번째다.
一. 평등을 거짓으로 일컬어 명분(名分)을 훼손시킨 것이 여섯 번째다.
一. 기괴(奇怪)스러운 말과 일로 우매(愚昧)한 백성을 현혹시킨 일이 일곱 번째다.
一. 천진(天眞)함을 빌어 마음속의 계략[機關]에 이용하고,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속임수와 욕심 부리는 일이 여덟 번째다.
一. 무리를 모아 할거하고 위복(威福)을 스스로 마음대로 한 것이 아홉 번째다.
一. 기수(氣數)를 망령되이 말하여 스스로 반역죄를 범한 일이 열 번째다.
인민 된 자가 이와 같은 10조의 대벽(大辟) 죄를 범하고 능히 법망(法網)에서 도망할 자가 있으랴? 사람 수효가 너희들보다 많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 위에 너희들보다 더 많은 수효가 있다. 마음속의 계략이 너희보다 기이함이 없을 것이라 믿지 마라. 그 위에 너희들보다 기이한 자가 있다.
또 너희들이 소위 말하는 도와 덕에 대해서 따져 물어보자. 너희가 일컫는 도와 덕은 곧 ‘경천(敬天)’이라 말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함)’이라 말한다. 이는 다 오도(吾道, 유교)에서 훔쳐간 지류(支流)로써 따로 하나의 깃발을 세운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여기에만 정신을 모으고 딴 패역(悖逆)한 거사(擧事)가 없었다면, 조정에서 어찌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겠느냐. 너희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가짜 명칭으로써 망령되이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너희들이 하는 행위를 돌아보면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조목을 나열하여 알아듣도록 타이르는 바이다. 국[羹]을 맛보는데 어찌 꼭 솥에 있는 음식 전체를 맛볼 필요 있겠는가?
다만 ‘경천’ 두 글자를 들어 말하자면, 과연 하늘의 형체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갖가지 물건마다 하늘이 형체를 나누어준 형체가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하늘의 자취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모든 일마다 하늘이 자취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많은 풀과 나무가 떼지어 나오고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이 축축한 기운으로 인하여 태어난다. 따라서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지 않음이 없는지라 자연스럽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과 팔조(八條) · 구법(九法)이 하늘의 자취를 본받아 그것을 따라 수양하지 않음이 없다.
도교와 불교에서 찾아보면, ‘대도(大道)는 무상(無相)하므로, 안으로는 항상 진성(眞性)이 무위(無爲)하고 밖으로는 그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또 ‘도를 도라 할 수 있지만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덕을 덕이라 할 수 있지만 늘 그러한 덕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또 ‘빈 산에 사람이 없어도 시냇물이 흐르고 꽃이 피며 달은 봉우리 중턱에 숨고 바람은 태허(太虛)에 숨쉬다’ 등의 이야기는 모두 지극한 것이라서,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억지로 문자(文字)를 세우고 무리하게 이야기를 지어내 그렇게 말한 것 뿐이다.
지금 너희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여 비교해 보면, 말은 허황되고 행동은 비적의 무리들이다. 이는 하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하늘을 공경하는 태도가 아니다. 공부한 것이 올바르지 못하여 바른 길로 입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 수행 득도에 지장이 있어서 그러한가? 아니면 도리를 모르면서 단지 마음속 계략으로써 표준을 도덕에서 빌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고 싶어서인가? 몹시 의혹스럽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작태는 편파적이고 어두운 행동이 아닌 것이 없고, 유도(儒道)를 거짓 존숭(尊崇)하면서 실은 그 도맥(道脈)을 어지럽게 하였고, 불교를 거짓 배격하면서도 가치 없는 것들을 가져다 썼다.
하나의 단(壇)을 마음대로 세워 온 나라를 요사하게 유혹하고 병기[兵革]를 동원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것을 놔두고 주벌(誅伐)하지 않는다면, 임금의 위엄이 어디에 있으리오. 사(使, 이두황)가 거느린 군사가 비록 1여(旅, 旅團)이지만, 조련이 정통하고 숙달되었으며 병기가 또한 예리하다. 하물며 거역과 순종의 형세가 대등하지 않고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의 구분이 이미 분명함에 있어서랴.
왕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행군하니, ≪산천의≫ 초목이 두려워 떠는데, 너희들 중에 나라의 군대에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자가 있다면 시험삼아 ≪앞에서≫ 멈추어 막아 보아라. 아직 모르지만 마른 가지와 썩은 나무처럼 꺾이는 날에는 옥과 돌을 구분하지 못할(玉石俱楚)터인데 어떻게 잡초인 낭유(莨莠, 강아지풀. 사악한 사람의 비유)를 구별하랴? 앞뒤로 유고(諭告)와 체지(帖紙)를 내렸는데, 너희들을 몹시 가여워하고 사랑하며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한결같이 회개하지 않고 갈수록 더욱더 점점 늘어 퍼지니, 너희들을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이와 같이 장황하게 되풀이하여 타이른 후에도, 만일 잘못을 바로 깨달아 병기를 관아에 수송하고 무리를 시골 마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비록 뼈가 대포(大礮)에 맞아 부서지고 살이 날아오는 탄알에 맞아 문드러지더라도, 다시는 감히 지하에서도 원한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먼저 깨우쳐 알리고 후에 토벌하는 의리로써 보루(堡壘)에 임하여 또 보여주노라. 각자 마땅히 모든 사정을 자세히 알지어다.”
○ 10월 13일 미원 장터에 경리청군의 행렬 후미가 도착하였다. 밥을 먹은 뒤 생각해 보니, 비도들이 만일 임금의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흩어져 도망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내 곧바로 행군하였다. 또 20리를 가서 청산(靑山) 지경의 사평(沙坪)에 도착하니, 보부상 20명이 자원해서 군대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 일행의 사람과 말이 저녁밥을 먹지 못해서 지치고 굶주린 자가 대다수였다. 또 밥을 지어 고루 먹이고 비로소 행군의 대열을 이루었다.
○ 청주에 도착하여 주둔해 잔 보고서는 따라온 사령(使令) 박광엽(朴光燁)을 정하여 죽산(竹山)으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것을 서울에 보내도록 하였다.
○ 그날 저녁에 죽산의 사령 강명손(姜明孫)이 각 항의 문서와 장부를 가지고 읍에서 미원으로 내려왔다. 도착한 곳에서 봉함을 뜯어보니, 9월부터 10월 초순까지의 조보(朝報) 9봉과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 2개가 있었다. 전령 내용에, “영군(領軍)이 정벌하러 나간 지 이미 며칠이 지났는 데도, 진군하여 ≪적도를≫ 무찔러 없앴다는 거사를 아직 듣지 못했다. 비류들을 방자하고 제멋대로 굴게 했으니, 어찌 이와 같은 사리와 체면이 있단 말인가? 일본 육군보병중위(日本陸軍步兵中尉)인 시라키 세이타로(白木誠太郞)와 소위인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가 그 중대를 통솔하고 내일 아침에 진발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도착함을 기다렸다가 맞이해 대접하고 힘을 합하여 기필코 큰 공을 세워 아뢰는 것이 좋겠다. 그 군사의 전진과 후퇴, 배치와 관리하는 절차는 그 사관의 지휘를 오로지 따라주어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나 혹은 겁먹고 후퇴하여 도피한 자가 있거든, 군율(軍律)이 더 없이 준엄한 사실을 자세히 알게 하라.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혹여 털끝만치라도 소홀한 실수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
○ 10월 9일에 온 전령 하나도 참령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이 가져온 것으로, 내용은 동일하였다.
○ 순영에서 보내온 감결에, “의정부 관문에 따라 본읍 군량미 150석을 영(營)에서 보통 때와 다르게 갈라 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공문이 도착하면 바로 색리(色吏)를 정하고 영문(營門)으로 보내어 ≪군량미≫를 수령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 순무영에서 보내온 제사(題辭)에, “선봉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할 때 그 지휘를 받는 일로 전령하였다. 또 군량미와 말먹이 콩은 그 실제 수효에 따라 우선 요구하여 쓴 뒤 책자로 만들어 치보(馳報)하도록 전령하였다. 아울러 이달 초7일에 도착했던 일의 상황에 대한 회답 제사로 겨우 또 전령이 있었으니, 유념하여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 음죽(陰竹)으로 옮겨 온 죄인 박만업(朴萬業)을 결과(結顆)했던 사실에 대한 회답 공문에, “이런 비류는 특별히 더 샅샅이 조사하여 법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 군무아문에서 보낸 제사에, “진천에서 보낸 이문은 논보(論報)의 사실에 근거하여 회답공문을 보내니, 그렇게 알라”고 하였다.
○ 동도가 움직이는 정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장리(將吏)를 사방에 파견하고 ≪그들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2개 중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이달 6일에 진천의 광혜원과 구만리 등지로 향하여 간 상황에 대한 회답공문에, “연이어 더 발병(發兵)하여 ≪동도를≫ 일일이 무찔러 없앤 뒤에 치보하라”고 하였다.
○ 동학무리 우성칠(禹成七)을 결과했던 일에 대한 ≪순무영의≫ 회답공문에, “잘 알았다”고 하였다.
○ 비류를 사로잡을 때에 선두에서 싸웠던 장수와 병졸을 기록한 책자의 첩보장을 올리니, 회답 공문에, “책을 만들어 바쳤거니와 상을 주는 등급은 마땅히 넉넉히 베풀도록 하라. 그리고 ≪비도들을≫ 별도로 더 잡도리하여 잡아들인 후에 사실을 알리라”고 하였다.
○ 당일 저녁 사평(沙坪)에서 탐색하여 알아보니, 동도가 그 근처에 많이 있었다. 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보은 땅 길곡(吉谷)과 중치(中峙)에 이르러, 두 마을을 포위하였다. 동도 김해경(金海京) · 김기환(金基煥) · 문종화(文鍾華) · 문희영(文喜榮) · 남판용(南辦用) · 전만철(田萬哲) · 문종흥(文鍾興) · 이태우(李泰友) · 정종길(鄭宗吉) · 문학만(文學萬) · 김윤영(金允榮) · 박만업(朴萬業) · 송민용(宋敏用) · 최일봉(崔一奉) · 이기원(李基元) · 김두봉(金斗奉) · 송계인(宋啓仁) · 조인이(趙仁伊) · 이한인(李漢仁) · 조한길(趙漢吉) · 원석만(元石萬) · 송헌세(宋憲世) · 신석용(申石用) · 김석재(金石才) · 김기동(金基東) · 조석봉(趙石奉) · 김석희(金石喜) · 조한석(趙汗石) · 서수영(徐壽榮) · 이원중(李元中) · 정동길(鄭東吉) · 신두적(申斗赤) · 이학이(李學伊) · 이성관(李聖寬) · 송봉래(宋奉來) 등 35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말미나 휴가를 청한 등짐장수[負商]와 행군 대열을 따라온 포교들이 체포하였다. 길곡점(吉谷店)에 당도하니 밤은 이미 깊어져 추운 기운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잘 곳을 정하여 숙박하는데 여관[店]이 비좁아서 일행이 모두 방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장리(將吏)와 군졸들은 모두 서리를 맞으며 한데서 주둔했다. 보기가 몹시 안쓰러워 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웠다.
○ 밤낮으로 행군한 거리를 계산해 보니 80리 길이었다.
10월 14일 맑음 [十四日晴]
길곡에서부터 거북고개[龜峴]를 넘어 구기점(龜基店)의 5리쯤에 이르러 동도 35놈을 일일이 취조해 보니, 그 중에 김해경(金海京)은 그 무리 중에 맡은 임무는 없었지만 따라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김기환은 성찰(省察)을 맡아 ≪백성들을≫ 속여 미혹한 행동을 멋대로 했으며, 이태우는 접주를 맡아 무리 100여 명을 거느렸다. 문학만 · 이원중 · 최일봉은 봉도(奉道)로써 정신이 팔려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서수영 · 조인이 · 원석만 · 김석재 등 4놈은 이천(利川)에 함께 거주하면서 미혹한 행동으로 왕래하며 취회하였다. 조한길은 집강을 맡아 도리에 어그러진 일을 멋대로 하였으며, 조한석은 본읍의 관포수(官砲手)로서 기꺼이 ≪동학에≫ 들어가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앞의 12놈은 그 여관 큰길 왼편에서 총포로 쏘아 죽여 민중들을 경계시켰다. 나머지 23놈은 모두 위압을 당해 들어갔으며 활동한 기간이 오래지 않아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아울러 비류를 배반하여 선행을 따르고 생업으로 돌아가 삶을 즐기라는 뜻으로 깨우쳐주며 놓아 보냈다.
○ 또 행군하여 보은의 큰 고개에 이르러 붙잡아 온 동도 강동회(姜同會)와 이희영(李喜永)은 함께 집강을 맡아 자기 멋대로 행패부린 자들이었다. 장물(贓物)로 금고(金鼓)를 각각 1좌(坐)씩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관 앞에서 총포로 쏘아 죽였다. 또 보은의 함림역(咸林驛)에 다다라 붙들어 온 동도 안성민(安性敏, 接主)은 검무문(劍舞文)과 안성의 접솔(接率)의 궤반미(饋飯米) 2두(斗)의 표지를 장물로 간직하였기 때문에 그 역 앞에서 총포로 쏘아 죽였다.
이내 20리 거리의 장내리에 도착하여 지리의 형상을 대략 관찰해 보건대, 산과 내가 험악하고 광대하게 열린 형국에 마을 모양이 즐비하게 보였다. 큰 가옥 하나가 주산(主山, 옥녀봉) 아래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최법헌(崔法軒, 최시형)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했다. 마을 앞 공한지(空閒地)에는 막사(幕舍) 400여 채를 지었다. 간간이 수사 탐지해 보니, 혹은 징과 북이 있었고 혹은 창[戈戟]이 있었다. 징과 북은 부셔버렸고 창은 관속(官屬) 중에 진중(陣中)을 맨손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내 주었다. 이른바 초막(草幕)과 마을 집들은 모두 불을 질러 비류의 소굴을 태워버렸다. 수색하여 붙잡은 동네 사람 3명은 거기서 즉시 총포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한 동도 박공선(朴公善)은 본디 안성 놈으로 음성(陰城)의 군기(軍器, 병기)를 탈취해 갈 때와 괴산을 불질러 함락할 때에 오고가며 모였던 자이다. 따라서 또 보은의 풍취점(風吹店)에서 총포로 쏘아 죽였다. 보은읍에 들어와 개인 가정에서 숙박하였는데, 본관(本官, 보은군수)인 이규백(李圭伯)이 보러 왔다.
○ 그날 나갔다 돌아온 거리를 계산해 보니 40리 길이였다. 다음 번에 장내리에 들어갈 때의 행군은 청주의 군병이 앞쪽에 서고 경리청의 군병이 뒤쪽에 있으면서 의각(猗角)의 형세를 이루고 본영(本營)을 성원(聲援)하도록 하여, 장내리로 들어갈 것이다.
10월 15일 맑음 [十五日晴]
별군관 이겸래(李謙來)와 김광수(金光洙)가 왔다.
○ 이천부에서 보내온 이첩에, “방금 도착한 이문과 탁지아문의 관문에, 군수용의 돈 당오평(當五坪) 3천 냥을 장교를 선정하여 실어 보내라”고 하였다. 그 즉시 보낸 회답 이문[回移]에, “당오전 3천 냥은 숫자대로 도착하였다. 쓰이는 곳에 따라 다시 문이(文移)할 것이니, 군수전을 넉넉히 확보하여 낭패당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 보은의 동면(東面) 성족(城足)마을에 사는 수사(水使)의 아들 김민대(金民大)가 대추를 넣어 찐 떡 1고리[楛栲→栲栳]를 군중에 바쳤으니, 그 마음이 매우 가상하다.
○ 순무영에 첩보하기를, “이달 초9일에 ≪죽산을≫ 출발하였습니다. 13일 해시에 받은 전령에 따라 비도를 무찌르는 계책과 진퇴하고 조도(調度)하는 절차를 명령에 따라 거행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순무영 및 군무아문에 첩보하기를, “군대를 모아 진군할 생각으로, 이달 12일에 청주에서 머물러 잔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13일 진시 무렵에 보은 장내리 동도 소굴로 출발하였는 바, 진남영의 장졸들은 앞쪽에 서고, 본영의 장졸들은 가운데 있고 경리청의 장졸들은 뒤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청주에서 상당산성 뒷 고개를 넘어 미원점(米院店)의 40리에 이르렀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후에 경리청의 장졸은 그대로 그 점에 머물렀다가 뒤에서 응원할 것입니다. 본영 및 진남영은 이내 즉시 행군하여 삼경(三更) 때에 20리 거리의 보은 중치(中峙)에 도착하여 동도 35놈을 포획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대로 전진하여 5리쯤 거리의 길곡점에 도착하니, 야색(夜色)이 이미 끝나 먼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장차 거북고개를 넘으려 하였으나, 고갯길이 가파르고 험하여 적의 정세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내 군사들을 머물러 밤을 지내고 하늘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넘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이미 잡아온 동도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접주와 및 진장(眞贓)이 있는 자 12놈을 가려내어 결과하고 그 밖에 협박당하여 따라다니는 여러 놈은 즉시 놓아 보냈습니다. 지나오는 길인 보은의 대암점(大巖店) 및 함림역에서 또 직임(職任)이 있는 자와 진장이 있는 동도 3놈을 아울러 바로 결과하였습니다. 진남영의 장졸들은 보은읍으로 곧장 가서 주둔하였습니다. 본영의 장졸들은 장내리로 곧장 들어갔더니, ‘동도가 이미 이번 11일에 청산(靑山) 땅으로 옮겨 모였다’고 합니다. ≪장내리≫ 상황을 점검해 보니, 비류가 사용하던 초막은 400여 곳이었고 그 마을의 호수는 수백여 호였습니다. 하지만 온 마을이 이미 다 텅텅 비었습니다. 약간 거주하고 있던 20여 놈은 우리의 행진을 바라보고 이미 산으로 올라가 도주했습니다.
온 마을을 수색하여 3놈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결과하였습니다. 그 초막과 민가를 불사르고 땅굴까지 소탕하였습니다. 보은읍으로 돌아가는 길에 붙잡은 동도 1놈은 거괴(巨魁)를 따라다니면서 행패부린 자였기 때문에 또한 바로 결과하였습니다. 결과한 여러 놈의 성명 및 죄목과 장물은 아울러 장부에 기록하여 책자로 꾸며 올려 보낼 것입니다. 당일 유시에 보은읍에 도착하여, 삼영(三營, 장위영 · 경리청 · 진남영)의 장졸들이 같이 주둔하여 잤습니다. 앞으로 전진하여 토벌하는 계책은 상의하여 진군한 뒤에 다시 치보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보은 읍재(邑宰) 보은군수가 소 3마리를 잡아 모든 군인들에게 호궤(犒饋)하였는데, ≪군사는≫ 이내 그 읍에 머물렀다.
10월 16일 맑음 [十六日晴]
아침밥을 먹은 후 보은에서 출발하여 취치(鷲峙) 큰 재를 넘어 동정(東井)을 지났다. 남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회인(懷仁)읍에서 주둔하여 잤다.
○ 보은의 앞 점을 지나 전령을 붙여서 동도를 효유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유문(曉諭文)
“효유하는 바이다. 나라에서 백성 사랑하기를 마치 적자(赤子)를 보호하듯이 하므로, 혹시 죄를 범했더라도 허물을 고치면 다시 양민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류가 창궐하였으나 그 면모를 일신하는 모양이 보고 싶어 오히려 뢰정(雷霆) 같은 위엄을 너그럽게 하고 여러 번 효유하여 경계하셨다. 지금 이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진실로 그 모인 군중을 해산하려는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무리 접주와 접사라 하더라도 당초의 마음을 회복하여 각각 돌아가 생업에 안정을 찾으면, 이 또한 양민이니 반드시 용서를 베풀 것이다.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 안심하고 생업에 힘쓸지어다. 혹여 꼬리를 끊거나[斷尾]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를[噬臍] 하지 말도록 하라.”
○ 포교 등이 잡아 바친 동도는 보은의 신촌(新村)에 사는 방갑준(方甲俊), 대암(大巖)에 사는 권망아지(權亡兒之), 이천의 근곡(芹谷)에 사는 홍복용(洪卜用), 보은의 안양(安良)에 사는 이광직(李光直), 안성의 기좌촌(其佐村, 其는 基의 오기)에 사는 신덕보(申德甫), 충주의 모두원(毛豆院)에 사는 안재용(安在用), 용인의 천곡(泉谷)에 사는 이청학(李靑學) 등 7놈이다. 그러므로 자세히 심문하여 사실을 밝히니, 7놈이 함께 청산의 비도가 도회(都會)한 곳으로부터 돌아온 자들이었다. 때문에 방갑준 · 권망아지 · 홍복용 · 이광직 · 신덕보 · 안재용 등 6놈은 모두 보은 앞에 있는 큰길가에서 총포로 쏘아 죽여 민중을 경계시켰다. 이청학은 공초(供招)에서 말하길, “만약 내가 청산에 가면 마땅히 비적의 괴수를 지목하여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선 포교와 포졸로 하여금 그를 압송케 하여 회인에 이르렀다.
○당일 유시에 양진(兩陣, 경리청과 진남영) 영관과 본영의 영관에게 보낸 청주병영의 전령을 받았는데, “현재 남적(南賊,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올라와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에 진을 쳤는데, 세력이 거대하다고 한다. 순영문 사또(충청감사)께서도 연이어 알려왔고, 조정에도 아뢰었다. 그러니 부득불 가서 구원해 주어야 한다. 화급히 진을 돌려 곧바로 삼현령(三懸鈴)으로 가서 지원하라”라고 하였다. ≪전령을 전하고≫ 돌아가는 심부름꾼 편에 공문을 작성하여 말하기를, “오늘 유시에 받은 전령에, ‘남적이 올라와 노성과 논산에 진을 쳤으니, 화급히 군진을 돌려 곧바로 삼현령으로 가서 구원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진남영 및 경리청의 장졸들로 선발진을 삼아, 오늘은 문의(文義)에 주둔하여 잘 것입니다. 본진의 장졸들은 후응(後應, 뒤쪽에서 응원함)을 삼아, 오늘은 회인에서 주둔하여 자고 앞으로 공주(公州)로 향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본 고을의 현령이 소를 잡아와 전 군대를 호궤하였다.
○ 회인 동면(東面) 동정리(東井里)의 동민들이 올린 글에, “어제와 오늘 양일간에 대진(大陣)이 행차하였지만, 군령이 상설(霜雪)과 같이 삼엄하여 거주한 백성들이 안도하고 닭과 개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장수의 명령이 내려진 바 이지만, 효유한 일은 분부하신 대로 낱낱이 효유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제공하는 약간의 물품은 휘하에 충분히 드릴 수 없지만, 작은 정성이나마 될까 하여 감히 대추 7두(斗)를 삼가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그에 대한 회답 제사에, “요즘처럼 백성들이 적 때문에 동요하는 때에 가상하구나. 군사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의리가 호소하는 말에 나타나 있으니, 가히 아름다운 일엽청(一葉靑)의 품격을 지니고 있도다. ≪그 마음을≫ 더욱더 확충하고 진일보하여 정도(正道)에 어긋난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삼가하라”고 하였다.
○ 당일 저녁 회인읍에 있으면서 각 읍에 노문(路文)을 보냈는데, “이달 17일 인시 무렵에 회인읍에서 행군하여 전진할 것인 바, ≪군대가≫ 통과하는 길 각처에서는 전례에 의거하여 ≪필요한 군수품을≫ 제공하라. 그리고 미리 ≪군대를≫ 맞이하러 나가는 일 같은 절차는 별도로 정했으니, 똑똑하고 민첩한 장리(將吏)가 미리 먼저 탐문하여 거행하라. ≪군수물품≫ 제공에 드는 경비는 시가에 따라 낱낱이 모두 상하(上下)하는 뜻으로 내려 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밤을 보낼 곳의 횃불과 군대가 건널 나루가 있는 곳의 튼튼한 배 수효는 넉넉히 준비하고 기다려라. 짐바리 소 30마리와 기복마(騎卜馬, 승마나 짐바리용의 말) 5필을 미리 먼저 준비하고 기다려라. 원역기(原役記): 상관(上官) 이하 병정 1천 명, 소와 말 모두 60필”이라고 하였다.
○ 당일 술시에 충청감영의 관문을 그 영의 편비(褊裨)가 회인읍으로 가져왔는데, “충청도관찰사 겸 순찰사는 상고(相考)하는 바이다. 지금 들어보니, ‘귀영(貴營, 장위영)의 군사가 괴산으로 나갔다가 회군하여 청주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호남의 비류가 많은 수효를 거느리고 와서 은진 땅을 침범하였으므로, 폐영(弊營, 감영) 사기(事機)의 위태로움이 매우 짧은 시간에 달렸다. 경군(京軍)의 지원이 아직 이르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절박하다. 이 공문을 달려가 전하니, 공문을 보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해 주어 나랏일을 함께 구제하는 의리를 보이기 바란다.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고 군사는 더디고 빠른 것이 있으니, 바라건대, 부디 달리 유념하여 혹여 잠시라도 늦어지지 않게 하라. 아울러 귀영의 군사가 폐영에 군병을 조달하여 보낸다는 뜻을 금방 조정에 아뢰었다. 만일 시일을 지체하여 때에 미치지 못하는 한탄이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군율에 적용될 것이다. 이같은 긴급한 상황을 비장에게 맡겨 알리니, 스스로 잘 헤아려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충청감영 비장 편에≫ 회답을 보내기를, “순무영의 전령에 따라 지원차 군대를 이끌고 청주병영으로 내려왔습니다. 경리청 장졸들은 이미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영(三營, 장위영 · 경리청 · 진남영)이 회합하여 의논해 결정하기를, 보은 장내리에 있는 동도 근거리 소굴을 먼저 소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달 13일 청주에서 길을 떠나 40리 거리에 있는 미원점에서 저녁밥을 먹은 뒤, 경리청의 장졸은 이내 그 점에 머물렀다가 뒤쪽에서 응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본진(本陣, 장위영)과 진남영 두 진은 곧바로 전진하여 25리길 구현(龜峴) 재 밑에 다다랐는데, 이미 밤은 깊고 길이 험난하여 적의 정황을 헤아려 알 수 없었습니다. 재를 넘지 못하고 군대를 머물러 밤을 지내며 동천(東天)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행군하였습니다. 진남영 장졸들의 진은 보은읍에 머물렀으며, 본진은 행군하여 장내리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동도는 이달 11일에 이미 청산(靑山) 땅으로 옮겨 모였다고 하며, 약간 남아 있던 수십 명은 우리 행진을 바라보고 또한 벌써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수색하여 3놈을 찾아내어 현장에서 결과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이 생활하던 초막 400여 곳과 민가 200여 호를 전부 불사르고 땅굴을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군대를 되돌려 보은읍에 이르렀는데, 삼영(三營)의 장졸들이 모여 주둔하여 자고 청산 땅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저녁에 청주병영에서 온 전령을 보니, ‘감영에 화급한 일이 생겼으니 속히 군대를 되돌려 가서 수호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감영 아래로 가기 위해 즉시 회군하여, 경리청과 진남영 두 진은 선진(先陣)이 되어 오늘 문의현(文義縣)에 주둔해 자고, 본진은 후진(後陣)이 되어 오늘 회인현(懷仁縣)에 머물러 자기로 하였거니와, 오늘 술시에 ≪충청감영으로부터≫ 받은 관문에, ‘호남의 비류가 올라와 은진 땅을 침범하여 폐영의 위태로운 사기(事機)가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즉각 와서 구원하라’ 하시므로, 관문 말씀에 따라 달려가 지원하기 위해 내일 새벽 군대를 출동시킬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10월 17일 맑음 [十七日晴]
어제 체포해 온 동도 이청학과 가는 길에 붙잡은 최윤백(崔允伯) · 최명백(崔明伯) 등 3놈에게 정세와 상황을 자세히 심문해 보니, 납 탄환[鉛丸]과 화약통 등의 진장(眞贓)이 탄로 났다. 그러므로 문의 앞길에서 그들을 모두 총포로 쏘아 죽이고 이내 출발하여 묵현(墨峴, 먹티)을 넘었다. 30리를 행군하여 문의읍에서 점심을 먹고 이내 떠나 홍현(紅峴)을 넘어서 공주(公州)의 지경에 있는 부강(芙江)의 30리 거리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였다. 경리청 군대 역시 월동(越洞)에 주둔하여 잤다.
○ 당일 오시에 도달한 충청감영의 관문에, “귀 영관(領官)이 병정을 거느리고 본영으로 이동하여 온 의미를 2차에 걸쳐 이미 ≪조정에≫ 아뢰었다. 또한 도순무영(都巡撫營)에도 아울러 보고하였으니, 필시 윤허하실 줄 안다. 관문이 도착하면 곧바로 행군길을 배나 재촉하여, 본영 아래로 이동해서 함께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본영의 중요한 고비가 전에 비하여 위급함이 조금 덜하지만, 행여 결정짓지 못하여 주저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 계문까지 내린 마당에 만일 두 마음을 품는 일이 있다면 군율에 적용될 것이다. 우리 본영이 처한 바 또한 말할 수 없이 황송하게 여긴다는 점을 잘 헤아리고 그대로 따라 시행해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10월 18일 맑음 [十八日晴]
부강에서 행군하여 20리 거리에 있는 연기읍(燕岐邑) 봉암(鳳巖)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다. 죽산에서 포교 양괴산(楊塊山)이 내려왔다. 그가 건네준 순무영의 전령에,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는 일은 군율이 더없이 엄중하다. 그런데 지금 듣자니, 한 곳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흉악한 무리들의 세력만 치열하게 하였다. 어찌 이와 같은 사리 체면이 있는가? 일상의 법률로 헤아려 보아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기에, 이렇게 또 영을 전한다. 그러므로 바로 며칠 전에 내렸던 명령에 따라 기필코 그들을 쳐서 무찌르는 일이 좋을 것이다. 만일 이전 관습을 따를 경우엔 결단코 의당 법률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매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화(星火)같이 나아가 토벌한 전후 사실을 곧 치보하라”라고 하였다. 원 영관(元領官, 원세록)이 있는 곳에도 동일한 전령을 보냈다.
○ 이달 13일에 청주병영에서 출발하여 14일에 보은에서 머물러 숙박했던 상황 보고에 대한 청주병영의 회답 제사에, “계문(啓聞)하려던 차에 ≪보고가≫ 도착하였다.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체계가 자못 조리 있었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이미 충청감영의 급보가 있었으니, 군대를 나누는 것은 더욱 신중히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의 상황을 상세히 살펴 나아가거나 머무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비도가 괴산 땅에 모여 있다고 하여 금방 군대를 진군했던 상황에 대한 초9일 보고에 대한 장위영의 회답 제사가 도착하였다. 이달 8일 동도 박봉학과 이돈화를 결과한 상황 보고에 대한 순무영의 회답 제사가 도달하였다. 그리고 괴산 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갔던 사실에 대한 회답 제사에, “바야흐로 선봉진과 일본 병대가 불일내(不日內)에 내려가야 하는데 아직 주둔해 있으니, 며칠 전에 전하였던 분부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다. 동일에 보고하였던, 동도를 무찔러 소탕했던 사무 논보장(論報狀)에 관한 회답 제사에, “선봉진과 일본 병대가 이미 출발하였으니, 그들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가 며칠 전에 전달한 분부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다.
○ 당일에 도착한 순영(경기감영)의 감결에, “탁지아문에서 여주목에 나누어 배정한 군수전을 다시 각 읍에 분배하므로, 다시는 여주에 전적으로 책임지우지 마라. 수원 엽전 1천 냥, 여주 엽전 1천 냥, 용인 엽전 600냥, 음죽 엽전 400냥, 남양(南陽) 엽전 800냥, 양지 엽전 200냥”이라 하였다.
○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첩보하기를, “이달 16일에 도착한 관문에 의거하여 군대를 되돌려 행군한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거니와, 17일에 회인현에서 행군하여 부강에 이르러 주둔하였습니다. 그날 밤 해시 무렵에 도달한 관문에, ‘배나 빨리 행군하여 충청감영으로 오라’고 하여, 행군하여 연기(燕岐) 봉암동(鳳巖洞)에 이르러 주둔하고 있으면서 명령을 받은 후에 나아가거나 머무를 생각입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삼영문에 보고하였다. “이달 14일에 본진이 보은의 장내리로 직접 들어가 동도의 소굴을 모조리 불살랐습니다. 그 뒤에 돌아와 보은읍에 이르러 경리청과 진남영 두 영의 장졸들과 더불어 주둔해 잤던 연유를 벌써 치보해 드렸습니다. 동도가 청산과 영동(永同) 등지에 모여 있다고 하여, 16일에 해당 지역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회인현에서 주둔해 잤습니다. 당일 유시 쯤에 청주병영의 전령에, ‘현재 남적(南賊,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올라와 노성과 논산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데, 그 세력이 거대하다’고 하였습니다. 순영문에서도 연이어 또 ≪조정에≫ 계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화급히 군진을 되돌려 며칠 내에 가서 호위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당일 술시 쯤에 받은 충청감영의 관문에, ‘호남의 비류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은진을 침범하여 폐영(弊營, 충청감영)의 상황이 매우 위태로우니, 관문 도착 즉시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여, 나라를 구제하는 의리를 보여 주라. 그리고 귀영의 군사를 우리 군영으로 징발(徵發)하여 왔다는 뜻으로 금방 조정에 계문까지 하였다. 만일 시일을 지체하여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탄식이 있을 경우에는 군율에 적용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17일에 회인현에서 출발하여 60리 거리에 있는 공주의 부강점(芙江店)에 다다라 머물러 잤습니다.
그날 밤 해시 무렵에 도착한 충청감영의 관문에, ‘귀 군영의 영관이 거느리는 병정을 본영으로 징발해 왔다는 뜻으로 이미 두 차례에 계문한 바 있다. 아울러 도순무영(都巡撫營)에도 보고하였으니, 반드시 윤허해 주실 것이다.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행군 길을 갑절이나 재촉하여 감영 아래로 달려오라’고 하였으므로, 그 다음날 18일에 부강에서부터 행군하여 연기의 봉암동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네에서 공주까지의 거리가 40리라고 하기에 명령을 받은 다음 나아갈지 머무를지를 결정하고자 충청감영에 공문을 꾸며 알리고 이내 ≪연기 봉암동에≫ 머물러 잤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 16일 청주병영에 보고하기를, “장차 공주로 향하려는 계획에 대한 회답을 받았는데, 공주의 사정이 몹시 다급하다고 하여 화급히 달려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저녁에 본읍(연기읍)의 이방인 임동석(林東錫)에게 소식을 들어보니, “본읍의 군병기를 이달 15일 저녁에 동도들에게 탈취당하였습니다. 본 현감인 김광현(金光鉉)은 집이 연산(連山)에 있는데, 조금 부유하게 산다는 소문이 나서 동도에게 붙잡혀 은진으로 갔습니다. 인질을 대신하여 데리고 갔던 통인(通引)은 엽전 250냥을 빼앗기고 비로소 몸만 빠져 나와 돌아왔습니다”라고 했다.
10월 19일 흐림 [十九日陰]
이내 봉암동에 군사를 머물르면서 동도를 붙잡았는데, 청주의 가자평(加自坪)에 사는 정석복(鄭石卜), 청주의 아로개(阿路介)에 사는 장봉운(張奉云), 연기의 월리(月里)에 사는 이진영(李臻榮)이었다. 이들의 실정을 상세히 조사해보니, 정 · 장 두 놈은 화약과 철환(鐵丸)을 장물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가 놈은 접주를 맡고 있을 때의 문적(文蹟)을 두루마리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동네 앞에서 아울러 결과하였다.
○ 서울 삼영(三營)에 보고하러 갈 문서를 꾸미고 노잣돈 20냥을 양괴산(楊塊山)과 박문흥(朴文興)에게 도로 돌려보냈다. 잠시 후에 포교(捕校) 윤영인(尹永仁)과 이상근(李上根)이 병교(兵校, 將校) 홍병익(洪秉益)의 문안수본(問安手本, 안부 묻는 편지)을 가져와서 바쳤다. 죄인 이공익(李公益) · 엄사명(嚴士命) · 오영묵(吳永黙) · 최상복(崔尙福) 등을 잡아 수금(囚禁)한 일에 대한 편지를 겸하여 가져왔다. 따라서 ‘달리 더 엄중하게 수금하라’는 뜻으로 제송(題送)하였다.
○ 이달 9일에 군대가 출발하여 그 후 이리저리 구불구불 잇따라 행군하여 18일에야 연기의 봉암동에 도착하였던 까닭을 선봉진(先鋒陣, 이규태진영)에 치보하였다.
○ 또 삼영문에 보고하기를, “이달 16일에 보은에서 군대가 출발한 이후로 결과하였던 동도의 성명과 죄목 및 장물을 현록(懸錄)하여 책자로 꾸며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술시(戌時)에 포교 이윤여(李允汝)와 서덕현(徐德玄)을 선정하여 노잣돈 20냥을 주어 죽산(竹山)으로 보냈다.
○ 16일에 진으로 가기 위하여 행군한 사실을 금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가 당일 유시에 도부하였다.
○ 명령을 받고서 나아가거나 머무르려고 ≪군대를≫ 연기의 봉암동에 주둔시켰던 상황을 ≪금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즉시 군대를 진군하기 위하여 유성(維城, 維는 儒의 오기) 장터에 군대를 주둔하고 아울러 청주의 병관(兵官)에게 명령을 내려 알려주고 힘을 합쳐 무찔러 사로잡으라.”고 하였다.
○ 금영에 보고하기를, “즉시 도부한 제사(題辭)로 말미암아 전령을 한 차례 청주의 병관에게 달려 보내기 위하여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나성(羅城)나루로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임무를 띄고 온 장교인 김홍기(金泓基)와 담당 아전[色吏]인 안광호(安光鎬)가 보고한 말을 직접 들어보니, ‘그 나루의 배는 ≪배삯을≫ 넉넉히 주지 않으면 시급하게 건너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군과 마주한 많은 수효가 저 나루에 흘러가 스스로 기회를 놓쳐 낭패를 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주병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영 아래로 함께 나아가 면전에서 분부를 받든 후에 군대를 전진시킬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술시에 청주병영에 보고하기를, “명령을 받고 나서 진군하거나 머무르려고 연기의 봉암동에 주둔했던 사유를 금영에 첩보하였습니다. 곧 도착한 회답공문에, ‘즉시 행군하여 유성 장터에 주둔하고 아울러 청주병영에 알려 힘을 합해 ≪동학농민군을≫ 무찌르라’고 하였거니와, 병영에 주둔해 있는 장위영의 교장과 병정 및 진남영의 장졸들은 즉시 출발시켜 아울러 유성으로 나아가 군대를 함께 주둔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0월 20일 맑음 [二十日晴]
당일 묘시에 도착한 청주병영의 감결에,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에 모여 있는 비도를 장차 토벌하기 위하여, 본영의 병정은 내일 출정하여 북면(北面) 양지리(陽地里)에 주둔할 것이다. 본진(本陣) 역시 이 지로(指路, 指路軍)와 보발(步撥)을 따라서 양지마을 유진소(留陣所)로 와 약속을 정한 뒤 출발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 충청감영에 보고하기를, “청주의 병관(兵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감영 아래로 진군하려는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20일 묘시에 도착한 청주병영의 감결에, ‘목천 세성산에 모여 있는 비도를 장차 토벌하기 위하여, 본영의 병정은 내일 출진하여 북면 양지마을에 주둔할 것이다. 본진 역시 이 길을 인도하는 보발을 따라서 양지마을 유진소로 와 약속을 정한 뒤 출발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천의 적은 양 군영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장차 매우 방자한 짓을 저지를 우려가 있습니다. 또 서울 통로와 아주 가까워 선봉군의 앞길에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먼저 서울 가까이에 있는 적을 쳐부수어 우리 군사의 위세로 사기를 북돋은 후에, 싸움에 이긴 군사로써 앞으로 계속 달려 남쪽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군대의 기세는 마치 높은 지붕에서 물병을 쏟는 듯한 이로움을 얻을 것이고, 적병의 사기는 파죽지세(破竹之勢)의 칼날을 맞이하는 시기(時機)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리병(經理兵)이 이미 병영 아래 머물러 막아 지키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에 비하여 조금 나은 편입니다. 지리는 멀고 가까움이 있고 형세는 긴급함과 느슨함이 있음에, 먼저 가까운 자와 긴급한 자를 무찌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멀리 있는 자와 느슨한 자를 토벌하는 것이 아마 일의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 선봉진과 미리 기일을 약속하고 모이는[迎合] 터라서 금방 목천을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닭이 울 때 금영에서 전용 파발을 통해 서찰(書札)을 보내왔다. 편지 사연에, “받들어 살피매, 영감께서 체력이 건강하시다니 위안이 된다. 표하신 뜻을 자세히 보니, 일의 중요한 기틀은 이미 ≪조정에≫ 계문하였고 또 선봉진중(이규태 진)에 알렸으되, 다른 의견이 없는 것 같았다. 만일 적은 군병이 걱정되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군사를 합쳐 협공(夾攻)하는 길을 도모해야 한다고 본다. 행여 진에 머무르게 한다면 모름지기 간단히 거느리고 군영에 들어오도록 영을 내림이 어떻겠는가? 거꾸로 미루어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없는데, 어찌 꼭 많은 사람이 이곳에까지 헛걸음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나서 말 나누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라고 하였다.
“선봉진이 어제 천안에 도착했다고 하니, 바야흐로 사람을 보내어 영접할 계획이다. 오늘은 광정(廣亭)에서 숙박하고 만약 길을 빨리 재촉하여 서둘러 가면 반드시 영에 다다를 것 같다. 경리병은 어제 벌써 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 협지
“청주병정은 굳이 영 안으로 들어올 필요가 없다. 만일 각 영이 모두 모여들면 안쪽에서부터 어지럽고 시끄러워질 뿐이다.” 즉시 편지를 써서 돌아가는 인편에 답신(答信)을 올렸다.
○ 당일 진시(辰時)에 봉암(鳳巖)에서 길을 떠나 북쪽으로 10리 길을 가니 바로 청주의 조천 장터(棗川場基)였다. ≪그곳에서≫ 행보상(行褓商, 도붓장수와 봇짐장수) 등이 소를 잡고 술자리를 벌여 전 군사에게 음식을 후하게 베푸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 술대접을 받은 후 10리 길을 가서 청주땅 송정리(松亭里)에 당도하였다. 적의 주둔지에서 20리 거리인데, 대포 소리가 자주 들렸다. 도사(都事) 정지완(鄭志完)의 집에 여관을 정하고 숙박하면서 진남영(鎭南瑩)의 장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당일 신시에 금영에 보고하기를, “청주군병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영 아래로 나란히 나아가 면대하고 분부를 받들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회답 공문에, “비도의 정황을 연이어 더 정탐할 일이다. 주둔할만한 장소에 진을 머물고 선봉장이 지휘하는 일을 기다렸다가 회답 편지를 아울러 쓰되, 본영의 하례(下隷)가 전임(專任)하고 왔다가 이미 목천으로 향하여 갔다는 의미로 문장을 꾸며 사례하라”고 하였다.
10월 21일 맑음 [二十一日晴]
감결에 따라 즉시 목천 양지리로 향한 일에 대한 청주병영의 제사(題辭)에,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고 군사는 허와 실이 있음에 먼저 뱃속의 근심을 제거하여야 한다. 오늘 저녁에 군사를 내어 직접 향하되, 뜻하지 않게 출동하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접응(接應)하라”고 하였다.
○ 이어 도달한 병영의 감결에, “정군(正軍)이 이르는 곳에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은 법률의 근본정신에 중요한 일이라서 반응이 특별히 신속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 없는 평민 중에 혹 침탈을 당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 그러니 다만 행군할 때에 민가에는 절대로 불을 지르지 말고 적의 수괴는 샅샅이 적발하고 백성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적을 경계(警戒)한 사람은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일 인시에 보발(步撥)이 송정리에 와 있어 만났다.
○ 당일 묘시에 죽산에서 내려 온 ≪순무영의≫공문에, “양호도순무영의 선봉진은 상고(相考)할 것. 대진(大陣)이 화부(華府)에 주찰하는 것은 곧 은혜와 위엄으로 비류의 거사(擧事)를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본읍의 경내에 이들 무리의 행동거지가 근래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효유하여 귀화시키는 일 같은 것은 한결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본읍에서 따로 토벌을 시행하여 거괴를 붙잡아 진 앞에 바치고, 위협으로 복종한 자들이 본 경내에서 안심하고 살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고을 힘의 형편상 무력으로 평정하기 어렵다면, 즉시 치보하여 분배받은 군사로 토벌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보낸 순무영의 방시문(榜示文)과 선봉진의 방시문 두 벌은 진서(眞書, 한문)와 언문(諺文, 한글)으로 베껴서 한결같이 효유한 뒤에 거리에 붙여 게시하고,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모르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중한 군무(軍務)라서 군율에 적용될 것이므로 특별히 명령을 내려 거행하라. 이 경우에 관문이 도달한 일시와 거행하고 있는 형편을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에 성화같이 치보하라”라고 하였다.
순무영 방시문 [榜示巡撫營件]
천지가 지극히 어질어도 위엄을 행하여 초목을 말라 죽이는 기운이 있고, 부모가 지극히 자애로워도 노여워하시며 회초리로 매질하기를 더하시니, 이것이 어찌 사랑과 미움에 차이가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진실로 법을 범하면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우리 임금께서는 너희들을 모두 나의 어린 자식처럼 생각하시는데, 감히 반란을 꾸미는 일을 자행하니, 어찌 그리도 양심이 없단 말인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애달픈 생각에 마음에 상처를 입어도 차마 갑자기 노여워하지 않고 은혜로운 말로 깨우쳐 주고 살 길로 인도하여 주는데, 너희들은 우매하고 미련하게 교화되지 않고 패악함이 더욱 방자해지고 있다. 너희들 스스로 생각해보라, 너희들의 죄가 어디로 가겠는가? 너희들은 터무니없는 도참설을 지어내 남을 속이고 요망하고 괴이한 일을 선동하고 우매한 자들을 꾀어 미혹되게 하고, 윗사람과 어른을 능멸하고 범하고, 병기를 도둑질하여 공적인 재물을 약탈하고 성을 공격하여 아전을 해치는 등 이미 반역이 드러났다. 이리하여 마을은 쓸쓸하고 길거리에는 다니는 인적이 다 끊어졌다. 법이 있는 데도 너희들을 용서한다면, 그 또한 누구나 당연히 의심할 것이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 분연히 노여워하시어 크게 군대를 일으키셨다. 바야흐로 장차 신령의 위엄에 따라 우리는 분연한 용맹을 다하여 너희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너희들의 무리를 전멸시킬 것이다. 한번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 너희들을 쫓아서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다 죽인 뒤에야 그칠 것이다.
또한 너희들의 장기(長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동쪽에서 추격하면 서쪽으로 도망가고 남쪽에서 토벌하면 북쪽으로 숨어서,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모였다 흩어지며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의 군대가 사방으로 출동하여, 어디든 가서 섬멸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가득한 큰 그물이 위아래를 넓게 덮어서 문득 부딪치는 곳마다 결려드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빠져나가 탈출하는 것을 용납하겠느냐?
아! 너희들은 이제 다 죽고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어지러운 칼끝과 날아다니는 탄환이 너희 몸에 이리저리 날아들어 거칠고 시들어버린 풀과 넝쿨들이 너희의 뼈를 칭칭 감을 것이다. 너희가 부모가 있다면, 그 누가 봉양을 할 것이며, 너희가 처자가 있다면 누가 편안히 보호하겠는가? 너희들 조상들의 묘소와 친척들은 영원히 버려지게 될 것이고, 집안의 생업은 끝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니, 너희가 목석이 아니라면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우리 임금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자애로우시니 어찌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시겠는가? 너희들 스스로가 죽을 뿐이다.
내가 한 마디 하겠는데, 맹세코 너희를 속이지 않을 것이니, 지금 만약 행실을 고치고 선한 일을 따른다면 곧 법을 범하여도 살길이 있을 것이다. 너희 또한 지각이 있을 것인데, 어찌 이러한 마음이 없겠느냐? 가만히 생각건대 일을 결정한 뒤에도 의심스런 생각이 만 가지나 될 것이다. 집에 돌아가서도 춥고 배고픔이 닥쳐올 것이고, 사람들을 대하면 부끄러움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며, 마을 사람들은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고 관리는 따라다니며 체포할 것이니,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여 탄식하면서 또한 귀화를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해 주고 너희들이 새롭게 귀화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 궁핍한 것을 구제해 주고 수사하여 체포하는 것을 금지하여 너희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거운 일을 하도록 도모해주어 영원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해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홀연히 마음을 돌려 깨우쳐서 혹시라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 너희 수괴가 어질지 못하여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왕법(王法, 국법)이 있는데 용서받지 못하겠는가? 진실로 너희들에게도 또한 같은 심한 원수가 될 것이다. 너희들을 으르고 위세부린 작태가 어찌 끝이 있으랴? 고기글 먹고 가죽자리에 자는 것이 너희들이 즐겨하는 바니, 능히 의리에 분발하고 힘을 합하여 ≪너희 수괴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아 와서 바친 자는, 내가 마땅히 공적을 논하여 상을 베풀 것이므로 애석해 할 바가 없다.
오호라!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고하는 것을 너희는 스스로 헤아릴 것이니, 만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나는 유감이 없다. 너희는 본래 평범한 양민으로 바로 우리의 동포(同胞)지만, 너희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살육할 것이다.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랴. 너희는 각각 잘 알아두어라.
선봉진 방시문 [先鋒陣榜示文]
아! 슬프다. 너희 비류는 모두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들이 배운 것은 무슨 학(學)이며, 너희들이 믿는 도(道)는 무슨 도란 말이냐? 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한 사대부들과 그들의 집안까지도 강제로 무리에 끌어들이고, 밭에서 일하는 농민들도 비록 어리석으나 협박을 하여 한 무리로 만들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남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남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거나 남의 자제를 죽이며, 끝내는 무기를 몰래 빼앗고 수령을 살해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진실로 학(學)의 큰 변괴이고 도(道)의 큰 적이다. 이른바 천주(天主)에게 신령함이 있다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재앙을 줄 것이고, 부적이나 주문에 영험이 있다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다.
치우(蚩尤)가 안개를 뿜어내는 능력이 있었어도 끝내 죽임을 당했고, 장각(張角)이 신을 마음대로 부렸어도 마침내 소멸되었다. 너희들은 본래 이러한 사술(邪術)도 없으면서 터무니없는 말로 떠들고 남을 속여서 겁탈하고 훔치는 칼자루로 삼고 있다.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머리와 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신명의 이치가 없는 일이다.
진작에 군대를 일으켜서 너희 죄를 묻는 일이 당연하지만, 지금 이렇게 은혜로 실오라기 같은 생명을 용서해주는 것은 너희 또한 우리 조상들께서 교화시켜 훈육해온 백성이고, 밝고 인자하신 우리 임금의 어린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오히려 이러한 것을 믿고 스스로 다행하게 여기고 스스로 미혹한 데로 빠져서 감히 조정의 명령을 거절하고 옛날의 악행을 고치려 들지 않고 모여서 떠들고 날뛰며 날로 더욱더 방자하고 패악하게 하니, 귀신이 노여워 한지 이미 오래 되었고 하늘도 싫어함이 또한 간절하다.
아! 너희 수괴(首魁)는 만 번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지만, 너희 무리들은 무슨 죄가 있으랴. 황당 괴이한 말로 서로 속이고 들뜨고 실속 없이 서로 모임에 바람과 비가 피부를 압박하고 추위와 굶주림이 골수(骨髓)에 사무쳤다. 비유컨대, 마른 가지가 화창한 봄날에 저절로 끊어지고 그늘진 벼랑은 태양에 스스로 막힌 것과 같다. 하지만 너희들이 각자 마음을 바로 바꾸고 깨달아 혹시 그 수괴의 목을 함께 베어 와서 군진 앞에 바치거나, 혹 의리를 외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소탕한다면, 이는 정말로 재화(災禍)가 바뀌어 도리어 복이 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아! 콩과 보리 같은 곡식이 이미 익고 무우 배추와 같은 채소를 수확할 때이니, 모두 너희 가정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고 아내와 자식을 편안하게 하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몸은 도끼날 앞에 엎어지고 뼈는 모래사장에 묻히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놀라고 원통한 혼백이 저 어두운 지옥 속에서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희 부모는 마을 문(어귀)에 기대어 바라보며 기다리고 너희 처자식은 문 앞에서 기다리며 울 터인데,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어찌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겠는가? 이 말을 듣고 귀화하라.
○ 당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순무영의 소모관(召募官)인 맹영재(孟英在)가 와서 바친 이문에, “대저 병가(兵家)의 군대 진군은 기밀(機密, 매우 중요하고 비밀함)하고도 중요합니다. 먼저 저 무리들의 임기응변을 정탐하여 그 허와 실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진군하여 공격한다면 이는 예부터 아주 안전한 계책이라고 일렀습니다. 따라서 폐직(본인)이 이번 11일에 병정을 거느린 이후로 즉시 여주 · 이천 · 음죽으로부터 귀부(貴府, 죽산부)에 이르러 접사(接司)를 베고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 안심시켰습니다. 비도가 출몰하는 정세와 상황을 전부 탐지해 보니, ‘그 수괴된 자가 갑자기 ≪그들을≫ 모두 보은 등지에 모이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집안 식구를 불러오게 하여 좋은 말로 훈계하고 깨닫게 하면서, ‘너희들이 각각 그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면 나는 당연히 저 보은에 가서 대면하여 편지를 전해 준 뒤에 교화시켜 잘 있게 해주겠다’라는 뜻으로 권하여 타이르니, 그 가족 중에 4놈이 과연 편지를 써 가지고 왔습니다. 때문에 먼저 그 편지에 네 가지 조목을 써서 단단히 봉하여 바치면서, 혹시 귀 진중(貴陣中)에서 그들을 불러올 훌륭한 계책이 있을는지요. 폐직이 행군할 때 이미 세 사람을 보내어 서로 이름 부르는 것을 근거로 삼아 말하기를, ‘캐물어 듣되, 그 자취를 은밀히 탐지하는데 있으니, 혹여 종적이 탄로가 날 경우에는 세 지경[三境]에서 힘을 다해 보호하여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묘시 끝 무렵에 송정리(松亭里)에서 행군하여 청주 땅 장명동(長明洞)에 있는 승지(承旨) 홍가유(洪嘉裕)의 집에 당도하여 들어보니, “세성산(細城山)은 10리 거리에 있는데, 토착민이 성 안에 쌓아 놓은 보루(堡壘)를 비도들이 빼앗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기세가 두렵고 떨리며 약탈이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일단 그 말을 듣고 도적이 갑자기 도망칠까 염려되어, 검(劍)을 손에 잡고 앞장서서 병사들을 재촉하여 급히 달려가 산 밑에 이르렀다. 적의 형세를 대략 관찰해 보니, 토성(土城)이 산꼭대기에 있는데 둘레가 대략 10리쯤 되었고 깃발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었다. 또한 허다한 적의 무리가 성 주변에 빙 둘러서서 총포(銃砲)를 쏘아 강성함을 과시하였는데, 그 소리가 공중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와 같이 방자하게 날뛰는 광경을 목격하자 분노한 간담(肝膽)이 찢어질 듯하였다. 그래서 용감하게 산으로 뛰어오르며 병정을 독려하여 뒤따르면서, 한편으로는 검을 휘두르고, 또 한편으로는 총포를 쏘아댔다. 그러자 적도들이 ≪우리 군대의≫ 위용과 화염을 보고서 겁을 집어먹고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쳤다. 그 광경이 마치 구름을 걷어치우고 자리를 말듯이 하였다. ≪세성산을≫ 전부 차지했으며,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는 모양은 파죽의 기세였다. 혹은 사로잡고, 혹은 죽이기도 하면서 사시부터 신시 사이에 성화같은 전투로 완전 승리를 거두었다. 그 성으로 들어가 장악한 뒤 그들의 깃발을 빼앗았으며, 버리고 도망친 기계 · 총 · 창 · 징 · 북 · 나팔(喇叭) · 곤장(棍杖) · 전립(戰笠) · 바라(鉢鑼) · 검(劍) · 창[戟, 갈래진 창] · 군막(軍幕) · 가마솥[釜] · 세발솥[鼎] · 쌀 · 조(租, 벼, 겉곡식) · 시초(柴草, 땔나무용의 마른 풀) 등을 대략 거두어 모았는데, 쌓인 것이 산더미 같았다. 또 풀 움막[草窖] 50군데가 있었다. 온 군병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고 바라보는 누군들 어깨를 솟구쳐 놀래지 않으리오. 잠깐 사이에 저녁 햇빛이 서산봉우리에 걸려 장수와 병졸들을 한 자리로 모이도록 하였다. 장명동에서 저녁밥을 지어 와서 온 군병이 배불리 먹고 주둔한 곳에서 밤을 지냈다.
○ 술시 무렵에 금영에서 관문이 도달했는데, 말뜻은 이러했다. “전에 접수한 귀 영관의 문이(文移)에, ‘연기 땅에 도착하여 명령을 받고 나아가던지 머무르겠습니다’ 하였다. 그 때문에 감히 공주와 대전으로 진군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청주병영의 감결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갔으니, 이문에 이른바 ‘명령을 받고 나아가거나 머무르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청주병영을 두고 한 말인가? 문장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진군을 요청하였으니, 도리어 당돌했음을 깨닫고 몹시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다. 방금 순무영의 제지(題旨, 題辭)를 싸 보냈는데, 귀 영관이 순무영의 지휘를 받는지, 아니면 청주병영의 지휘를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비도를 무찌르는 한 가지 일로써 말한다면, 도내의 봉기가 목천 같은 유는 여러 곳이 모두 그러하지만, 전주(全州)를 공격해 함락시킨 전봉준(全琫準)이 가장 큰 거괴이다. 또 공주(公州)는 알려진 중요한 곳이요, 요충(要衝)의 큰 도로인지라, ≪전봉준이 이끄는≫ 적이 있는 곳과 100리 이내의 거리라서 하루와 한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다. 알 수 없지만, 귀 영관이 험한 길을 피하고 평탄한 길로 진군하기 위해 그와 같이 한 일인가? 이에 귀 군대가 나아가거나 머무르는 일은 본영에서 좌지우지할 바가 아니므로, 모두 헤아려 알고 진퇴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 청주병영의 감결에 따라 목천에 있는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목천으로 출발하여 간 연유를 보고한 것에 것에 대한 금영의 회답 공문에, “순무영에서 ‘공주로 가서 구원하라’는 전령이 이미 도달했을 듯하나 그 여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순무영이 명령한 것을 따르지 않고 단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감결을 따랐으니, 이 무슨 곡절인가? 병사의 지론(持論) 때문에 둘로 갈라졌으므로, 그를 파직하도록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 충청병영 · 선봉진 · 금영 · 군무아문 · 기영(畿營) · 순무영에 보고하였다. “이달 18일에 연기의 봉암동에 도착하여, 명령에 따라 나아가거나 머무르려고 충청감영에 공문을 꾸며 보고했던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이달 20일 묘시에 받은 청주병영의 감결에, ‘목천 세성산에 모여 있는 비류를 빨리 토벌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일 사시 무렵에 행진하여 30리 거리에 있는 청주의 송정리에 당도하여 주둔해 잤습니다. 그 이튿날 21일 묘시쯤에 행군하여 바로 목천의 세성산 아래 이르러 지형과 적의 기세 등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성산의 세 방면은 높고 가파르며 한 방면은 조금 평탄했습니다. 보루와 참호(塹壕)는 매우 견고하고 널찍하였으며, 깃발은 숲처럼 늘어섰는데, 총포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자그마한 들에 군진을 주둔함에 진이 동북쪽 토산 위에까지 뻗쳤는데, 군대를 쉬게 한 뒤에 차례대로 진발시켰습니다. 1개 소대는 세성산의 동남쪽 기슭에서부터 총포를 쏘며 돌격하여 올라가고, 2개 소대는 세성산 북쪽 기슭 아래 매복하였으며, 또 1개 소대는 호응하여 지원하려고 토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적과 반나절 가량 서로 대치하다가 우리 병사와 부딪쳐 접전한 끝에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때 우리 병사의 동남쪽 기슭에서 위로 돌격한 자들이 먼저 그 성지(城池)를 얻었고, 북쪽 기슭에 매복했던 자들은 패배해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였습니다. 수 십리를 뒤쫓으면서 더러는 쏘아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기도 하여 완전한 승리를 크게 거두었는데, 시각은 당일 신시 무렵이었습니다. 노획한 전리품은 일일이 숫자를 센 후에 책자로 만들어 첩보할 계획입니다. 이런 연유를 우선 치보합니다.”
○ 당일 술시에 금영의 관문 및 제사(題辭)로 인하여 논보(論報)하였다. “ ≪군대가≫ 목천으로 향하여 출발한 사유의 첩보장을 올렸는데, 이달 21일 술시에 받은 회답제사에, ‘순무영에서 공주로 가 구원해 주라는 전령이 벌써 도착했을 것 같은데, 그 여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순무영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단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감결을 따랐으니, 이는 무슨 곡절인가? 차례로 잇달아 도달한 관문에, ‘지금 순무영의 제사를 싸서 보내준 일로는 알 수 없으니, 귀 영관은 순무영의 지휘(指揮)를 받는가? 병영의 지휘를 받는가? 아니면 험난한 길을 피하여 평탄한 길로 행군하느라고 이렇게 한 일인가? 귀 군대가 나아가거나 머무르는 일은 본 충청감영에서 좌지우지할 만한 일이 아니므로, 잘 헤아려 알고 진퇴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의 관문이 이같이 정중함에 삼가 매우 황송하여 감히 말참견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일은 먼저와 나중이 있고 군사는 급함과 급하지 않음이 있는데, 이미 청주로 달려가 구원하라는 순무영의 전령은 삼가 받들어 행하였으나, 감영 아래로 달려가 구원하라는 전령은 아직 받들어 따르지 못했습니다. 전령에 따라 거행하는 일은 청주병영에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달 19일에 감영 아래로 달려 나아가 면전(面前)에서 분부를 받든 후에, 진군할 계획인 연유의 첩보장을 올렸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제사에, ‘비류의 정세와 상황을 연이어 더 정탐할 것이며, 군진을 주둔할 만한 곳에 머물러 선봉진의 지휘를 대령하라’고 하였습니다. 목천 땅에 모여 있는 비류가 선봉진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또한 서울 통행로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슴과 배의 걱정거리와 같다고 할 만합니다.
토벌의 시급함이 목천에 있고 경리청의 장수와 병졸이 이미 감영 아래로 나아가 있어 막아 지키는 계책이 전에 비해 약간 나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실상을 보고하고 행군해서 먼저 목천 땅의 적을 토벌하여 완전한 승리를 크게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이미 치보하였거니와, 선봉진이 만일 남쪽으로 향하면, 본진 또한 장차 선봉진의 지휘를 받아 나란히 행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순무영에서 보낸 제사도 한 차례 도로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10월 22일 낮에는 맑고 저물녘에는 비가 옴 [二十二日午晴暮雨]
≪군대가≫ 거듭 산성에 모여 탈취했던 군물(軍物)을 일체 한 곳에 모아 수효를 세어 초록(抄錄)한 뒤 책자로 만들었다. 또한 목천에 관문을 보내 영을 내려서, 대기하고 있는 인마(人馬)를 이용하여 ≪노획물≫을 실어 나르도록 하였다.
목천 세성산 적을 토벌하고 얻은 노획물 책자[木川細城山討賊軍實成冊]
조총
140자루 [鳥銃一百四十柄]
창
288자루 [鎗二百八十八柄]
거마철
32건 [拒馬鐵三十二件]
징
5좌 [鉦五坐]
동로구
3좌 [銅爐口三坐]
북
3좌 [鼓三坐]
나팔
2개 [喇叭二箇]
장전
3300개 [長箭三千三百箇]
편전
2000개 [片箭二千箇]
청국 탄환
26궤 반, 26500개 [淸國彈丸二十六樻半二萬六千五百箇]
철 탄알
356000개, 19태 1척으로 만듦 [鐵丸三十五萬六千箇作爲十九馱一隻]
작은 삽
5자루 [小鍤五柄]
큰 삽
5자루 [大鍤五柄]
작은 철화로
1좌 [小鐵爐一坐]
월도
1자루 [月刀一柄]
곡괭이
1자루 [曲光伊一柄]
철 촉롱
2쌍 [鐵燭籠二雙]
잡색 크고 작은 깃발
30면 [雜色大小旗三十面]
철질려
1500개 [鐵蒺藜一千五百箇]
화살촉
2000개 [箭鏃二千箇]
일삽
1개 [日鍤一箇]>
산 위에 쌓아 둔 곡물 수량 [山上積置穀數]
백미 266석 [白米二百六十六石]
정조 367석 [正租三百六十七石]
콩 12석 [太十二石]
보리 8석[麥八石]
소금 3석 [鹽三石]
곡물 합계 656석 [合穀六百五十六石]
추격하여 살해한 자 7명 [追擊殺七名]
포로로 잡아[虜獲] 사살한 자 10명 [虜獲殺十名]
당일 미시에 세성산에 있으면서 사로잡아 처형한 동도의 성명은 이복길(李福吉) · 송치성(宋致成) · 박흥길(朴興吉) · 김흥복(金興福) · 김영손(金英孫) · 설정업(薛正業) · 이영희(李英熙) · 김병구(金炳玖) · 고순용(高順用) · 고성환(高成煥)이다.
○ 북접(北接)에서 유명한 괴적(魁賊) 김복용(金福用)은 사로잡아 체포하여 가두었다.
○ 이달 9일에 죽산에서 출발하여 21일에 목천의 세성산에 이르러 비류를 크게 격파한 연유, 금영의 논보(論報) 제사 의미, 북접의 유명한 적괴 김복용을 생포하여 아직 가두어 둔 일, 노획물을 기록하여 책자로 만든 일 등을 상세히 선봉진에 논보하였다.
○ 완전한 승리를 크게 거둔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비류에게 완전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통쾌한 일이다. 다만 마땅히 전보(轉報)하였거니와, 만일 우두머리를 붙잡지 못하고 단지 그들을 소탕만 하였다면 기회(機會)를 잃은 계획이라고 본다. 노획한 물건의 실제 수량을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어서 성화같이 공문으로 보고하라. 장수와 병졸들이 산 넘고 물 건넌 노고는 참으로 가상히 여겨 감탄스럽다. 호궤(犒饋)하는 절차는 우선 해당 현(縣)에서 풍족한 수량으로 올려 안배하라는 뜻으로 금방 감결을 보내어 명령하였다. 단지 청주병영 관문의 지시에 따라 거행한 것은 서로 ≪견해가≫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당일 유시부터 찬비가 쓸쓸하게 오고 음산한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 군병들이 찬 데서 주둔하여 자니 참으로 가엾게 여기나, 군령(軍令)이 엄중한지라 감히 일을 더디고 느리게 할 수 없다. 대충 풀 움막을 접수하여 비를 무릅쓰고 잤는데, 해시와 자시 무렵에 비가 갰다.
10월 23일 맑음 [二十三日晴]
그대로 세성산에 머물면서 노획품을 기록하여 만든 책자를, 충청감영 및 각 영에 보내어 보고하였다.
○ 명령을 전하는 목천의 공형(公兄)이 초혜(草鞋, 짚신) 300죽(竹)과 고초장(古草醬, 고추장) 10동이[東海]와 간장(懇醬) 10동이와 침채(沈菜, 김치) 30동이를 가져왔는데, 그들을 군진이 주둔한 곳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 당일 진시에 도착한 선봉진 전령에, “지금 노문(勞問, 위문)하려고 본진(本陣)의 참모사(參謀士) 정도영(鄭道永)과 별군관(別軍官) 이종진(李宗珍) · 이필영(李弼榮) 세 사람을 파견하였는 바, ≪동도를≫ 소탕할 때 잔당이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있을 것이다. 추적하여 체포하는 절차는 모두 ≪잔당의≫ 이름을 아는 고을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하고 확정하여, ≪잔당들을≫ 낱낱이 모두 적발하고 염탐하여 잡아와 법률에 따라 시행하라. 무엇보다 급선무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특별히 더 위로하고 도와주며, 각 병정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폐단을 각별히 단속하여 더욱 소란한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 즉시 선봉진에 회답 보고하기를, “방금 받은 전령에 위관(委官)이 내려와 위문한다 하니, 삼가 황송과 감격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남은 도당을 염탐하여 체포하는 일과 백성을 안정시키고 병정을 단속하는 절차는 명령 말씀에 따라 거행할 작정이며, 분부를 받아 진군하던지 머무르려고 아직 세성산에 주둔해 있습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세성산에 있을 때, 부근 각처의 백성들에게 명령을 전달하였는데, “본진이 이번에 이미 세성산에 모여 있는 적도를 격파하고 소굴을 소탕하였으니, 그 또한 족히 백성들을 위해 해독을 제거한 것이다. 위협당하여 도(道, 동학)에 들어간 자는 모두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고 각 마을에서는 해당 동네의 접주와 접사를 잡아다 바쳐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세성산의 비류를 토벌하여 완전한 승리를 크게 거둔 것에 대한 청주병영의 제사에, “듣자니 매우 기분좋은 일이다. 적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멀리 도주하였는데, 공주의 기별 역시 시급하다고 한다. 즉시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라”고 하였다.
○ 청주병영에 보고하기를, “세성산에서 적을 격파하고 노획한 백미 199석과 정조 286석은 본영(本營, 청주병영)의 군수에 보태려고 이미 수송하여 받아서 사용하고 있으며, 노획한 군수품 역시 수송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천안군으로 수송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신시 무렵에 청주의 장명동(長明洞)으로부터 술과 물품(또는 음식물)을 풍성하게 갖추어 군대를 대접하였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 천안군에 보낸 관문에, “세성산에서 노획한 군물을 본읍(천안군)에 수송하는 것은 선봉진의 지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문이(文移)하는 바입니다. 도달하는 즉시 소와 말을 넉넉한 수효로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려 주시고, 관속(官屬)과 민병(民兵)을 다수 선정하여 보내 빠르게 실어가야 합니다. 노획한 백미는 벌써 청주로 수송하였고, 나머지 남아 있는 조포(租包, 벼를 담은 섬)는 본읍에 민병이 있다고 하니, 이를 군량으로 삼으라고 목천현에 영을 내려 알려주고 그것을 본군(本郡)에 수송해야 합니다. 물건이 도착하는 대로 일일이 셈하여 바친 뒤에 실제 수효를 치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유시에 받은 청주병영의 감결에, “어제 공주로 가서 구원하라는 내용의 제사를 보낸 바 있다. 지금 듣건대, ‘비도가 문의(文義)와 옥천(沃川) 파군리(破軍里) 등지에 연락하여 아침 때나 저녁 때 본영에 당도한다’고 한다. 잠시 서쪽으로 향하는 지휘를 돌려서 청주병영의 군병과 함께 청주에 모여 적의 형세를 관망(觀望)한 뒤에 나아가거나 머무르는 일이 좋을 것이다. 공주로의 행군은 비록 잠시 지체되더라도 특별히 우회할 길이 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즉시 ≪청주병영으로≫ 오라”고 하였다.
○ 충청도관찰사의 관문 내용에, “방금 받은 의정부 관문에, 의정부에서 임금의 분부에 따라 아뢰었는데 그 계사(啓辭)에, ‘충청감사 박(박제순)의 전후 장계(狀啓)를 베껴 보고한 내용을 연이어 보았더니, 대비하여 방어할 계책이 없음을 갖추어 진술하고 요청하기를, 순무영 선봉으로 하여금 속히 내려오게 하시고, 지금 청주에 있는 장위영과 경리청 두 영의 영관(領官)도 즉시 와서 구원하게 해 주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충청감영은 요충지에 처해 있으므로 방어와 수비를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순무영에게 성화같이 지시하여 알려주고 날짜를 정하여 가서 구원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한다.’고 전교(傳敎)하셨다. 전교 내용과 같이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관문 내용을 상고하여 시행하되, 본영(충청감영)의 상황이 매우 긴박하니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밤낮으로 진군해 와서 구원하되, 혹여 잠깐이라도 늦어져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 순영과 선봉진영)에 보고하기를, “방금 받은 관문에 따라 한결같이 선봉(先鋒)의 지휘를 좇아 거행하라는 뜻으로 이미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을 받들었는 바, 선봉이 벌써 가까운 곳에 주둔하였다고 하므로 선봉진의 지휘를 기다렸다 거행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이 목천읍에 있을 때에 보낸 문이(文移)의 대략적인 내용은, “압송한 죄인 장돌용(張乭用)과 안천복(安千福)은 함께 이 읍(邑)에 딸린 노령(奴令)으로서 군사 물품을 분실하였을 때, 창고 문을 때려 부수고 본관(本官)을 찾아내었던 자들입니다. 이에 이들을 압송하니 법에 따라 죄를 심리하여 처단하시오. 군사 물품이 쓰이는 데가 매우 많으니, 총과 화약과 탄환 등이 부족함을 헤아려 아시고 필요한 것을 쓰게 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회관(回關)에, “압송한 죄인 장돌용과 안천복 2놈은 문이에 따라 결과(結顆)할 생각이려니와, 우리 군대가 세성산의 적을 격파하면서 노획한 군수품은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천안군으로 모두 실어 보냈고 미처 다 수송하지 못한 것은 납 탄환 뿐인데, 사람을 보내어 실어가시오”라고 하였다.
10월 24일 맑음 [二十四日晴]
≪군대가≫ 그대로 세성산에 머물러 있었다. 당일 묘시에 도달한 청주병영의 감결에, “본진(本陣)의 병사가 청주로 모이는 일에 관해서는 이미 감결로 신칙하였다. 목천의 적은 비록 이미 토벌했지만, 거괴(巨魁)를 붙잡지 못했고 여당(餘黨)이 사방으로 흩어져, 인근 지역에서 폐단을 일으킬 ≪염려가≫ 전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방금 전의(全義) 및 천안 · 직산 · 진천 · 목천 등지에 관문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은밀히 염탐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잔읍(殘邑, 형편이 어려운 고을)의 형편으로는 필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에 특별히 관문을 보내니, 병사 300명을 천안과 목천 사이에 나누어 두었다가 지원 요청이 있을 때 즉시 가서 구원하고 나머지 군사 400명은 이전의 명령에 따라 ≪청주병영으로≫ 거느리고 오라”고 하였다.
○ 즉시 회답으로 청주병영에 보고하기를, “방금 받은 감결은 즉시 거행할 겨를이 없습니다. 군사를 나누고 합하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일은 순무영의 전령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선봉진의 지휘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이는 현재의 직무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지금은 선봉진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절도영(節度營, 청주병영)에서 선봉진에 공문을 보내고서 ≪선봉진이≫ 본진에 명령을 내린 연후에야 거행할 생각입니다. 군대를 나누어 파견하는 일은 함께 고립될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마는 공문을 참작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 정기봉(鄭基鳳)이 목천에 있을 때 보낸 공문을 연이어 받았는데, “납탄[鉛丸]을 실어 오려고 사람과 말을 보내니 넉넉한 수량을 실어 보내주고, 우리가 진중에서 타는 것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번에 노획했던 나귀건 말이건 간에 10여 필을 나누어 보내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돌아가는 인편에 보낸 회답한 관문에, “납탄 1궤와 정제약(精製藥, 정밀하게 만든 화약) 1궤는 위임을 받고 온 인부를 만나 건네주어 수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획한 나귀와 말은 넉넉하지 못할뿐더러, 군중에서 쓰이는 것은 귀하나 우리나 서로 마찬가지라서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납탄 4척(隻)과 화약(火藥) 1궤.
선봉진 표지(標紙)
세성산에서 노획한 군실(軍實)은 모두 의병(義兵)에게 내어주라.
○ 표지에 의하여, 천안의 장교(將校)인 김일환(金一煥)과 의병 수십장(義兵首什長)인 최국보(崔局甫)와 통장(統長)인 강사선(姜士先)에게 내어주고 다짐을 받고나서 알리기를, “저희들이 선봉진 표지를 받고 세성산 적을 무찌를 때 얻은 군사 물자를 후록(後錄)에 의하여 받아갔으며, 만일 중간에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거든 당연히 저희들을 추궁하십시오.”이라고 하였다.
○ 조총 141자루[鳥銃一百四十一柄], 납탄 35척[鉛丸三十五隻], 창 284개[鎗二百八十四箇], 거마적(拒馬的) 36건[拒馬的三十六件], 징 5좌[鉦五坐], 동로구 3좌[銅爐口三坐], 나팔 1쌍[喇叭一雙], 장전(긴 화살) 7부(浮)[長箭七浮], 편전(아기살) 4부[片箭四浮], 큰 삽 5자루[大鍤五柄], 작은 삽 5자루[小揷(小鍤)五柄], 철화로 1좌[鐵爐一坐], 월도 2자루[月刀二柄], 곡괭이 1자루[曲光耳一柄], 철 촉롱 2쌍[鐵燭籠二雙], 철질려 1500개[鐵蒺藜一千五百箇], 화살촉 2000개[箭鏇二千箇], 대곤(大棍) 1개[大棍一箇], 탄환 4000개[彈丸四千箇], 북 3좌[鼓三坐], 정조(벼) 193석[正租一百九十三石]
○ 백미 169석, 정조 206석을 군수품으로 보태 쓰라고 청주병영으로 보냈다.
○ 나누어 수송한 실제 수효를 질서정연하게 장부에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어 청주병영 · 충청감영 · 순영(감영) · 군무아문 · 순무영 · 선봉진에 보고하였다.
○ 나누어 수송한 뒤에 서울에 있는 삼영(三營) 및 청주 · 공주 두 영(營, 병영과 감영)과 선봉진에 아뢰었다.
○ 이렇게 더없이 소중한 군수물자를 비록 선봉진의 문적(文蹟, 후일에 참고할 문서나 장부)으로 인하여 내주었지만, 익숙하지 못한 민병에게 갑자기 내어주다 보니 소홀한 실수를 면치 못하였다. 이 일에 누가 주장(主張)이 되고 누가 전적인 책임자인지 자세히 물어보니, “위임하고 온 사람은 아산의 신동(新洞)에 사는 정용묵(鄭容黙)이오. 그가 아산의 신동에 사는 남정섭(南廷燮)과 함께 스스로 나서서 참모(參謀)가 되었으며, 천안의 황곡(黃谷)에 사는 이화용(李華用)을 양곡(糧穀) 운반의 책임자로 삼아 세 사람이 민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지금 이 성에 왔습니다. 하지만 주장(主將)은 천안의 신촌(新村)에 사는 윤치소(尹致昭)인데, 현재 천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우삼소대십장(右三小隊什長)인 정군서(鄭君瑞)와 병정인 태응선(太應先)의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여[足繭]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어, 2명을 아울러 돌려보내고 기계는 진중에 머물러 두었다. 그 소대의 병정 2명을 평상복 차림으로 대신 보충하여 내려 보낸 사실을 대장(大將)의 처소에 보고하였다.
○ 이달 9일에 보고하였던 당일의 행진(行陣)과 11일 청주로 향하여 응원하려는 일의 형편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에, “뒤를 따라 행진하면서 1명의 적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장차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다만 닥쳐오는 뒷날의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무아문에서 보낸 회답 제사가 도착하였다.
○ 이달 12일에 청주성에 머물러 잤던 일의 형편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에, “일본 군사가 이미 내려갔다고 하니 그들과 상의하고 확정지어 같이 나아가거나 물러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 이달 5일 밤에 본진의 행순병(行巡兵, 순찰병)인 김윤근(金允根) 등이 동도 박봉학(朴奉學) 등 5놈을 잡아왔는데, 박봉학과 이돈화(李敦化)의 이름을 접사(接司)에게 검사하여 증거를 찾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결과(結顆)하였다. 그 밖에 ≪나머지≫ 3놈은 협박당하여 억지로 따른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풀어준 연유를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에, “풀어준 일과 결과한 일이 모두 온당하니 매우 통쾌하다. 순찰병의 성의를 나타냄이 가상하니, 특별히 더 감독하고 신칙하여 시종 한결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 동도를 무찌른 사무를 나열한 정황을 군무아문에 초9일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에, “연달아 군사를 출병시켜 기필코 ≪동도를≫ 소탕한 후에 보고하라”고 하였다.
○ 당일에 도착한 천안군수의 첩정에, “세성산에 있는 군사물자와 조포(租包)를 실어오려고 우척(牛隻, ‘隻’은 마리의 뜻)과 군인을 보낸 상황을 제송(題送)하였는데, 군대물자와 조포가 모두 도착한 뒤에 모든 사유를 열거하여 순무영 및 감영과 병영에 치보하겠소”라고 하였다.
10월 25일 비 [二十五日雨]
그대로 세성산에 머무는데 찬비가 쓸쓸히 내리고 음산한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니, 군사들이 산채(山寨)에 오래 머무는지라 혹시 병이 생길까 참으로 걱정되었다.
○ 당일 묘시에 도착한 청주병영 보고에, “세성산에서 적을 격파할 때에 노획한 백미 169석과 정조(벼) 286석을 군수물자로 보태어 사용하겠다는 정황과, 제사 내용에 성책(成冊)을 받아 올리겠다는 뜻은 이미 문서를 만들어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의논이 갈라져 어려움이 있다. 또 군대 물자인 탄환을 피폐한 고을에 맡겨 두면, 적도의 수중에 있었던 물건이라서 혹 온당치 못한 일인 듯 하다. 다시 사리를 논하여 병영의 창고에 수송하여 둔 뒤에 혼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각 읍으로 분산하여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라고 하였다.
○ 21일 크게 전승(全勝)을 거둔 일을 금영에 보고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보낸 제사(題辭)에, “승전했다는 보고가 도달하니 나도 모르게 쾌재(快哉)를 불렀다. 의당 즉시 계문(啓聞)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 이어 도달된 노획 군수품을 책자로 만들어 고하는 공문에 대하여 금영에 보고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보낸 제사(題辭)에, “≪임금에게≫ 아뢰면서 자세히 논열(論列)하였거니와 이렇게 싸움에 이긴 군사라면 어느 성(城)인들 이기지 못하리오. 곧 길을 재촉해 와서 구원함으로써 함께 구제하는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거괴를 즉각 결과한 일은 아마 타당한 처사로 여긴다”고 하였다.
○ 21일 해시에 보고한 일에 대하여 내린 제사 및 관문(關文)은 원장(原狀, 처음에 제출한 소장) 중에 나열한 문서에 의거하였고, 금영에서 보낸 회답 제사와 순무영에서 보낸 전령과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 및 계칙(啓飭)은 본영(本營)의 관문에 의거하여 이미 차례대로 도달하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 이달 13일 보은읍에 머물러 잤던 상황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제사에, “이미 진병(進兵)하였으나 수괴 1명을 잡지 못한 채 아직 머물러 있으니, 일본병사가 도착한 것을 기다린 후에 서로 잘 의논하여 나아가거나 물러가라”고 하였다.
○ 즉시 도달한 전령은, 군실(노획물)에 의거하여 책자로 만들어 보고한 사실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내린 제사에, “책자로 만들어 바치니 다만 의당 올라온 보고서를 전하였다. 붙잡은 수괴 김복용(金福用)은 짧은 시간이나마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으니, 즉시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을≫ 경계시킨 후에 바로 순무영에 아뢸 일이다. 병장기는 일전에 전했던 명령대로 양 읍(兩邑)에 나누어 공급할 것이며, 모아 쌓아 둔 곡식은 청주병영에 낱낱이 보고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일을 처리하라. 그리고 즉각 밤을 새어 길을 빨리 재촉해서 금영으로 가도록 하라. 어제 금영이 관문으로 신칙하였는데, ≪귀진(貴陣)이≫ 이미 진발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금영에서 화급한 상황을 알려오며 시각을 보전하기 어렵다 한다. 성화같이 달려가 도우라”고 하였다.
○ 어제 서울에 있는 3영(京三營)에 보내드릴, 군실을 나누어 보내는 사실을 책자로 만든 일과 죽산으로 보낼 문적(文蹟)을 나란히 봉하여 포교(捕校)인 유원식(劉元植)과 김응서(金應西)를 선정하고 노자(路資, 여행 경비) 15냥을 주며 당일 사시에 떠나보냈다.
○ 명령을 받고 나아가거나 머무르려고 아직 세성산에 주둔해 있는 연유를 탐문 보고하는 서장(書狀, 편지)에 대하여 선봉진에서 내린 제사에, “얼마 전에 제사로 신칙한 일이 있으니, 이에 따라 성화같이 금영으로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각 진(各陣)이 지금 이미 일제히 가지런히 당도할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밤을 새가며 조절하여 진발하라”고 하였다.
○ 이어서 도달한 천안군수가 보낸 첩정에, “각 진에서 붙잡아 보낸 비류 14명을 압송하였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대한 상황을 책자로 만들어 바친 일에 대한 제사에, “죄인 14명을 압송하여 보냈다”고 하였다.
○ 이 성에 들어와 차지한 지가 무릇 5일 낮밤이 되었다. 높은 언덕과 낮은 습지(濕地)를 두루 다녔던 노력을 감히 칭찬할 만한 일이 못되지만, 긴 창에 의지하여 언덕을 임함에 단지 밤이 되면 밤 풍경을 바라본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 지척(咫尺)의 거리도 분간하기 어려운데, 질풍(疾風)이 쉴 새 없이 불어오니 찬 기운은 사람을 핍박한다. 공주와 청주의 두 영에서는 구원하러 가기를 연달아 요청하고 선봉진은 금영에 구원하러 가라고 지시하므로, 내일 아침 일찍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적을 쳐야겠다는 조급함으로 실지 이 심담(心膽)이 터질듯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군졸들이 입은 얄팍한 군복 또한 걱정된다.
10월 26일 맑음 [二十六日晴]
≪군대가≫ 세성산을 떠나 공주로 향하였는데, 40리 거리를 가서 봉암동(鳳巖洞)에 머물러 잤다.
○ 선봉진과 순무영과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다. “세성산에 있는 북접 거괴(北接巨魁) 김복용(金福用)에 관하여 올린 공문에 대한 선봉진의 회답 결정을[回題] 기다렸다가 거행하려고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바로 도달한 선봉진의 회답 공문에, ‘즉시 죄인을 효수하고 뭇사람에게 보여 경계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복용을 당일에 결과하였으며, 이른바 적진의 중군(中軍) 김영호(金永祜)와 화포대장(火砲大將) 원전옥(元全玉) 및 수종(隨從)한 3놈은 딴 갈림길에서 염탐하여 붙잡았습니다. 소모관(召募官)인 정기봉(鄭基鳳)이 잡아 보낸 2놈과 천안군에서 호송해 온 14놈들과 함께 모두 결과를 시행한 후에, 기록한 성명으로 책자를 만들고 수정하여 첩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봉진에서 보낸 회답공문에 따라 구원하러 가려고 당일에 공주를 향해 진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26일 세성산에서 결과한 동도의 성명과, 북접 괴수 김복용, 적진 중군인 김영호, 화포대장 원전옥, 수종하였던 신정문(申定文) · 송석태(宋石泰) · 진한식(陳漢植) 이상 6놈은 본진에서 염탐하여 붙잡았습니다. 박영식(朴永式) · 박계선(朴季先) · 임순용(林巡用) · 이언여(李彦汝) · 안덕인(安德仁) · 김정헌(金正憲) · 진암회(陳巖回) · 김경백(金京伯) · 김수여(金水汝) · 이진여(李眞汝) · 고춘일(高春日) · 임천일(林千日) · 김형옥(金亨玉) · 김순경(金巡京) 등 이상 14명은 천안군에서 압송해 왔으며, 장돌용(張乭用) · 안천복(安千卜) 이상 2명은 소모관이 붙잡아 보냈는데, 모두 합한 수효가 22명이다.
○ 당일 술시에 도달한 청주병영의 감결에, “방금 들어보니, 감영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남적(南賊,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고행로(高行路)에서 전투를 벌여서 어제 낮부터 밤새도록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감영의 남쪽 수십 리 거리의 지역에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는데, 본영(本營)으로 향해 가려 한다고 한다. 모름지기 일의 형세를 살펴서 대단히 급히 진군하라”고 했다. 이 기회에 금방 선봉진에 이문(移文)을 보내려던 차였다.
○ 군사를 나누고 합하는 일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한결같이 선봉진의 지휘를 따르는 일에 대해 24일 보고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청주병영의 제사에, “교도진(敎導陣)에서 어제 이미 사람이 왔으니, 이 일에 대하여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 이달 11일에 행군하여 청안현에 당도하여 머물러 잤던 상황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공주에서 위험을 경계하라고 알렸으므로 선봉진의 지휘를 기다렸다가 속히 거행하라”고 했다.
○ 세성산에서 노획한 군수품을 나누어 보낸 사실을 책자로 만들어 보고한 것에 대한 선봉진의 제사에, “조(租)와 쌀이 이전에 성책하여 보낸 실제의 수량과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혹시 별안간 작성하다가 잘못 기록하여 그렇게 된 일인지, 이후로는 성책하여 여러 가지를 대조하여 상고한 뒤에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10월 27일 안개가 낌 [二十七日霧]
짙은 안개[大露, 露는 霧의 오자]가 하늘에 가득하여 열 걸음 떨어진 사람의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연기 봉암동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30리를 가서 금강나루 앞에 당도하였다. 금백(錦伯, 충청도관찰사)이 명첩(名帖)을 내 보내어 노문(勞問)하고 일본공사도 함께 왔으며 영관(領官)도 와서 노문하였다. 강변에 이르러 지나는 길에 일본병사 1개 중대가 산 밑의 소나무숲 속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강을 건너고 30리를 가서 금영에 당도하였다. 숙소를 전보국(電報局)에 정한 뒤 선봉진을 알현하고 다시 금백을 알현하였다. 또한 일본공사도 예방하였다. 선봉진과 서로 거리가 약간 멀므로, 여관을 본영(本營, 감영) 별초청(別抄廳)으로 옮겼다.
○ 당일 오시에 받은 순무영 전령에, “진중에서 밤을 지새며 사용할 목금갑(木錦甲) 20벌[領]을 내려 보내니, 도착하는 즉시 헤아려서 적절하게 분배하여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이어 도착한 순무영의 전령에, “출정하는 장수와 병사가 바람과 이슬을 맞고 한데서 먹고 자며 고생하니, 어찌 질병과 추위로 인한 괴로움이 없겠는가? 오직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염려하시고 가슴 아파하시어, 북어(北魚) 30척을 잘게 찢어 장(醬)에 담아 내려주시어 반찬감으로 나누어 사용하도록 하시었다. 이에 즉시 별무사 김영호(金永祜)로 하여금 북어 8척(隻)을 수령하여 각 진에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니 도착한 즉시 공손히 받은 후에 일일이 나누어 주어 임금님의 덕의(德義)를 널리 펴도록 하라. 지금 이와 같은 후한 은덕은 참으로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임금의 염려에서 나왔으니, 무릇 우리 장수와 병사가 누군들 감사히 여겨 떠받들지 않으리오. 자기의 밥을 밀어주며 먹게하는 은혜를[推食之恩] 골고루 입고 마땅히 솜옷을 입은 듯한 의리에[挾纊之義] 온 힘을 다할지어다. 뒤이어 특별히 더 격려하여 은혜 갚기를 꾀하는 데 더욱 힘쓰게 하면, 곧바로 용감하게 나아갈 테니 며칠 안에 적을 토벌하여 평정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또한 장수의 명령으로써 한결같이 위문한 뒤에 일의 자초지종의 경과를 즉시 치보하라”고 하였다. 부령관(副領官) · 참령관(參領官)
○ 순무영에 회답 보고하기를, “내려주신 북어 8척을 공손히 받은 뒤에 일일이 나눠주어 임금님의 은택을 널리 펴겠습니다. 또한 장수의 명령으로써 한결같이 위문할 것이며, 목면갑 20벌 역시 엎드려 받았습니다”고 하였다. 부령관(副領官) · 참령관(參領官)
○ 순무영에 보고하기를,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공주로 나아간 사유를 이미 첩보하였거니와, 이달 27일에 공주에 당도하여 머물러 자고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갈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10월 28일 맑음 [二十八日晴]
그대로 금영에 머물렀다.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에, “부(府, 충청감영)에 들어가 머물러 잔 후에 각 대의 병정들이 과연 곤핍(困乏)과 번뇌(煩惱)로 인한 빌미[祟, 병이나 재앙이 생기는 원인]가 생기지 않았는지 일일이 위문하고, 영관 이하의 성명 및 각 대의 병정의 실제 수효와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성화같이 치보하여 선발하여 쓰는 자료로 삼으라”고 하였다.
○ 즉시 선봉진에 회답 보고하기를, “전령이 도달하는 즉시 그에 따라 각 대의 병정을 일일이 위로하였으며, 각 대의 병정의 실수효와 성명을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영관 이하 병정 692명 이름, 서기(書記) 이하 잡색(雜色) 158명의 이름, 도합 850명의 인명.
○ 청주병영의 전령에 따라 명령을 듣고 나아가거나 머무르려고 이달 18일에 연기 봉암동에서 머물러 잔 일에 대한 순무영의 제사가 도달하였는데, 청주병영의 전령이 무슨 사체(事體)인지 모르겠다.
10월 29일 맑음 [二十九日晴]
기영(畿營, 경기감영)과 순무영과 군무아문과 장위영에 보고하기를, “정산(定山) · 예산(禮山) · 덕산(德山) · 온양(溫陽) · 신창(新昌) · 대흥(大興) · 홍주(洪州) · 결성(結城) · 당진(唐津) · 면천(沔川) · 해미(海美) · 서산(瑞山) 태안(泰安) 등지에 있는 비류가 창궐하여 10리에 왕왕 그 수효가 수만 명이라고 합니다.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두루 다니며 토벌하고, 또한 일본병사와 서로 지원하려고 당일에 공주에서 출발하여 광정(廣亭)으로 향합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사시에 선봉진 및 금백을 하직하고, 또한 일본공사와도 작별하였다. 금영 영장(營將)의 중군(中軍)과 더불어 곧 북쪽으로 출발하여 40리를 행군하였다. 초경(初更, 오후 6시 전후) 무렵에 광정에 당도하여 머물러 잤다.
1894년 10월 21일 세성산 적 격파시 ≪장졸 군공록(將卒軍功綠≫
좌일소대(左一小隊) 대관(隊官)
박영호(朴永祜)
별군관(別軍官)
조 편(趙翩)
이상은 군사를 거느리고 위험을 무릅쓰며 적의 성지(城池)를 탈환하였음.
십장(什長)
고영규(高永奎)
이응로(李應魯)
병정(兵丁)
홍구봉(洪九奉)
이덕준(李德俊)
엄경준(嚴敬俊)
한경식(韓景植)
이상은 위험한 탄환을 무릅쓰고 먼저 올라가 적을 쫓아내고 보루(堡壘)를 빼앗았음.
우삼소대(右三小隊) 교장(敎長)
홍선경(洪善敬)
병정(兵丁)
문응락(文應洛)
이상은 산간에 엎드려 엿보고 있다가 적의 수괴를 용맹스럽게 움켜잡았음.
십장(什長)
이응천(李應天)
몸을 떨치고 일어나 적들을 총으로 쏘아죽였음.
좌이소대(左二小隊) 규칙(糾飭)
김용구(金龍九)
병정
박계원(朴癸元)
좌일소대(左一小隊) 병정
윤창진(尹昌鎭)
박태순(朴泰純)
전봉구(全奉九)
중사소대(中四小隊) 병정
차화경(車化景)
곡호(曲號)병정
안석이(安石伊)
포대(砲隊)병정
송치운(宋致運)
이상은 뒤따라와 계속 전진하며 기계(器械)를 많이 노획했음.
중삼소대(中三小隊) 대관
윤희영(尹喜永)
별군관
이겸래(李謙來)
교장
이경진(李景振)
이상은 4로(四路)에서 유격(遊擊)하며, 적의 수괴를 염탐하여 붙잡았음.
병정
강순원(姜順元)
정홍준(鄭弘俊)
이창래(李昌來)
이상은 길에서 도주하는 적을 만났을 때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용맹스러웠음.
좌이소대(左二小隊) 교장
박성희(朴聖熙)
병정
김한근(金漢根)
이상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지(賊地)에 깊이 들어가 적을 붙잡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