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1894년 11월 1일 [甲午十一月初一日]
아침 일찍 군사를 전진하기 위하여 어스름 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쳐다보니, 날씨가 어둡고 흐릿하여 비가 올 듯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그렇지만 이번 토벌이 매우 시급하여, 사졸(士卒)들의 식사를 재촉한 뒤 출발하였다. 이내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려 군복을 온통 적시고 스며들었다. 군사를 도저히 전진시킬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도로 광점(廣店)으로 돌아와 그대로 군대를 주둔하고 있다가 잤다.
○ 어제 술시 선봉진(이규태)에서 보낸 전령이 인시에 도착하였는데, “지금 기별을 듣건대 적이 5리 밖까지 다다랐다고 하니, 밤을 가리지 말고 군대를 나누어 차례대로 빨리 와서 금영(錦營, 충청감영)을 구원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공주에서.
○ 해시에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이 묘시에 연이어 도착하였는데, “즉시 군사를 돌려 금영을 구원하라는 전령이 이미 있었거니와, 이곳에 있는 비도들은 밤이 깊어서 감히 가까이 접근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본진(本陣, 장위영)에서 출장 나간 군관 이창직(李昌稙)의 보고를 받아 보니, ‘병정 30명을 거느리고 덕산(德山)의 합덕(合德)에 있는 유회소(儒會所)에 이르렀다가 비도에게 압박당하여 대단히 시급한 상황이므로 병정을 조발해 즉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예산의 적이 합덕으로 방향을 바꾸어 간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즉시 신속하게 군대를 진군시켜 이곳으로 시급히 오도록 하시오. 또한 대관(隊官) 박영우(朴永祐)가 밖에서 바로 갔는데, ≪이는≫ 군율에 관계되므로 그로 하여금 빨리 와서 대령하게 할 일 공주에서 21일 세성산의 ≪적을≫ 토벌하여 크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에 대하여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임금에게 ‘아뢸 수 있도록 ≪보고서가≫ 도달하였거니와, 이번 행군 이후 처음 듣는 승전 소식인데다, 더욱이 그 거괴를 포획함에 있어서랴. 따라서 사졸들이 명령을 수행하는 일을 볼 수 있으니, 매우 가상하고 감탄스러운 일이다. 다만 보고문서가 여러 날 지체되었으니,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성책(成冊)에 ≪적혀 있는≫ 탄환은 선봉진의 총구에 부합할 것 같으니 옮겨다 사용하고, 기계 및 곡물은 쌀을 만들어 본군(本郡)에 맡겨 둔 뒤에 보고하여 군수물자로 삼으며, 김복용(金福用)은 군사들 앞에서 효수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이미 엄중하게 수감하였으니, 마땅히 선봉진의 조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0월 27일 발송.
○ 순무영에 보고하기를, “세성산 적을 격파한 보고에 대한 ≪순무영의≫ 회답 제사에 따라 노획한 곡물을 나누어 보낸 일과 김복용을 결과한 연유는 이미 치보하였거니와, ≪현재≫ 남아 있는 탄환 21척 중에서 9척이 통위영(統衛營)의 총구(銃口)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통위영 진으로 옮겨 보내고, 10냥척(十兩隻)은 모두 각 군영의 총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주판관(公州判官)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거행하라는 전령은 당일 유시에 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를 아울러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탄환 9척을 통위영에 나누어 보낸 연유에 관해, 군무아문(軍務衙門)과 순영대장소(巡營大將所)와 순무영의 전령에, “선봉진이 이미 출정하여 각 군대를 전적으로 통제하라는 전령이 있었거니와, 군율이 극히 엄중함에도 군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폐단이 있다 하니, 어찌 된 일인가? 이에 전령하거니와 도착 즉시 거행하고, 한결같이 선봉진의 지휘에 따라 각별히 단속하여 군율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27일 발송.
11월 2일[初二日]
먹구름이 사방에 드리워, 비가 올 듯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날씨가 비록 그러하나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광정에서 온양(溫陽)을 행해 10여 리를 행군하니, 바람이 몰아치고 빗줄기가 들이쳤다. 군사를 재촉해 전진하여 천안 경계인 궁리(宮里)에서 머물러 잤다. 거리를 계산해 보니 35리였다.
○ 선봉진에 보고하기를, “지난달 29일에 공주에서 출발하여 광정에 이르러 머물러 잤습니다. 그 이튿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으므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둔하여 잤으며, 오늘 묘시 무렵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의병진(천안)에 보낸 관문은 다음과 같다. “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때를 당하여 의리를 앞세워 난중(亂中)으로 달려가니, 참으로 공경하고 우러러볼 만하오. 지금 귀진(貴陣)이 천안군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는데, 그 고을의 위치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있으므로 삼남(三南)의 큰 길에 기틀을 설치하여 군사를 사용할 것이오. 본진이 비류를 토벌하려고 지금 서산(瑞山)과 홍주(洪州) 등지로 향하여 가다가, ‘적도가 벌떼같이 일어나고 개미같이 모였으며,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엉켜 있으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또 앞에 나타나 교란시키고 또 뒤에 나타날 염려가 있다’고 하니, 바라건대 모름지기 귀진은 별도로 계책을 베풀고 특별히 대오(隊伍)를 단속하며 기밀을 자세히 살피고 적의 정황을 정탐하시오. 따라서 적의 후미를 차단하고 뒤에서 성원(聲援)하는 형세를 취하는 일이 좋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 천안군에 관문을 보내었다. “본진이 비류를 토벌하기 위하여 지금 서산과 홍주 등지로 향하였는 바, 귀 천안군은 동서쪽에서 서로 돌보아 주고 남북 쪽에서 연합하여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에 처하여 있다. 의병이 바야흐로 주둔하였으므로 의당 특별히 계책을 세울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본진이 지금 이렇게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오로지 귀 천안군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적도가 각처에 흩어져 있어서 옆에서 견제할[掣肘]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의병진과 서로 의논하여 뒤에서 성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 ≪본관이≫ 보은에서 출발한 이후 처형한 동도의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를 장교 이기택(李箕澤)이 내려오는 편에 가지고 와서 바쳤다.
11월 3일 [初三日]
음산한 구름이 산굴[岫]을 가려 추위의 위세가 갑자기 맹렬해졌다. 천안의 궁리에서 행군하여 30리에 이르러 온양 땅에 주둔하여 잤다. 당일 신시에 홍주의 장교인 이기련(李奇連)이 전도군(前導軍)으로 그 읍으로 가는 차에, 공주로부터 와서 본진을 기다리던 길에서 동도 김동운(金東運, 接主)을 붙잡아 군진(軍陣) 앞에 바쳤다. 이에 기찰포교(譏察捕校)에게 맡겨 문초(問招)하게 하였다.
○ 우이소대병정(右二小隊兵丁)인 황기복(黃基福)과 신선봉(申先奉)은 병으로 인하여 전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잘 치료한 후에 조금 나아질 때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향하여 가기 전에 역참(驛站)이 있는 읍으로 호송하라는 뜻으로 천안군에 관문을 보내고, 이러한 사유를 대장소(大將所)에도 보고하였다.
11월 4일 맑음[初四日晴]
어젯밤에 검문하여 붙잡은 동도 황천일(黃千一), 봉도(奉道) 정구영(鄭九永) · 유덕신(劉德信), 봉령(奉令) 안완석(安完石) · 이구길(李九吉) · 김일석(金一石) · 백원손(白元孫) 등 7놈과, 홍주 장교 이기련이 붙잡아 바친 김동운을 온양읍에서 모두 결과하였다.
○ 온양읍에서 진시초(辰時初, 오전 7시 직후 무렵)에 길을 떠나 20리를 가서 신창읍(新昌邑)에서 머물러 잤는데, 그 고을 현감(縣監)인 최재학(崔在鶴)이 보러 왔다.
○ 홍주영장(洪州營將)에게 관문을 보냈다. “선봉진 전령을 보내니, 살펴보고 거행하라. 방금 들은 소식에 의하면, ‘비류가 예산(禮山)의 역촌(驛村)에 많이 모여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적을 먼저 무찌르려고 오늘 신창읍에 주둔하였는 바, 적의 정세를 자세히 탐색하여 기밀에 따라 우선 통지하고 군사들을 특별히 단속하여 지원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 당일 묘시에 도착한 의병소 통령(統領)의 첩정(牒呈, 첩보) 내용에, “즉시 귀진의 명령에 따라 내포리(內浦) 등지의 길에 익숙한 2인을 길 안내차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천안군수가 보낸 첩정에, “목천 세성산에 모여 있던 비류들이 훔쳐 가져간 곡물과 무기는 도달하는 대로 그 종류와 실제 수효를 책자로 만들어 첩보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성책은 받아서 올려 보낼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성책(成冊)
총 136자루, 파상(破傷)한 납탄 35척. 장창(長槍) 277자루 중에 자루가 있는데 칼날이 없거나 혹은 나무창과 죽창으로 숫자를 채운 것임. 장전(長箭) 7부(浮), 편전(片箭) 4부, 거마창(拒馬鎗) 36부, 징 5좌(坐) 중에 4좌는 파상되었음. 동로구(銅爐口) 3좌는 파상되었고 나팔 1쌍 중에 1개는 파상되었으며, 큰 삽 5자루와 작은 삽 5자루가 함께 파상되었음. 월도(月刀) 2자루 , 괭이[廣耳] 1자루와 철롱(鐵籠) 2쌍은 파상되었고, 철질려(鐵蒺藜) 1,500개 , 화살촉 2,000개, 탄환 4궤, 곤장 1개, 철화로 1좌, 북 2좌, 조포 150석 5두(斗) 1승(升)인데, 190포는 작석(作石, 섬으로 만듦)하였음.
11월 5일 흐림 [初五日陰]
어젯밤에 붙잡은 동도 김기형(金琦亨) · 이호득(李好得) · 이성오(李成五) · 정군칠(鄭君七) · 이우하(李禹夏) · 권태진(權泰鎭) · 엄흥록(嚴興祿) 등 7놈을 신창 앞길에서 결과하였다.
○ 묘시 무렵 신창읍에서 행군하여 남쪽으로 10리쯤을 향해 가니 시전리(柿田里)가 있는데, 온 마을이 거의 다 동도라고 하였다. 그 동네로 진군하여 온 마을을 에워싸고 머무르면서 동민 29명을 붙잡고 낱낱이 조사하여 캐어물었다. 혹은 ≪그 도(道)에≫ 잠시 들어갔다가 금방 배반한 자이거나 혹은 초짜로서 아직 물이 들지 않은 자들인데, 그 중에 남성칠(南成七) 1놈은 무리를 모아 천안 땅의 윤병사(尹兵使)의 집에 끌어들인 일을 한 자였다. 마침 의병장인 윤치소(尹致昭)의 부하 중에 위임한 사람이 있어서, 이놈과 대질시켜 죄를 자백 받았기에 그 마을 앞에서 결과하였다. 나머지 28명은 모두 무죄로 판명되어 타이르고 일깨워 놓아 주었다.
이내 20리를 가서 예산의 창촌(倉村)에 다다라 도중에 점심을 먹고, 또 10리를 가서 예산의 역촌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그 마을 뒤쪽 산기슭은 동도가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수리(數里)에 걸쳐 볏짚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고 두루 불을 질러 타고 있었다. 그 형상과 자취가 매우 낭자(狼藉)하였다. 이에 토착민을 불러 물어 보니, “지난달 26일에 비류 수만 명이 이곳에 와 진을 치고 홍주의 관군과 접전을 벌이다가 관군이 싸움에 져 피해를 입은 사람이 100여 명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해미성(海美城)으로 옮겨 그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홍주 사람들이 도랑과 골짜기를 두루 다니면서 시체를 수색하니, 보기에 몹시 비참하였다. 지나가는 도로 연변(沿邊)에 불에 타고 남은 인가가 가는 데마다 눈에 띄었는데, “동도의 집은 관군이 불을 지르고 평민의 집은 동도가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 당일 오시에 도달한 선봉진의 전령에,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홍주의 적 수만 명이 각 군사들에게 토벌되어 포살된 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많은 병장기를 탈취했다고 합니다. 이는 확실한 보고인 것 같습니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본진이 오늘 홍주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방만하게 적을 뒤쫓아 붙잡는 일에 헛되이 날짜만 허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 적 소굴이 논산(論山)의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군사를 합하여 토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급히 전령을 보내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바로 정산(定山) 길로 향하되, 밤을 새워 이인(利仁) 앞길로 달려가 ≪군사를≫ 제때에 뽑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주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 몇 명을 별도로 정하여 길을 멀리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시급한 군무에 관계되니, 유념하여 ≪군대를≫ 단속해 신속히 이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에 앞 나루는 반드시 왕진(旺津)에서 건너야 하므로, 선척(船隻, 배)는 지금부터 미리 신칙하여 이 점을 모두 알게 할 일이다. 초4일 묘시 공주에서.
○ 지난달 21일에 세성산에서 승전한 후에 군실(노획물)을 책자로 만들어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가 도달하였다. “행군이 도착하는 곳에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특별히 더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후에 진행되는 상황을 종종 치보하라.”고 하였다. 28일 발송.
○ 신창현감이 보낸 첩정에, “아산 의병이 압송하여 넘긴 죄인 임화경(林化京) · 이문옥(李文玉) · 차기성(車己成) · 차도련(車道連) · 차득윤(車得允) · 이승실(李升實) · 김보일(金甫一) · 유진국(兪鎭國) 등 8놈은 장교와 아전을 선정하여 압송하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 당일 술시에 선봉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진이 홍주로 향해 가는 길에 오늘 오시에 받은 전령 내에, ‘현재 적의 주력부대가 논산 근처에 있으므로 군사를 합하여 나아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이인 앞길로 빨리 가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전령 말씀을 마땅히 곧바로 거행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앞길에 있는 적의 정황을 연이어 탐지해 보니, 적도 4~5만 명이 예산(禮山) 역촌과 덕산(德山) 역촌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는데, 본진이 추격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해미성(海美城)으로 물러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달 초6일 장차 홍주를 함락하라고 하셨는데, 그 동안 홍주에서 비록 적도를 약간 토벌하였을지라도 지금 사태의 위태로움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습니다. 홍주에서 해미까지의 거리가 겨우 30리이며, 6일이 바로 내일입니다. 본진이 홍주의 가까운 곳에 가서 그 고을의 병사들과 더불어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기필코 적도를 소탕할 것입니다. 해미에 있는 적의 기세가 이미 이와 같이 급박하니, 가히 전쟁터에 나아가 적과 마주 대하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이 가까운 적을 놔두고 먼 적을 체포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를 다 실패할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다시 지시 말씀을 기다렸다가 나아가든지 물러가려고 오늘 예산 역촌에서 머물러 자고 내일 홍주로 출발할 요량입니다. 오늘 보낸 이 전령의 본 문서에는 비록 답인(踏印, 관인(官印)을 찍음)이 없으나, 겉봉투에 이미 답인한 마패(馬牌)가 있으므로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런 연유로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11월 6일 [初六日]
갑자기 비가 내리다가 잠깐 개었고 서북쪽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군사를 점검한 후에, 어제 신창현의 의병소에서 붙잡아 압송해 온 동도 8놈과 본진에서 몰래 탐지하여 붙잡은 이판용(李判用) · 이계춘(李季春) · 김용산(金龍山) · 김정기(金正己) · 장봉산(張奉山) · 원학도(元學道) 등 6놈을 예산의 역촌 앞길에서 모두 결과하였다.
묘시 무렵 길을 떠나 덕산읍으로 향하여 10리를 행군하는데, 지나가는 길에 있는 주점(酒店)들이 거의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또 불에 타 훼손된 집이 많아서 몹시 비참하게 보였다. 이는 동도의 집들인데, 유회소에서 불태웠다고 하였다. 덕산의 지경인 삽교(揷橋) 큰 시냇가에는 볏짚을 연달아 펼쳐 놓았고, 공석(空石, 곡식을 담지 않은 빈 섬)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모닥불을 피웠던 무더기 자취와 밥을 지었던 흔적이 있었는데, 몇 리(里)에 걸쳐 이어져 있었다. 덕산 역촌에 이르니 그 역의 뒷산 기슭과 산 밑에 있는 보리밭은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혀 마당이 되어 버렸다. 무덤이 모두 불에 타고 수목도 불탔으며, 밥을 먹었던 그릇과 도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거주민에게 물어 보니, “비류가 지난달 27일 이곳에 주둔해 있다가 홍주의 군사와 접전하였으며, 평민도 30여 명이나 피살되었다. 적도가 28일에 해미성 안으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 덕산의 경계에 들어가니, 산비탈에 유회소(儒會所)가 있었다. 종이 깃발에 ‘儒會所’라고 쓰여 있었다. 덕산에서 홍주로 가는 길에 간간이 보발막(步撥幕)에서 나온 보발군(步撥軍)이라고 한 자들이 있었는데, 손에 종이 깃발을 들고 길을 오고가는 자가 끊임없이 연달았다. 이내 5리 길을 행군하였다.
○ ≪병대를≫ 나누어 오시에 덕산읍에 들어가니, 고을은 쓸쓸하고 적막하여 사람들이 드물었다. 거주민에게 물어 보니, “지난 달 27일 동도가 읍에 들어와 민가를 파손하고 병장기를 약탈해 갈 적에 거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본관(本官, 덕산현감)이 이 일로 인해 파직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잠시 군대를 읍내의 여염집에 머물러 점심을 먹게 한 뒤에 바로 출발하여 홍주에 가서 군사를 합하고 해미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렇게 되면 단지 길을 멀리 돌아갈 뿐만 아니라, 혹시 군사 기밀이 새어 나갈까 두려웠기 때문에 바로 해미로 향하였다. 경유하는 길에 가야동(伽倻洞)에 다다라 군사를 나누어 위아래 마을에서 주둔하여 잤다. 다만 줄을 길게 쳐서 통행을 차단한 뒤에 병사 50~60명이 마을 뒤에 있는 보덕사(報德寺)로 찾아 들어갔다. 산속으로 4,5리를 걸으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수려한 봉우리와 깊은 계곡, 무성한 숲과 긴 대숲에 푸른 시냇물과 깎아지른 절벽이 참으로 하나의 장관이었다. 길을 따라 사찰 문에 다다르니, 문에는 ‘불이(不二)’라는 편액(扁額)을 달았고 누각에는 ‘보덕(報德)’이라 걸렸으며, 전은 ‘극락전(極樂殿)’이라 이름 하였다. 곧 군사를 머물러 저녁밥을 먹고 거리를 계산해 보니 30리 길이었다.
○ 당일 저녁에 해미성에 주둔해 있는 적을 격파할 대책을 산정(算定)하여, 대관(隊官) 김진풍(金振豐)에게 지시해서 치중군(輜重軍, 보급부대)을 인솔하고 곧 가야동에 머물게 하였다. 삼경(三更, 밤 11시부터 오전 1시) 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가야산(伽倻山)의 최고봉에 올랐는데, 만길[萬仞] 산마루인 일선(一線)의 조도(鳥道)라서 기어서 손을 잡고 이끌어 주며 올라갔다. 험준한 바위산을 올랐는데, 이를 ‘일락치(日落峙)’라 하였다. 가야산 서쪽 봉우리나 해미의 북쪽 산기슭에서 성까지는 10리 거리라, 그대로 이곳에서 밤을 지내고 나서 우리 군대가 그 후미를 습격할 것이고, 홍주에 있는 천안의 의병은 내일 아침 일찍 군진을 성의 남문 밖으로 이동하여 앞뒤에서 협공(挾攻)한다는 뜻으로, 의병진에 편지를 보냈다.
○ 홍주진(洪州鎭)에 관문을 보내기를, “앞길에 있는 적의 정황을 탐색하여 들어 보니, ‘적도가 해미성에 주둔해 있다’고 하니, 본진은 오늘 덕산에 머물러 자고 내일 군대를 지휘하여 해미로 갈 계획이다. 귀진에서도 군병을 지휘하여 내일 아침 일찍 바로 해미에 당도하여 호응해 지원하라.”라고 하였다.
세성산에서 노획한 군수품을 나누어 보낸 성책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을 당일 술시에 지자(持者) 등이 가지고 왔는데, “이미 전날의 제사가 있었으므로 성책을 도로 내려보낸다.”라고 하였다. 10월 28일 발송.
11월 7일 맑음 [初七日晴]
새벽에 ≪가야산 꼭대기에 있는≫ 일락치의 위에 있으면서 적의 세력을 멀리 바라보니, 매우 드세게 깃발을 꽂아 놓고 총을 쏘아 대는 것이 완연히 큰 적의 소굴과 같았다. 이내 분노가 치솟아 잠시라도 ≪토벌을≫ 늦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날이 아직 새기도 전에 위태롭고 험준한 곳을 넘어 바로 성 북쪽에 다다라 불의의 계책으로 기습하니, 적이 이내 계책을 잃고 허둥지둥 당황하여 달아났다. 후군(後軍)을 교동(校洞)에 주둔시키고 바로 수십 명의 군사로 하여금 성으로 돌진해 들어가 기치를 세워 우선 적의 기세를 꺾고 군사를 4군데로 나누어 보내어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였다. 총으로 쏘아 죽인 자가 40여 명이요, 찾아내어 체포한 자가 100여 명이었다. ≪난을 피하여 달아나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들을 뒤덮고 계곡을 메웠다. 몹시 고통스러워 부르짖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지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군사를 철수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노획한 물건을 점검해 보니, 목천 세성산의 군수품보다 오히려 많았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매, 군대를 남문 안에 머물게 하여 저녁밥을 먹었다. 초경(初更, 저녁 7시~9시) 때에, 가야(伽倻)에 있는 대관 김진풍(金振豐)에게 지시하여 치중부대를 거느리게 하고 군진에 당도하니, 시끄럽게 서로 축하하며 기뻐하는 소리가 온 군대를 뒤흔들었다. 이내 머물러 잤다. 의병과 홍주의 병사들은 기한이 정해져 있는데도 진군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의심스럽고 의아스러운 일이다.
11월 8일 맑음[初八日晴]
그대로 해미성 안에 머물러 노획한 군수품을 정리하고 성책하여 홍주진(洪州鎭)으로 실어 보냈다.
○ 홍주진에 관문(關文)을 보냈다. “우리 진이 이 달 7일 해미성에 주둔해 있는 적을 격파한 뒤에 노획한 군수품 수효를 대조하여, 받으러 온 귀진의 중군(中軍)인 박봉진(朴鳳鎭)에게 내주어 보냈으니, 이것으로 상고(相考)하라.”고 하였다.
○ 군수품 목록: 불랑기(佛郞器) 11좌, 대포 4좌, 자포총(子砲銃) 22자루, 천보총(千步銃) 10자루, 조총(鳥銃) 43자루, 창 85자루, 환도(環刀) 9병, 대징(大鉦) 3좌, 소징(小鉦) 3좌, 북 2좌, 포환(砲丸) 130개, 장전 4부, 납탄 6궤, 염초화약(焰硝火藥) 500근, 침수기(浸水器) 8면(面), 수연통(水烟桶) 4개. 이상의 물품을 홍주진에 보냄.
○ 말 8필, 나귀 5필, 소 52수(首)는 나누어 주는 날에 군인들에게 먹였다.
○ 순무영과 군무아문・선봉진에 첩보하기를, “본진이 지나가는 연로(沿路) 각 면의 마을에서 군병을 위해 음식을 보내 준 물품을 적어 정리하고 성책하여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세성산에서 처형한 동도의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낸 일과, 선봉진의 제사에 따라 공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일로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아뢰려던 차에 도착하였거니와 이후에 진행되는 상황을 연이어 치보하라.”고 하였다. 11월 초1일 발송.
○ 삼영문(三營門, 순무영・군무아문・장위영) 및 순영(충청감영)과 선봉진(이규태)에 다음과 같이 첩보하였다. “지난달 29일 금영에서 길을 떠나 광정에 다다른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이 달 초1일에는 비로 인하여 여관에서 체류하였고, 2일에는 길을 떠나 30리를 행군하여 천안의 궁리에서 머물러 잤습니다. 3일에는 30리를 행군하여 온양읍에서 머물러 잤으며, 4일에는 20리를 행군하여 신창읍에서 주둔하여 잤습니다. 적의 정황을 탐지하여 들어 보니, ‘4~5만의 적당(賊黨)들이 예산의 역촌과 덕산의 역촌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토벌하기 위해 행진하면서 소식을 들어 보니, ‘15리쯤 지나는 길에 있는 신창 경계의 시전리(柿田里) 마을 전체가 동도가 거주하는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로 진군하여 거주민 50여 명을 붙잡고 일일이 조사하여 심문해 보니, 혹은 잠깐 들어갔다가 도리어 배반한 자이거나 초짜로서 들어가 물들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범죄를 무릅쓰고 무리를 끌어들이는 자가 7놈인지라, 30리를 압송하여 예산역에서 결과한 뒤에 곧 머물러 잤습니다.
적의 형편을 정탐하여 보니, ‘적도가 본진이 추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해미성으로 퇴각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6일에는 30리 거리의 덕산읍에 당도하여 밥을 지어먹은 후에, 바로 가야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야동에 군사를 주둔하고 여러 군관들과 20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바로 일락치에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니, 해미성이 10리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굽어보니 분명하게 보였는데, 깃발을 꽂아 놓고 총을 쏘아 대니 엄연(儼然)히 하나의 큰 적의 소굴이었습니다.
이내 일락치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 북쪽에 직접 다다랐습니다. 높은 산에 의지하여 습격하니, 이는 적에게는 불의의 습격인지라 비적도 갑자기 대비할 수 없어 성을 버리고 사방으로 허둥지둥 도주하며 어찌할지를 몰랐습니다. 후군을 교동에 머물게 하고 수십 명의 군사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서 기치를 세워 우선 적의 기세를 빼앗았습니다. 그런 후에 병사를 나누어 4군데로 나가,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20~30리 가량을 추격하였습니다. 찾아내어 체포한 적도가 100여 명이요, 총으로 쏘아 죽인 자도 40명 가량 되었습니다. 부녀자와 어린이가 ≪난리를 피해≫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달아나 들을 뒤덮고 골짜기를 메웠으니, 이 또한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이 일어 곧 군대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노획한 군수품을 셈하여 점검해 보니, 목천에서 노획한 것보다 도리어 더 많았습니다. 군수품은 적어 정리하고 성책하여 첩보하였습니다. 모든 장수와 병졸들이 여러 날 동안 바쁘게 달려 다녔습니다.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한데서 잠을 잤으니 수고로움도 몹시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노획한 소를 도살하여 호궤를 크게 거행하였습니다.
연이어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의 정황을 탐지해 보니, 추격을 받은 나머지 무리들이 혹은 산림으로 숨거나 혹은 먼 마을에 의지하여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장차 다시 방자한 일을 저지를 염려가 있는 나머지 무리들이 나누어 모여 있는 곳은 바로 당진(唐津) · 면천(沔川) · 서산(瑞山) · 태안(泰安) 등지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병력을 조금 쉬게 하였다가 계속 동도를 무찌를 계책을 도모할 생각입니다. 지난달 26일에 세성산에서 길을 떠난 이후에 결과한 동도의 성명을 성책하여 아울러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11월 9일 맑음 [初九日晴]
해미읍에서 출발하여 한태령(寒泰嶺)을 넘어 40리를 가서, 홍주읍(洪州邑)의 서문(西門) 안에 이르러 주둔하여 잤다. 연로(沿路)에 있는 유회소(儒會所)로부터 지나오는 길에 공문(公文)과 개인 기별[私奇]이 보발(步撥)로 소식을 전하였는데, 부복군(負卜軍, 짐을 운반하는 군사)도 갈아탈 파발마를 마련하였다. 홍주의 서문 밖에 다다르니, 불에 타 훼손된 인가가 많았다. 그래서 거주민에게 물어 보니, “지난번 동도와 접전할 때에 그 무리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 홍주로 출발한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당일 유시에 도착한 회답 제사에, “다시 홍주로 가서 비류를 토벌하겠다는 기별이 다른 읍에서 왔으므로 ≪군대를≫ 돌려 구원하라는 지시가 있었거니와, 최근 비도가 이와 같이 창궐하는데 가까운 적을 놔두고 멀리 갈 수 없다. 그러나 이미 해미로 들어갔으니, 서산과 태안의 ≪비도를≫ 차례대로 토벌 평정하여 남김없이 소탕한 뒤에 그 즉시 신속하게 이동하여 구원하되, 만약 평정하지 못한 자들이 있으면 각 고을에서 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날짜를 정하여 급히 달려가고, 본 지시대로 할 수 없게 되면 비록 잘잘못에 관계될지라도 소홀히 하여 그르치는 실수를 면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초7일 공주에서.
○ 어젯밤에 병사를 나누어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서산 땅의 매현(梅峴)에서 크게 무찔렀던 사실을 각 군영에 공문을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 삼영 및 선봉진과 순영에 첩보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달 초7일에 해미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격파한 뒤에, 군수품을 책자로 만들어 이미 치보하였거니와, 그날 남은 적들 가운데 도망하여 달아난 자가 다시 그 고을 서북쪽 산기슭에 있는 옛 산성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성은 4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요, 가운데는 또 편편하고 넓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곳입니다. 바로 2개 소대를 파견하여,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 별군관(別軍官) 조편(趙翩) · 윤지영(尹摯榮), 교장(敎長) 추광엽(秋光燁) · 박성희(朴聖熙) · 장세복(張世福) · 오순영(吳順永) · 이경진(李景振)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위쪽으로 돌진해가서 그 성을 격파하고 적을 쫓아냈습니다. 그 중에 풀움막 40여 곳이 있었고 흩어져 있는 무기가 매우 많았습니다. 또 일종의 남은 적당(賊黨) 400~500명이 성 남쪽 10리쯤에 있는 저성(猪城)으로 향하였습니다. 장차 그곳을 차지하고 수비할 것이기 때문에 또 1개의 소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별군관 이겸래(李謙來)와 교장 김대유(金大有) · 최기성(崔基成)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추격하여 연이어 쏘아 죽이며 1개 진을 해산시켰습니다. 혹여 병사들이 피곤할까 염려되어 곧바로 철수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또 정탐한 자의 말에 따라 참령관 원세록이 대관 윤희영 · 이규식(李圭植)과 교장 이경진 · 양기영(梁基英) · 최기성 · 홍선경(洪善敬) · 김인길(金仁吉)을 나누어 별군관 윤지영 · 김광수(金光洙)와 함께 해당 1중대 병사를 인솔하여 서산 땅으로 가서 순찰하다, 하나의 큰 비적 소굴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바로 서산 매현으로, 고개는 높고 가운데가 둥근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원조경(遠照鏡, 망원경)을 통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깃발이 주변에 꽂혀 있고 적들이 가운데 모여서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어둠을 틈타 몰래 서산읍으로 들어가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황혼이 겨우 지나자 저녁밥이 다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혹 기밀이 새어 나갈까 염려되어 밥을 먹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로 적에게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뜻밖에 나타나서 함성을 지르고 포위하여 총을 쏘아 대니 적들도 거세게 저항하였습니다. ≪접전 중에≫ 나는 총탄이 뒤섞여 빗발쳤는데 대포를 자주 쏘다가 쉬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넉넉히 1시간쯤 지났을 무렵에 뜻밖에 적진(賊陣)에 쌓아 둔 화약에 불이 붙어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곧이어≫ 수천 명의 적들이 쏟아져 달려 나와 마치 좁쌀이 흩어지듯 달아났습니다. 이에 우리 군사들도 한동안 겁을 먹고 놀랐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수백 무(武, 1무는 반걸음. 곧 3척)의 거리를 추격하여 흩어져 있는 병장기를 수습하고 다시 서산읍으로 돌아와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 다음 이전 군수가 피살당했던 곳을 찾아냈는데, 그곳은 읍내의 율장촌(栗場村)이었습니다. ≪포로들을≫ 현장에서 모두 죽이고 이내 군사를 돌려 해미성으로 돌아오니, 새벽닭이 3차례 울 때였습니다. 접전할 때 쏘아 죽이고 칠흑 같은 밤에 길을 재촉하여 왔기 때문에 그 수효를 미처 셀 수 없었습니다. 포로들은 모두 옷 등 뒤에 적의 도장이 찍혀 있어서 전혀 의심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심문도 하지 않고 즉석에서 총살한 자가 23명이었습니다. 그들 명단과 노획한 군수품은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첩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홍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사관 아카마츠 고쿠보(赤松國封)가 보내 온 공문에, ‘공주가 위급하니 각 부대를 모아 일제히 남적(전봉준 부대)을 토벌하라’는 말에 따라, 아직 붙잡지 못한 이곳 나머지 적을 버려 두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행군하여 홍주의 읍에 이르러 머물러 잤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정하여 공주로 급히 갈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 해미성으로 도주한 적 포로 29명과, 서산의 매현으로 도망쳐 모인 나머지 무리들을 추격하여 잡은 포로 5명을 합한 39명, 매현에서 얻은 군수품을 적은 공문을 작성하여 함께 홍주의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 출발하는 길에 남문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서산의 전 수령의 상구(喪柩)와 마주쳤는데, 그 정경이 참혹한지라 참령관과 함께 한바탕 애도하여 조문하였다. ‘≪상여가≫ 지나가는 여러 고을은 각별히 호송하라’는 뜻으로 관문을 작성하여 주었다. 초상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해당 읍에 소속된 아전의 아들 2명에게 성복(成服)하여 상여를 뒤따르게 하였으니, 더욱 가엾고 애처로운 일이다.
○ 죄인의 성명을 기록하여 성책하였는데, 곧 박치용(朴致用) · 진삼달(陳三達) · 류정축(柳丁丑) · 노용준(魯用俊) · 류종월(柳宗月) · 김순희(金順喜) · 김상길(金相吉) · 이희순(李喜順) · 김선칠(金先七) · 문정봉(文丁奉) · 이중국(李重國) · 신철희(申哲熙) · 안인수(安仁洙) · 김한성(金漢成) · 신헌명(申憲明) · 김만희(金萬喜) · 최덕수(崔德水) · 장재현(張在玄) · 안성범(安聖範) · 임창재(林昌才) · 김순필(金順必) · 이영식(李榮植) · 김학봉(金鶴鳳) · 송만복(宋萬卜, 卜은 福의 오기) · 이정운(李正云) · 심인수(沈仁水) · 방태봉(方泰奉) · 김금록(金今祿) · 신동희(申東喜) 등 이상 29명이다. 또한 해미성에서 잡은 포로 김지희(金芝喜) · 이금봉(李今奉) · 이학봉(李學奉) · 김성운(金成云) · 강성칠(姜成七) 이상 5놈과 서산의 매현으로 도망쳐 모여 있는 적을 추격하여 잡은 포로를 합하여 도합 34명이다.
○ 서산의 매현에서 노획한 군수품을 성책하니, 대포 1좌 · 천보총(千步銃) 7자루 · 조총(鳥銃) 9자루 · 창(鎗) 16자루 · 징(錚) 4개 · 광쇠(光釗) 1개 · 환도(環刀) 2자루 · 포란(砲卵) 1승(升)이다.
11월 10일 맑음 [初十日晴]
묘시에 홍주에서 길을 떠나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 동문으로 나가니, 좌우에 있는 민가가 다 불타 버리고 남은 집이 없었다. 보기에 참혹한지라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니, “지난달 28일에 동도가 성을 포위하고 접전할 때에 그 무리들이 불을 질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100여 보를 더 걸어 나가니 적의 시체가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고, 숲 덤불에는 송장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동쪽으로 30리를 가서 대흥군(大興郡)에 당도하여 주둔해 자는데, 그 고을 군수인 이창세(李昌世)가 보러 왔다.
○ 당일 인시에 도달한 선봉진의 전령에, “어제도 제송(題送)을 하달하였지만, 해미에 있는 비류는 당일 안으로 토벌하여 평정하는 일을 꾀할 것이요, 서산과 태안에 있는 적들도 차례대로 소탕하라. 이전에 보낸 제사에 따라, 날짜를 정하여 급히 ≪공주로≫ 달려가 구원하라. 그리고 이미 서산과 태안에 들어갔으니, 피해를 입은 두 고을 전 수령의 시신을 치상(治喪)하고 운구(運柩)하는 절차는 간여하여 감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그 사이에 이미 장례를 치렀고 전 수령의 친형이 지금 운구하려고 갔으니, 특별히 더 돌보아 주어 후하게 서로 힘을 같이 하여 도와주는 의리를 베풀라.”고 하였다. 초8일에 공주에서.
11월 11일 맑음 [十一日晴]
대흥에서 길을 떠나 동점재(銅店峴)를 넘어 40리를 가서 공주의 경계인 유구동(維鳩洞)에 도착하였다. 전 우후(前虞候)인 백낙중(白樂重)이 주물(酒物)을 성대하게 갖추고 맞아들여 정성스레 대접하고, 모든 군인의 두 끼 밥도 잘 접대하였으니, 그의 성의가 매우 후하였다.
○ 당일 묘시에 어젯밤에 붙잡아 온 동도인 장일관(張一官) · 강도석(姜道石) · 강수흥(姜水興) · 강천복(姜千卜) · 김진길(金辰吉) · 안은중(安銀仲) · 김수경(金水京) · 박덕윤(朴德允) · 김성용(金成用) · 신복록(申卜祿) · 강유굴(姜有屈) · 강이현(姜二玄) · 최응삼(崔應三) · 김백용(金白用) · 박준악(朴俊岳) · 강선화(姜善化) · 김순종(金順宗) · 성자은(成子銀)과 서산 관노(官奴) 김대석(金大石)을 합한 19명을 대흥읍 앞에서 결과하였다.
○ 당일 유시에 도부한 해미의 적을 격파했던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는 다음과 같다. “해미성의 적을 토벌하여 평정한 일로 그 동안 장수와 군졸들의 근면한 노고가 극히 가상하다고 들었다. 즉시 의당 보고하겠거니와, 남은 무리가 여러 고을에 출몰하는 것은 형편상 본래 그러하다. 그러나 주둔해 있는 무리들을 일시에 격파하고 여당(餘黨)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일은 여러 고을의 자목(字牧)들의 책임에 달려 있고, 대병(大兵)이 진압하여 제거할 일이 아니다. 또 하물며 본영(충청감영)에 압경(壓境)한 비도가 일으킨 소요는 절대 보통 일이 아니다. 제사가 도착한 즉시 밤을 새워 달려가는 것이 좋겠다. 혹시 여당의 소요를 정리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지연된다면 책임이 장차 돌아갈 것이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군대를 단속해야 한다. 그리고 노획한 군물의 실제 수효를 성화같이 치보하고 호궤(犒饋)하는 절차를 형편에 따라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하였다. 10일 공주에서.
○ 당일 유시에 유구(維鳩)의 전평(前坪)에 당도하니, 천안 의병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붙잡은 동도 9명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장물(贓物)을 군대 앞에서 현납(現納, 실지 그 물건으로 바침)하였다. 이에 ≪동도를≫ 자세히 캐물으며 취초(取招)하였더니, 이들은 바로 이 마을 비류와 같은 무리로서 남몰래 전봉준과 약속하기를, “본진이 반드시 이 마을을 통과할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후미(後尾)를 끊고 내려가면서 공격하고 전적(全賊, 전봉준)은 금강을 건너 역공(逆攻)하여 위아래 양쪽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하기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유구마을은 모두 목천 비류의 소굴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매우 통탄스러워, 진중(陣中)에 분부하여 마을 주민 천여 명을 수색하여 붙잡고 군수품을 찾아내, 포교(捕校)와 각 소대에 나누어 가두고 밤을 지냈다.
○ 당일 유시에 도달한 매현(梅峴)에 둔치고 있는 적을 격파하였던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올라온 보고서를 전하려고 책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비도를 차례차례 토벌하여 많은 수효의 군사 물자를 도로 빼앗아 왔으니, 힘쓴 보람과 큰 공은 실로 매우 감탄스럽다. 화근(禍根)을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으니 뒷일이 비록 염려되지만, 이는 그 지방의 책임이다. 전날에 보낸 제사(題辭)에 따라가서 구원해 줄 것이며, 서산의 적은 스스로 불을 질러 자멸(自滅)하였다. 이는 가히 신과 사람이 함께 미워하는 이치를 볼 수 있는지라 더욱 매우 기특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11일에 공주에서.
○ 해미에 둔치고 있는 적을 격파한 일과 세성산에서 길을 떠난 이후로 결과하였던 동도의 성명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올라온 보고서를 전하려고 책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노획한 군물이 이와 같이 많은지라, 창궐(猖獗)하는 저 무리들의 작태를 가히 알 만하다. 이렇게 온전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비로소 금영(錦營)으로 나아가 구원하라는 제사의 명령이 내렸으니, 이에 따라 밤을 새워 진군하여 혹시라도 기회를 잃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10일 공주에서.
○ 계속하여 도착되고 있는 본진이 지나가는 연로(沿路)의 각 읍 촌리(村里)에서 군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보내 준 물종(物種)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공문에, “올라온 보고서를 전하려고 책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마을마다 대그릇 밥과 병의 음료[簞食壺漿]를 마련하여 군사들을 맞이하니, 난을 겪은 백성들의 심정을 이것으로 알 만하구나.”라고 하였다. 10일에 공주에서.
11월 12일 맑음 [十二日晴]
축시에 도달한 선봉진이 보낸 전령에, “지금 소식을 듣건대 본진이 유구로 지나간다고 하니, 반드시 금영에 다다를 필요는 없다. 바로 정산(定山)으로 향하는 길에 차례대로 논산 길로 진발(進發)하는 일이 매우 편리하고 좋을 것이다. 지금 일본 군진[日陣]에서 기별하여 알려 왔다. 이렇게 영을 전하므로 바로 정산 길을 택하고 진발하여 기다렸다가 편리한 대로 군대를 합하라.”고 하였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를[路程] 기록하여 보내는 일을 고준(考準)하였다. 11일 술시에 공주에서.
○ 어젯밤에 유구동(維鳩洞)에서 근거지를 지키고 있던 동도 1천여 명 중에서 붙잡힌 자들을 차례로 취초하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며 조사하고 캐물어서 그 거괴(巨魁)로서 반드시 죽여야 할 자 27놈을 택하여 그 마을 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 마을에 사는 오정선(吳鼎善)은 본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으로, 이미 용담(龍潭)과 금산(錦山) 등지의 읍 수령을 지냈던 자이다. 그런데 비도에 투신해 들어가 도집강(都執綱)의 임무를 맡았다고 자신의 입으로 범죄 사실을 진술하였다. 이미 그 죄를 자백하여 복종하였으니, 즉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현재 선봉진의 별군관 임무를 띠고 있다. 그 때문에 상부의 회답 제사를 대령했다가 이 일을 처리할 참으로 진중(陣中)에 수감하였다. 또한 최석주(崔石柱)는 말솜씨가 좋고 기개와 박력이 있어서 크고 작은 마을 일을 거의 다 간섭하고, 비도의 수괴를 겸하여 맡은 자이다. 진중에 같이 수감하여 우선 회답 제사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려고 그 사유를 아울러 갖추어 선봉진에 보고할 생각이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협박당하여 복종한 자들이기 때문에, 잘못을 고치고 선을 행하여 마음 놓고 생업을 즐기라는 뜻으로 타일러 일깨우고 석방하였다.
○ 동학의 도집강인 전 용담현령(龍潭縣令) 오정선의 공장(供狀, 진술서)에, “아룁니다. 저는 금년 3월경에 용담현령으로 있으면서 금산에 있는 동도가 일으킨 민요(民擾)를 조사하였습니다. 그 해당 군의 보부상(褓負商)이 의연금(義捐金)을 내고 군진(軍陣)을 설치하여 진산군(珍山郡)에서 동도 100여 명을 토벌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승진하여 진산군에 전임하였습니다만,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질병으로 말미(휴가)를 얻고 돌아가자 그대로 체직(遞職)당했습니다. 집에서 병을 앓으며 6개월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이었는데, 마을 안으로 동도가 침범하여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당한 재난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당장 편한 것만 따르려는 생각에 지난 8월 28일 동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병든 몸으로 문밖을 나가지 못하여 한 번도 무리들 속에 끼지 못했던 일은 바로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도집강 임명첩은 그 무리들이 스스로 만든 일이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저에게 일을 맡겨 차출(差出)했던 의미를 대략 들어 보았더니 과연 이것은 전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은 조정의 관리인데 아무리 위협을 당하여 무리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들어갔으면 죽는 일을 어찌 아까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의 공초(供招)는 여기에 그쳤으니 참고하여 처치할 일이다.
○ 선봉진에 다음과 같이 첩보하였다. “지시에 따라 날짜를 정하여 공주로 급히 가려고 이달 초9일 해미를 출발하여 홍주에 도착하여 머물러 잔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거니와, 그 다음날 초10일 30리를 가서 대흥읍(大興邑)에 주둔하여 잤습니다. 유회소(儒會所)의 지적(指摘, 지목하여 폭로함)에 따라 붙잡은 동도를 바로 결과하였습니다. 11일 40리를 가서 공주의 유구에서 머물러 잤더니, 11일 축시에 도달한 전령에, ‘곧바로 정산(定山) 길을 택해 진군하여 대령하였다가 편의에 따라 합병(合兵)하라’고 하셨으므로, 지시 말씀에 의거하여 군사를 되돌려 정산으로 전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11일 신시 무렵 유구에 도착하여 주둔해 자려고 진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는데, 의병진에서 붙잡아 보낸 동도 9명은 바로 유구에 거주하는 놈들입니다. 즉석에서 공초하였더니, 유구의 이른바 충경포(忠敬包)는 4~5천 명으로, 그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당일 밤이 깊어진 후에 산에 올라가 총포를 쏘아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킨 뒤에 경군(京軍)의 무기를 빼앗고 경군을 무차별 살해할 작정이었습니다. 거기서 탈취한 병기로 강북(江北, 금강의 북쪽)에 있는 동도를 성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하고 범죄 사실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에 저녁밥이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어도, 미처 밥을 먹지 못한 채 날이 어두워지는 황혼에 군사를 출병시켜 ≪그들을≫ 습격하여 밤새 천여 명을 붙잡아, 다행히 ≪우리가≫ 그 화(禍)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러 놈에게 자세히 캐물어 보니, ‘거괴의 수효가 매우 많아서 협박당하여 복종한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그 자들을 모두 잡아 죽여야 하지만, 감히 거괴들만 처단하고 협박당하여 복종한 사람은 다스려 처벌하지 않는 의리에 따라 그 우두머리만 잡아 죽이고 복종한 자들은 놓아 주었습니다. 유구에 있는 적의 큰 소굴을 오늘 제거하는 일 역시 전쟁에서 공격하고 쏘아 죽이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 역시 적을 부수고 뒷길을 여는 확고한 한 가닥의 계책입니다.
금영(錦營)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3갈래가 있으니, 동쪽은 대교(大橋, 현 대교리)가 있고 가운데에는 광정(廣亭)이 있고 서쪽에는 유구가 있습니다. 유구의 길은 여기서부터 점점 넓게 열리니, 대교와 광정이 가까이서 어떤 모양을 이루겠습니까? 남북에 있는 두 적(賊)이 서로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경군을 에워싸는 것으로 최상의 계책을 삼았으니, 그 헤아릴 수 없는 일을 누가 깊이 알았겠습니까?
이에 결과(結顆)한 여러 놈을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 거괴 중에 선봉진의 별군관 1명이 있었는데, 그에게 듣고 묻는 일이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죄상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바로 마땅히 결과하여 뿌리를 제거해야 하지만, 그가 군관(軍官)에 관계되므로 회답 제사를 기다렸다가 처치하려고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내용을 점련(粘連, 증거 서류를 덧붙임)하여 첩보합니다. 그리고 대흥읍에서 결과한 동도의 성명도 책자로 만들어 수정하여 함께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결과 죄인 성명 성책(成冊)
장일관(張一官), 강도석(姜道石), 강수흥(姜水興), 강천복(姜千卜), 전진길(全辰吉), 안은중(安銀仲), 김수경(金水京), 박덕구(朴德九), 김성용(金成用), 신복록(申卜祿), 강유굴(姜有屈), 강이현(姜二玄), 최응삼(崔應三), 김백용(金白用), 박준악(朴俊岳), 강선화(姜善化), 김순종(金順宗), 성자은(成子銀), 김대석(金大石). 이상 19놈. 11월 11일 대흥읍에서 결과.
○ 최한규(崔漢奎), 강대숙(姜大叔), 채동주(蔡東周), 이인보(李仁甫), 한성리(韓成履), 이만헌(李萬憲), 박지용(朴之用), 상천만(尙千萬), 상훈이(尙勳伊), 강이남(姜二男), 정영남(鄭永男), 이상봉(李上奉), 박명여(朴明汝), 홍재익(洪在益), 김봉갑(金奉甲), 한복록(韓卜祿), 김치삼(金致三), 김거복(金巨卜), 문천복(文千卜), 오청용(吳靑用), 양성기(梁成己), 박희덕(朴喜德), 박덕련(朴德連), 서순보(徐順甫), 박덕현(朴德賢), 김화봉(金化奉), 양성기(梁性己). 이상 27놈. 유구 앞에서 결과.
11월 12일.
○ 당일 신시에 붙잡은 죄인은 죄의 경중(輕重)을 구분해 참작하여 처리하고, 장부에 기록한 뒤에 유구를 출발하여 정산 가는 길로 향하였다. 겨우 10리를 행군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목(烏木)과 구령(九靈) 등의 고개를 넘는데, 산은 높고 길은 험하였다. 큰 시냇물이 협곡을 통과하였는데, 그 냇물을 13번이나 건넜다. 하물며 또 구름은 짙게 끼고 비는 흩날리는데, 인적이 없는 협곡 길에서 어찌 불붙이는 도구를 얻으리오. 사람과 말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행군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전진하기가 괴로워 40리를 가서 공주 지경의 동천리(銅川里)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11월 13일[十三日]
밤새도록 내린 비가 개지 않다가 사각(巳刻, 오전 9~11시)에 잠시 멈췄다. 동천에서 길을 떠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20리 길을 지나면 정산 땅의 건지동(乾芝洞)인데, 여기가 바로 동도의 소굴이며, 새벽과 저녁에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마치 관부(官府, 조정이나 관아)와 같이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동네에 당도하여 갑자기 습격하여 40~50명을 체포하고 일일이 사핵(査覈)해 보니, 거괴는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붙잡힌 놈들로 하여금 행패 부린 자를 적발하게 하였으니, 곧 이칠천(李七千) · 송기용(宋己用) · 이용흡(李用洽) · 홍종일(洪宗一) · 변천석(卞千石) · 황정여(黃丁汝) 등 6놈인데, 그 자리에서 결과하고 공문을 작성하여 선봉진에 보고하였다.
○ 선봉진에 첩보하기를, “이 달 11일에 유구에서 머물러 잤던 사유를 이미 첩보하였거니와 12일에 30리를 가서 동천에서 주둔하여 잤습니다. 오늘 길을 떠나 행군하며 소문에 들으니, ‘20리 길을 지나면 정산 땅의 건지동인데, 바로 동도의 소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을에 당도하여 포위하고 갑자기 기습하여 50여 명을 체포하였으나, 거괴는 이미 도주하였습니다. 붙잡힌 여러 놈으로 하여금 행패 부린 자 6놈을 적발하여 현장에서 결과한 후에 그대로 행군하였습니다. 정산읍에 이르러 지시를 받고 나아가거나 머무르고자 합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동일(同日, 13일) 축시에 도달한 선봉진의 전령에, “오늘 일본군 대위(大尉)가 말을 전했다. 진군하여 구원할 조짐이 있다. 이에 전령을 보내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이인(利仁) 땅으로 진군하여 기다렸다가 편리에 따라 조발(調發, 군사를 징발함)하라”고 하였다. 13일 공주에서.
○ 선봉진에 첩보하였는데, “오늘 자시에 도착한 전령에 따라 금방 ≪군사를≫ 이인 땅으로 전진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를 치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정산 읍에 당도하여 주둔하여 자면서 적의 정황을 탐지하여 들어 보니, “그 읍 건지동의 접의 무리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그날 밤 오경(五更)에 군사를 파견하여 포위하고 100여 명을 체포하여 엄중하게 잡아 가두고 밤을 지냈다.
11월 14일 맑음 [十四日晴]
조반(早飯)을 먹은 뒤에 어젯밤에 붙잡은 여러 놈을 자세히 캐묻고 취초(取招)하니, 지난달 23일 이인에서 접전할 때에 따라간 자와 직임(職任)을 가지고 행패 부린 자가 10명이요, 그 나머지 여러 놈은 함께 무리에 들어간 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협박당하여 복종하였을 뿐이요, 이미 인륜에 어긋난 좋지 못한 버릇이 없었으므로 타일러 깨우쳐 주고 석방하였다. 실제로 죄를 범한 이승주(李承周) · 박대심(朴大心) · 이오길(李五吉) · 박용대(朴用大) · 허일손(許一孫) · 강정문(姜正文) · 정석이(鄭石伊) · 이용근(李用根) · 조성복(趙性卜) · 조영천(趙永千) 등 10명을 해당 읍 앞에서 결과하였다.
미시쯤 선봉진의 지시에 따라 이인을 향하여 길을 떠나 반탄(班灘)을 건너서 20리를 간 뒤 저물녘에야 이인에 당도하였다. 대관 박영유(朴永裕)가 금영(錦營)에서 진영으로 돌아와,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을 갖추어 전하였다. 또한 선봉진에 고하고 공주 땅 용수막(龍水幕)에 출장 갔던 때의 이야기와 적과 접전할 때의 소식에 대해 말하였다.
○ 정산 건지동에서 붙잡았던 동도를 결과했던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당일 술시에 도착한 회답 제사에, “건지동은 본디 비도의 소굴이라 칭하였지만 거괴가 도피하였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지금 이러한 위엄으로 단속하여 남은 나쁜 습성을 징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양민(良民)들이 함께 그 재앙을 입는 일 또한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즉시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출발하며, 갑자기 이인으로 돌아가 머물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전령이 도달하는 즉시 군사를 진군하라.”고 하였다. 13일 공주에서.
○ 이어 도달한 ≪선봉진의≫ 전령에, “대진(大陣)은 바야흐로 용수막에 머물러 잤고, 본진은 내일 이른 아침까지 편한 대로 좇아 경천점(敬天店)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합하는 일이 좋을 것이다. 혹시라도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14일 용수동(龍水洞)에서.
○ 선봉진에 첩보하기를, “본진이 정산읍에서 길을 떠나 오늘 해질녘에 이인에 당도하였습니다. 지금 삼가 전령을 받들어 내일 아침 일찍 경천으로 떠날 계획입니다. 이런 연유로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정산에서 붙잡은 동도의 도집강(都執綱)은 본현의 하리(下吏, 낮은 벼슬아치)인 이장헌(李章憲)으로, 이인에서 접전할 때에 따라갔던 자이다. 그리고 동몽(童蒙)인 김영석(金永石)은 아직 결과하지 아니 하고 진중에 가두어 두었다가 이인으로 압송하여 왔다.
○ 선봉진에 다음과 같이 첩보하였다. “오늘 새벽 전령에 따라 정산에서 이인으로 출발한 사유는 이미 치보하였거니와, 어제 정산에 주둔할 때에 적의 정황을 탐지하여 들어 보니, ‘그 읍 건지동에 접의 무리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오경(五更) 때에 군사를 파견하여 에워싸고 별안간 습격하여 동도 100여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다각도로 탐색하여 사실을 밝혀 보니, 이인에서 접전할 때에 수행했던 자와 임무를 띠고 행패 부린 자 등 도합 10명을 적발하여 바로 결과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놈들도 이미 모두 입도(入道)한 무리인지라 마땅히 바로 모두 죽여야 하지만, 함께 협박당하여 복종한 자들로서 이미 행패 부린 사실이 없었습니다. 과실로 인한 재앙의[眚災] 죄목에 해당하여 사면(赦免)의 특전[原恕]을 시행하는 것에 합당하기 때문에 곧바로 유회(儒會)를 열어 거기에 따라 비도를 죽이겠다는 뜻으로 잘 타일러 경계하고 또 일깨워 주었습니다. 아울러 석방하고 민심을 안정시킨 후에 곧 출발하여 이인에 다다라 머물러 잤습니다. ≪그 동안에≫ 결과하였던 동도의 성명을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이상 보고드릴 공문을 미처 경리청에 보내 드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용수막(龍水幕)의 선봉진이 주둔한 곳으로부터 참모관(參謀官) 2명이 전담하여 본진으로 와서 말하기를, “논산에 있는 적의 기세가 몹시 급박하며 적도들 또한 아군(我軍)의 복장을 입고 현혹시키는 계략을 쓰고 있으니, 우리 군사는 마괘자(麻掛子, 마고자)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저고리 소매의 흰 부분을 나타내어 각각 구별하게 한다.”는 비밀 지령을 은밀히 전하였다. 이에 진중에 있는 장관(將官) 이하 병정에게 분부하여 명령에 따라 소매를 걷도록 하였다. 해시(亥時) 무렵 행군이 10리 거리의 용수막에 당도하여 선봉진 및 일본 사관인 모리오 가이치(森尾雅一)를 직접 만나 뵙고 약속하였다. 그 후 마을에서 선봉진이 내린 지시에 따라 밥을 짓고 기다렸다가 사졸들에게 밥을 먹였다. 곧바로 10리를 가니, 첫닭이 이미 울었다. 새벽에 바로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멀리 적의 기세를 바라보니,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11월 15일 맑음 [十五日晴]
또 바로 행군하여 노성읍(魯城邑)을 지나 문래고개[文來峴]에 다다라 잠시 머물고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먹였다. 잔대(棧臺)를 넘어 망리고개(芒里峴)에 모여 적의 정세를 염탐해 보니, ‘≪그들이≫ 논산에 모여 있는데 형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이에 치중(輜重)부대와 백의(白衣)로 종군(從軍)한 자들을 문래동(文來洞)에 머물게 하고 급히 구보(驅步)로 전진하여 논산에 도착하였다. 주둔해 있는 적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남적(南賊)인 전봉준의 무리였다. 전투에 승리한 후에 산 위에서 밤을 지냈으며, 당일의 행군을 계산해 보니 30리 거리였다. 산길이 험악하여 용수막 이후부터는 걸어서 행군하였다.
11월 16일 맑음[十六日晴]
논산(論山)에서 군대를 돌려 20리 거리인 노성읍으로 돌아와, 소 5필을 도살하여 전사(戰士)들에게 거하게 호궤하고 거기에 주둔하여 자면서 군사를 휴식시켰다.
11월 17일 맑음 [十七日晴]
그대로 노성읍에 머물러 삼영(三營) 및 선봉진과 순영에 다음과 같이 첩보하였다. “선봉진에서 보낸 제사(題辭)에 따라 이 달 9일 해미에서 길을 떠나 홍주에 이르러 주둔하여 잔 사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0일에는 30리를 가서 대흥읍에서 주둔하여 잤고 유회소의 지적에 따라 붙잡은 동도 19명을 즉시 결과하였습니다. 11일에는 40리를 가서 공주의 유구에 도착하여 머물러 자려고 군진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습니다.
천안에 있는 의병 행진소로부터 잡아 보낸 동도 9명은 바로 유구에 살고 있는 놈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즉석에서 심문하였더니, ‘유구의 이른바 충경포(忠敬包)는 무려 4~5천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약속하기를, 그날 밤이 깊어진 후에 경군의 무기를 빼앗고 경군을 모조리 잡아 죽인 뒤 탈취한 무기를 강의 북쪽에 있는 동도를 지원하려 한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몰래 습격하여 밤새도록 1천여 명을 체포함으로써 다행히 그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자세히 캐묻고 조사하여, 협박당하여 추종했던 자들은 석방하고 거괴 27명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거괴 중에 전 용담현령이었던 오정선(吳鼎善)은 바로 선봉진의 별군관인데, 동도의 도집강(都執綱)의 임무를 띠고 있는 자입니다. 조사하여 캐묻자 범죄 사실을 자세히 진술하였습니다. 이에 상부의 회답 공문을 기다렸다 처치하려고 진중에 잡아 가두고 초사(招辭, 供招)를 첨부하여 선봉진에 첩보하였습니다.
12일에는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에 따라 정산으로 진군하려고 40리를 가서 공주의 동천리에 주둔하여 잤습니다. 13일 정산을 출발하여 지나오는데, 건지동은 바로 동도의 소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로 가서 갑자기 기습하여 50여 명을 체포하고 일일이 조사하여 물어 보니, 거괴는 이미 도주했습니다. 붙잡혀 온 여러 놈들로 하여금 행패 부린 6명을 적발하게 하여 즉석에서 결과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놈들은 아울러 경계하고 깨우쳐 놓아 보냈습니다. 곧 10리를 가서 정산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습니다. 그리고 접전(接戰)할 때에 따라다닌 동도와 직임을 맡고 행패를 부렸던 자들을 조사하여 붙잡은 10명을 즉석에서 결과하였습니다.
14일에는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에 따라 30리를 행군하여 이인에 이르렀습니다. 당일 해시 무렵 선봉진의 참모관이 와서 전하기를, ‘일본군 사관의 지시로 즉시 용수동(龍水洞)에서 합병(合兵)하기로 하였다’라고 하기에, 당일 자시쯤 행군하여 용수동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내 일본군 사관 모리오 가이치(森尾雅一)를 접견하였는데, ‘장차 노성(魯城)의 적을 사로잡으려고 군사가 세 갈래 길로 출동했습니다. 서쪽 길을 따라 날이 새기 전에 전투할 장소에 이르러 서로 호응하여 지원하자’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의 주산(主山)인 서남쪽 산기슭에 당도하니, 날이 아직 새지 않았습니다. 암석과 솔숲 사이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적들이 모여 있는 곳을 멀리 살펴보니, 아득히 불 무더기가 몹시 많게 보였습니다. 짐작건대 노성읍을 얻는다 하더라도 적막하여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아, 몰래 매복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시진(時辰)이 지났어도 아직 하늘이 밝아오지 않았는데, 불빛이 먼저 주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사가 먼저 ≪그곳을≫ 차지한 것을 짐작해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걸어서 전진하여 노성읍으로 향하니 거주민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적이 이미 도주하였다’고 했습니다. 대관 이규식을 보내어 일본군 사관과 노성읍에 관한 약속을 하였으므로 이를 실천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였습니다. 10리 거리에 있는 논산 땅의 초동(轈洞)에 이르러 밥을 지으려고 잠시 주둔하였습니다. ‘일본군 병사가 통위병(統衛兵)과 더불어 논산으로 향하여 먼저 갔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 따라서 바로 군 장비를 꾸려 뒤따라가서 몇 리를 겨우 행군하였을 때에 논산에 있는 적이, ‘들을 가득 메우고 관군을 가로막으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응원하려고 군사를 재촉하여 전진하니 또 몇 리를 못 가서 앞에 있는 진에서 대포 소리가 들을 뒤흔들고 적병의 깃발이 흔들렸습니다. 일본진의 병사들이 포 소리를 듣고 깃발을 목격하자 개개인이 날 듯이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며, 여러 장관(將官)들이 거느린 부대가 길을 나누고 뒤따라와 응원하였습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통위병과 함께 이미 소토산에 있는 적진을 빼앗았고 적의 깃발을 휘두르면서 함성을 지르니, 본진의 군사들도 일제히 함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적의 진영은 오히려 퍼져 흩어지지 않고 군대를 정비하여 여러 무(武, 1무는 반걸음. 곧 3尺)의 거리로 퇴각하여 은진(恩津)의 황화대(黃華臺)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이 장차 다시 돌진해 올 염려가 있기에, 일본군 병사가 통위병과 같이 먼저 격파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적의 기세가 시들할 때에 본진이 이내 앞쪽의 구릉을 차지하여 적의 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적이 수비하는 황화대는 광대한 들 가운데 우뚝하게 홀로 서 있어 사방의 산기슭이 조밀하게 둘러 있고 가운데 봉우리는 펀펀하고 넓은 땅이었습니다. 사방으로 산 낭떠러지에 에워싸여 있으니, 자연히 이루어진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주위는 매우 광활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사방에 서서 갖가지의 총구(銃口, 총부리. 총구멍)를 교대하며 쏘아 대니 그 소리도 각각 달랐습니다. 곧 천보총(千步銃)은 소리가 크면서 사정거리가 멀고 후문총(後門銃)은 소리는 나지막하되 급히 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승총(火繩銃)은 소리는 빈 듯하여 사정거리가 가깝지만 번잡하게 발사되어 원근에 나는 탄환이 좁쌀같이 흩어졌습니다.
이에 분노와 용감한 감정이 북받쳐 적을 깔보지 말라는 뜻을 돌보지 않고 바로 대관 윤희영・김진풍과 별군관 윤지영・이겸래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2개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의 서쪽 주변 넓은 들 가운데로 좇아가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 반개 소대(半個小隊)를 참령관 원세록에게 붙여 주어 뒤에서 의병(疑兵) 작전을 쓰게 하였습니다. 또한 대관 박영호(朴永祜), 별군관 김광수(金光洙), 대관 이규식으로 더불어 몸소 3개의 반 소대를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황화대의 동북쪽 작은 산기슭을 따라가 함성을 지르면서 곧바로 올라가 적을 격파하게 하니, 서쪽을 포위하고 있는 적이 남쪽 기슭을 향하여 미친 듯이 달려갔습니다. 곧 여러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와 군졸들이 함성을 지르고 추격하여 그 후미를 압박하며 총을 쏘았습니다. 남은 적 1천여 명이 흩어져 드문드문한 모양이 마치 새벽하늘에 성긴 별과 같았으며, 가을바람에 낙엽과 같은 꼴이었습니다. 길가에는 총과 창이 버려지고 밭두둑에 쓰러진 시신과 머리는 처참하게도 눈에 걸리고 발길에 채였습니다. 이때 서쪽의 해가 산과 바다에 걸려서 독기가 점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창을 휘둘러 지는 해를 되돌리지 못함을 한탄스러워 했습니다[未回落日之戈].
곧 ≪군사를≫ 철수하고 합하여 그대로 돌아가 황화대에 주둔하였습니다. 시골 마을을 찾아가 군사를 먹이고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고 한데서 밤을 지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군사를 배치하고 지휘하는 여러 가지 기술은 사실은 일본군 사관 모리오 가이치에게서 나왔습니다. 함께 올라가 둘러보면서 모리오 가이치가 마음을 쓰고 힘을 낸 것이 실로 감탄할 바이며, 또한 우리 병사가 목숨을 걸고 지시에 따른 일도 따라서 가상합니다.
어제 모리오 가이치의 지시로 노성읍으로 군사를 돌려 주둔하여 잤으며, 군대가 돌아오는 길에 ‘은진의 묵동이 곧 적들이 화약을 제조는 곳이라’는 사실을 탐지해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참령관 원세록이 거느린 군대를 나누어 그 동으로 들어가서 별안간 기습하여 베어 죽인 자가 7명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일깨우고 경계하여 놓아 보냈으며, 화약을 제조하는 기구는 죄다 부수어 버렸습니다.
어느 곳으로 나아가거나 머무를지 선봉진의 지시를 대령하여 거행할 요량입니다. 홍주에서 길을 떠난 이후로 결과하였던 동도의 성명을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선봉진에 대해서는 머리말과 끝부분의 내용을 고쳐 보고하였다.
○ 공주판관(公州判官)에게 관문을 보내기를, “본영 병정인 김치순(金致順)은 이번에 논산에서 접전할 때에 적의 총탄에 상처를 입어 이에 호송하니, 잘 치료해 줄 것이며 호송하는 사람도 아울러 일체의 식사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 논산에서 승리하였던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당일 저녁에 도착한 제사에,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냈거니와 이번의 승리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비류(匪類)들이 이미 낌새를 알아차리고 먼저 도주하여 그물 포위망을 빠져 나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몹시 통한스럽다. 장수와 병졸들이 전략을 잘 세워 임기응변(臨機應變)한 것은 매우 가상하고 감탄스러운 일이다. 매번 밖에서 공을 거둠에도 아직 대면하여 공로를 치사하지 못하였으니, 항상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상처 입은 병정은 특별히 구조하여 치료하도록 당부하여 잠시 머물러 있게 하고, 노성(魯城)의 피폐한 세간의 민심을 진정시키라.”고 하였다. 17일 공주에서.
○ 14일에 정산에 주둔하여 잤다. 결과한 동도의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첩보한 일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올라온 보고서를 전하려고 책자로 만들어 바쳤다. 수괴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오면 섬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나랏일[王事]≫을 중지할 수 없음을 알라.”고 하였다. 17일 공주에서.
○ 10월 29일에 정산 등 13개 읍으로 향하여 갔던 일을 공문으로 보고한 일을 순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적개심(敵愾心)이 있는 곳에 나랏일을 중지할 수 없는지라, 날마다 그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데, 여러 번 승전한 공적이 있으니, 모름지기 공경하고 감탄하였다. 다시 더 마음을 가다듬고 힘써 기필코 적을 소탕하기를 도모해야 하니, 이것을 바라는 바다.”라고 하였다. 11월 26일 군영에서.
○ 11월 초1일 세성산에서 노획한 탄환이 21척 남아 있는데, 그 중에 9척을 통위영의 군진으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10냥척을 공주판관에게 맡겨 두었던 일을 공문으로 아뢴 일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탄환을 옮겨 사용하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공주에 맡겨 둔 것을 후일에 실어 보내라는 뜻으로 매이(枚移)하라.”고 하였다. 초6일 발송.
11월 18일 맑음 [十八日晴]
사시(巳時)에 도착한 선봉진 전령은 다음과 같다. “대대군(大隊軍, 일본군)이 노성읍에 머물러 주둔하여 직무에 분주한 일이 많고 또 철수하여 돌아가기 어렵다고 들었다. 노성현감과 함께 좋은 방편을 상의하여 읍내와 논산 2곳 중에 적당한 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지휘를 기다리되, 논산은 본래 갯마을[浦村]이 즐비한 곳으로 근래에는 적의 소굴이 되었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그 당에 들어갔고, 선량한 자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 온 마을이 텅 비었으며, 세간살이는 거의 다 포기하였다고 한다. 병정을 단속하여 함부로 약탈하는 악습을 엄격히 금하고, 뿔뿔이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라. 그런 후에 음식을 제공하는 절차와 군진을 이동할 때의 편리 여부 상황을 차례대로 치보하라.”고 하였다. 17일 해시 공주에서.
○ 선봉진에 첩보하기를, “즉시 도달한 전령에 따라 명령하신 대로 금방 논산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안심하여 살게 하고, 병정들을 단속하여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할 생각입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노성 · 은진과 논산 두 마을의 삼소임(三所任) 등에게 전령하기를, “본진이 금방 진을 옮겨 본동(本洞)에 주둔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놀라 동요하지 말고 영접 절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등등의 모든 일은 미리 치하여 준비하라.”고 하였다.
○ 당일 사시에 먼저 본읍의 사령 2명을 선정하여 해당 현감에게 내보냈다. 또한 먼저 가서 그들로 하여금 마을 주민을 타일러 깨우쳐 주어 안심시킨 후에 즉시 군진이 나아갔다. 20리 길을 가서 은진에 다다르니, 논산의 수천 호 되는 큰 마을이 모두 적에게 핍박당하여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고 지탱하여 남은 곳이 거의 없었다. 난리를 겪은 백성들의 실정(實情)이 불쌍하고 근심스러웠다. 곧 마을 앞에 있는 봉화대(烽火臺) 위에 군사를 주둔하여 군 장막을 치고 밤을 지내는데, 변경(邊境) 바람이 갑자기 혹독하게 불어와 찬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익산(益山)의 미륵산(彌勒山)에 주둔하고 있는 적과 이곳에서 대치하였다.
11월 19일 맑음 [十九日晴]
금방 논산으로 진을 이동한 사실을 선봉진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답 제사에, “일본 군진이 금방 길을 떠났으니 그의 지휘를 듣고 나아가거나 머무를 것이며, 본진도 차례대로 전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일 공주에서.
○ 당일 사시에 일본군 사관이 딴 사람에게 맡겨 기별을 통지하였으므로, 논산의 봉화대로부터 7리쯤을 행군하여 은진읍에 도착하여 일본인 사관을 방문하였다. 이내 행군하여 읍내의 30리 거리에 있는 한곡리(鷳谷里)에 당도하여 머물러 잤다.
11월 20일 낮에는 갰다가 밤에 눈이 내림 [二十日晝晴夜雪]
그대로 한곡에 머무르면서 아침에 은진읍에 있는 일본군 사관을 방문하여 군사 업무에 대해 강론(講論)하였다.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별군관 이겸래(李謙來)를 보내어, “군사 1개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가서 전라도의 익산 경계인 미륵산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탐지하라.”고 하였다. 오후에 일본군 사관이 우리가 주둔한 곳에 와서 고마움을 표하였다.
○ 중삼소대(中三小隊) 교장(敎長)인 이경진(李景振)이 병정을 단속하지 못하여 ≪병정들이≫ 자기 멋대로 출발하였다. 이에 경계시키지 못한 죄과(罪科)로 엄중하게 곤장 10대를 쳤다. 그날 밤 이경(二更)에 별군관 이겸래가 진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미륵산 근처에 과연 적이 주둔해 있다가 이미 6,7일 전에 거의 다 도망쳐 흩어지고 지금은 남아 있는 비도들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11월 21일 맑음 [二十一日晴]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진중(陣中)에 붙잡아 가두었던 동도(東徒) 오정선(吳鼎善) · 김영석(金永石) · 이장헌(李章憲) · 최우범(崔又凡) · 김판길(金判吉) · 강이거(姜理居) · 유상신(柳相信) · 윤백현(尹白玄) · 임주달(任柱達) · 홍용만(洪用萬) · 김만석(金萬石) · 이장묵(李章黙) · 최영태(崔寧太) 등 13명을 일본군 사관의 행진소로 이송하였다.
○ 일본군 사관인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본진의 병사 100명을 나누어 일본군 사관인 아카마츠 고쿠보에게 붙여 주고 석성(石城)으로부터 보령(保寧)에 이르는 곳에 파견하여 보냈다. 참령관 원세록이 거느리는 부대 중에 군사 180명을 머물러 해당 소좌(小佐)와 더불어 은진에 머물렀다. 이에 몸소 은진읍으로부터 행군하여 20리 거리인 강경리(江鏡里, 鏡은 景의 오식)에 다다라 도중에 점심을 먹었다. 또 20리를 가서 전라도(全羅道)의 용안읍(龍安邑)에 당도하여 주둔하여 자는데, 이 고을의 현감 ▣▣▣가 보러 왔다.
○ 11일 대흥(大興)으로부터 포교(捕校) 이순길(李順吉) 등이 강경으로 되돌아와서 각 군영의 회답 제사를 바쳤다.
○ 해미의 적을 격파한 후에 군실을 책자로 만들어 이 달 8일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임금에게 아뢸 수 있도록 도착하였거니와 여러 번 승전하였으니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한다. 이후의 자초지종 상황을 종종 치보하라. 금영(錦營)의 사세(事勢)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때에 임기응변으로 가서 구원해 주라.”고 하였다. 13일 발송.
○ 같은 내용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책자로 만들어 바쳤는데,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자는 여러 장졸(將卒)들이 질병이나 없는지 밤낮으로 걱정된다. 행군하여 도착한 곳에 특별히 더 대책을 강구하고 기일을 정하여 토벌할 것이며, 이후에 진행되는 형편을 계속 치보하라.”고 하였다. 13일 발송.
○ 8일 밤에 또 서산의 적을 격파하고 그 군실(軍實)을 공문으로 닦아 장위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공문이 도달했거니와 그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단지 모여 있는 무리들을 흩트려 쫓아 버린 일로써 승리했다’고 하니, 능히 그 근원을 부수지 못하고 도리어 딴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는 필시 흩어진 적으로 하여금 행군한 뒤에 다시 합치게 되면 승첩(勝捷)한 본래의 의미가 진실로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적의 소굴을 만난다면 반드시 노력하여 일제히 공격하라. 그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한 번 싸우고 두 번 싸운다면 깨끗이 제거할 날이 올 것이다. 모두 모름지기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하였다. 14일 발송.
○ 9일에 서산의 적을 격파한 일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에, “임금에게 아뢸 수 있도록 도착하였거니와, 승전하였다는 소식을 연이어 들으니 사졸(士卒)들이 명령을 따르는 일이 매우 가상하다. 종당에는 포상(褒賞)이 있어야 한다. 이후에 진행되는 상황을 종종 치보하라.”고 하였다. 14일에 나온 일이다.
○ 본진이 지나온 연로(沿路)의 각 읍의 마을에서 군사들에게 향궤(餉饋)할 물종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가 도착하였다. 13일 발송.
○ 세성산(細城山)에서 노획한 탄환 9척을 통위영(統衛營)에 옮겨 보냈던 일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가 도착하였다.
○ 본진이 지나오는 ≪연로의≫ 각 읍의 마을에서 마련한 군사들을 먹일 물종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제사 내에, “임금에게 아뢸 수 있도록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13일 발송.
11월 22일 맑음 [二十二日晴]
용안현(龍安縣)에서 길을 떠나 20리를 가서 함열(咸悅)의 경계인 웅포(熊浦)에 당도하여 도중에 점심을 먹었다. 동장(洞長)인 안이신(安理信)・이기찬(李起贊)・안내서(安乃瑞) 등이 소 3마리를 도살하여 모든 군사를 정성껏 대접하였다. 진실로 그 성심을 따져 보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웅포로부터 출발하여 10리를 가서 임피(臨陂)의 경계인 나포(羅浦)에 도착하여 잠을 자려고 숙소에 진을 주둔시켰다. 쫓기고 있는 비류가 그 동(洞)의 접주(接主)인 이한(李漢)의 집에 모여 회의와 추렴 잔치를 벌이려다가 본진이 도착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즉시 병정들에게 명령하여 따라가서 눈에 띄는 대로 체포하고, 체포한 200여 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저녁밥을 먹었다. 거리를 계산해 보니 30리가 되었다.
○ 서울 삼영(三營) 및 선봉진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달 15일에 논산의 적을 격파하였고 16일에 노성읍으로 돌아가 도착했던 연유와 홍주에서 출발한 이후에 결과했던 동도의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17일에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8일에 선봉진에서 보낸 전령에 따라 노성에서 다시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논산에 도착하였습니다. 황화대 위에 막사를 짓고 밤을 지냈습니다. 19일에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로 황화대에서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은진의 한곡(鷳谷)에서 주둔하여 자며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21일에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로 인하여 진중에 붙잡아 수감한 동도 유구의 도집강인 오정선과 그 나머지 동도 12놈을 모두 일본군 사관의 행진소에 압송하여 옮겼습니다.
그런 다음 바로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에 따라 본진의 군사 100명을 나누어 일본군 사관 아카마츠 고쿠보에게 붙였습니다. 석성으로부터 보령으로 가려고 떠나면서 참령관 원세록이 거느린 부대 중에 병사 180명을 잔류시켜 ≪일본군≫ 소좌와 함께 은진현에 체류하도록 하였고, 저는 몸소 2개 소대를 인솔하여 용안으로부터 함열을 거쳐 익산읍과 삼례역(三禮驛, 三은 參의 오식) 등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다음 일본군과 회합하려고 이 달 21일에 용안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후에 진행되는 상황은 계속 치보할 생각이며, 일본군 진영에 압송하여 옮긴 동도의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한산군(韓山郡)에 관문을 보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열의 웅포에 있는 비류가 갑자기 귀군(貴郡)으로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겁탈하며 살상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본동(本洞, 웅포를 가리킴)을 도륙(屠戮)을 내어 기어코 치욕을 씻고자 하여 근방에 이르러 다시 탐문해 보니, 이는 금구(金溝)의 비류인 박여장(朴汝長)이 웅포의 비류 몇십 명을 앞장서 인도하고 함께 가서 소란을 일으킨 일이었다. 이제 군대의 행진이 가까이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박가 놈은 그 본당을 거느리고 이미 도주하였다. 웅포의 비류들이 그를 따라가 죄를 지은 자들 또한 이미 포위망을 빠져 나갔으니 이들을 기어코 체포하여 마침내 베어 죽여야 한다. 본포(本浦, 웅포를 지칭함)에서 따라간 여러 놈의 집도 해당 동민들이 이미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이 포학을 당한 와중에 겨우 목숨을 보존한 백성들이다. 본읍의 아전과 백성들이 기필코 한을 풀고자 하면, 함께 교화되는 백성으로서 형세상 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문을 보내므로 관례(官隷, 관가에서 부리는 하인)를 단속하여 혹시라도 살상하지 말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 웅포의 동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영을 전하였다.
“근래에 불량한 무뢰배와 불의(不義)・불충(不忠)한 무리들이 불을 지르고 겁탈하는 일을 좋은 계책으로 삼아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急先務)로 삼고 있다. 이는 비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드러내 놓고 도륙할 생각을 할 뿐 아니라, 지중(地中, 지하)에 있는 귀신도 필시 가만히 죽이기를 의논할 것이다.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어찌 온종일 내리겠는가. 하늘의 그물이 넓게 펼쳐졌으니, 반드시 흉악한 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태양의 바퀴가 널리 돌지만 어찌 불길한 기운을 놔두랴. 기둥이 불타는 집의 제비는 날개로 어디로 갈 것이며, 끓는 솥 안에 있는 고기는 반드시 마침내 익고야 말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의리로써 먼저 효유하고 군사로써 뒤에 토벌할 것이다. 곰을 잡는 군사가 일거에 토벌하면 솔개같이 나는 오만한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다. 이미 배[腹]가 불타는 화를 겪었으니 반드시 배꼽을 물어뜯는다[噬臍, 후회] 하더라도 이미 때가 늦을 것이다. 너희들도 비적의 약탈을 당할 것이지만, 다행히 왕사(王師)의 토벌을 만나 마땅히 ≪적자(赤子, 백성을 이름)를≫ 보호하는 깊은 은혜를 생각할 것이다. 당초의 천성을 굳게 간직하고 각각 본업에 힘쓰고 안도하라.
옛 사람들이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했던 일과 같이 하는 것은 사람들의 변치 않는 인정이다.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고 조정의 좋은 제도에 따라, 아무리 혹여 지난날 위협으로 따랐던 죄가 있더라도 뉘우쳐 고친다면 양민들에게 의심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 깨닫고 귀화하여라. 만일 고집스럽게 그루터기만 지키는 미혹한 일을 하면 어찌 우레와 벼락 같은 위엄이 없으랴. 아내와 자식들이 도륙을 당할 것이며, 종족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니, ≪뒤늦게≫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이것으로 특별히 효유하니 모두 모름지기 알도록 하라”고 하였다.
11월 23일 맑음 [二十三日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지난밤에 잡아 왔던 동도를 낱낱이 조사하여 실정을 밝히니, 그 직임에 있으면서 행패 부린 하치홍(河致弘) · 이경한(李敬漢) · 김내경(金來敬) · 이중백(李仲白) · 김기서(金奇瑞) · 조학동(趙學東) · 권덕수(權德秀) · 김윤칠(金允七) · 김달환(金達煥) · 서경삼(徐京三) · 김영언(金永言) · 이기찬(李起贊) · 조만홍(趙萬弘) · 박경희(朴京喜) 등 14놈을 택하여 그 마을 앞에서 결과하였다. 나포(羅浦)로부터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임피(臨陂) 경계인 서포(西浦)에서 점심을 먹고 이내 10리를 가서 임피읍(臨陂邑)에 당도하여 머물러 잤다. 거리를 계산해 보니 20리가 되었다. 갯가[浦邊] 좁은 길에 눈이 쌓여 행군하기가 어려웠다.
11월 24일 맑음[二十四日晴]
임피읍에서 길을 떠나 마포교(麻浦橋)를 건너 함열(咸悅)의 경계인 황등(黃燈, 燈은 登의 오식) 장터에 도착하였다. 2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이내 걸어서 익산읍(益山邑)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거리를 계산해 보니 40리가 되었다. 일기가 조금 따뜻하여 행군하기가 매우 편했다.
○ 황등에 있으면서 그 장터의 우사상민(右社商民)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전하였다. “한번 동도가 창궐할 때부터 양민(良民)들이 겁을 먹고 삼가촌(三家邨, 호수가 적은 마을)의 마을 ≪사람들이≫ 그 천성을 온전히 간직한 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슬프도다. 우리 이 백성들이 어찌 모두 귀신이 되게 하리오? 혹여 역(蜮, 물여우)이 시킨 일인가? 필시 타고난 양심[天良]을 모두 손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대군(大軍)이 ≪동도를≫ 소탕하는 데에 표준이 있지 않아, 실로 설명하기 어렵다. 너희들 상민(商民)은 본디부터 성의와 의리가 있다고 일컬었다. 요즘처럼 정(正)과 사(邪)를 분간하기 어렵고 참과 거짓[眞贋]이 뒤섞인 때를 당하여, 만일 한결같이 그 정성과 의리를 이용하면,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아래로는 그 처자를 보존하여 길이 실가(室家)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지금 ≪동도를≫ 죽여 정벌하는 가운데 한 조각의 노파심으로 그러하니, 슬프도다. 양민들이 재앙을 입을까 걱정되어 꺼리지 않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노라.
너희 상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지금 이후로부터 만약 동도가 너희들을 침범한 자가 있거든, 한편으로는 낱낱이 붙잡아 바치고, 한편으로는 너희들의 애매한 처지를 ≪확실하게≫ 밝힐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국가의 굳센 재앙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너희들이≫ 홀연히 깨달아 우리 임금의 적자(赤子, 백성)가 되기를 몹시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11월 25일 맑음 [二十五日晴]
익산읍에서 20리를 행군하여 삼례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수백 호인 온 마을이 모두 동도에게 침략을 당하였다.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물어 보거나 들을 곳조차 없었다.
일본군진이 참령관 원세록과 함께 이미 전주성으로 들어갔다. 군병들이 배가 고파 곧바로 완영(完營, 전라감영)으로 향하여 가지 못하고 부득이 전주 땅인 조곡동(鳥谷洞)으로 구불구불 나아가 점심을 먹고 즉시 출발하였다. 30리를 가서 완영의 서문 밖에 다다르니, 원 참령관이 문 밖에 나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군영의 소식을 대략 들어 보니, “적도 전봉준이 논산에서 쫓긴 이후로부터 도주하여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선화당(宣化堂)으로 들어가 차지하고서 잡아온 남원부사(南原府使)인 ▣▣▣에게 곤장 60대를 치고 참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천부사(順天府使)인 ▣▣▣에게 곤장 30대를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군사마(軍司馬)인 송(宋)▣▣을 결박하고 불로 지져[火焦] 바야흐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리들은 대군이 압림(壓臨, 위엄 있게 임함)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금구(金溝) 지방으로 도주한지라. 일본군 병사가 통위병과 함께 어제 쫓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후에 즉시 성으로 들어가 남문 안에 주둔해 있으면서 완백(完伯, 전라도관찰사)을 뵈었다. 그리고 일본군 사관이 주둔했던 곳을 방문하니 바로 선화당 안에 있는 관아였다. 담화(談話)를 나눈 후 초경(初更, 저녁 7시~9시) 무렵에 돌아가 머무르고 저녁밥을 먹은 후, 밤을 지냈다. 당일에 행군한 이수는 50리 길이었다. 이때부터 일본 군진과 더불어 회합하였다.
○ 당일 밤에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대관 1명과 교장 2명, 병정 100명을 나누어 금구 원평(院坪) 땅으로 파송(派送)하였다.
11월 26일 맑음 [二十六日晴]
그대로 완영에 머물렀다. 당일 유시에 선봉진이 완영에 들어왔는데, 군진이 객사(客舍) 앞에 있는 여염(閭閻)에 머물렀다. 이에 가서 뵈었다.
○ 당일 7시에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대관 1원과 교장 1원과 병정 100명을 나누어 장수(長水) 땅으로 파송하였다. 또 대관 1원과 교장 1원과 병정 140명을 나누어 주고 금구와 태인(泰仁) 등지로 파송하였으니, 어제와 오늘 양일 간에 걸쳐 파송한 장졸이 도합 350명이 되었다.
○ 순무영과 군무아문과 선봉진과 순영에 다음과 같이 첩보하였다.
“이 달 21일에 용안(龍安)으로 진군했던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2개 반소대(半小隊)가 일본군 사관인 아카마츠 고쿠보와 함께 보령(保寧)으로 향하여 나아갔던 일은, 길이 서로 엇갈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관(領官)이 거느렸던 부대는 당일에 용안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습니다. 22일에 나포(羅浦)에 머물러 잤고, 동도 몇 명을 염탐하여 붙잡아 결과하였으며, 이 사실을 책자로 만들어 치보하였습니다. 23일에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로 강을 따라 내려가 서포(西浦)를 수색하여 임피읍(臨陂邑)에 다다랐고, 거기서 머물러 잤습니다. 24일에 약속을 이행하려고 삼례로 향하여 진군하는 길에 날이 저물어 익산에서 잤습니다. 삼례에서 일본 병사가 머물렀는지 머물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타진하여 들어 보니, ‘23일에 ≪일본 병사가≫ 이미 전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25일에 드디어 진군하여 전주성에 이르러 본영(本營)에 회합하니, 참령관 원세록이 일본군 소좌(小佐) 미나미 쇼시로와 함께 주둔하여 잤습니다.
다만 미나미 쇼시로의 용병술(用兵術)을 관찰해 보건대,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할 적에 분병(分兵)과 합병(合兵)에 이치가 있고, 멀고 가까움을 ≪이용하는≫ 방도가 있었습니다. 혹 10명이나 혹은 30~40명으로, 혹 반일정(半日程, 한나절 걷는 거리)이나 혹은 하루 이틀 일정으로 배회하고 어정거리면서 여러 고을을 돌며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색하고 한편으로는 습격하는데, 그 지시 명령이 아주 은밀하여 옆사람도 알 수 없었습니다. 파견한 군사가 자주 드나들고 군인 수효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았으며, 길이 구불구불한 곳에 임무를 맡겨 부리는 일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신묘한 계책의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허다한 자초지종의 상황을 일일이 보고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대략의 줄거리만 들어 종종 치보할 생각입니다. 이런 연유로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11월 27일 맑음 [二十七日晴]
그대로 완영에 머물렀다.
11월 28일 맑음 [二十八日晴]
그대로 완영에 주둔하여 1개 군진이 지급 받는 땔감과 군량미를 교도소(敎導所)에서 받아와 각 소대 및 수종(隨從)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냈다.
11월 29일 맑음 [二十九日晴]
그대로 완영에 머물렀다. 신각(申刻, 申時)에 신임 완백인 참판(參判) 이도재(李道宰)가 본영에 당도하고, 중군(中軍) 이승원(李承遠) 역시 부임해 왔다. 잠시 후에 전라도관찰사가 장병들을 위문하고 이승원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군공(軍功)을 인정 받아 우선봉에 임명된 연유라고 하였다. 마패(馬牌)와 인신(印信)은 관직에 임명한 공문과 함께 곧 뒤따라 하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승원이 장위영에서 보낸 전령을 받아서 건네주었다.
○ 우선봉 이두황(李斗璜)에게 내린 전령
“아래 전령을 빨리 거행하라. 전주의 중군인 이승원은 군무(軍務, 군사에 관한 업무)를 조금 알고 주략(籌略, 策略)이 남보다 뛰어나다. 조정의 의논 결정이 중요함에 이에 파송하니, 크고 작은 사안을 논할 것 없이 힘써 서로 의논하고 확정하여, 군국(軍國)의 업무를 함께 구제하는 일이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당일 밤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 무렵 금구와 태인 등지에 출진(出陣)하니, 대관 윤희영과 이규식의 연명(聯名)으로 된 승전(勝戰) 소식을 파발이 와서 전했다. 이에 ≪그 내용을≫ 베껴서 각 군영에 보고하였다.
○ 군무아문과 순무영과 순영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달 25일에 전주성에 도착했던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그날 밤 삼경에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에 따라 금구에 출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도병(敎導兵)을 지원하려고 대관 윤희영이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금구의 원평점(院坪店)으로 향하여 출진하였습니다. 26일 7시에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이어서 지원하려고 대관 이규식이 군사 140명을 거느리고 금구의 원평점으로 나갔더니, 당일 밤중에 이미 나가 싸웠던 교도병이 승전하고 군사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는 길에, 저들 무리 500~600명이 원평점을 근거지로 삼아 창을 휘두르며 저항하였습니다(금구 · 원평전투). 그래서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칼을 겨누고 찔러 30여 명을 죽였으며, 노획한 전목(錢木, 돈과 무명)의 수량이 매우 많았습니다. 10여 리가 넘도록 남은 무리들을 쫓아 분산시켰다가 회군(回軍)하여 지원하였습니다. 연이어 지원하는 장위영 병사가 일본 병사와 함께 북쪽으로 ≪적도를≫ 뒤쫓아 전진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29일 유시 무렵에 출진하니, 대관 윤희영과 이규식이 첩보한 내용에, ‘26일에 행군하여 금구읍에 이르러 일본군 사관 스즈키(鈴木)와 함께 주둔하여 잤습니다. 그 이튿날 27일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태인 땅 경계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가 되었습니다. 적의 형편을 염탐하여 살펴보니, 그 읍(邑)의 주산(主山)인 성황산(城隍山) · 한가산(閑加山) · 도리산(道理山) 이 세 곳을 합하여 빙 둘러 진(陣)을 치니, 진의 형세와 적의 무리가 5~6천 명이 되었습니다. 천보총(千步銃)을 한꺼번에 마구 쏘아 대어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적이 산 아래에 진을 쳤는데, 근처에는 잔산(殘山)이 있고 밖에는 넓은 들판이 트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합쳐 230명이 되었고, 일본군 병사는 60명이었습니다.
스즈키의 지시하에 대관 윤희영이 거느린 병사 90명이 일본군 병사 30명과 더불어 적이 둔치고 있는 산을 따라 서쪽 길로 공격하였습니다. 또한 대관 이규식이 거느린 병사 140명이 스즈키와 더불어 적이 둔치고 있는 산을 따라 동쪽 길로 접응(接應)하여 공격하라고 하였습니다. 병사를 나누어 출발하는 일이 이미 확정됨에 따라 ≪동서쪽≫ 두 길의 병사가 가지런히 나와 산으로 올라갈 즈음에 총탄이 빗발치듯이 날았습니다. 이에 혹은 산을 의지하여 총을 쏘고 혹은 들에 엎드려 쏘면서 총탄을 무릅쓰고 빙 둘러 공격하자, 적이 이내 겁을 집어먹고 깃발을 떼어 바야흐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에 양쪽 길에 있는 병사가 일제히 날 듯이 뛰어 올라가 공격하자 적 무리들이 겨우 물러났습니다.
산으로 올라가 바라보니, 앞 뒷산에 있는 적들이 아울러 성황산으로 집합하여 회룡총(回龍銃)을 연달아 쏘아 대니 탄환이 좁쌀같이 날아다녔습니다. 산에서 내려가 모이기 위하여 각 부대 병사가 다시 두 길로 나누어 출발하였다가 별안간 위로 돌격하여 총포를 쏘아 공격하자, 적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달아난 자들을 뒤따라 북쪽으로 쫓아 생포한 자가 40여 명이오, 쏘아 죽인 자가 30여 명입니다. 그리고 노획한 군기는 회룡총 15자루와 조총(鳥銃) 200여 자루요, 철창(鐵鎗)과 죽창(竹鎗)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생포한 적에게 자세히 캐물어 조사해 보니, 거괴는 전봉준(全琫準) · 김문행(金文行, 태인 접주) · 유공만(劉公萬) · 문행민(文行敏)이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이미 술시(戌時) 말이라서 군사를 모아 점고(點考)해 보니, 우리 병사와 일본군 병사는 부상당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내 행군하여 태인읍에 이르러 머물러 잤습니다’라고 하므로 이 ≪사실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에 따라 30일 9점종(九點鍾, 9시)에 미나미 쇼시로와 함께 출발하여 만마관(萬馬關)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11월 30일 맑음 [三十日晴]
9시에 일본 군진 및 교도병과 함께 완영을 떠나 남천교(南川橋)를 건너 용두리(龍頭里, 전주 입구 고개가 있는 곳)를 통과하였다. 또 신원점(新院店)을 지나 남관(南關) 별장(別將)의 길에 이르러 일본 군진 및 교도병은 그 별장 길 및 노고암점(老姑巖店)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우리 군진은 이내 수리를 행군하여 만마관에서 나와 전주의 마지막 경계인 산정리(山亭里)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다. 거리를 계산해 보니 30리 길이었다. 산천이 이리저리 구부러져 험악함과 도로가 기구(崎嶇)하고 비좁은 것을 실로 다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산정리는 길가의 높은 비탈 위에 있으며, 촌락이 듬성듬성하고 쓸쓸하여 1개 군진의 인마(人馬)가 한때 머물러 있기도 여유롭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대부분 한데서 주둔하고, 게다가 또 겨울비까지 주룩주룩 내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전 장위영 출진 군안(前壯衛營出陣軍案)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
참령(參領) 원세록(元世祿)
대관(隊官) 김진풍(金振豐), 박영호(朴永祜), 윤희영(尹喜永), 이규식(李圭植)
별군관(別軍官) 이겸래(李謙來), 조편(趙翩), 윤지영(尹摯榮), 김광수(金光洙)
서기(書記) 최태현(崔泰鉉), 윤구영(尹龜榮), 윤현영(尹顯榮), 윤광영(尹光榮)
좌일소대(左一小隊)
교장(敎長) 추광엽(秋光燁), 최기성(崔基成)
규칙(糾飭) 이인협(李寅協), 이응수(李應秀), 정기동(鄭基東)
십장(什長) 김덕흥(金德興), 이응로(李應魯), 이화실(李化實)
병정(兵丁) 전덕록(田德祿), 황해창(黃海昌), 정명수(鄭明洙), 박진규(朴鎭奎), 박진근(朴鎭根), 황영조(黃永祚), 전경춘(全景春), 호사근(扈士根), 김홍식(金弘植), 심석이(沈錫伊), 이재수(李在洙), 이창식(李昌植), 전창환(全昌煥), 박순근(朴順根), 박계원(朴啓元), 박창순(朴昌順), 이영지(李永志), 현덕기(玄德基), 김경문(金敬文), 이순조(李順祚), 최상엽(崔相葉), 김흥복(金興福), 김기준(金基俊), 홍순석(洪順石), 전경운(全景云), 윤창근(尹昌根), 홍수홍(洪秀弘), 호영근(扈永根), 김성규(金聖奎), 정일원(鄭一元), 전성필(全聖弼), 소치운(蘇致雲), 이우석(李禹錫), 안기종(安基宗), 박태순(朴泰順), 김용준(金龍俊), 이학수(李學秀), 이학준(李學俊), 강윤석(姜允石), 조성준(趙聖俊), 김치교(金致敎), 장재의(張在宜), 정응선(丁應善), 최순록(崔順祿), 안흥관(安興寬), 방윤명(方允明), 전봉구(全奉九), 김순흥(金順興), 방인명(方仁明), 이춘엽(李春燁), 김창연(金昌連), 함창원(咸昌元)
화병(火兵, 취사병) 한원식(韓元植), 최영환(崔永煥), 황용운(黃龍雲)
좌이소대(左二小隊)
교장(敎長) 오순영(吳順永), 송치응(宋致應), 박성희(朴聖熙)
규칙(糾飭) 정기봉(鄭基奉), 김용구(金龍九)
십장(什長) 이순길(李順吉), 손인수(孫仁秀)
병정(兵丁) 이수옥(李壽玉), 김한근(金漢根), 전영갑(全永甲), 김용운(金龍雲), 이장식(李章植), 박인태(朴仁泰), 우학이(禹學伊), 이정식(李正植), 신흥로(申興魯), 김경운(金景雲), 김흥철(金興哲), 김금복(金今福), 맹인기(孟仁基), 이재근(李在根), 나유신(羅有信), 이응운(李應云), 김경희(金景熙), 강원성(姜元成), 왕순계(王順啓), 신치문(申致文), 피점흥(皮點興), 전흥복(全興福), 박장성(朴長成), 유성관(劉聖寬), 최병문(崔秉文), 김원선(金元善), 엄영근(嚴永根), 박봉석(朴奉錫), 우수남(禹守男), 정창수(鄭昌守), 윤경선(尹景善), 김창복(金昌福), 장순성(張順成), 장사원(張士元), 이수만(李守萬), 손덕준(孫德俊), 오경석(吳景石), 김현성(金賢成), 김성현(金聖賢), 박창성(朴昌成), 최순용(崔順用), 김응준(金應俊)
화병(火兵) 정창성(鄭昌成), 이명천(李命千)
후병(候兵, 척후병) 조남이(趙男伊), 장금동(張今同)
좌삼소대(左三小隊)
교장(敎長) 장세복(張世福)
규칙(糾飭) 최덕홍(崔德洪), 이장옥(李章玉)
십장(什長) 고영규(高永奎), 김순기(金順基), 정순직(鄭順稙), 박종혁(朴宗爀), 오상동(吳相東), 박창인(朴昌仁), 이흥직(李興稙), 홍윤석(洪允石), 황봉학(黃奉學)
병정(兵丁) 박건식(朴健植), 이기문(李基文), 권광옥(權光玉), 한경식(韓景植), 김영천(金永天), 이덕준(李德俊), 윤흥균(尹興均), 이삼동(李三同), 김윤환(金允煥), 송갑성(宋甲成), 이봉환(李奉煥), 이덕화(李德化), 채명규(蔡明奎), 장학봉(張學奉), 김흥삼(金興三), 이순기(李順基), 우창순(禹昌順), 최원경(崔元景), 이춘근(李春根), 박수영(朴守永), 임주경(林周景), 김경선(金景善), 한만세(韓萬世), 차영순(車永順), 박진복(朴鎭福), 김원실(金元實), 이춘식(李春植), 신명산(申命山), 김순진(金順鎭), 지순칠(池順七), 방성배(方聖培), 강성문(姜聖文), 홍구봉(洪九奉), 이창래(李昌來), 이윤달(李允達), 경학범(慶學範), 안경운(安景雲), 엄경준(嚴景俊), 이응호(李應浩), 양경식(梁景植), 김완근(金完根), 임창식(林昌植), 이완재(李完在), 이덕수(李德守), 장명규(張明奎), 정덕선(鄭德善), 윤복성(尹福成), 이동필(李東弼), 임순록(林順祿)
후병(候兵) 전석희(全石喜), 이봉국(李奉國)
화병(火兵) 김금석(金今石), 김희중(金喜仲)
좌사소대(左四小隊)
규칙(糾飭) 박흥원(朴興源)
십장(什長) 이응현(李應鉉), 김규혁(金奎爀), 한필인(韓弼仁)
병정(兵丁) 김덕현(金德鉉), 김석준(金石俊), 최치영(崔致英), 간명준(簡明俊), 송민수(宋敏守), 장금복(張今福), 김흥준(金興俊), 이순서(李順西), 김용현(金龍鉉), 임석근(林石根), 이희성(李喜成), 이원식(李元植), 박원기(朴元基), 안덕진(安德鎭), 정도식(鄭道植), 조덕근(曺德根), 김점용(金占用), 임상준(林相俊), 이춘성(李春成), 장순범(張順凡), 신화준(申化俊), 김흥수(金興守), 최흥길(崔興吉), 신삼철(申三哲), 박충석(朴忠石), 김정엽(金廷燁), 김태련(金泰連), 전봉제(全奉濟), 김성길(金聖吉), 우수영(禹守永), 이윤진(李允振), 조기원(趙基元), 김성용(金聖用), 김윤근(金允根), 김원태(金元泰), 김준식(金俊植), 이계성(李桂成), 이준용(李俊用), 노응상(盧應相), 강진홍(姜眞弘), 황순기(黃順基), 안덕유(安德有), 심우석(沈祐石), 최동완(崔同完), 황사준(黃士俊), 심선흥(沈先興), 김복현(金福鉉)
화병(火兵) 김덕중(金德仲), 김군심(金君心)
중일소대(中一小隊)
규칙(糾飭) 전정진(全井震), 최경석(崔景錫)
십장(什長) 박수봉(朴守奉)
병정(兵丁) 이용학(李龍學), 이순용(李順用), 정성복(鄭聖福), 배영춘(裴永春), 조사윤(曺士允), 최춘식(崔春植), 김영춘(金永春), 김삼용(金三龍), 조천봉(趙千奉), 이만성(李萬成), 조기석(趙基石), 전창순(全昌順), 박건성(朴建成), 서희준(徐喜俊), 이원영(李元英), 장형기(張亨基), 박원서(朴元瑞), 오영환(吳永煥), 이봉현(李奉鉉), 홍태영(洪泰永), 김호신(金浩信), 김업동(金業同), 모윤근(牟允根), 김만용(金萬用), 김응준(金應俊), 권한길(權漢吉)
화병(火兵) 곽영호(郭永浩), 한곡보(韓谷甫)
중이소대(中二小隊)
규칙(糾飭) 허붕(許鵬)
십장(什長) 임순완(任順完), 박성순(朴聖順), 차영순(車永順)
병정(兵丁) 박중석(朴仲錫), 우창길(禹昌吉), 심용복(沈龍福), 김광식(金光植), 황성업(黃聖業), 연경수(延景秀), 김용연(金龍淵), 최상근(崔相根), 김수봉(金水奉), 김천복(金千福), 이봉석(李奉錫), 박준기(朴俊基), 김학근(金學根), 박삼용(朴三用), 박원근(朴元根), 윤종현(尹宗鉉), 오갑성(吳甲成), 김석준(金錫俊), 김영식(金永植), 정홍필(鄭弘弼), 황완복(黃完福), 하수용(河壽用), 서광준(徐光俊), 정순록(鄭順祿), 염삼용(廉三龍), 황천흥(黃千興), 이만근(李萬根), 마응준(馬應俊), 김필현(金弼鉉), 한사만(韓士萬), 최성순(崔性順), 양삼록(梁三祿), 김충엽(金忠燁), 김창식(金昌植), 전경순(全景順)
후병(候兵) 김순민(金順敏)
화병(火兵) 안춘석(安春錫), 양종수(梁宗秀), 강석현(姜錫鉉), 백선락(白善樂)
중삼소대(中三小隊)
교장(敎長) 이경진(李景振)
규칙(糾飭) 최수범(崔壽範)
십장(什長) 이순근(李順根), 이영돈(李永敦), 이정식(李正植)
병정(兵丁) 최영봉(崔永奉), 김용술(金用述), 윤산이(尹山伊), 강순원(姜順元), 홍용이(洪龍伊), 정홍준(鄭弘俊), 함성규(咸聖奎), 정순종(鄭順宗), 허성필(許聖弼), 정윤성(鄭允成), 이궁엽(李宮燁), 이완근(李完根), 한영서(韓永瑞), 박성복(朴聖福), 김귀동(金貴同), 이경도(李景道), 박경운(朴景雲), 오선영(吳善永), 문대근(文大根), 장영근(張永根), 박흥근(朴興根), 박대운(朴大雲), 박영근(朴英根), 김흥원(金興元), 임흥택(林興澤), 박응수(朴應秀), 백춘성(白春成), 서응인(徐應仁), 최재봉(崔在奉), 엄금석(嚴今石), 이천호(李千浩), 조계삼(趙啓三), 정순조(鄭順祚), 이창선(李昌善), 정윤식(鄭允植), 하봉집(河奉集), 최후복(崔厚福), 박금동(朴今同)
후병(候兵) 임봉순(林奉順)
화병(火兵) 박성일(朴聖日), 방성완(方聖完)
중사소대(中四小隊)
교장(敎長) 김대유(金大有)
규칙(糾飭) 정유준(鄭裕準), 천덕보(千德甫)
십장(什長) 김은종(金殷宗), 김인엽(金仁燁), 권광운(權光雲), 장영삼(張永三)
병정(兵丁) 한윤환(韓允煥), 지영환(池英煥), 이명원(李明元), 임수명(任守明), 권대식(權大植), 박춘화(朴春和), 이용순(李龍順), 우원준(禹元俊), 임영준(任英俊), 차화경(車化景), 김홍익(金弘益), 김홍기(金弘基), 장순명(張順明), 김일남(金日南), 김윤만(金允萬), 이경완(李景完), 조진성(趙振星), 박대근(朴大根), 김만조(金萬祚), 이성기(李聖基), 김성옥(金聖玉), 한영조(韓永祚), 신진영(申鎭永), 이선길(李先吉), 원영문(元永文), 함봉산(咸奉山), 김성배(金聖培), 김명길(金命吉), 서원석(徐元石), 손봉조(孫奉祚), 장만용(張萬龍), 전흥길(全興吉), 조진철(趙鎭哲), 김덕여(金德汝), 윤흥용(尹興龍), 조덕성(趙德成), 박영순(朴永順), 김학범(金學範), 장영근(張永根), 김장록(金長祿), 기만쇠(奇萬釗), 곽수만(郭守萬), 윤기석(尹基石), 이용준(李龍俊), 이봉손(李奉孫), 양귀용(梁貴龍), 고순일(高順日), 정한민(鄭漢敏), 김광석(金光石), 김용순(金龍順), 윤기흥(尹基興), 이희태(李熙泰)
후병(候兵) 김규현(金奎鉉)
화병(火兵) 이영식(李英植), 박재민(朴在敏), 이창규(李昌奎), 이흥록(李興祿)
우일소대(右一小隊)
규칙(糾飭) 손재호(孫在浩)
십장(什長) 한원호(韓元浩), 지홍엽(池洪燁), 박재봉(朴在鳳)
병정(兵丁) 김상길(金尙吉), 박동직(朴東稙), 강관식(姜寬植), 김성운(金聖云), 오정선(吳貞善), 오원순(吳元順), 육용업(陸龍業), 심용문(沈用文), 고춘택(高春澤), 김백용(金白用), 홍경식(洪景植), 주성준(朱聖俊), 김성옥(金聖玉), 한성환(韓聖煥), 김원준(金元俊), 윤형식(尹亨植), 강명회(姜明會), 유정묵(劉正黙), 한선집(韓善集), 박재덕(朴在德), 천성근(千聖根), 곽흥복(郭興福), 김명순(金明順), 김덕환(金德煥), 이상남(李相南), 윤춘식(尹春植), 정석기(鄭錫基), 홍덕준(洪德俊), 서흥득(徐興得), 정태진(鄭泰鎭), 이성운(李聖云), 조성순(趙聖順), 임화준(林化俊), 김광천(金光千), 이응정(李應貞), 김용완(金用完), 김치순(金致順), 이중학(李仲學), 윤장원(尹長元), 정응순(鄭應順), 홍영록(洪永祿), 지택엽(池澤燁), 한문환(韓文煥), 김광석(金光石), 김성삼(金星三), 김유근(金有根), 김경선(金景先), 윤춘직(尹春稙), 양만석(梁萬石), 한명집(韓明集), 이응순(李應順), 낭명진(浪明辰), 오흥규(吳興奎), 안재기(安在基)
화병(火兵) 박춘성(朴春成), 우점봉(禹點奉), 김상희(金尙喜), 최길이(崔吉伊)
우이소대(右二小隊)
규칙(糾飭) 황학신(黃學信)
십장(什長) 최수복(崔守福), 갈창연(葛昌淵), 김순명(金順明), 김덕종(金德宗)
병정(兵丁) 김치관(金致寬), 한창일(韓昌日), 김응삼(金應三), 김순원(金順元), 박만춘(朴萬春), 전경환(全景桓), 이세복(李世福), 박점동(朴點同), 조창성(趙昌成), 한만길(韓萬吉), 곽봉선(郭奉先), 김명재(金明在), 이창식(李昌植), 김봉운(金奉云), 박봉용(朴奉用), 유춘옥(劉春玉), 홍은록(洪殷祿), 박창근(朴昌根), 김복만(金福萬), 최근창(崔根昌), 김준식(金俊植), 임봉삼(任奉三), 차영준(車永俊), 오상근(吳相根), 김원식(金元植), 양경신(梁景信), 조동식(趙東植), 양만순(梁萬順), 신수길(申守吉), 유원길(劉元吉), 박신복(朴申福), 조흥성(趙興成), 한성기(韓聖基), 전천만(全千萬), 정완기(鄭完基), 신성태(申聖泰), 김완수(金完守), 이삼용(李三龍), 류학준(柳學俊), 김종성(金宗成), 채영환(蔡永煥), 김보경(金輔景), 이순재(李順在), 이원식(李元植), 임성희(林聖喜), 박종식(朴宗植), 최기록(崔基祿), 김중렬(金仲烈), 김원업(金元業), 김점동(金點同)
우삼소대(右三小隊)
교장(敎長) 홍선경(洪善敬)
십장(什長) 한성창(韓聖昌), 이흥천(李興天), 이덕우(李德宇), 박창식(朴昌植), 이여삼(李汝三), 정석진(鄭錫鎭)
병정(兵丁) 한태식(韓泰植), 임문오(林文五), 문응락(文應洛), 박원기(朴元基), 조용철(趙龍哲), 강춘식(姜春植), 박봉현(朴奉賢), 송완직(宋完直), 이운성(李雲成), 최영순(崔永順), 안경운(安景云), 이중표(李仲杓), 최광현(崔光賢), 최성현(崔聖鉉), 원재정(元在貞), 박재선(朴在善), 이창옥(李昌玉), 주용이(朱用伊), 민재석(閔在石), 황원종(黃元宗), 염성묵(廉聖黙), 조명현(趙明鉉), 이만록(李萬祿), 조창인(趙昌仁), 권재현(權在鉉), 장봉용(張鳳龍), 석기준(石基俊), 김봉옥(金奉玉), 오흥서(吳興瑞), 이덕근(李德根), 전기호(田基浩), 기영록(箕永祿), 김영순(金永順), 김영택(金英澤), 김영준(金永俊), 유원실(兪元實), 허복이(許福伊), 신흥근(申興根), 정지복(鄭之福), 유순근(劉順根), 김명길(金明吉), 오흥원(吳興源), 박성옥(朴聖玉), 이성규(李聖奎), 박영석(朴永石), 김규성(金奎成), 김경의(金景儀), 한성규(韓聖奎), 박덕순(朴德順), 양원근(梁元根), 정황용(鄭黃龍), 박재근(朴在根), 김흥식(金興植), 김부성(金富成), 이덕인(李德仁), 이삼이(李三伊), 장영신(張永信)
화병(火兵) 김사홍(金士弘), 김광선(金光先), 김덕순(金德順), 이수길(李壽吉)
우사소대(右四小隊)
교장(敎長) 김인길(金仁吉)
규칙(糾飭) 조금석(曺今石), 김계완(金桂完)
십장(什長) 이덕진(李德振), 김순손(金順孫), 채학원(蔡學元)
병정(兵丁) 조천용(趙千用), 조봉길(趙奉吉), 최삼동(崔三同), 황학성(黃學成), 조성운(趙聖云), 홍백동(洪伯同), 정희준(鄭喜俊), 노수명(盧守明), 강성준(姜聖俊), 지춘경(池春景), 이성학(李聖學), 김낙흥(金洛興), 박춘삼(朴春三), 김원식(金元植), 배순길(裴順吉), 이봉용(李奉用), 최순봉(崔順奉), 김현규(金鉉圭), 권성근(權聖根), 김귀용(金貴用), 김범산(金凡山), 이운학(李云學), 배명심(裴明心), 류점쇠(柳點釗), 윤홍원(尹弘元), 박영춘(朴永春), 엄윤국(嚴允國), 이성화(李聖化), 왕명선(王明善), 강수춘(姜守春), 김순길(金順吉), 신성조(申聖祚), 오희선(吳喜善), 이석현(李石鉉), 장윤홍(張允弘), 서봉심(徐奉心), 김경삼(金景三), 김기선(金基善)
후병(候兵) 김삼쇠(金三釗)
화병(火兵) 염창학(廉昌學), 이순여(李順汝)
포대(砲隊)
교장(敎長) 양기영(梁基英), 김명산(金命山)
규칙(糾飭) 조수만(趙壽萬)
십장(什長) 김수봉(金秀奉), 전명환(田明煥)
병정(兵丁) 최명순(崔明順), 이성용(李成用), 이수철(李守哲), 함명길(咸命吉), 이용환(李用煥), 송치운(宋致雲), 신흥복(申興福), 김원록(金元祿), 김태희(金泰熙), 이갑석(李甲石), 정준기(鄭俊基), 김석윤(金石允)
후병(候兵) 임용이(林用伊), 김순민(金順敏)
화병(火兵) 이성현(李聖鉉), 김원백(金元伯)
곡호대(曲號隊)
십장(什長) 류봉길(柳奉吉), 박대봉(朴大奉)
병정(兵丁) 유한종(劉漢宗), 김기종(金基宗), 안석이(安錫伊), 남청용(南靑龍), 이흥록(李興祿), 최수진(崔壽振), 강정복(姜正福), 신원서(申元瑞), 김봉석(金奉錫), 함천일(咸千一), 김동식(金東植), 김창학(金昌學), 정학남(鄭學男), 이인태(李仁泰)
화병(火兵) 장치삼(張致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