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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양호우선봉일기 兩湖右先鋒日記
일러두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1894년 12월 1일 눈 · 비 [甲午十二月初一日雨雪]

바람이 매우 세차고 비와 눈이 교대로 날렸다. 진시(辰時, 아침 7시~9시)경에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일진(日陣, 일본군 진영) 및 교도병(敎導兵)과 함께 출발하였다. 노고암점(老姑巖店)을 지나 원두리(院頭里) 장터를 경유하여 오원강(梧原江)을 건너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임실읍(任實邑)에 도착해서 3개 진영(陣營)이 주둔하여 묵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가 되었다. 지난 번 전주(全州)에서 들었는데, “임실현감 민충식(閔忠植)이 9월에 김적(金賊) 개남(介男)도성찰(都省察)이 되어 적진을 따라다녔는데, 지난 달 보름쯤에 김적(金賊, 김개남)과 전주성에 함께 들어갔다가 최근에 ≪임실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해당 읍에 도착하여 그 사정을 탐문해 보았더니 정말로 그러하였다. 잠시 뒤 관사(館舍)로 내려가자 현감 민충식이 본진(本陣)에 왔다가 다시 일본군 사관(士官)에게 갔는데, 마침내 일본사관에게 잡혀서 구금되었다.

12월 2일 맑음 [初二日晴]

진시(辰時, 아침 7시~9시) 초(初)에 3개 진영이 모두 임실읍을 출발하였다. 어제 일본군 진영이 원두리(院頭里)에서 잡은 접주(接主) 2명과 본읍(本邑, 임실)의 사령(使令)으로 비도(匪徒)에 물들어 패악을 저지른 1명, 모두 합하여 3명을 본 읍의 앞길에서 쏘아 죽인 뒤에 행군(行軍)하였다. 구와평(狗臥坪)을 지나 말치(抹峙)고개를 넘어 남원(南原)의 경계인 오수역(獒樹驛)에 이르러 모두 주둔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 길이었다. 그러나 어제 눈이 개이지 않고 진흙길이어서 행군의 어려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12월 3일 눈 [初三日雪]

오점(五點)에 3개 진영이 모두 오수역을 출발하여 미륵선리(彌勒先里)의 주점(酒店)을 지나 전석치(磚石峙)에 이르렀다. 봉우리는 돌고 길은 구불구불하며 고갯길은 험준한 데다가 소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였다. 그대로 길을 가서 남원성의 북쪽 문에 도착하니, 도리에 ‘공신(拱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읍내로 들어가 민가를 살펴보니, 태반이나 불탔고 남은 연기가 아직도 많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남원성의 동문 · 서문 · 남문도 모두 불타버렸다. 거주하는 백성에게 물어보았더니, “지난 달 28일에 각 처의 동도(東徒) 몇 백 명이 이 성에 모여서 속인(俗人)의 집을 지목하여 한편으로 불을 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탈을 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류(匪類)가 일제히 성에 들어올 때에 운봉(雲峯)의 의병장인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 벼슬) 박문달(朴文達)이 의병 500~600명을 인솔하여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우선 동문 · 서문 · 남문에 불을 질러 적으로 하여금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북문만을 열어 적이 도망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문 밖에 수 백보 되는 산의 양쪽 요충지에 총을 가진 군사를 매복시켰습니다. 성을 에워싸고 함성을 지르며 성안을 향해 포(砲)를 쏘니, 적이 흩어져서 ≪북문으로≫ 도망쳤습니다. 북문 밖에 매복한 병사들이 ≪북문으로 빠져나오는≫ 적을 향해 총을 난사하여, 쏘아 죽인 자가 50~60명이었고 사로잡아 죽인 자가 10여명이었습니다. 드디어 적들을 모두 내쫓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안에 난리를 겪고 남아 있는 백성이 얼마 되지 않았고, 3개 진영이 주둔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 부대는 교도병과 함께 성안에 주둔하였고, 본진(本陣, 우선 봉부대)은 남문 밖에 나가 광한루(廣寒樓) 옆에 주둔하였다. 26일에 금구(金溝)와 태인(泰仁)등지로 나누어 보냈던 장졸(將卒)들 이 어제 남원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 서로 만나서 그 사이에 겪었던 얘기를 나눈 뒤에 관사(館舍)를 정하고 묵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40리길이었다. 여러 장관(將官)들과 함께 광한루에 올라가서 누대의 벽을 보니 시(詩)와 사(詞)가 벽에 가득하여 비단으로 수를 놓은 누대라고 할 만하였다. 누대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 섬이 있으며 섬 옆에 영주각(瀛州閣)과 오작교(烏鵲橋)가 있어 선경(仙境)으로 의심될 정도였다. 섬을 에워싸고 빽빽한 대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는데, 못에 가득 시든 연잎은 소리만 나고 향기가 없었다. 누대가 비록 완전하다고 해도 성이 이미 파괴되었으니, 유명한 누대가 이것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다. 하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스산한데 어찌 경치를 논하겠는가?

12월 4일 맑음 [初四日晴]

남원성 남문 밖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 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순창(淳昌)의 민인(民人) 등이 비괴 전봉준(全琫準)을 잡아 순창읍에 바쳤는데, 소모관(召募官) 임도혁(任道赫)이 목에 칼을 씌워 엄중히 가둔 일을 ≪알리는≫ 보발(步撥, 걸어서 공문을 전하는 것)이 일본군 사관이 주둔하는 곳에 왔다.

12월 5일 맑음 [初五日晴]

인시(寅時, 오전 3시~5시) 초에 3개 진영이 모두 출발하여 서쪽으로 10리쯤 가다가 한어물(閒於物)방죽을 지났다. 다시 정충사(貞忠祠) 마을을 거쳐 광대거리(廣大巨里)에 도착하였다. 25리 앞에 큰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비웅령(飛熊嶺)’이라고 하였다. 광대거리에서 고갯마루까지 5리가 되었고, 남원에서 그곳까지는 30리가 되었다. 이 고개는 높고 멀어서 가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층층암석이 서있고 절벽과 돌길에다가 옆으로 큰 산이 걸려있어 날아다니는 곰도 넘기가 어려워서, 그 명성이 허튼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고개에서 5리를 가서 남원의 경계가 끝나는 곳에 차계산(嵯稽山)이 있었는데, 층층의 산이 솟아오르고 하늘에 기암괴석이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었다. 산 아래에 적성강(赤城江)이 있었는데, 강이 비록 넓지 않았으나 한 조각 배 만이 있어 대군(大軍)을 실어 건너기에는 매우 넉넉하지 않았다. 나루를 건넌 뒤에 군대의 대오를 정돈하고 바로 25리를 가서 초경(初更, 오후 7시~9시)에 순창읍에 도착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길이었다. 순창읍의 전 군수 이승렬(李承烈, 承은 聖의 오기)은 교체되어 떠났고 신임 수령 박용원(朴容元)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 읍의 아전과 백성이 대군의 진영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처(下處, 임시로 머물 곳)의 준비와 ≪음식 등을≫ 접대하는 절차 등에 관아가 빈틈이 조금도 없어 가상스러울 만 하였다. 곧바로 하리(下吏, 본 읍의 아전)의 집에 머무르고 전적(全賊, 전봉준)을 잡은 연유를 들었는데, “본 읍에 거주하는 순무영 소모관(巡撫營 召募官) 임도혁(林道赫)이 상금 천금(千金)을 준다는 방(榜)을 면마다 걸었더니, 이 달 2일에 본 읍의 3개 방(坊)과 3개 동(洞) 및 피광리(皮廣里) 민인 등이 이 적(賊)을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방(榜)에 따라 상을 주고 형구(刑具)를 채워 엄중히 가두었다가 지금 일본군 진영에 옮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창군 경내에 들어와서 보니, 소모관이 마을에 명령하여 민정(民丁)을 모아 각자 죽창과 돌멩이를 갖추고 사방을 지키게 해서 비류가 난리를 일으킨 것이 다른 읍에 비해 조금 덜해 인민이 마침내 보호가 되었기에 매우 다행스러웠다. 또한 ≪소식을≫ 들었는데, “적(賊) 김개남(金介男, 介男은 開南의 오자)이 태인(泰仁) 근곡(芹谷)에서 잡혀 함거(函車)에 가두었다가 완영(完營, 전주 감영)에 압송(押送)했는데, 전 남원부사(前 南原府使)의 아들이 그의 배를 갈라 간을 꺼냈고 책실(冊室)의 아들이 그 두골(頭骨)을 가르고 역시 간을 씹었다”고 하였다. 1894년 12월 이 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끝에 적성강(赤城江)을 건넜다. 죽산(竹山)의 관속(官屬, 아전)이 공문을 보내왔다. 서산(瑞山)과 매현(梅峴)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격파한 일을 순영(巡營, 충청감영)에 보고했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제(回題, 답신) 안의 장문(狀聞)에, “1달에 3번 승리하여 위엄을 떨쳤으니 술을 부어 축하할 만하다. 싸우는 병사들이 여러 날을 이슬에 드러나서 반드시 허기지고 목마른 가운데 있는 자가 많을 것이다. 소 1마리와 술 3동이를 본 읍의 공전(公錢) 중에서 마련하여 ≪군사를≫ 먹인 뒤에 보고하고, 더욱 용기를 내어 ≪저들을≫ 소탕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1894년 12월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쳐부순 일을 순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보고에 대한≫ 회제(回題) 안의 장문(狀聞)에, “첩보(捷報, 승리한 보고)가 다시 오니 하늘의 신(神)이 돕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는 위엄에 의지하고 있고, 남은 적은 괴로워하여 그들의 목숨은 대나무가 쪼개지는 가운데에 있으니 남은 용기를 다시 내어 나머지 요사스런 기운을 하루가 아니 되어 깨끗하게 없애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순무영에 보고하였는데, 그 회제 안의 계문(啓聞)이 도착하여 받았다. 그 계문에, “김치순(金致順)을 각별히 구제하여 보호하라”고 하였다.

12월 6일 맑음 [初六日晴]

오늘은 바로 일본의 설날이어서 일본군 진영에 새해를 축하하고 그대로 머물렀는데, 구례(求禮)의 유생 이기(李沂)가 편지를 올렸다. 그 편지에 의하면, “유생 이기(李沂)는 삼가 재배(再拜)하고 장위영 부영관(壯衛營 副領官) 어른께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외람되게도 하찮은 재주이지만 본 현(本縣)의 아전과 백성의 추대로 맹주(盟主)가 되어 민병(民兵) 수 백 명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고 ≪성을≫ 지킬 방도를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대군(大軍)이 오수역(獒樹驛)에 주둔한다는 소식을 듣고, 포복(匍匐)하여 절을 하며 명령을 요청해야 하지만, 순천(順天)과 광양(光陽) 의 적들이 가득 차서 언제나 침범하려는 것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성을 비우고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스러움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대군의≫ 위엄과 명성에 힘입어 깃발과 칼 1자루를 얻어 군대의 뒤를 따라가서 약간의 보탬이라도 도모할 수 있다면 저의 소원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회답하기를, “가상한 논의를 받아보고 나도 모르게 글의 뜻에 감탄하여 반복하여 읽어보니 일군(一軍, 全軍)을 장려할 만 하였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 의기(義旗, 의병의 깃발)를 주어 요얼(妖孼, 동학농민군)을 숙청하고 싶으나 반드시 성을 비우고 대군을 따라올 필요는 없다. 다만 백성을 독려하여 경내를 지키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성(城)을 다스려서 한쪽을 지켜 적을 막는 것이 마땅하다. 충의(忠義)가 솟구친 것에 누구나 감복하지 않겠는가? 위기를 도와 공을 세우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 구례현(求禮縣) 공형(公兄, 三公兄)의 문장(文狀)에, “본 읍의 민인 등이 유생 이기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적을≫ 토벌하고 ≪성을≫ 지키게 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에 대해 회신하기를, “백성에게 추대되어진 것으로 능력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민병의 본래 뜻은 다만 그 성을 지키는 것이고 경내를 넘을 수가 없다. 백성으로 하여금 성을 정돈하는 데에 뜻을 두게 하여 한쪽을 방어하고 왕사를 기다렸다가 돕는 경우가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2월 7일 낮에 맑았다가 밤에 눈이 옴 [初七日晝晴夜雪]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지위(知委, 지시)에, “하나, 적들의 소식은 특별히 들은 것이 없다. 둘, 대대(大隊)는 담양(潭陽)으로 전진하라. 셋, 장위영(壯衛營)부대는 왼쪽의 지대(支隊)가 되어 내일 8시에 출발하여 구례 · 광양 · 순천 · 낙안(樂安) · 보성(寶城) 등지에서부터 나주성(羅州城)에 이르기까지 지나는 곳과 길가 근처의 여러 곳에 적의 사정을 수색하고 토벌하라. 넷, 거괴(巨魁)를 잡아 대대(大隊, 일본부대)에 보내고, 적의 사정을 탐문하여 종종 보고하라”고 하였다.

○ 당일 순창읍을 출발하여 10리를 가서 선유탄(仙遊灘)에 도착을 했다. 단지 자그마한 배 1척을 띄워 10여 차례 왕복을 해서 겨우 나루 1곳을 건너 소평(小坪)의 좁은 여울을 넘어갔다. 가로세로 작은 길이 굽이굽이 양의 창자 같고, 층층이 솟은 돌산은 물고기 이빨처럼 서있으며 10리의 긴 강물은 돌에 부딪혀서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사방의 푸른 절벽에 소나무 그림자가 에워싸고 있었다. 지나가는 것이 비록 험난했으나 그림에서 품격의 하나로 기억되었다. 바로 20리를 가니 중주원(中洲院) 앞에 작은 강이 있었는데, 바로 선유탄의 하류이었다. 역시 작은 배를 띄워 간신히 일군(一軍, 全軍)을 건너고 병사들에게 밥을 먹인 뒤에 10리 길을 가서 곡성읍(谷城邑)에 이르렀다. 그 거리를 계산해서 보니 40리 길이었다. 하리(下吏, 곡성읍의 아전) 신선유(申善有)의 집에 묵었는데, 집이 비어 있었다. 이 고을의 수령인 이문영(李文永)이 보러 왔다. 양식과 반찬을 마련하여 와서 노파 1명을 불러 밥을 지으니 날이 저물어서야 밥이 들어왔다. 읍에 들어가서 소식을 들어보니, “운봉(雲峯)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이 일본군 50명과 함께 수성민병(守城民兵)을 인솔하여 동도(東徒) 20여명을 잡아 죽였다”고 하였다. 현(縣)에 빈집이 많이 있었다.

양영(兩營)과 순영(巡營, 전라감영)에 첩보(牒報, 서면으로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하기를, “지난 달 30일에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와 함께 전주에서 출발하여 만마관(萬馬關)으로 향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그 날 함께 30리 길을 가서 만마관에 주둔하였고, 이 달 1일에 함께 30리 길을 가서 임실읍에서 주둔하였습니다. 2일에 함께 30리 길을 가서 오수역에 주둔하였고, 3일에 함께 40리 길을 가서 남원읍(南原邑)에 주둔하였습니다. 남원성에 들어가서 보니, 동도의 약탈을 겪어 빈집이 절반이나 되었고, 성의 동문 · 서문 · 남문이 모두 불탔으며 집집마다 잿더미가 되어 황량한 읍의 모습은 거의 서리를 맞은 풀과 같았습니다. 놀라고 겁을 먹은 아전과 백성은 활에 상해를 입은 참새와 같지 않은 이가 없어 그 정상(情狀)을 살펴보니 매우 가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머무르며 위로하고 구제하여 안정을 시키고 나주를 구하러 갔습니다. 5일에 함께 길을 떠나 60리를 가서 순창읍(淳昌邑)에 주둔하였고, 6일은 바로 일본의 설날이어서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다시 광양 · 순천 · 낙안 등지에서 적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가 군대를 나누어 본진(本陣)은 곡성 · 구례 · 광양 · 순천 · 낙안 · 보성 등지를 따라 ≪적을≫ 토벌한 뒤에 나주에서 합류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일본군 진영은 담양에서 바로 나주로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쪽 진영은 모두 7일에 출발하였습니다. 순창에서 그 소식을 듣고 적괴(賊魁) 전봉준(全琫準) · 양하일(梁河一) · 최경선(崔慶善)이 ≪순창의≫ 주민에게 잡혀서 소모관 임두학(林斗鶴)에게 바치어 일본군 진영에 옮겨서 가둘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거괴가 잡힌 것으로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음을 알 수가 있고, 백성들의 공로는 그들이 교화를 받아 모두 귀의(歸依)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에 기쁨을 견딜 수가 없어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각 처에 보낸 전령(傳令)에, “타일러서 깨우쳐줄 일은 대개 본성(本性)을 따라 바름을 닦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자신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는 것을 학(學)이라고 한다. 지혜로운 자는 때를 따르는 데서 이루어지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죄를 짓는다. 동도가 하는 짓이라는 것이 불충하고 불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당류(黨類, 동도 무리)는 모두 선량하지 않거나 무뢰한 사람들이다. 몸에 요사스런 부적(符籍)을 지니고 병사가 주(州)와 군(郡)을 에워싸서 움직이면 불태우거나 위협하고 실행하면 반드시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다. 스스로 짐독(鴆毒, 짐 새의 치명적인 독)을 품고서 올빼미와 같은 나쁜 짓을 그만두지 않아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노하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은혜와 의리로 말했으나, 고집을 부리며 반성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를 보내어 무력을 떨쳐 ≪적을≫ 토벌하니 상풍(商風, 가을바람)은 숙살(肅殺)의 위엄을 돕고 주양(朱陽, 해)은 요사스런 기운을 없앴다. 활활 타는 불을 들어 저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泰山)을 높이 들어 참새 알을 누르는 것과 같다. 표범 같은 군사를 불러 한 번에 박살을 내니 오합지졸(烏合之卒, 까마귀가 모인 것처럼 엉성한 군사) 같은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서 그 몸은 제부(齊斧)에 바르는 기름이 되고, 뼈는 융거(戎車, 수레)에 눌려 가루가 되었다. 거괴 전봉준 · 김개남 · 양하일 · 최경선 · 윤종호(尹宗祜) 등과 같은 경우에는 지금 사로잡혀 마침내 법에 따라 죽였다. 그들은 죄가 지독하여 하늘에 넘쳐나서 반드시 버려질 것이고, 땅에 널려져서 죽음을 당하여 끝내 가루가 될 것이다.
아! 백성들은 내 말을 들어라! 나라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적자(赤子,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듣지 못했는가? 경(經, 書經)에 말하기를, “그 거괴는 죽이고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말라”고 했는데, 군정(軍政)은 은혜를 우선으로 하고 처벌은 나중에 할 것이다. 왕사는 죄 없는 사람을 토벌하지 않고, 비록 협박에 따른 자들이더라도 곧바로 뉘우치고 다시 양민(良民)이 된다면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이 나라의 깊은 인(仁)이다. 또한 법을 굽혀 은혜를 펴는 것이 조정의 영전(令典, 훌륭한 법)이다.
보벌(寶筏)로 어리석은 내를 급히 건너오면, 바로 금민(金(糸+黽), 법도)으로 깨달음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집착하지 말고 일찍 돌아가서 교화를 받아 네 부모를 봉양하고 네 처자를 길러 생업에 힘써 평생 동안 배부르고 안도하여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거괴와 패악을 저지른 두령(頭領)과 같은 경우에는 순창에 사는 백성들이 사로잡아 바친 의로운 일을 본받아서 뒤를 밟아 잡아서 진영에 바친다면 나라를 위해 근심을 덜고, 너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쑥대나 잡목가지로 만든 문에서 났으나 이름은 조야(朝野, 조정과 재야)에 전해질 것이다. 아녀자를 본받지 말고 어떻게 할지 결심을 한다면 능히 대장부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이룰 것이다. 오직 깊이 바라보아 모두 잘 알기를 바란다.

12월 8일 흐리고 바람이 불며 매우 추웠다 [初八日陰風酷寒]

당일 곡성(谷城)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10리를 가니 절벽이 있고 천척(千尺)의 깎아지른 벼랑이 긴 강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을 마릉대(馬陵臺)라고 하였다. 먼 옛날 손장수(孫將, 손권)가 계책을 쓴 것이 떠올렸다. 그대로 10리를 가서 구진동(九辰洞)에 이르니 절벽이 펼쳐지고 돌이 포개져 있었는데, 용암(龍巖)이라고 하였다. 자세히 보니 크고 넓은 돌 하나가 강에 닿고 언덕으로 비스듬히 있어 용이 누워있는 모습이 현저하였다. 기이하구나! 저 한낱 석아(石兒, 용암)가 일찍이 무후(武侯)의 춘수당(春睡堂)을 지나 온 적이 있던가?
바로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압록원(鴨綠院)에서 주둔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 길이었다. 마릉대에서 압록원까지 길은 산골짜기에서 나오고 높은 산봉우리는 구름사이로 튀어나오며 험한 돌은 바둑알처럼 포진하고 언덕 앞에 종종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심장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갈수록 더욱 깊은 골짜기여서 눈앞이 몽롱하였다. 압록원의 가구 수는 60여 호였다. 여사(旅舍, 여관)에 묵었는데, 문은 긴 강을 마주하고 있고 울타리는 층층의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산수(山水)에 의지하는 즐거움을 삼기에 충분하였다.

○ 이 날 저녁에 곡성(谷城) 서봉동(棲鳳洞)의 백성이 와서 말먹이 콩 2두(斗) · 큰 닭 30마리 · 계란 10개(介) · 미투리 1죽(竹, 10벌이 1죽이다)을 바쳤다. 현조동(玄鳥洞) 백성이 와서 말먹이 콩 3두(斗) · 큰 닭 5마리 · 계란 19개 · 미투리 18부(部)를 바쳤고, 압록동(鴨綠洞)의 백성이 와서 누런 소 1마리 · 큰 닭 22마리 · 계란 40개 · 남초(南草, 담배 17파(把, 움큼)) · 미투리 7죽(竹, 10벌이 1죽이다)을 바쳤다. 물건을 바친 3개 동(洞)에 각각 전령을 내어 보내기를, “최근에 비류가 창궐하여 독사의 독을 마음으로 삼고 승냥이와 같은 성품이 되었다. 작게는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우며, 크게는 성을 함락시켜 ≪인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여 요사한 기운이 넘쳐나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니 조정이 매우 이것을 근심하여 왕사를 멀리까지 보내었다. 본 마을이 와서 몇 가지 물건을 바친 것은 군대를 환영하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 어지러운 때에 이런 점호(簟壺, 대자리와 병으로 작은 정성)의 정성이 있으니, 이는 물건을 탐한 것이 아니라 선량한 백성이 준 것이다. 성의(誠義)를 생각해보니, 500년 동안(이씨 왕조) 비와 이슬 같은 은택을 기억하여 아직도 3천리 ≪강산에≫ 예의(禮義)의 풍속이 남아 있었다. 만약 지조 있는 백성이 아니라면 어찌 세속을 넘어서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갠 뒤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을 보는 것처럼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군정(軍政)은 무고한 사람을 토벌하지 않으니 혹시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도하여, 생업(生業)을 즐기는 것을 옛날처럼 평상시처럼 하라.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길러서 기쁨을 함께 누려라. 동도의 거괴와 두령(頭領)이라고 하는 자들은 보는 대로 잡아서 진영에 바치면 그들을 잡은 해당 백성에게는 그 영광이 한 집안에 미칠 것이니 각자 특별히 유념을 하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구례(求禮)의 전 현감(前 縣監) 남궁표(南宮杓)가 왔을 때에 현감 조규하(趙奎夏)는 이미 전주에 갔다고 하였다.

12월 9일 맑고 북풍이 세차게 불었다 [初九日晴北風烈烈]

이 날에 압록원(鴨綠院)을 출발하여 강을 건넜다. 날씨가 매우 추었다. 자그마한 배가 협소하여 일개 진영이 겨우 건넜다. 해가 3장(三丈, 세길)이나 되었을 때에 강을 따라 10리를 가니 물의 북쪽에 몇 십 호의 마을이 있는데, 독자촌(讀字邨)이라고 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에 인접하여 대나무 울타리와 소나무 숲이 있어 풍월주인(風月主人, 풍류를 아는 주인)이 거처할 만하였다. 10리를 더 가니 물의 남쪽에 수 십 호의 마을이 있는데 마을이름이 진촌(陣邨)이었고, 마을 앞에는 기름진 땅이 있어 농민이 살만하였다. 지나는 곳에 매우 험한 데가 많고, 천길 절벽과 중간에 끊긴 옆의 지름길, 높은 산봉우리에 위태로운 바위는 떨어지려고 하였다. 험준한 벼랑 아래 푸른 물결이 소나무 그림자가 거꾸로 있고, 아래와 위로 연기가 끊어지며 긴 모래톱에는 오리의 머리가 들락거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였다. 강 길을 버리고 북쪽으로 10리를 가서 구례현의 성에 도착하여 여사(旅舍)에 주둔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 길이었다. 남문 밖에 동도들의 시신 4구가 있었는데, 의병이 죽인 것이었다. 성안의 민병 수 백 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지난번에 편지를 보낸 유생 이기가 모집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 이 날에 백목(白木, 흰 무명) 10필 · 씨를 제거한 솜 10근(斤) · 군수전(軍需錢) 300냥을 배정하고 관문(關文, 관청의 문서)을 만들었다. 본 현의 군수전 300냥을 나누어 정하고 군(軍)과 노문(路文)도 만들어서 광양현에 보내었다. 노문은 역참(驛站)을 배정하였는데, 순천 경계의 북창(北倉)까지는 30리 길이었다. 11일의 숙소는 광양현으로 50리길이었고, 12일 숙소인원은 상관(上官) 이하의 병정(兵丁) 800명과 소와 말 60필이었다.

○ 이 날 밤에 의병의 맹주인 이기가 잡아서 가둔 접주(接主) 임정연(林定然)과 접사(接司) 양주신(梁柱臣)을 본진(本陣)에 데려왔다. 그러나 그가 비류 4명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그를 잡아서 가두었다. 그러나 많은 선비들의 등장(等狀, 여러 사람들이 연대하여 올린 청원서)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다.

12월 10일 맑음 [初十日晴]

순창에서 파견된 군사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 구례에 머물렀다.

○ 화엄사(華嚴寺)의 승려인 계암(桂庵) 등이 와서 찬합(饌榼, 반찬)을 바치기에 전령을 만들어 주었다. 그 전령에, “최근에 동도가 창궐하여 주(州)와 군(郡)이 소란스럽다. 이런 어지러운 때를 맞아 놀라서 동요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가 위엄에 의지하여 요얼(妖孼, 요사스런 무리로 동학농민군을 지칭)을 소탕했으니 혹시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여 도(道)를 즐겨라. 아름다운 숲의 인동초(忍冬草)와 화려한 누대의 영험한 꽃은 자비(慈悲)의 심법(心法)이 아닌 것이 없다. 천성을 굳게 지켜서 경계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누가 감히 도를 닦는 승려를 모욕하겠는가? 만약 흩어진 동도가 자취를 감추려고 머리를 깎으려 하면 은밀하게 관아에 알려 동도를 뿌리 뽑도록 하고, 무뢰배가 만일 혹시라도 침범하면 바로 쫓아버려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 이날 구례 현감 조규하(趙奎夏)가 이 날에 관아에 돌아와서 공장(公狀)을 바치고 배알(拜謁)하였다.

○ 곡성 현감의 보고에, “배정한 돈 300냥을 보냈다”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보내준 돈을 받았다”고 하였다.

○ 구례현 공형의 문장(文狀, 상관에게 보고하는 문서)에, “배정한 돈 300냥과 백목(白木, 흰 무명) 50필 및 씨를 제거한 솜 50근을 보냈다”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보내준 숫자대로 받았다”고 하였다. 낙안 군수를 겸임하고 있는 순천부의 보고에, “각 처의 동도 수 천 명이 떼를 이뤄 순천부에 소(所)를 설치하여 각 공해(公廨, 관아의 창고)의 돈과 쌀을 열어서 가져가고 사람을 해치며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여러 가지 소란을 피워 이르지 않은 곳이 없어 경내의 아전과 백성이 고통스런 지경에 들어갔고, 관아는 비어 일은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수를 겸임하는 즉시 동도의 거괴를 잡았고 그 다음에는 본 군(郡)의 민포(民砲) 50명을 인솔하여 관아로 달려갔습니다. 어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관아의 양반 3명과 하속(下屬)이 모두 나와, 성내의 민인(民人)으로서 영호(嶺湖, 김인배가 지휘하던 영호대도소)의 도집강(都執綱)이라고 하는 정우형(鄭虞炯)과 접주(接主)라고 하는 놈으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문가(文哥) 및 전미도총(錢米都摠)이라고 하는 양철교(梁喆敎), 선봉(先鋒)이라고 불리는 진주(晋州)의 양가(梁哥)와 그들을 따르는 150명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성의 수비를 엄중히 지시하고 도망간 나머지 무리를 엄중히 뒤를 밟아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라고 불리는 금구(金溝)의 김인배(金仁培)가 순천부에서 도망하여 광양현에 숨었는데, 해당 현에서 김인배와 그를 따르던 2놈을 잡아서 베어 죽였다는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이 지금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급(首級, 머리)을 바치고 나머지 무리를 더욱 기찰(譏察)하여 잡도록 해당 현의 공형에게 특별히 지시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에 대해 답신하기를, “해당 현의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고, 광양의 백성이 거괴를 잡아 죽인 것은 이런 때에 드문 일이다. 매우 가상하다. 더욱 힘써서 도망간 나머지 무리를 일일이 잡아서 목을 베라”고 하였다.

○ 전령을 만들어 정읍(井邑)의 문안(文案) 박기철(朴箕哲)의 집에 보냈다. 그 글의 내용에, “정읍에 사는 전 문안(前 文案) 박기철(朴箕哲)은 조관(朝官, 조정의 벼슬)을 지내어 평소에 지조가 있었다. 동도가 창궐하여 핍박이 이르자, 독사의 독을 견디지 못하여 잠시 금수(禽獸)의 명부에 들어가서 지조를 잃은 혐의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로 화를 피하려는 계책으로, 억지로 ≪동도 명부에≫ 들어간 것이어서 흔쾌히 따른 것과는 매우 다르다. 오히려 한스러우니, 어찌 혐의가 있으리오? 그러나 사람들이 매양 기뻐함이 없는데, 누가 그것을 헐뜯어 말하리오. 이것으로 침범을 당한다면 실제로 은혜를 베푼 전례(典禮)가 아니기 때문에 첩문(帖文)을 만들어 준다. 이것을 증거로 삼아 침범하지 말라(물침표).”고 하였다.

○ 양영(兩營)과 선봉진(先鋒陣, 이규태가 거느린 부대)에 첩보(牒報)하기를,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지시 때문에 본진(本陣)은 이 달 7일에 순창에서 출발하여 곡성과 구례 등지로 향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지난 번 순창에 있을 때에 구례현 공형의 문장(文狀) 안에, ‘본 현의 민인들이 유생 이기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적을≫ 토벌하고 ≪성을≫ 지킬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대군의 뒤를 따라가고 싶으나 순천과 광양 등의 적들이 늘 침범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을 비우고 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에 추대된 것으로 그가 능력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민병(民兵)의 본래 의도가 단지 그 성을 지키는 데 있고 경계를 넘어서는 아니 된다. 백성으로 하여금 성을 완비하는 데에 뜻을 두게 하여 한쪽을 방어하고 왕사를 기다려서 도울 수 있도록 하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일본군 사관이 이 문장을 보고 본진으로 하여금 해당 현(縣)등으로 가게 하여 이 날 40리 길을 가서 곡성현에 주둔하였습니다. 8일에 30리 길을 가서 곡성 압록원(鴨綠院)에 주둔하였고, 9일에 구례현에 도착하여 유숙(留宿)하였습니다. 성(城)에 들어가서 보니, 본 현의 유생 이기(李沂)가 수 백 명의 민생(民生)을 인솔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읍에는 빈집이 없고 백성들은 모두 생업이 안정되어 다른 읍들에 비해 성(城)이 공고하고 읍 전체가 평안하였습니다. 이기(李沂)는 멀리 떨어진 곳(김제)의 서생(書生)으로 향촌 전체의 추대를 받아 의병의 깃발을 들어 요얼(妖孼, 요사스런 무리로 동학군을 지칭)을 없애려고 안으로는 성을 지키고 밖으로는 적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추대하여 온 경내가 그에 의지하여 안정되었습니다. 그의 뜻과 재주는 권면하는 데에 부합될 것 같고 성의(誠義)를 참고하면 매우 가상합니다. 그러나 의사(義士, 의병)가 가지고 있는 직함이 없어 사람들을 독려하는데 권도(權道, 임시 방도)를 써서 자연히 장애가 많습니다. 관함(官銜, 관직)을 특별히 허락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성을≫ 방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기(李沂)가 각 처에 보낸 격문(檄文)을 베껴서 첨부하여 올립니다. 본진은 하루를 더 머물렀다가 파병(派兵)한 군사가 모이는 것을 기다려서 11일에 광양 등지로 출발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운봉현(雲峯縣)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적괴(賊魁, 적의 우두머리) 김개남(金介男)이 백성에게 거둔 쌀을 구례 화엄사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해당 현의 이기(李沂)가 의병을 일으킬 때에 적의 장물(贓物, 훔친 물건)이 경내(境內)에 있어 그것을 가져다가 군량(軍糧)으로 삼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귀현(貴縣, 운봉현)의 박참모(朴參謀, 박봉양)가 전령을 잡아가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본진(本陣)이 구례에 도착한 날에 의병에게 나누어 주어 비용을 마련할 것이다. 이런 뜻으로 잘 타일러서 분란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 하동부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말하기를, “본진(本陣)이 길을 가서 구례에 당도하여, 구례현의 동도가 하동의 화개동(花開洞)에서 죄를 저지른 3명이 있어 해당 현에서 의병을 보내 체포하려 했으나 아직 잡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 관아에서도 그들이 잡히는 것을 기다려서 조처를 하고 혹시라도 경계를 넘어 군대를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화개동의 백성들에게 잘 타일러라”고 하였다.

○ 구례현 의병맹주 이기의 격문(檄文)에, “구례현 의병맹주 이기는 삼가 본도(本道) 여러 읍의 유생들에게 알린다. 사설(邪說, 사악한 말)과 패악한 말을 말로 대항할 수 있는 자도 성인(聖人)의 무리이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모두 잡아 죽이는 것은 반드시 사사(士師, 禁令과 형벌을 맡아 보는 관리)의 직임만이 아니다. 이런 이치는 하늘에 있고, 땅에서도 차이가 없다. 눈이 있어 해와 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횡사(橫死)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은가?
이부(尼父, 공자의 존칭)는 어린아이 왕기(汪踦, 노(魯)의 종실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죽은 어린 아이)에서 연유하여 예(禮, 주례)를 만들어서 말세에 감동을 줄 수가 있었고, 자양(紫陽, 朱熹)은 오대(五臺)의 승려들이 일어나거나 탄식한 것을 오히려 모두 고금에 빛나서 능히 우주를 바쳤다 했다. 하물며 사는 것도 우리가 하고자하는 바이거늘 조금 사어(舍魚)와 취웅(取熊)도 판별하는 것임에랴. 그 임금에게 무례를 입히는 자는 들으니 마치 매가 새를 쫓듯 해야 하는데 일찍이 벙어리 장님 절룸발이보다 독한 기운을 뿜어 내버리고 절의의 문장을 배에 가득 채운 자이겠는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해서 교화가 거듭 빛나고 덕택을 끼쳐서 산이나 계곡이 험하거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았음에랴! 여러 마음이 성처럼 굳건해 전쟁이 오래 가지 않았으니 국가의 은혜가 바다와 같다. 아! 승제(乘除, 번성과 쇠퇴를 비유)에 운수가 있고 비태(否泰, 곤경과 태평)는 서로 이어진다. 내는 연못에 들어가서 저장되어 물고기가 더불어 살게 한다. 만물은 무겁고 땅은 커서 오히려 그 사이에 재앙의 단서를 면하게 한다. 지난번에 외부의 사악(邪惡, 천주교)이 틈을 타서 엿봄에 따라 동학이 점차 치열하게 되었다. 처음에 부적(符籍)을 ≪탄≫ 물로 병을 치료하여 장각(張角, 황건적의 우두머리)과 도릉(道陵, 장도릉)의 부류로 의심을 했으나, 끝내는 난리를 일으켜서 갑자기 방훈(龐勛)방랍(方臘)의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군(郡)이 물고기처럼 강대한 번진(藩鎭, 동학농민군을 지칭)에 놀라 짐승처럼 달아나서 적을 바라보며 임금으로 맞이하니 오히려 조정에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문을 열어 적을 들인 것은 통탄할만하다.
중국 봉강(封疆, 영토)에는 사람이 없었다. 산동(山東)의 200개 주(州)와 100개의 마을에 모두 가시나무와 구기자나무가 생겨났고, 하북(河北)의 24개 군(郡)이 상봉(桑蓬)의 ≪뜻을≫ 저버리고 누의(螻蟻, 하늘밥도둑과 개미) 처럼 작은 벌레가 굼틀거리다가 마침내 벌이나 전갈 같은 독을 펴고 뱀과 돼지가 먹어버리 듯 하며 대대(大隊)가 이름 있는 성(城)을 점거하여 달과 개가 편안하지 못하고 유격(遊擊)하는 기병(騎兵)이 민가(民家)와 사대부를 약탈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찌 피가 날리고 고문(拷問)하는 형벌을 허물하겠는가? 나라가 모두 집안의 적을 원수로 여겨 이를 갈고 있다. 나는 영락한 선비이고 궁박한 수재(秀才)로 고기를 먹을 계책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울적함을 어찌 하겠는가? 죽으려고 했으나 자를만한 연도(鉛刀, 쓸 만한 재주가 없음을 비유한 표현)를 시도하고 내 스스로 강직한 지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파리가 산을 짊어진 것을 헤아리지 못하여 단지 개와 말같이 미천한 내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다.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서 요사스런 기운을 쓸어낼 것을 서약한다. 밝게 비추니 하늘의 떳떳한 본성을 생각하고 현자(賢者)를 높이고 보답해야 한다. 여러 군자(君子)들은 호남의 절의(節義)를 지닌 향촌에서 자라 시(詩)와 예(禮)를 익히는 가르침을 받아 굳센 마음은 북두칠성을 관통할 것이니 응당 건재제봉의 풍모를 들었을 것이다. 웅장한 기운이 무지개를 끊어버리니, 어찌 석저(石底, 김덕령)금남(錦南, 정충신)의 기개에 부족하겠는가? 나라를 위해 용기를 내어 모두 칼에 의지하여 먼저 올라가서 그대와 짝이 될 것이다. 어찌 곳집을 가리키며 서로 주는 것이 어렵겠는가? 아! 군대는 성대한 일로 따르면 이루어진다.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시신이≫ 싸여 죽어 돌아와도 충의(忠義)가 있는 귀신이 될 것이다. 지금 천자(天子, 임금)가 인각(麟閣, 공신의 초상화를 걸어두는 사당)을 열어두고 이런 공명(功名)을 이룰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1894년 12월 모일(某日) 동맹(同盟) 유학(幼學) 왕사춘(王師春) · 박해우(朴海友) · 전 도사(前 都事) 김홍식(金弘植) · 전 현령(前 縣令) 남궁표(南宮杓) · 진사(進士) 김용선(金龍善) · 전 감역(前 監役) 박건양(朴健陽) · 유학 유제양(柳濟陽) · 박태현(朴泰鉉) · 진사 고광문(高光文) · 좌수(座首) 전두경(全斗景) · 호장(戶長) 김재현(金在鉉) · 이방(吏房) 안기섭(安冀燮) · 의병중군(義兵中軍) 고희수(高熺洙) · 전군(前軍) 고창식(高昌寔) · 후군(後軍) 안창섭(安昌燮) · 좌군(左軍) 김기문(金淇文) · 우군(右軍) 윤자각(尹滋恪) · 서기(書記) 윤상호(尹相浩) · 권동욱(權東旭) · 김광두(金光斗) · 집사(執事) 김리호(金履湖) · 김광벽(金光璧)

12월 11일 맑음 [十一日晴]

이 날 동쪽으로 10리를 가니 잔수역(潺水驛)이 있었고, 강을 건너 20리를 가서 순천 황전면(黃田面) 괴목장(槐木場)터에 이르러 김성규(金性圭) 집에서 묵었다.

○ 구례 의병 10여명이 진영을 따라와서 길을 인도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길이었다. 구례 접주(接主) 임정연(任定然)과 접사(接司) 양주신(梁柱臣)을 이 날에 해당 현의 남문 밖에서 죽였다. 동도 사환(使喚) 정영수(鄭永水) · 김기만(金基萬) · 양갑동(梁甲同) · 김귀철(金貴哲)은 잡아서 진중(陣中)에 가두었다.

12월 12일 맑음 [十二日晴]

이 날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솔원현(率院峴) 고개를 넘어 몇 리 쯤 가니 순천 서면(西面) 와요점(瓦要店)에 이르렀다. 순무영 교장(巡撫營 敎長) 최명주(崔明株)가 와서 순무영 전령 1도(度, 통을 얘기하는 듯), 군무아문(軍務衙門) 전령 1도, 우선봉(右先鋒) 수기(手旗) 1면(面, 단위) 2품(品) 봉사(奉使)의 인신(印信) 1과(顆, 단위)를 바치기에 공손히 인신(印信)을 받고 수기(手旗)를 엎드려서 받았다. 바로 몇 리를 가서 회룡점(回龍店)에 이르니 해당 마을의 동민(洞民) 장규열(張奎烈) · 조정국(趙禎國) · 박규섭(朴奎燮) · 남준권(南準權) · 임태헌(任泰憲) 등이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여 대군(大軍)을 환영하였다. 그래서 병사를 쉬게 하고 음식을 먹인 뒤에 바로 40리 길을 가서 광양읍에 이르러 주둔하였다.
좌수영(左水營, 여수) 민병(民兵) 600여명과 일본군 200여명이 11일에 와서 성안에 묵고 있었다. 좌수영의 병사가 광양성의 남문을 불태웠고 집집마다 많이 태웠다. 또한 선무청(選武廳)과 이방(吏房)의 집을 불태우고 순천의 지자(持者, 지자군)를 쏘아 죽였다. 지나가는 곳에서 저지르는 행패가 놀라왔다. 하동(河東)의 민병이 광양현의 경계를 침범했다고 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전령을 보내 지시를 하고, 하동 민포(民砲) 중군(中軍) 박제민(朴齊敏)을 잡아다가 곤장 10대를 쳐서 징계한 뒤에 풀어주었다. 동도 접주인 순천 황전면(黃田面) 강문(江問)의 정항식(鄭恒植)을 쏘아 죽였다.

○ 순무영에 첩보(牒報)하기를, “이 달 11일에 구례현에서 광양 등지로 출발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이 날 30리 길을 가서 순천 괴목 장터에 주둔하였습니다. 12일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순천 와요점(瓦要店)에 도착하였는데, 교장(敎長) 최명주(崔明株)가 와서 받은 전령에, ‘11월 20일에 계(啓,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하기를, ″적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선봉(先鋒) 이규태(李圭泰)를 좌선봉으로 임명하고, 장위영 영관(壯衛營 領官) 이두황(李斗璜)이 여러 차례 전공(戰功)이 있으니 우선봉(右先鋒)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길을 나눠 토벌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윤허(允許)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전령을 보내니 도착하는 대로 장위영 장관(將官)이하의 병정을 인솔하여 전적으로 처리하고 좌선봉 진영과 충분히 상의하여 길을 나눠 큰 공을 세우라. 우선봉(右先鋒)의 수기(手旗) 1면(面), 2품(品) 봉사(奉使)의 인신(印信) 1과(顆)를 내려 보내니 그것을 받고 치보(馳報, 빨리 보고하는 것)하라’고 하기에, ‘인신(印信) 1과(顆)는 공손히 받았고 수기(手旗) 1면(面)은 엎드려서 받았으며 명령에 따라 거행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총애가 특별하여 죄송스러움과 두려움이 교대로 깊습니다. 중임(重任)을 어찌 감당할는지 두려운 마음이 더합니다. 감히 규곽(葵藿, 해바라기로 충심을 비유)의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견마(犬馬, 자신을 낮추어 가리키는 말)의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 날에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광양읍에 주둔한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군무아문(軍務衙門)에 첩보하기를, “이 달 11일에 구례현에서 광양 등지로 출발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이 날에 길을 떠나 30리를 가서 순천 괴목 장터에 주둔하였습니다. 12일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와요점(瓦要店)에 도착했는데, 교장(敎長) 최명주(崔明株)가 도착하여 받은 사또의 전령과 2품 봉사(奉使)의 인신(印信) 1과(顆),우선봉(右先鋒)의 수기(手旗) 1면(面)을 전해주어서 공손히 인신을 받고 엎드려서 수기를 받았습니다. 영사를 보고 고마움과 눈물이 교대로 이어졌습니다. 재주는 성글고 공(功)은 작아서 어리석은 자질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은혜가 깊고 영광이 넘쳐나니 바다와 산처럼 엄중함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분수를 헤아려보니 과분하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장졸(將卒)이 힘을 다한 것에 의지하고 종묘사직의 위엄이 더해졌습니다. 서남(西南)쪽의 요사한 기운을 3~4차례 제거한 것은 바로 신명(神明, 천지신명)이 도운 것이지 어찌 저의 마음을 다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임금의 총애가 일군(一軍, 전군)을 덮어 땀이 사체(四體)를 두루 적십니다. 비록 알맞게 처리하여 변고에 대처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더라도 바탕이 본래 거칠어서 감히 생령(生靈, 생민)을 구제하여 안정시키는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혜도 성글고 부족하여 특별한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더욱 황공하여 감히 규곽(葵藿, 해바라기로 충심을 비유)의 마음을 다하겠습니까마는 견마(犬馬, 자신을 낮추어 가리키는 말)의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서합니다. 아울러 위로하는 편지를 받으니 황공함과 고마움을 견딜 수가 없고 영감의 글을 진중(陣中)의 병사에게 모두 펴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광양현에 주둔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군무아문과 순무영에 첩보하기를, “연로(沿路, 큰길 가)의 각 처에서 일어난 민병(民兵)이 도망간 여적(餘賊)을 잡아 죽인 실상을 살펴보니 가상한 일이지만 민병은 호미를 메고 나무를 하던 자들입니다. 의(義)를 떨친 것은 귀중하지만 법을 어기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도(道)를 넘어가거나 이웃의 경계를 나가 군제(軍制)의 엄중함을 다하지 않고, 대오(隊伍)의 순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 법도가 없고, 제멋대로 죽이고 해치며, 옥(玉)과 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니 선량한지를 어찌 가리겠습니까? 불을 놓아 재산을 약탈하고 행패를 저질러 위협을 하니,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없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둔다면 실제로 비류를 제거하는 계책이 아니라, 이것은 양민(良民)을 해치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에게 엄중하게 성(城)을 지키고 다른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타이르고 훈계하였습니다. 일의 기미를 헤아려서 각 도(道)의 감영(監營)에 관문(關文)을 보내 여러 읍에 지시하게 하였습니다. 각 처의 민병은 원병(援兵)의 요청이 없으면 제멋대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본진(本陣)이 구례에 있을 때에 해당 읍의 도접주(都接主) 임정연(林定然)과 접사(接司) 양주신(梁柱臣) 2명을 구례현의 의병맹주인 이기(李沂)가 본진영에 잡아바쳤기 때문에 바로 죽였습니다. 막 도착한 순천 겸임 낙안군수의 보고에, ‘각 처의 동도 몇 천 명이 무리를 이뤄 본 관아에 소(所)를 설치하고, 각 공해(公廨, 관아의 창고)의 돈과 쌀을 꺼내가며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저지르는 여러 가지 행패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경내의 아전과 백성이 괴로운 처지에 들어갔고, 관아는 비어 일은 구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제가 ≪낙안군수를≫ 겸임하여 바로 동도의 거괴를 잡은 뒤에 본군의 민포(民砲) 50명을 인솔하여 본 관아로 달려갔습니다. 어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관아의 양반 3명과 하속(下屬)들이 일제히 나와 성내의 민인으로 영호 도집강(嶺湖都執綱)이라고 하는 정우형(鄭虞炯), 접사(接司)라고 하는데 이름을 모르는 문가(文哥), 전미도총(錢米都摠)이라고 하는 양철교(梁喆敎), 선봉(先鋒)이라고 하는 진주(晋州)의 양가(梁哥), 그들을 따르는 150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지키고 도망간 여당(餘黨)을 그들로 하여금 엄중히 기찰(譏察)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였습니다.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라고 하는 금구(金溝)의 김인배(金仁培)가 본 관아에서 도망하여 광양현에 숨었는데, 해당 현에서 김인배와 그를 따르던 2명을 잡아 죽였다는 공형의 문장(文狀)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급(首級)을 가져오고, 남은 무리를 더욱 기찰하여 잡도록 해당 현의 공형(公兄)에게 특별히 명령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광양현 공형(公兄)의 문장에, ‘이 달 7일에 본 읍의 이교(吏校, 吏胥와 軍校)와 노령(奴令, 지방관아의 官奴와 使令) 및 민포(民砲)가 일제히 힘을 합쳐 동도 중에서 영호대접주라고 하는 금구의 김인배(金仁培)와 수접주(首接主)라고 하는 순천의 유하덕(劉夏德) 및 도당 40여명을 잡아 김인배와 유하덕은 바로 목을 베어 대소민인(大小民人)에게 경계(警戒)를 하였고, 나머지 놈들은 모두 쏘아 죽였습니다. 도망간 동도는 특별히 뒤를 밟아 탐문하여 일일이 체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모두 베껴 적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각 처에 있던 적은 도망하였는데, 거괴 중에 나머지 놈들은 점차로 죽일 것이고, 연로(沿路)의 민병이 곳곳마다 일어나서 도망간 적들을 일일이 체포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양민이 의지할 방도가 있게 되고, 비류(匪類)는 거의 소탕할 기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약탈을 당한 군읍(郡邑)의 남은 가호(家戶)와 놀란 부곡(蔀曲, 蔀는 部의 오자)의 피폐한 백성은 만약 특별한 위로와 구휼이 없다면 진정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난리를≫ 겪은 여러 읍에 먼저 백성을 안정시킬 방도에 힘써 주시기를 바라며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군무아문의 전령에, “이 명령을 한번 낸 뒤에 승리의 소식이 계속 이어져서 군심(軍心)이 고무되고, 지나간 현과 읍이 수 십 개를 넘으며 전후에 걸쳐 ≪적을≫ 토벌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임금의 영명함에 의지하여 지휘를 해서 녹림(綠林)에게 위엄을 떨치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여 앞으로 나아가서 그 형세가 대나무가 쪼개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군부(軍府, 군무아문)에서 그 공(功)을 아뢰어 임금의 명이 내려왔다. ‘본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을 올려 우선봉(右先鋒)으로 삼으니 그 영광을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기뻐하게 하라. 눈이 활과 칼에 차고 바람이 깃발을 찢는 이때에 충성과 용기가 드러나니 참으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일에 따라 군대를 진퇴(進退)시킨 것을 알겠다. 어찌 말을 몰아 달려가는 것을 견뎠겠는가? 하지만 군대의 일은 잠시도 그쳐서는 아니 된다. 특별히 임금의 은총을 입어 두루 성은(聖恩)을 받았으니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한다. 더욱 남은 용기를 내어 3남(三南)의 비도를 쓸어내어 큰 공을 세워 구중대궐(九重大闕)의 근심을 덜어낸다면 생령(生靈, 생민)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국가는 공고한 반석(盤石)과 태산(泰山)에 두게 될 것이다. 더욱 힘써라. 이에 따로 집사(執事)를 보내 ≪고생을≫ 위로하고 문안하는 것을 대신한다. 반드시 이런 뜻을 진영의 병사들에게 모두 펴서 보게 하라.’ 하였다.

○ 순무영(巡撫營)의 전령은 보장초(報狀草, 보장을 적은 것)에 실었기 때문에 중첩하여 적지 않았다.

○ 광양현에 감결(甘結,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공문)을 보냈는데, “진중(陣中)에 쓸 백목(白木, 흰 무명) 2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을 배정하니 바로 가져오라”고 하였다.

12월 13일 맑음 [十三日晴]

그대로 광양현에 머물렀는데, 밤에 비가 오고 조수(潮水)가 성 밖에 1후(帿, 과녁으로 활을 쏘아 닿을 수 있는 거리) 정도 되는 곳까지 밀려들어왔다.

○ 구례 현감의 첩보에, “본 현의 의병장 이기(李沂)가 광양현으로 도망간 동도를 잡으러 민병(民兵) 200명을 인솔하여 이 날 인시(寅時, 오전 3시~5시)경에 광양현과 경계를 하고 있는 본 현의 간전면(艮田面) 요충지를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답신하기를, “본 경계만 지키고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였다.

○ 광양 공형의 문장(文狀)에, “군수전 200냥을 우선 보내어 바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가져온 돈을 받았다”고 하였다.

○ 경상도 하동(河東) 민포장(民砲將)에게 영칙(令飭, 명령)하기를, “경상도 각 읍(邑)의 포군(砲軍)이 도(道)를 넘어 광양(光陽)·다압(多鴨)·동포(同浦)·진상(津上)·진하(津下)·옥곡(玉谷) 등지를 함부로 침범하여 거리낌 없이 불을 지르고 돈·곡식·집물(什物, 가재도구)도 약탈했다고 한다. 성화(星火)같이 엄중히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감히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관문(關文)을 보냈는데 아직 어떠한 보고도 없다. 또한 포군들이 마침내 소란을 일으켜 본 읍의 각 면(面)이 비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행위를 살펴보니, 도리어 동도보다 더하다. 진실로 착실하게 조치했다면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하겠는가? 포군이라는 것이 어떤 읍을 막론하고 각각 자신의 읍을 지키고 밖의 적을 방어하며 다른 읍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군제(軍制)에 들어있다. 그러나 지금 도의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니 이것이 동도의 습속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특별히 조처하고 그대로 두지 말라. 이에 다시 관문을 보내니, 성화같이 엄중히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고향에 돌아가서 다시는 악습(惡習)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라. 혹시라도 뉘우치지 않으면 각 해당 읍의 수령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유념하여 거행하라”고 하였다.

○ 광양 공형의 문장(文狀)에, “본 현에 배정된 백목(白木, 흰 무명) 100필(匹) 중에 51필을 우선 수납(輸納)하겠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가져와서 납부한대로 받았다”고 하였다.

○ 노문(路文)을 만들어 순천과 낙안에 보냈다. 순천까지 거리가 30리가 되었다. 14일의 숙소는 낙안(樂安)인데, 거리가 40리였다. 15일의 숙소는 상관(上官) 이하 병사가 800명, 소와 말이 60필이었다.

12월 14일 흐림 [十四日陰]

일본군 사관(士官)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요즈음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저희 진영(陣營)은 이 달 7일에 순창(淳昌)에서 출발하여 30리길을 가서 곡성현에 주둔하였고, 8일에 30리 길을 가서 구례현에 주둔하여 하루를 더 머무르며 순창에서 나뉘어진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1일에 길을 떠나 30리를 가서 순천 괴목 장터에 주둔하였고, 12일에 50리 길을 가서 광양읍에 주둔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적의 동태를 탐문해보니, 해당 읍의 민인(民人)이 적들을 죽여서 아직 드러나는 근심은 없었으나, 경상도 하동의 민병(民兵)이 동도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해당 현의 지방을 침범해서 해당 현의 민인이 일제히 그들을 막아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고, 다른 한편으로 해당 현의 민인을 안심시키며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 14일에 순천과 낙안 등지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하생(下生,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어 쓰는 말)은 12일에 양호순무우선봉(兩湖巡撫右先鋒)에 임명하는 공문과 2품의 인신(印信) 및 우선봉의 수기(手旗)를 받고 고마움과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흥양(興陽)에 적이 조금 모여 있고, 장흥에 적들이 많이 집결하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전해들은 것이라서 아직 믿을 수는 없습니다. 순천 등지에 가서 상세히 탐문하여 다시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이 날에 광양현을 출발하여 30리 길을 가서 순천 읍에 도착하여 남문안의 김양언(金陽彦) 집에 주둔하였다. 본 관아의 3개 대문 밖에 동도의 시신 100여두(頭)가 있었다.

○ 진중(陣中)에 쓸 백목(白木, 흰무명) 2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을 순천에 배정하였다.

○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대개 군정(軍政)은 죄를 범한 자를 섬멸하고 선량한 사람을 안심시키며 ≪쓸모없는≫ 가라지를 제거하고 곡식을 키우는 것이다. 본진(本陣)이 광양에 도착하여 그 성지(城池)를 살펴보고 그들이 전하는 것을 들어보니, 본영(本營, 전라좌수영)의 군졸들이 와서 성문을 불 지르고 집마다 태웠으며 공해(公廨, 관아의 창고)와 사가(私家, 민가)에 간간히 불을 놓아 약탈을 해서 인민(人民)이 흩어졌다고 한다. 보고 들은 것이 너무 놀랍고 해괴하였다. 그런데 순천부에 이르러 해당 관아의 소안면(蘇安面)에서 생목(生木, 눕지 아니한 무명) 민인의 등소(等訴,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관아에 올리는 진정서)를 보니, 본영의 군졸이 30여 호에 불을 지르고 소와 재물을 약탈했다고 하였다. 영군(營軍, 전라좌수영)은 지나는 곳마다 태워버리는 것을 훌륭한 계책으로 여기고 약탈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이것은 비류를 제거한 병사가 아니라 실제로 양민을 해치는 무리이다. 그 소행을 살펴보면 법으로는 진실로 용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삼가고 조심했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특별히 단속하여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고, 나중에 다시는 관할하는 작은 읍에 쉽게 군대를 내려 보내지 말라. 만약 다시 병사를 움직여서 폐단을 저지른다면 해당 두령(頭領)의 목을 베어 경계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특별히 조심하고 엄중히 단속하라”고 하였다.

○ 순천 영장(營將, 각 진영의 군사를 통괄하던 무관인데 여기서는 순천부에 딸린 장수)에게 전령을 보내기를, “본진이 관아에 도착하여 대략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해당 관아의 아전과 백성이 일어나서 적을 많이 잡아 토벌한 것은 매우 가상하다. 더욱 기미를 살펴 남은 무리를 잡아 선량한지의 여부를 구별하여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탄식이 없도록 하라. 지금 적의 사정을 보니 거괴가 점차로 주륙(誅戮)되어 그들을 거의 소탕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글을 지어 각 면에 명령을 내리니, 이것에 근거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생업을 안정시키는 방책을 도모하라”고 하였다.

○ 순천 영장 이풍희(李豊熙)가 직접 문장(文狀, 공문서)을 가지고 왔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라고 하였다.

12월 15일 맑음 [十五日晴]

순천의 월등(月燈)과 상사(上沙) 2개 면(面)의 민인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본진(本陣)이 본 관아[순천]에 도착하여 대략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16일에 각 면의 민인이 모두 일어나서 동도를 잡아서 바치거나 군기(軍器)를 거두어 들였다 한다. 오직 월등과 상사 두 개 면에서만은 동도를 하나도 잡아 드리지 않고 군기도 또한 거두어 들리지 않으니 이는 무슨 의사인가? 경(經, 서경)에 말하기를, ‘거괴는 죽이고 위협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국가가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의 덕이 하늘과 같아 위협에 ≪못이겨≫ 따른 너희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겠다. 의심과 두려움을 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갖지 말고 바로 뉘우쳐서 마음을 바꿔 귀화를 하여 본 면에 있는 무기를 성화같이 본 진영(鎭營)에 거두어 바치고, 동도의 접주(接主)·접사(接司)·성찰(省察)·교장(敎長) 등을 일일이 잡아서 본진(本陣)에 대령을 하라.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은 귀화를 하지 않으려는 백성이니 법으로 용서해서는 아니 된다. 대군(大軍)을 보내어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죽일 것이다. 반드시 이런 뜻을 잘 알아서 특별히 조심하여 거행하고 후회하는 데에 이르지 말라”고 하였다.

○ 순천 영장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본 관아의 각 면(面)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서 힘을 다했으나 유독 월등(月燈)과 상사(上沙) 2개면이 아직도 침묵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2개면에 있는 군기(軍器, 무기)를 성화같이 거두어 본진에 들이도록 2개면에 겨우 명령을 하였다. 충실한 본 진영(鎭營)의 교졸(校卒)과 의병을 2개면에 보내어 동도의 두령(頭領)을 잡아 성화같이 압송하여 본진(本陣) 앞에 대령하고, 군기는 본 진영에 거두어 보관을 하라. 특별히 교졸과 민병에게 명령을 내려 혹시라도 폐단을 저질러서 탈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 구례의 의병맹주인 이기(李沂)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가두고 있는 죄인 중에 양한표(梁漢杓)는 상세히 조사하여 조치하고, 이기한(李起漢)·원현덕(元賢德)·고성권(高成權) 3명은 죄가 드러나서 ≪재고할≫ 여지가 없으니 같은 종류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진주(晋州)의 적 4명과 함께 즉시 죽이고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이 날에 순천에서 서쪽으로 떠나 골짜기 길을 따라 가니 돌길이 험난하였다. 25리를 가서 순천의 용암촌(龍巖村)에서 쉬어 병사들에게 밥을 먹인 뒤에 바로 20리를 가서 낙안의 불치(不峙)에 도착했는데, 돌이 고갯길에 펼쳐 있어 행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5리를 가서 낙안읍에 이르러 동헌(東軒)에 묵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50리 길이었다. ≪순천 겸임≫낙안 군수 장교준(張敎駿)이 직접 찾아와서 공문을 바치기에, 그것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라고 하였다.

○ 백목(白木, 흰무명) 3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斤) 및 군수전 300냥을 흥양현(興陽縣)에 배정하였고, 백목 2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 및 군수전 300냥을 보성군(寶城郡)에 배정하였다.

○ 흥양(興陽)에 감결(甘結,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주는 공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흩어져서 도망을 간 비류의 여당(餘黨) 중에 본 현에 피신한 자가 매우 많고, 본 현의 비류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또한 비괴 유복만(劉卜萬)은 바로 본 현에 피신을 했다고 하니 정말로 그러한지 상세히 탐문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12월 16일 맑음 [十六日晴]

병사를 쉬게 하려고 하루를 머물렀다.

○ 광양현 공형의 문장(文狀)에, “다시 가둔 본 현의 죄수 40명의 죄목을 3등급으로 분류하여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냈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성책하여 올려 보낸 죄수 10명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죽여라. 애초에 ≪동학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바로 풀어주고, 억지로 들어간 자는 잘 타일러서 풀어주라. 경내의 남은 적은 일일이 잡아 소탕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 낙안 군수의 첩보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사또의 감결에 ‘군수전 300냥을 준비하여 바치라’고 하였고, 동시에 도착하여 받은 감결에, ‘진중(陣中)에서 쓸 백목(白木) 2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을 마련하여 바치라’고 한 것은 모두 막중한 군용(軍用)에 관계되어 잠시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본 읍이 여러 차례 넘어져 흩어지는 것을 겪고 백성의 힘이 소진되고 지쳐서 떠나간 자가 절반이나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여 기러기처럼 모일 겨를이 없어 무지개를 바라는 기대가 간절합니다. 군수전 300냥을 마련하여 보낼 계획이나, 백목과 씨를 제거한 솜은 정말로 마련할 길이 없으니 특별히 분간하여 처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백성의 힘이 비록 소진되고 지쳤다고 해도 병사의 옷은 마련하지 않으면 아니 되니 즉각 준비하여 바쳐서 분란이 생기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 광양현 공형의 문장(文狀)에, “본 현의 노비 염순필(廉順必)이 억울하게 동도의 누명을 썼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노비 염순필이 애매한 것은 아전과 백성이 모두 알고 있고, 또한 확실한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사실을 진술한 말)가 없기 때문에 특별히 풀어주라. 이밖에 3명은 좌수영(左水營)에 잡아 보내라”고 하였다.

○ 순천의 수성중군과 공형 및 수교(首校, 각 고을 장교의 우두머리)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본진(本陣)이 본 관아에 도착하여 그 형편을 대략 살펴보니, 아전과 백성이 일어나 동적(東賊, 동학농민군)의 거괴와 포악한 놈들을 섬멸하고 성을 회복한 것은 매우 가상하다.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지금부터 각 영(營)·진(鎭)·읍(邑)은 민포(民砲)와 기포교졸(譏捕校卒)들이 만약 혹시라도 경계를 넘어 분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모두 잡아서 행진소(行陣所)에 대령하라”고 하였다.

○ 광양의 민병 좌우영장(左右領將)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본진(本陣)이 본 현에 도착하여 그 형편을 대략 살펴보니, 아전과 백성이 일어나서 동도의 거괴와 포악한 놈들을 많이 토벌한 것은 매우 가상하다. 민병(民兵)이 성을 지키는 데에 양식이 부족하여 많이 탄식하리라 생각한다. 죽인 적들에게서 몰수했다고 한 것은 민병에게 주어 식량에 보충하고, 적들이 이미 죽었으나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불쌍한 자에 속하니 위로하여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 흥양(興陽)·낙안(樂安)·순천·보성(寶城)에 감결(甘結)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사는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이니 가볍게 출동해서는 아니 된다. 민병의 본래 뜻은 자기 성만을 지켜 한쪽을 각각 보전하는 것이다.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착실하게 본 경계를 지키고 혹시라도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지 말라. 다른 읍의 민병이 원병(援兵)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만약 본 경계를 넘어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잡아서 진영(陣營) 앞에 대령하라. 도망간 나머지 적은 각각 해당 읍에서 특별히 탐문하여 잡고, 거괴는 압송하여 진영에 대령하라”고 하였다.

○ 구례현의 맹주 이기(李沂)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본 현의 동도(東徒) 중에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정영수(鄭永水)·김기만(金己萬)·양갑동(梁甲同)·김귀철(金貴哲) 등 4명의 죄는 억지로 따라 들어갔다고는 하나 징계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진중(陣中)에 잡아가두고 여러 날 동안 진중의 일을 시켜서 그 죄를 징계하고, 또한 단속하는 것을 알게 하고나서 의병으로 하여금 다시 압송하게 하고, 의병소(義兵所)에서도 그들로 하여금 진중의 을 하게 하여 그 죄를 징계한 뒤에 풀어주라”고 하였다.

○ 낙안 군수의 첩보에, “지금 도착한 감결에 따라 본 읍의 경납(京納, 경군에 납부할 군수품) 중에서 군수전 300냥을 꿰어 봉(封)하여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 구례의 민병(民兵) 맹주인 이기(李沂)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순천의 월등면(月燈面)은 본래 종적을 숨긴 동도의 거괴가 많다. 해당 면의 굴을 파서 숨은 자가 매우 많고 또한 해당 면의 접주(接主)와 접사(接司) 등 적들의 우두머리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해당 면의 민인 등에게 전령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일일이 잡아서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은 많고 병사는 적어서 그것을 행할 수 없다고 여겨, 지금 돌아오는 구례의 민병 좌군장(左軍將) 김기문을 보내 적괴(賊魁)를 상세히 살펴 잡아들이도록 분부하였다. 김기문이 거느린 병사가 만약 힘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있으면 장병(將兵)을 더 파견하여 도와서 적을 잡아 가둔 뒤에 그 형편을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다.

○ 순천에 감결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시할 것이 있어 지금 구례의 민병 10여명을 파견하였다. 본 관아의 모처(某處)에 도착하는 대로 음식물을 지급하는 일을 일일이 지시하여 궁색한 폐단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순천 겸임 낙안군수의 보고에, “저희 관아에서 납부할 군수전 300냥을 이 날 그 숫자에 맞추어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에 답신하기를, “보낸 돈을 받았다”고 하였다.

12월 17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어서 눈이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웠다 [十七日朝晴暮雪日候酷寒]

이 날에 낙안(樂安)에서 서쪽으로 출발하여 30리길을 가서 자세현(仔細峴)에 도착했는데, 고개는 높았으나 길이 험하지 않았다. 바로 길을 떠나 5리를 가서 열하현(烈下峴)을 넘어 보성(寶城)의 조성원점(鳥城院店)에 도착했으나, ≪길이≫ 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당 점(店)의 안쪽마을이 바로 대곡(大谷)이었는데, 마을의 모양은 제법 충실하고, 호구 수(戶口數)도 많았다. 바로 대곡에 가서 양반 이봉회(李丰會)의 집에 묵었다. 양반 이(李)는 본래 부유하다는 이름이 있어 아마도 ≪우리≫ 일행을 접대했으나, 마을 전체가 거의 비어있다고 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30리 길이었다. 이 날 밤에 달빛이 매우 밝고 큰 바다는 남쪽으로 꺾여 감회를 풀기에 충분하였다. 훌륭한 문장(文章, 글)은 사마천(司馬遷, 史記를 지은 漢의 사가)이 강회(江淮, 장강과 회수)를 유람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장군의 웅대한 계책은 멀리서 반초(班超)가 옥문관(玉門關)을 진압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삼동(三冬, 겨울)에 행군하여 한 해가 끝나가고 천리 길을 출정해서 군용(軍容, 군대의 모습)이 모두 지쳐 있다. 승리한 소식을 비록 4차례 올렸으나 요얼(妖孼)이 아직 한쪽 귀퉁이에 남아 있어, 해와 산에 맹서하고 밤낮으로 생각하여 남은 요사한 무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은혜에 만분에 일이라도 갚으려고 한다.

12월 18일 맑고 바람이 세차며 매우 추웠다 [十八日晴風高酷寒]

이 날에 대곡촌(大谷村)에서 출발하여 20리 길을 가서 불무등(拂舞嶝)에 도착하니, 본관(本官,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가 영접하였다. 곧바로 10리를 가서 안치(雁峙)를 넘어 10리를 더 가서 보성군에 도착하니, 일본군 사관(士官) 스즈끼(鈴木)대위가 인솔한 1중대와 좌수영(左水營)의 병사 50명이 보성군의 성안에 주둔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진영(陣營)을 합쳐서 머물렀다. 바로 북문 밖으로 나가 호장(戶長) 임양온(林樑瑥)의 집에 유숙(留宿)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40리 길이었다.
이 날 보성 군수 유원규의 보고에, “군수가 직접 만나 뵙고 급히 보고하려고 합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고 하였다. 이어서 도착한 해당 군수의 보고에, “근래에 비류가 창궐(猖獗)하여 수성군(守城軍)을 많이 보내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뒤를 밟아 체포하였습니다. 이 달 15일에 장흥의 경계인 웅치면(熊峙面)에서 문공진(文公振)을 잡았는데, 이 놈은 바로 장흥부사에게 포를 쏘는 변고를 저지른 거괴(巨魁)입니다.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해야 하나, 감결(甘結)로 지시하신 뒤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죄인 문공진을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고 그 형편을 우선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에 답신하기를, “순무영(巡撫營)에 등보(謄報, 베껴서 보고하다)해야 한다. 죄수는 본군(本郡)에서 교졸(校卒)과 민병(民兵)을 많이 징발하여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의 대대본부(大隊本部)에 압송하라”고 하였다.
이 날 도착하여 받은 일본군 진영의 대대장(大隊長)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행군하는 며칠 동안 지나온 곳의 적의 동태가 과연 어떠하고, 지금은 어느 곳에 도착했는지, 어찌 하여 보고를 하지 않아 답답하고 울적한 데 이르게 하는가? 연이어 남쪽에서 오는 보고를 들어보면, 비도(匪徒) 10,000여명이 장흥에서 해당 수령(부사 박헌양)을 죽이고 이어서 강진성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병사를 세 길로 보내는데, 한길은 능주(綾州)에서 제 1중대가 바로 장흥과 강진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길은 나주에서 바로 영암과 강진으로 향하는 길이며, 또 다른 한길은 무안(務安)과 목포(木浦)에서 해남과 강진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다. 비류가 대군이 오는 것을 보고 해남으로 도피할 것이다. 만약 그대 쪽의 적들을 소탕했다면 강진 등으로 가서 힘을 합쳐 토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착한 곳은 일에 따라 자주자주 빨리 보고하라. 순천 등지에 있는 적의 사정을 상세하게 빨리 보고하라. 만약 그들이 창궐한다면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된다. 남쪽으로 가서 상세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 남영관(南領官)과 강영관(姜領官) 2명의 편지에, “그 사이에 영감께서 군무(軍務)를 돌보는 형편이 좋고, 휘하가 모두 평안한지 그립습니다. 저희들은 객지에서 지내는 모습이 여전할 뿐입니다. 비도(匪徒)가 다시 장흥과 강진 2개 주(州)를 무너뜨렸고 그 숫자가 10,000명이 된다고 합니다. 나주에서 군대를 나누어 세 길로 출발을 했으나 아직 승리한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태정(胎呈) 하나는 바로 좌선봉(左先鋒, 이규태)이 베껴서 본영(本營)의 주진(駐陣)에 보낸 것인데, 일본군 진영에 전해져서 잘못 개봉(開封)하였기 때문에 다시 붙여서 보내니 살펴보고 들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행군 뒤에 소식이 서로 끊기어 일장(日將, 일본군 장교)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종종 주편(走便,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894년 12월 15일 요생(寮生, 휘하의 병사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 남만리(南萬里)와 강원로(姜元魯)가 재배(再拜)하고 ≪편지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 좌선봉(左先鋒)의 편지에, “≪정신이≫ 산란하여 공문을 쓸 겨를이 없어 병영(兵營)의 이문(移文, 동등한 관아 사이에 왕래하는 공문서)을 베껴서 보냅니다. 급박한 보고를 일본군 진영과 상의하고 편한 대로 처리하여 ≪원병을≫ 보내어 구원해주시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1874년 12월 10일 묘시(卯時, 아침 5시~7시)에 나주의 북창(北倉)에서 강진 병영의 이문을 베껴서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강진 병영의 이문이 12월 6일에 내어 12월 8일 오후에 도착하였다. 그 이문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서병무)가 상고(相考)합니다. 비류 10,000여명이 본영(本營, 강진 병영)에서 1사(舍, 거리의 단위로 30리) 되는 장흥 땅에 집결하여 이 달 4일에 벽사역(碧沙驛, 현 장흥읍 원도리)을 불태웠습니다. 4일 새벽녘에는 장흥관아를 무너뜨리고 들어가서 부사(府使, 박헌양)를 사로잡아 머리를 무수히 때려 생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형을 쏘아죽이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남녀를 죽여서 그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서 숨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각 처의 비류가 지금 본영과 40리가 되는 장흥의 사창시(社倉市)에 모여 있습니다. 장흥을 무너뜨리고 ≪관아에≫ 들어간 무리와 합세하여 바로 본영을 도륙할 것이라고 합니다. 본영을 잃을 근심이 급박하기가 조석(朝夕) 사이에 있습니다. 빨리 헤아리고 급히 구제하여 유린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도착한 병영의 이문은 7일 진시(辰時, 아침 7시~9시)에 내어 9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도착하였다. 그 이문에, “병마절도사가 상고합니다. 비류가 장흥 부사를 쏘아죽이고 이어서 불태웠으며 사람을 쏘거나 찔러 죽여서 시신이 산처럼 쌓였고 피가 흘러 절구를 띄웠습니다. 각 공해(公廨, 관아의 창고)와 인가(人家)가 모두 불에 타서 객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6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경에 벽사역 뒤의 산등성이로 옮겼고, 미시(未時, 오후 1시~3시)경에 다시 장흥과 강진 본영의 접경(接境)인 사인점(舍人店) 앞들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본영과의 거리가 10여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립된 것과 같은 군대로 지키기가 어려운 데다 장흥 부사가 죽어서 인부(印符)가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공형이 모두 죽은데다가 만약 밤을 가리지 않고 상대할 군사가 없다면 본영을 잃어버릴 근심은 서서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귀(貴) 진영에서 특별히 빨리 구제하여 병영을 온전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도착한 병영의 이문은 7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내어 10일 축시(丑時, 오전 1시~3시)에 도착했는데, “비도가 오늘 [12월 7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경에 강진현을 침입하여 인가(人家)를 불태우고 ≪사람을≫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 울부짖으며 달아나 숨었는데, 이 일을 폭우 속에 보발(步撥)로 급히 알려왔습니다. 본영을 침범하는 것은 호흡하는 데에 있는 것처럼 급박합니다. 다시 빨리 보고하니 귀 진영에서 정예 병사를 보내 밤을 가리지 않고 와서 구원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士官)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를, “삼가 답장을 합니다. 이 달 7일에 순창에서 출발하여 곡성을 지나 구례에 주둔했다가 광양에 들어간 연유는 이미 지난번 편지에 써서 받아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14일에 광양에서 출발하여 30리 길을 가서 순천읍에 주둔하여 그 성에 들어가서 보니, 이리저리 널려 있는 적의 시신이 150여구가 되었습니다. 아전과 백성이 들고 일어나서 적을 죽여 성을 회복하였고, 게다가 각 면의 마을에서 점차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죽인 것이 많았습니다. 대개 그 동정을 살펴보니, 광양과 순천 2개 읍은 제법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좌수영이 군사를 모집하여 지켰습니다. 귀국의 군대 약 1개 중대가 하동으로부터 광양 순천 낙안을 순찰하고 보성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15일에 순천에서 출발하여 60리 길을 가서 낙안에 이르러 주둔하고, 흥양(興陽)에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흥양의 백성이 일어나서 적을 죽인 연유를 알고 난 뒤에 길을 떠나서 자연히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 낙안에서 30리 길을 가서 보성의 경계인 대곡촌(大谷村)에 주둔하였습니다. 18일에 40리 길을 가서 보성읍에 이르렀더니 하동에서 온 귀국의 스즈키(鈴木)대위의 1중대와 좌수영의 병사 50명이 아직도 해당 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할 계획입니다. 다만 보내주신 명령을 받아보니, 요즈음에 군무(軍務)를 살피시는 형편이 크게 편안하신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고 축하를 드립니다. 날씨가 고르지 않아서 저희 진영의 병졸(兵卒)은 근래에 많이 병에 걸려 보성에서 장수를 살피고 병사를 쉬게 한 뒤에 바로 강진과 해남 등지로 갈 계획입니다. 그 사이 동쪽으로 돌아온 이후에 별다른 접전(接戰)없이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을 뿐입니다. 도착하는 읍마다 영칙(令飭)으로 타이르고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점점 멀어지고 거주하는 백성이 적어 갑자기 보고가 드물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의 형세 때문이라고 해도 실제로 미안하여 스스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보성군수의 보장(報狀)을 보니, ‘근래에 비류가 창궐하여 수성군(守城軍)을 많이 징발해서 사방으로 보내 ≪적의≫ 뒤를 밟아 체포하였습니다. 그 중에 이 달 15일에 장흥의 웅치면(熊峙面)에서 잡은 문공진(文公振)은 바로 장흥부사를 쏘아 죽이는 변고를 저지른 거괴이어서 함부로 처리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죄인 문공진을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고 그 형편을 우선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순무영(巡撫營)에 베껴서 보고해야 한다. 죄인은 해당 군(郡)에서 교졸(校卒)과 민병(民兵)을 많이 징발하여 나주에 주둔한 일본군 진영의 대대본부로 압송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압송한 것을 살펴 헤아려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앞으로 일의 사정은 탐문하는 대로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이 달 12일에 광양현에 주둔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3일에 해당 현의 민인(民人) 등이 그대로 머물러서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로 주둔하기를 요청했기 때문에 하루를 체류(滯留)하며 위로하고 구제하여 안정을 시켰습니다. 14일에 떠나 30리 길을 가서 순천읍에 주둔하여 그 성에 들어가서 보니 이리저리 널려있는 적의 시신이 150여구가 되었고, 아전과 백성이 들고 일어나서 적을 죽이고 성을 회복한데다가 각 면의 마을이 점차로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죽인 것이 많았습니다. 대략 그 동정을 살펴보니, 광양과 순천 2개 읍은 제법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15일에 60리 길을 가서 낙안읍에 주둔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16일에 흥양(興陽)에 있는 적의 사정을 탐문하여 아전과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 적들을 죽여 흩어지게 한 연유를 안 뒤에 17일에 길을 떠나 30리를 가서 보성 경계에 있는 대곡촌(大谷村)에 주둔하였습니다. 일본군 진영과 나주에서 만나려고 18일에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보성읍에 도착하였더니,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나주에서 보낸 지시에, ‘계속 남쪽에서 오는 보고를 들었는데, 비도 10,000여명이 장흥에서 수령을 죽이고 이어서 강진성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군대를 3갈래 길로 나누어 보내면 비류가 대군이 오는 것을 보고 해남으로 피신을 할 것이다. 그 쪽의 적들을 만약 모두 소탕했다면 해남 등지로 가서 힘을 합하여 토벌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지시를 보고 그대로 보성에 머물렀습니다. 근래에 날씨가 순조롭지가 않아 병에 걸린 병사가 많아 해당 군에서 병사를 쉬게 하고 강진과 해남 등지로 향할 계획입니다. 12월 18일 보성 군수의 보고에, ‘근래에 비류가 창궐하여 수성군(守城軍)을 많이 징발하여 사방으로 보내 뒤를 밟아 체포하였습니다. 이 달 15일에 장흥 경계인 웅치면(熊峙面)에서 문공진(文公振)을 잡았는데, 바로 장흥부사를 해친 자입니다.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해야 하나 함부로 처치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고 그 형편을 먼저 보고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순무영(巡撫營)에 베껴서 보고해야 하고, 죄수는 본군에서 교졸(校卒)과 민병(民兵)을 많이 징발하여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의 대대본부로 압송하라’고 답신을 하였습니다. 바로 진영 앞에서 목을 베어 경계하지 않고 일본군 진영에 이송(移送)한 것은 일본군 사관의 전령을 받아 지시한 것이고, 사로잡은 동도를 함부로 죽이지 않고 일본군 진영에 압송하도록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 싸움에 직면하여 쏘아 죽인 자 외에는 모두 일본군 진영에 압송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강문안(姜文案)남영관(南領官) 의 편지에 답장하기를, “편지를 받고 요즘에 영감의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심을 아니 위로가 되고 축하를 드립니다. 저는 객지에서 지내는 모습이 여전하고 진영 전체에도 변고가 없을 뿐입니다. 순창에서 떠난 뒤로 광양에 도착한 연유는 광양에서 편지를 써서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 공(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상세하게 지나간 곳의 사실을 편지로 보고하면 자세히 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보고가 드물었던 것은 실제로 길이 점차 멀어진데다가 긴급한 사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의 형세 때문이라고 해도 실제로 미안합니다. 이런 뜻을 상세히 진술하여 의혹을 깨고 기대를 펴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진영의 병사는 근래에 날씨가 순조롭지 않아서 병에 걸린 자가 많아 보성에서 병사를 쉬게 하고 바로 강진과 해남 등의 적을 추격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12월 19일 맑음 [十九日晴]

병사를 쉬게 하려고 그대로 보성에 머물렀다.

○ 낙안(樂安)의 공납(公納) 중에 900냥과 군수전 300냥을 받고 자문(尺文, 영수증)을 만들어 보냈다.

○ 보성에서 잡은 죄수 문공진(文公振)을 호송(護送)하는 일은 해당 군의 군졸(軍卒)과 민병(民兵)을 따로 정하여 나주로 압송하고, 지나가는 곳의 각 관아에서도 영리한 교졸을 정해 천천히 함께 호송하라. 각 처를 지키는 것은 각자 잘 알아서 통행에 애로가 없도록 하게 하라. 보성에서 나주까지 각 관아에 ≪알려라≫.

○ 장흥에 사는 죄생(罪生, 자신을 지칭하는 말) 백낙인(白樂寅)과 백회인(白會寅)의 정장(呈狀, 관아에 바치는 청원서)에, “저희의 선친이 본 관아의 수성패장(守城牌將)으로 ≪일을≫ 수행하다가 이 달 2일에 동도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휘하(麾下, 우선봉)에 저희를 거두어 달려 나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편지를 펼쳐 읽다가 끝내지 못하고 사람의 자식으로서 소름이 돋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종군(從軍)하기를 원했으니 원수를 갚고 공을 세울 날이 바로 오늘이다. 특별히 향도(鄕導, 길을 안내하는 일)의 직임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 흥양 수성중군(守城中軍)의 보고에, “비류가 여러 달 동안 굽히지 아니하고 주(州)와 군(郡)을 부수고 백성과 아전을 해쳤으니, 진실로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들이 잡아 죽일 자들입니다. 본 현은 땅이 비록 외졌으나 풍속이 본래 순박하고 근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몇 차례 무뢰하고 선량하지 않은 자들이 올바르지 못한 도(道)를 도와 민간을 속여 재앙이 퍼지고 악(惡)이 가득 찼습니다. 중로인 제가 절제(節制, 군사지휘)의 ≪명을≫ 받고 아전과 병사를 깊숙한 곳으로 보내 비류가 은신한 곳을 탐문해서, 동도의 거괴(巨魁) 유봉만(劉奉滿, 또는 福滿으로 표기)과 당우(黨羽, 추종자) 오준언(吳俊彦)·임태인(林泰仁) 및 여당(餘黨) 박몽용(朴夢用)·이기순(李基淳)·명사홍(明士洪)·노경칠(盧敬七)·김양두(金良斗)·사인석(史仁石)·이칠선(李七善) 등을 차례대로 체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날에 장시(場市)에서 법정을 열어 군민(軍民)을 많이 모으고 위의 10명을 쏘아 죽인 뒤에 거괴 유봉만과 추종자 오준언·임태인 3명의 머리를 나무상자에 각각 담아 수성집사(守城執事) 지발련(池發蓮)으로 하여금 바로 좌수영의 문에 바쳤습니다. 성을 지키는 일은 갑절이나 엄중히 단속하고 법망에서 빠진 비류도 특별히 뒤를 밟아 탐문하여 체포해서 바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아룁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잡은 것은 매우 가상하다. 순무영에 그것을 베껴서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망에서 빠진 남은 무리는 특별히 기찰(譏察)하여 잡고, 경내의 애매함을 밝혀라. 보성에서”라고 하였다.

○ 흥양현 공형의 문장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사또님의 비밀 감결(甘結)에 따라 흩어져서 숨은 비류는 모두 잡아서 바칠 계획입니다”라고 하여,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또 추가하여 답신하기를, “군수전과 백목(白木) 및 씨를 제거한 솜은 관문(關文)을 보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어떠하다는 보고가 없다. 그 거행에 있어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 성화같이 보내어 바쳐서 분란이 생기는 폐단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 보성의 민인과 관속(官屬) 등에게 보낸 전령에, “흥양과 장흥 2개 읍은 바로 동도의 소굴이다. 본 읍은 두 읍(邑) 사이에 끼어 있으니 어찌 그것에 오염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본 읍에 도착하여 대략 그 정형을 살펴보니, 아전과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서 기구(機構)를 세워 방어하여 오래 묵은 오염을 씻어내고 다시 귀화하여 교화를 받을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현저하게 드러내어 해명한 것이 없어 의심의 눈초리를 면하기가 어렵다. 본 경내에 숨은 자를 찾아내고, 숨어서 왕래하는 자를 살펴서 잡아 진영 앞에 직접 바친 뒤에야 애매함을 드러내고 가짜와 진짜를 분명히 구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까마귀의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는 것처럼 어렵게 될 것인데, 어찌 곤륜의 옥과 돌을 가릴 수 있겠는가? 빨리 수주대토(守株待兎,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의미)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서제(噬臍, 사향노루가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는 것)와 같은 후회에 이르지 말라”고 하였다.

12월 20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추웠다 [二十日晴風高而寒]

이 날에 보성읍에서 출발하여 20리길을 가서 시목정(枾木亭)고개에 이르렀다. 고개가 비록 높지 않았으나 돌이 많고 길이 험했다. 고개 아래에 몇 채의 집이 있었고, 외로운 점막(店幕)에서 끓는 물을 준비하여 얼은 병사를 맞아 추위를 막아주었다. 바로 길을 떠나 20리를 가니 50여 호의 큰 마을이 있었는데, 호계(虎溪)라고 하였다. 마을 앞에 작은 시내가 있었고, 시냇가에 둘러앉아서 장졸(將卒)들이 각각 밥을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나 얼은 밥은 밥알마다 얼음이 되었고, 찬 물은 마실 때마다 소름이 돋아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먹고 자는 것)이라고 할 만 하였다. 바로 15리를 가서 장흥성 동쪽의 벽사역에 이르렀는데, 역은 절반이나 타서 재가 되었다. 찰방(察訪) 김일원(金日遠)이 직접 찾아왔는데, 찰방의 16세 어린 아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 불에 타다 남은 집에 묵으려고 했으나 들어가는 것이 불편하고 음식물 제공이 실제로 어려웠기 때문에 그대로 5리 길을 가서 장흥읍에 도착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60리길이었다. 성에 들어가 보니, 이 달 5일에 동적이 성을 함락시켜서 성안의 인가(人家)가 거의 모두 불탔고, 성 밖의 수 십 호도 불타버렸다. 시신이 기와 가운데 뒹굴고 피가 길가를 적시고 있었으며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고 병화(兵火, 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화재)가 쌓여 있었다. 처참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이 해를 입은 연유를 전해 들었는데, “고립된 성이 위기를 전했으나 병영(兵營)이 구제하지 못했고 적들이 엄습하자 문을 닫고 다리를 끊어서 사수(死守)하였다. 그러나 성이 파괴되어 적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에 아전과 백성이 모두 성을 넘어갈 것을 요청하니, 부사는 말하기를, ‘만약 성을 넘어 간다면 이것은 성을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성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겠는가.’라고 하고, 위태로운 성곽에 굳건히 앉아 인수(印綬, 인끈)를 움켜잡으며 ≪도둑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탄환이 비처럼 날아와도 조금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충성스런 혼령이 떠나갔다.”고 하였다. 그 충절은 옛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柏,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절개를 알게 된다. 장하도다! 충성스런 마음과 뛰어난 절개는 비록 ≪몸이≫ 죽었어도 오히려 살아있었다. 인부(印符, 관인과 명부)는 떨어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 장흥의 각 면과 각 마을의 민인(民人) 등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동도라고 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요술을 부려 유혹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니 임금이 크게 분노하여 연이어 친군(親軍)을 내어 기내(畿內)의 요사스런 무리를 소탕하고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귀역(鬼????, 귀신과 물 여우로 동학농민군을 비유)을 죽이게 되었다. 나도 명(命)을 받들어 군대를 나눠 한 갈래는 목천(木川, 세성산 전투)의 적을 격파하고 해미성(海美城)을 회복하였으며 이어서 서산(瑞山)·매현(梅峴)·노성(魯城)·논산(論山)에서 적을 베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마침내 전주성에서 여러 진영과 만났다가 다시 길을 나누어 동쪽으로 갔다. 지나가는 여러 읍에서 항거하는 자는 격파하고, 귀순하는 자는 위로하여 안심을 시켰다. 낙안 보성 등지에 이르러서 너희 고을의 형편을 정탐해 보니 양호의 흩어지고 도망친 여당들과 각 마을에 숨어있는 우두머리들이 토끼처럼 달아나고 돼지처럼 돌진하여 태수(太守)를 해치고 아전과 백성을 살육하는 데에 이르렀다. 정탐군의 보고와 행인들이 전하는 말에 장흥읍 전체가 적의 소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말을 먹이고 군사를 독려하여 바로 경내를 도륙하려고 갑절이나 빨리 왔다. 그 경계를 들어가서 그 백성을 살펴보니 백성은 백성이고 적은 적이었다. 먼저 도착한 각 진영이 추격해서 몰아내어 적은 해산하였고 요사스런 기운은 없어졌다. 그러나 ≪형세가≫ 궁박한 자는 산속에 들어가거나 바다의 섬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마을에 남은 백성은 적들에게 약탈을 당했거나 또는 이웃 읍에 의심을 받아 의지할 성지(城池)가 없다. 태수는 죽었으니 어디에 의지하여 살아가겠으며 무슨 낯이 있어 서겠는가? 불쌍하도다. 우리 임금의 적자(赤子, 어린애로 백성을 지칭)들이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되었는가? 가련한 우리 양민(良民)이 하루아침에 자신의 몸 하나도 용납하기 어려운 탄식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너희들이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은 순도(順道)와 역도(逆道)를 잘 알아 백성과 적의 관계를 잘라내고 빨리 힘을 다해 이웃 읍의 의심을 받는 것을 풀려고 한 뒤에야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서서 부모와 처자를 보호할 수가 있다. 남의 의심을 풀려고 한다면 적들을 잡아 바치는 한가지 일 뿐이다. 그래서 자세하게 너희 민인들에게 알린다. 각자 해당 마을에서 적들을 적발하여 결박해서 진영 앞에 데려오라. 혹시 숨어버린 수상한 사람도 잡아다 바치면 해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이처럼 자세하게 반복해서 ≪말한≫ 뒤에도 만약 어리석음을 고집하여 뉘우치지 않거나 또는 과감한 기개가 없어 실천하지 못한다면 대군이 토벌할 때에 옥과 돌을 구분할 겨를이 없고 곡식과 잡초도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너희가 실제로 나를 저버린 것이다. 앞으로 각 마을에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알리는 것은 너희에게 유감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월 21일 맑음 [二十一日晴]

그대로 ≪장흥에≫ 머물르면서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19일에 죄수 문가(文哥, 문공진)를 압송하는 편에 보낸 편지를 받아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연이어 앞길의 적의 사정을 탐문해보니, 크게 집결(大屯)한 것이 비록 패배하여 흩어진 무리가 모인 것이라고 해도 아직 그 수가 적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추격하여 잡는 것이 시급하였습니다. 20일 새벽녘에 떠나 60리 길을 가서 장흥성에 도착하여 그들의 동정을 정탐해보니, ‘성안의 민가는 모두 불에 탔고 벽사역도 잿더미가 되어 눈에 보이는 것이 스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숨어 그림자와 소리가 모두 끊겼고, 약간의 남은 백성은 적에게 노략질을 당한데다가 사람에게 의심을 받아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공허해 있습니다. ≪주민들이≫ 낮에는 ≪산에≫ 올라갔다가 밤에는 숨어 10리 길 마을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드물게 볼 수 있었습니다. 3채의 집은 비어 있고 개와 닭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옆의 촌 아낙에게 ≪정보를≫ 수집해보니, 귀국의 군대가 교도대(敎導隊)와 함께 적들을 추격하여 먼저 강진을 향해 떠나버렸고 강진과 해남 등지에도 모여 있는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장흥에 주둔하여 각 면과 각 동에 전령을 보내 한편으로는 백성을 안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찰(譏察)을 해서 잡은 동도가 40여명이 되었습니다. 각 마을의 백성이 힘을 내어 잡아들이는 것도 계속 이어지니, 이곳 백성들의 양심이 아직 전부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읍의 지금 형세는 태수(太守, 수령)가 이미 죽었고, 성지(城池)도 비어서 백성이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데다가 적이 엿보고 있습니다. 저희 진영이 조금이나마 머물러서 안정을 시키는 것이 사리(事理)에 맞을 듯 합니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이렇게 상세히 알리니 헤아려보시고 지적하여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앞으로 잡는 적은 잡는 대로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미 잡은 40여 명 중에 엄중히 조사하여 죽을 죄를 진 자가 10여명인데, 압송하여 진영 앞에 대령해야 하나 길이 제법 멀고 놓칠 염려가 있어 우선 여기에 두고 먼저 보고하여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치할 방도를 돌아오는 편에 확실히 알려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계속 편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이 달 18일에 보성군에 주둔하였고,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의 지시에 따라 강진과 해남 등지로 향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9일에 흥양(興陽) 수성중군(守城中軍)의 보고에, ‘제가 절제(節制)의 ≪지시를≫ 받들어 아전과 병사를 깊숙한 땅으로 보내 비류가 숨은 곳을 탐문하였습니다.

동도의 거괴 유봉만(劉奉滿)과 당우(黨羽, 추종자) 오준언(吳俊彦)·임태인(林泰仁) 및 여당(餘黨)인 박몽용(朴夢用)·이기순(李基淳)·명사홍(明士洪)·노경칠(盧敬七)·김양두(金良斗)·사인석(史仁石)·이칠선(李七善) 등을 차례대로 잡아 이 날에 장시(場市)에서 ≪자리를≫ 열어 군민(軍民)을 크게 모으고 위의 10명을 모두 쏘아 죽인 뒤에 거괴 유봉만과 추종자인 오준언·임태인 3명의 목을 나무상자에 각각 담아 수성집사(守城執事) 지발련(池發蓮)을 시켜 좌수영에 바로 들이게 하였습니다. 성을 지키는 일은 더욱 엄중히 단속하고 법망에서 빠진 자도 특별히 뒤를 밟아 탐문하여 잡아들일 계획입니다’라고 했기에, 이것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9일에 병사를 쉬게 하려고 보성군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20일 새벽녘에 떠나 60리 길을 가서 바로 장흥성에 이르러 형편을 대략 살펴보니, 태수가 해를 입고, 인가가 모두 불탔으며 벽사역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시신은 담장과 벽에 뒹굴고 피는 길을 적셨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초목(草木)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병화(兵火)가 쌓여있고 사람과 귀신이 모두 비참했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스산하여 참으로 차마 보거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숨어버려 그 그림자와 메아리가 모두 끊어졌습니다. 일본군 진영의 군대는 교도대(敎導隊)와 함께 그들을 추격하여 먼저 강진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강진과 해남에도 모여 있는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우선 장흥에 주둔하였습니다. 각 면(面)과 각 마을에 전령을 보내 한편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적을 기찰(譏察)하여 잡은 동도가 40여명이 되었습니다. 각 마을에서 힘을 내어 잡아들인 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들을 엄중히 조사하고 ≪죄의≫ 경중(輕重)을 가려 조치할 계획입니다. 이 읍의 오늘 형세는 태수가 이미 죽었고 성지(城池)도 비어 백성이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데다가 적이 틈을 보고 있어서 본진(本陣)이 우선 이 읍에 머물러서 백성을 위로하여 안정을 시키고 적을 기찰하여 뿌리를 뽑아 버릴 계획입니다. 장흥부사 박헌양이 해를 입은 연유를 아전과 백성에게 수집해보니, 고립된 성(城)이 위태로움을 전했으나 이웃 읍에서 구제하지 않았고, 적들이 엄습했을 때에 문을 닫고 다리를 끊어 사수(死守)하였습니다. 성이 파괴되어 적이 들어올 때에 아전과 백성이 모두 성을 넘어가기를 요청했더니, ‘성지(城池)를 넘어가는 것은 성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고, 위태로운 성곽에 꼿꼿하게 앉아 인수(印綬)를 잡고 ≪도둑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탄알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조금도 낯빛을 변하지 않고 충성스런 혼령이 떠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 충절을 생각하면 옛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벽사도(碧沙道, 벽사역) 찰방(察訪)이 첩보할 일은, “이 달 20일에 포군(砲軍) 4명이 본 역(本驛)의 민정(民丁)과 함께 잡아온 죄인 9명을 봉초(捧招)한 문건을 적어서 올려 보냅니다. 그 가운데 안규상(安圭尙)의 보고에, ‘애초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지 않았고 화를 피하는 방도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잡아가두지 않았으나 동도의 습속이 매우 가증스러워서 그의 부모와 대질(對質)을 하였습니다. 본 역에서 보고한 놈들은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는 것도 특별한 사정이 있어 이에 첩보를 합니다. 뒤에 적은 놈들은 안규상과 함께 병정(兵丁)을 인솔하여 저들의 은신처를 수색해서 모두 잡아들이고, 그밖에 나머지 죄인들은 분명하게 봉초를 조사하여 옥과 돌이 모두 불타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며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초사(招辭, 신문을 하여 죄인이 진술한 말)한 2건을 올려 보내라. 잡아들인 죄수 8명은 이 곳에서 잡은 동도와 함께 잡는 대로 보내어 상세히 조사해서 주범과 추종자를 가려 성책(成冊)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진영에서 온 편지에, “하나, 장흥과 강진 부근의 적들을 거의 토벌하였다. 둘, 순천과 낙안 부근의 적의 사정을 급히 보고하고, 순천 부근은 부산에서 1중대가 와서 적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만약 귀 부대에서 들은 소식이 있으면 함께 보고해야 좋을 것이다. 셋, 귀 부대는 신속하게 이동을 하라. 넷. 탄약이 부족하면 지금 나주에 있으니 호위병과 ≪탄약을≫ 수령할 자를 빨리 정하되 성실하고 믿을만한 자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2월 19일 오후 5시 30분에 나주에서 편지를 보낸다.”고 하였다.

12월 22일 맑고 추웠다 [二十二日晴寒]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를, “삼가 답장을 드립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장흥과 강진 부근의 적들을 거의 토벌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순천과 낙안 부근의 적의 사정은 특별히 긴급한 일이 없습니다. 아전과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 사방에서 적들을 잡아 생업에 종사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귀국의 1중대가 부산에서 와서 진영에 도착하여 지금 보성에 주둔하고 적들을 많이 잡았다고 합니다. 저희 진영은 순창에서 헤어진 뒤에 곡성·구례·광양·순천·낙안·보성·장흥 등지로 이동하였는데, 신속하게 행군하여 특별히 머문 곳이 없습니다. 탄약은 그 사이에 접전한 적이 없어 쓸 것이 아직 넉넉합니다. 그 사이에 다소(多少) 겪은 일은 광양에 있을 때 14일에 파발(擺撥) 편에 부친 편지에 상세히 말씀을 드렸고, 또한 보성에 있을 때 19일에 파발 편에 부친 편지에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흥에 있을 때 21일에 파발 편에 부친 편지에서 모두 남김없이 보고하였습니다. 차례대로 받아보시면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군대의≫ 진군과 정지는 지시를 기다려서 하겠습니다. 민(民)의 형편과 적의 사정은 탐문하는 대로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장흥의 민인(民人)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동도가 창궐하여 민심을 선동해서 심지어 죄가 하늘에 닿고 저지른 악행(惡行)이 가득 찼다. 거괴라고 하는 자는 즉시 섬멸해야하지만,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마음을 바꾸고 얼굴을 고치어 다시 양민(良民)이 되어, 옛날에 물든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빨리 열라. 기러기발을 아교로 부쳐놓고 거문고를 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고 일찍 돌아가서 교화를 입으라. 어리석음을 고집하여 오지 않으면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씹듯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각각 잘 알아 빨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란다. 거괴와 두령(頭領)을 적발하여 잡아들이면 애매함을 드러낼 표식이 되고 소상하게 해명할 단서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의 첩정(牒呈)에, “장흥의 적괴(賊魁) 중에 대흥면(大興面)의 강위로(姜委老)를 해당 면의 민인이 결박해서 잡아왔기 때문에 바로 묶어서 올려 보냅니다. 민인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강(姜)이란 놈은 장흥과 강진 및 병영 세 곳에서 성을 침범하고 난리를 저지른 괴수입니다. 그가 저지른 것을 살펴보면 잠시도 숨을 쉬게 해서는 아니 되는 자입니다. 그래서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대흥면은 본래 ≪적들의≫ 소굴로 불려졌으나 적들을 잡아 바쳤으니 마음과 얼굴을 바꾼 것을 알 수가 있다. 해당 민(民)을 장려하고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넓혀라. 강이란 놈은 우선 구류해 두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의 연이은 첩정에, “적괴(賊魁) 강위로(姜委老)·신문옥(申文玉)·배성오(裴成五)·김진옥(金辰玉) 등 4명은 바로 죄를 인정하여 때려 죽였고, 그밖에 7명은 모두 신문옥의 난초(亂招, 신문에 대해 죄인이 두서없이 한 진술)에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엄중히 훈계하고 풀어주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 능주(綾州)의 수성장(守城將)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통위영(統衛營)교장(敎長)의 집안사람인 이명옥(李明玉)이 지금 수상한 사람으로 여겨져 본 읍의 수성군에게 잡혀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령을 보낸다. 전령이 도착하는 대로 이명옥을 성화같이 호송하여 진영 앞에 대령하고, 그가 소지한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숫자대로 가져와서 바치라”고 하였다.

12월 23일 맑고 추웠다 [二十三日晴寒]

보성군수의 보고에, “전에 도착하여 받은 사또의 감결(甘結)에 따라 본 관아에 배정된 군수전 300냥은 이미 납부하였고, 백목 129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근은 전에 이미 보냈습니다. 백목 71필과 씨를 제거한 솜 180근은 부지군(負持軍,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을 정해 모두 바치고,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납부한대로 받았다”고 하였다.

○ 좌수영(左水營) 진중에 나간 영관(領官)이 첩보하기를, “이 달 9일 진시(辰時, 아침 7시~9시)경에 순천 사항참(沙項站)에서 적들과 함께 산위에서 접전을 하여 10리를 추격해서 적괴(賊魁) 중에 접사(接司)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쏘아 죽인 나머지 적들의 머리가 41정(頂, 머리를 세는 단위)이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진영을 후퇴시켰습니다. 11일에 순천에 들어가서 적괴 중에 접주(接主)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를 하였습니다. 12일에는 적괴 중에 접주 1명을 체포하여 죽였고, 다시 2명의 성찰(省察) 중에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를 하였습니다. 13일에 적괴 중에 집강(執綱) 1명을 쏘아 죽였고, 접주 2명과 성찰 1명 및 포군(砲軍)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를 하였습니다. 접주 2명과 성찰 8명 및 서기(書記) 2명과 포군 3명을 모두 쏘아 죽였습니다. 21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경에 보성(寶城) 도촌면(道村面) 작천(鵲川)의 산위에서 접전을 하여 적괴 중에 접주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적당(賊黨) 46명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와서 군민(軍民)을 크게 모아놓고 진법(陣法)을 익히며 쏘아 죽였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제가 초관(哨官) 김경운(金景雲)과 곽경환(郭景煥)을 인솔하여 직접 앞장을 서서 싸웠고 데리고 있던 5초(五哨)의 군병들은 조금도 다친 자가 없습니다. 획득한 적들의 머리수와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수정한 뒤 가져다가 바치겠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베껴서 보고한 것을 책자로 만들어 바쳐라. 출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연이어 승리를 하고 적들을 잡은 것이 적지 않다. 더욱이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적의 예봉을 꺾어 진영을 함락시킨 것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앞으로 논보(論報, 공로를 따져 보고)할 것이다. 승리를 얻은 병사로 연이어 사기(士氣)를 키워 사방을 기찰하고 추격하여, 적들을 잡아 근원을 막고 뿌리를 제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흥양현(興陽縣) 수성중군(守城中軍)의 첩보에, “본 읍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송주환(宋柱煥)을 좌수영문(左水營門)에서 임명하여 보냈으나 수성장이 임명을 받은 뒤에 병을 얻어 신음하고 있어서 아직까지 일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병이 나아 부임했으니 사용할 도서(圖署, 인장)를 바로 만들어 보내 일을 볼 수 있도록 지금 좌수영에 보고를 해주시기를 요청하고, 그 형편을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 흥양현 수성중군의 첩보에, “동학 거괴 유봉만(劉奉滿) 등 10명을 잡아 죽인 연유는 전에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나머지 무리인 김자명(金子明)도 뒤를 밟아 잡아서 바로 쏘아 죽였고, 그물망에서 빠진 자는 계속 긴밀하게 뒤를 밟아 체포하고, 수성하는 일은 특별히 명령하여 엄중히 단속할 것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비류를 연이어 잡은 것은 매우 가상하다. 즉시 베껴서 보고할 것이다. 이후에 특별히 기찰하여 그들을 잡아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흥양현 공형의 문장에, “이 달 16일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도착하여 받은 사또님의 비밀 감결(甘結)에, ‘지금 흩어진 비류의 여당(餘黨) 중에 본 현에 피신한 자가 매우 많다. 본 현의 비류도 적지 않다. 또한 비류 유복만(劉福萬)은 바로 본 현에 살던 자로 패배하여 흩어진 뒤에 다시 본 현에 숨어 들어왔다고 들었다. 과연 그러한지를 상세히 탐문하여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류가 여러 달 동안 굽히지 않고 주(州)의 관아를 파괴하며 아전과 백성을 해치니, 참으로 천고(千古)에 가장 심한 변고입니다. 본 현이 땅이 비록 외져 있으나 풍속은 본래 순박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무뢰하고 불선(不善)한 3, 4명이 옳지 못한 도(道, 동학)를 도와 민간을 속여서 재앙이 퍼져나가고 악행도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관아는 비어 읍에 통솔하는 자가 없고 계속 흉년이 든 데다가 여러 차례 비도(匪徒)의 약탈을 입어 읍의 ≪모양을≫ 갖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온 성(城)이 분노하여 스스로 지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월 초에 저희 공형이 앞장서서 동지를 규합하고 관병(官兵)이 성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지난 달 열흘쯤에 좌수영문(左守營門)에서 동도를 토벌하는 일로 저희 공형과 일을 잘 아는 아전을 불러서 저희가 바로 달려가서 좌수영문에 대령(待令)을 하였더니, 비류를 토벌하는 일을 엄중히 분부하고, 수성장(守城將)으로 송주환(宋柱煥)을 임명하며 그 밖의 임장(任掌)도 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좌수영문의 지시를 한결 같이 따라 더욱 성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성장 송주환이 마침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여 수성중군이 관례에 따라 호장(戶長)을 겸임했기 때문에 새로 호장 신충구(申忠求)를 맞아들여 수성중군으로 군무(軍務)를 통괄하고 적절하게 수성을 하였습니다.
이 달 4일에 동도 1,000여명이 본 현의 동북쪽 2개 산을 점거하고 성안의 형세를 엿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수성소(守城所)에서 서쪽과 북쪽 문을 굳게 닫아 남문만 열고 포병(砲兵)을 인솔하여 부대를 만들어서 바로 산 아래에 이르러 군사를 나눠 성채를 짓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 본 현의 유둔(油屯) 등지로 돌아가서 그대로 해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성중군 신충구가 아전과 병사를 깊숙한 땅으로 보내 뒤를 밟아 탐문을 했습니다. 비도의 당우(黨羽, 주동자) 오준언(吳俊彦) · 임태인(林泰仁), 여당(餘黨) 박몽용(朴夢用) · 이기순(李基淳) · 명사홍(明士洪) · 노경칠(盧敬七) · 김양두(金良斗) · 사인석(史仁石) 등은 전에 이미 차례대로 체포하였고, 거괴 유봉만(劉奉滿)과 여당(餘黨) 이칠선(李七善)은 포군(砲軍) 정재홍(鄭在洪)이 중군의 패칙(牌飭, 패록에 적은 지시)을 가지고 가서 팔영산(八影山)에서 잡아 직접 군중(軍中)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 달 11일에 중군(中軍)이 장시에서 ≪자리를≫ 열어 크게 군민(軍民)을 모아 위의 10명을 모두 쏘아 죽인 뒤에 거괴 유봉만과 당우 오준언 · 임태희 등 3명의 머리를 좌수영문에 바로 바쳤습니다. 비도 김자명(金子明)도 뒤를 밟아 잡아 죽였기 때문에, 그 형편을 수성중군이 각각 영문(營門)과 순무대장 순무선봉소(巡撫先鋒所, 이두황 우선봉진)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순무선봉사또님의 행차가 오른쪽 연로등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미리 이 일을 오른쪽 연로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결(甘結)로 일의 거행사항을 물어 오시니 매우 송구스럽고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전후의 사실을 감히 문장(文狀)으로 거행하니 헤아려보시고 처분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연이어 비류를 잡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즉각 베껴서 보고할 것이다. 이후에도 특별히 기찰하여 ≪그들을≫ 잡고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흥양 공형의 문장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사또님의 감결의 내용에, ‘본 읍의 수성군은 그 성만을 지키고 혹시라도 경계를 넘지 말라. 만약에 본 읍의 경계를 침범하는 다른 읍의 민병(民兵)이 있다면 바로 잡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도망간 나머지 적들은 특별히 탐문하여 체포하고, 거괴는 진영 앞에 압송할 계획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 흥양 공형의 문장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사또님의 효유문(曉喩文) 1장을 경내의 대소의 민인(民人)에게 두루 배포한 뒤에 네거리에 부쳤습니다. 그 연유를 아룁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 12월 21일에 나주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교장(敎長) 추광엽(秋光燁)을 보내고 돌아오는 인편에 온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편지에, “하나, 장흥과 강진 부근의 관민(官民)이 모두 동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엄중히 조치하도록 힘쓰고 처리하라. 둘, 해남지방에는 제 1중대와 제 3중대 및 교도중대를 이미 파견했기 때문에 귀관(貴官)은 장흥부근에 머물면서 잔여 적을 체포하라. 셋, 우리 해군이 좌수영에서 크고 작은 함선(艦船) 2척으로 남서(南西) 근해를 순행하는 것은 바로 달아나서 숨는 동도를 막으려는 것이다. 만약 ≪일본 해군 군함이≫ 근해에 이르면, 시탄(柴炭, 땔감)·쌀·장(漿, 음료)은 요청하는 대로 반드시 주선하라. 넷, 귀 부대의 보고는 본래 매일 받아야 하나, 죽여도 되는 동도 40명은 모두 죽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귀관의 조치에서 용서할만한 자는 용서를 하라. 만약 거괴가 아니라면 본진(本陣)에 압송하는 것을 하지 말라. 다섯,하동(河東)에서 온 1중대는 그 사이에 서로 만났는가? 그렇지 않은가? 다시 보고를 기다려라. 1월 17일(양력) 오시(午時, 오전11시~오후 1시) 지휘관 소좌(小佐, 계급)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가 나주에서 편지를 보냄”라고 하였다.

○ 장흥의 송신묵(宋信默)을 수성좌영장(守城左領將)으로 김인섭(金寅燮)을 우영장(右領將)으로 임명하였다.

○ 임피(臨陂) 나포(羅浦)에서 죽인 동도의 성명을 순무영(巡撫營)에 보고하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 군무아문의 보고에 대한 답신에, “책자를 만들어 바치고, 일본군 진영과 함께 더욱 서로 상의하여 ≪동도를≫ 토벌하도록 한 뒤에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 회령면(會寧面) 통수(統首) 등의 보고에, “본 면의 각 마을에 다른 곳에서 도망 온 자와 원래 거주했던 무안(務安)의 접주 박치경(朴致京)·박채현(朴采玄) 및 접사(接司) 임학(林鶴), 그리고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김몽길(金夢吉) 등 4명을 결박하여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거괴를 잡아 보내는 일은 각 면(面)에 전령을 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본 면의 백성이 마음을 쓰고 힘을 내어 잡아서 바치는 일을 가장 먼저 했으니 매우 가상하다. 계속 기찰하여 동도를 잡아 흔쾌하게 스스로 해명을 하라”고 하였다.

12월 24일 맑음 [二十四日晴]

순천부 겸임 낙안군수의 보고에, “저희 관아에서 배정을 받아 납부할 백목 2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200근 중에 백목 1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100근은 이미 납부하였습니다. 나머지 백목 100필과 씨를 제거한 솜 100근은 오늘 숫자대로 보내고,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납부한 대로 받았다”고 하였다.

○ 구례현감의 첩보에, “본 현의 죄인 이기한(李起漢)·고성권(高成權)·원현덕(元賢德)과 진주(晋州)의 적 4명을 본 현의 의병소(義兵所)에서 영칙(令飭, 명령)에 따라 죽였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베껴서 보고할 것이다. 더욱 기찰하여 ≪동도를≫ 잡아 뿌리를 제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해남과 강진에 보낸 감결과 흥양(興陽)의 수성장에게 보낸 전령에, “일본 군함 2척이 연해를 순행하는데, 시탄(柴炭, 땔감)·쌀·장(漿, 음료)은 요구하는 대로 주도록 특별히 소속한 각 포구(浦口)에 명령을 하고,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장흥의 각 포구와 각 섬의 민인(民人)등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일본 군함이 연해를 순행하는데, 시탄(柴炭, 땔감)·쌀·장(漿, 음료)은 요청하는 대로 주고, 들어간 물건은 일일이 본 관아에 보고하라”고 하였다.

○ 운봉현감의 첩보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통관(通關)에, ‘지금 적괴(賊魁) 김개남(金介男)이 백성에게 거둔 쌀을 구례 화엄사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해당 현의 이기(李沂)가 의병을 일으킬 때에 적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 ≪화엄사≫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다가 식량으로 삼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본 현의 박참모(朴參謀, 참모일 맡은 박봉양)가 전령을 지금 억류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고, 본진(本陣)이 구례에 도착하는 날에 이미 의병에게 떼어주어 비용을 조달하게 하였으니, 이런 뜻으로 잘 타일러서 분쟁이 일어나는 단서가 없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참모는 관문(關文)이 도착해서 받기 전에 군무(軍務) 때문에 나주에 갔습니다.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관문의 뜻에 따라 잘 타일러서 깨우쳐 줄 계획이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이웃 간의 호의를 다하는데 힘써 서로 어긋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 각 섬의 민인들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좁은 섬에서 사는 것이 본래 괴롭고 힘들다. 돌밭을 갈아 심는 것은 차조에 불과하며 게를 잡아 살아가니 바다에서 채취하는 것뿐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불쌍한데, 근래에 흩어진 비류가 섬 안에 도망가서 숨어 그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고 있다. 불쌍한 섬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비도 중에 행패를 저지르고 침탈을 하는 자는 바로 결박하여 진중 앞에 바치고, 침탈을 하지 않고 해치지 않는 자는 각각 돌아가서 생업을 안정시키게 하라. 거괴는 지금 이미 체포를 하였고 섬에 흩어져 있는 자는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이니, 특별히 ≪죄를≫ 다스리지 않는 은전(恩典)을 베풀 것이다. 혹시라도 의심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바로 돌아가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삶을 즐기도록 일일이 타일러서 보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 흩어져서 숨은 동도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본래 양민(良民)으로 사설(邪說)을 즐겨 듣거나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억지로 그들을 따라가서 자신의 본업을 포기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성과 집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들을≫ 따라 행하다가 대군(大軍)의 무력을 펴게 될 때에 소문을 듣고 달아나서 숨어버렸다. 거괴를 일일이 잡아들이니, 너희들은 두려워서 도망을 하여 숨어버렸다. 너희들이 위협에 못 이겨 ≪그들을≫ 따른 실정을 살펴보면 실제로 어리석음에서 연유하는 것이지 본심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경(經, 서경)에서 말하기를, “그 거괴는 죽이고 위협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미 거괴는 섬멸했으니, 앞으로 ≪그들을≫ 따른 자들을 용서할 것이다. 의심하거나 두려운 마음을 갖지 말고 각자 네 집에 돌아가서 네 생업을 지키라. 옛날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일찍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길을 열며 어리석음을 고집하지 말고 다시 교화가 된 땅의 백성이 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윤선(輪船, 군함)과 철포(鐵砲)로 몰살할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후회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각자 잘 알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 장흥의 수성영장(守城領將)과 흥양의 수성중군(守城中軍)에게 보낸 전령에, “해남과 강진에 보낸 감결에, 본 읍에 소속된 각 섬에 보내는 전령 2장을 붙여서 보낸다고 했으니 전령이 도착하는 대로 정서(精書)하고 베껴서 섬마다 2장씩 성화같이 보내라”고 하였다.

○ 벽사역 찰방(역에 딸린 책임자)의 첩보에, “본 역이 떼어서 준 백미(白米) 10석을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죄인을 조사한 보고는 어찌 이처럼 더딘가? 즉시 책자로 만들어 보고하라”고 하였다.

○ 장흥 웅치면(熊峙面) 집강(執綱, 수성군에 딸린 소임. 농민군 집강과 구분)의 전령이 도착하여 받은 보장(報狀, 상관에게 보고하는 공식문서)에 대해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해당 면에 숨은 적들을 성화같이 잡으라. 만약 감추어준다면 면 전체가 도륙을 당하는 탄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좌수영에 출진(出陣, 전투에 출동)한 영관(領官)의 첩보에, “어제 보성에서 잡은 동도 중에 양성좌(梁成佐)·허성보(許成甫)·허용범(許容範)은 본읍의 거괴 접주이고, 김보열(金寶烈)·김성한(金成漢)·정덕흠(鄭德欽)·김시언(金時彦)·구자익(具子益)은 장흥성을 무너뜨린 거괴 접주입니다. 어제 군민(軍民)을 크게 모은 뒤 진법(陣法)을 연습하며 ≪그들의≫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보성의 박윤지(朴允之)와 장흥의 김달해(金達海)는 진영 앞에서 쏘아 죽인 뒤에 죽인 적의 숫자를 책자로 만들어 가져다가 바칩니다. 적의 사정이 위축되고 읍의 형세가 조금 편안해졌으나 엄중히 수성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탐한 보고를 보니, 장흥의 유치곡(有治谷)에 적의 종적이 제법 많다고 하여 오늘 일본군과 두 길로 나누어 행군을 급히 하여 나아가서 대진(大陣, 선본진 군사)이 오기 전에 성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을 하기를, “베껴서 보고할 때 성책(成冊)하여 올릴 것이다. 연이어 거괴를 잡았다니 매우 기쁘고 축하를 한다. 또한 일본군대와 함께 도착했다니 우선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 엄찬교(嚴瓚敎)를 장흥의 수성중영장(守城中領將)으로 임명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이 달 24일에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출진영관(出陣領官) 이주회(李周會)의 첩보에, ‘이 달 9일 진시(辰時, 아침 7시~9시)경에 순천의 사정참 산위에서 적들과 접전을 하여 10리를 쫓아가서 적괴 중에 접사(接司)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나머지는 쏘아 죽였습니다. 거둔 적들의 머리가 21과(顆)이었고, 날이 저물어서 진영을 물렸습니다. 11일에 순천성에 들어가서 적괴 중에 접주 1명을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경계를 한 뒤에 12일에는 적괴 중에 접주 1명은 잡아 죽였고, 접주 2명과 성찰 1명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를 하였습니다. 13일에 적괴 중에 집강 1명을 잡아서 죽였고, 접주 2명과 성찰 1명 및 포군 1명도 쏘아 죽였습니다. 21일 오시(午時, 오전 11시 ~ 오후 1시)경에 보성(寶城) 도촌면(道村面) 작천(鵲川)의 산위에서 접전을 하여 적괴 중에 접주 1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경계를 하였고, 적당(賊黨) 40여명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가서 군민(軍民)을 크게 모으고 진법(陣法)을 연습하며 쏘아 죽였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영관(領官)이 초관(哨官) 김경운(金景雲)과 곽경환(郭景煥)을 인솔하여 직접 앞장서서 싸웠고, 거느리고 있는 5초(五哨)의 군사들은 애초에 다친 자가 없었습니다. 거두어들인 적당의 머리 수효와 성명을 책자로 만들어 수정(修正)해서 바칩니다.
해당 영관 이주회(李周會)가 자신의 병사들보다 앞장을 서서 ≪적의≫ 예봉을 꺾고 진영(陣營)을 무너뜨렸습니다. 출전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승리한 소식을 연이어 보고하니 그들이 애쓴 것이 매우 가상합니다. 이 날에 흥양현 수성중군(守城中軍)의 보고에, ‘동학 거괴 유봉만과 여당(餘黨) 김자명(金子明)도 뒤를 밟아 체포를 해서 바로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24일 구례현감의 보고에 ‘본 현의 죄인 이기한(李起漢)·고성권(高成權)·원현덕(元賢德)과 진주적(晋州賊) 4명을 본 현의 의병소(義兵所)에서 영칙(令飭, 명령)에 따라 죽였다고 했기 때문에 모두 베끼어 보고합니다. 좌수영 출진영관(出陣領官)이 보고한 동도들의 성명을 성책(成冊)한 것도 베껴 써서 보냅니다. 본진이 백성을 위로하고 적을 잡기 위해 잠시 장흥부근에 주둔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장흥 남상면(南上面) 집강(執綱)의 보고에, “본 면(本面)의 동학 거괴 교장(敎長) 이방언(李邦彦)과 대정 겸 선봉(大正 兼 先鋒) 고순칠(高順七) 및 도성찰(都省察) 마경삼(馬京三)을 면 안에서 뒤를 밟아 체포하여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면민이 한마음으로 거괴를 잡았으니 그 양심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게다가 면 전체의 생령(生靈, 생민)이 이것으로 화를 면하게 되어 기쁘다. 그물망에서 빠져 숨어있는 접주와 접사 등의 수괴는 더욱 기찰하여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하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의 첩보에, “적괴(賊魁) 이방언(李邦彦)은 남면(南面)의 민군(民軍)이 잡았으나 놓칠 것을 염려하여 경병(京兵)을 요청하였습니다. 수성군과 함께 보내어 잡아와서 대진(大陣)에 결박하여 바칠 계획입니다. 웅치면(熊峙面)의 접주 김창환(金昌煥)과 남상(南上)의 접주 고응삼(高應三)은 모두 거괴에 해당되어 본 읍의 인부(印符, 印信과 兵符)를 찾아내기 위해 본소(本所)에 가두었습니다. 고읍(古邑)의 손자문(孫子文)은 분명히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이기 때문에 곤장 80대를 쳐서 엄중히 훈계를 하여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남상면의 김춘배(金春盃)·김영삼(金永三)·이치선(李治先)과 고읍의 손인태(孫仁太) 등 4명은 민인이 잡아 바친 자들인데, ≪민인들이≫ 울면서 원수를 갚을 것을 청하였고, 이들 모두가 접사·성찰·도포수(都砲手) 등의 이름으로 참가하여 폐단을 저지른 것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로 때려죽여 양민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진소(陣所)에 보낸 편지에,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본진(本陣)이 장흥성에 들어온 뒤에 각 면과 각 동에 전령을 보내 의리로써 타이르고 이해로 깨우쳐주니 각 동의 양민이 분연히 팔과 소매를 걷어 붙이고, 일어난 자가 많았습니다. 연일 민간에서 진영 앞에 잡아다가 바친 동도의 숫자가 이미 100명이 넘어 조사를 해서 죄의 경중을 가려 조치할 계획입니다. 이 달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장흥 남면의 민인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전라좌도(全羅左道) 거괴 이방언이란 놈을 찾아내어 체포하고 진영 앞에 압송해서 대령했기 때문에 바로 조사를 하였더니, 정말로 유명한 거괴였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여기서 죽일 계획이나 유명한 적괴 이방언의 경우에는 함부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군사를 파견하여 대대본부(大隊本部)에 보낼 계획입니다. 방화를 당한 인민과 부자형제가 살육을 당한 자의 친척·고아·과부 등이 길을 이어 울부짖고, 칼을 잡고 따라오며 이방언의 살 1점을 먹으려고 길을 가로막고 마을을 메웠습니다. 원통해서 통곡하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였습니다. 그 정형(情形)을 상상하면 혹시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진중(陣中)에 가두고 이에 보고를 합니다. 이 이방언이란 놈을 만약에 장흥 시장터에서 사람들을 크게 모으고 그 머리를 베어 사람들의 분노를 씻어주는 것도 상쾌한 일인데다가, 민심을 위로하는 한 가지 단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대대본부의 지시를 얻지 못하여 잠시라도 그것을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상세히 백성들의 심정을 말하고, 압송여부를 이번에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동적 거괴 이방언을 잡은 남상면에 사는 백중인(白重寅)에게 백미(白米) 5석(石)을 상으로 주었고, 해당 면의 집강(執綱)에게도 백미 5석을 주었습니다. 힘을 합쳐 함께 잡은 동민(洞民) 40여명에게 엽전(葉錢) 100냥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 강진(康津)에 보낸 감결에, “민병(民兵)의 본래 뜻은 그 성만을 지키고 다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본 현의 민병 수 백 명이 떼를 지어 다른 경계를 넘어가서 제멋대로 약탈을 하고, 심지어 병영에 들어가서 사람의 목숨을 해쳤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더욱이 장흥에 본진(本陣)이 지금 주둔하여 널리 기찰(譏察)을 하고 있고, 민간에서 동도를 잡아오는 것이 연일 이어져서 머지않아 그들을 소탕할 길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민병을 경계하여 다시는 감히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민병이란 본래 군정(軍政)에 어두운데, 어찌 선혜후주(先惠後誅, 은혜를 베푸는 것을 먼저하고 처벌을 나중에 하는 것)와 죄 없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을 알겠는가? 스스로 ≪자신들의≫ 수효가 많은 것을 믿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일삼는다. 이것을 만약 내버려두어 악습이 더하여 퍼진다면 폐단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엄중하게 단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내 하나만을 보호하게 하고, 혹시라도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특별히 경계한 뒤에 혹시라도 다시 지난 악습을 되풀이 한다면 해당 두령(頭領)은 목을 베어 경계할 것이고, 경계하지 못한 책임도 돌아갈 것이다.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유념하여 거행하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진소(陣所)에서 온 편지에, “하나, 12월 22일에 장흥에서 보낸 보고는 23일에 받았다. 둘, 귀 부대는 회령포(會寧浦)에서 마도진(馬島鎭) 부근 및 그밖에 해안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지대(支隊, 소규모 부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적정(賊政, 政은 情의 오기)을 탐문하라. 다만 해변의 작은 섬에 숨은 적이 있으면 추격하여 격파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셋, 덕도(德島)에 500~600명의 적들이 숨어있다고 하니 가서 추격하여 토벌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도착하여 받았다.

○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 “삼가 답장을 드립니다. 당신이 쓰는 책력(冊曆, 양력)으로 1월 19일 오전 8시에 보낸 편지는 저희 책력으로 12월 24일 오후 10시에 받아 보았습니다. 회령포(會寧浦)와 마도진(馬島鎭) 부근의 해봉(海峯)과 작은 섬에 지대를 파견하여 적의 사정을 탐문할 계획입니다. 이것으로 정탐한 것을 들어보니, 덕도(德島)의 적들은 500~600명이 된다고 하여 추격해서 토벌할 계획입니다. 24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경에 귀국의 대원(隊員) 1명이 강진의 통로역(通路驛)에서 와서 전령을 전한 뒤에 보병(步兵)을 준비하였습니다. 제 19대대 제 3중대장 이시쿠로고세이(石黑光正)의 공문 1장에, ‘천관산(天冠山)에 모여 있는 적들을 토벌하려고 하니 귀 진영과 함께 남북에서 서로 호응하여 산과 계곡을 수색해 적을 토벌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약속을 정하여 25일 오후 2시에 천관산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기 위해 소대장 1명과 군조(軍曹) 2명 및 부대원 100명을 25일 오전 5시에 천관산 아래 신지(汛地, 군대가 주둔하여 지키고 있는 곳)로 보냈습니다.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앞으로 일의 형편은 계속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12월 25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녘에 눈이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二十五日旦晴暮雪仍留]

장흥 공형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군수전 1,000냥과 ≪군사들에게≫ 먹일 소 5마리를 본 읍에 배정했으니 바로 준비하여 진영 앞에 납부하라”고 하였다.

○ 벽사역에 보낸 감결에, “지금 본 역(本驛)의 하예(下隷)들이 동도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마을에 출몰하여 평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소와 재산을 빼앗아서 원성이 길에 가득 찼다는 소리를 듣고 매우 놀랐다. 나라를 위해 근심을 제거하고 백성을 위해 해를 없애야 할 처지에 침탈하는 이런 폐단이 있으면 불쌍한 이 양민이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겠는가? ≪감결이≫ 도착하는 대로 하예를 엄중히 단속하여 다시는 감히 폐단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라. 지금 이렇게 특별히 훈계한 뒤에 혹시라도 다시 전의 악습을 답습한다면 당사자는 목을 베어 경계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훈계하여 막지 못한 책임도 돌아갈 것이니 심상히 여기지 말고 유념하여 거행하라. 거행한 형편을 먼저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부산에서 육지에 내린 귀국의 중대장 스즈키(鈴木安民)가 보성에 주둔하였고,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대략 2개 소대 규모의 부대를 인솔하여 장흥경계에 들어와서 장흥성 남문 밖 향교마을에 주둔하였습니다. 25일에 병사를 쉬게 하려고 움직이지 않았고, 보성에는 1개 소대만 남겨두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스즈끼대위의 전진과 정지를 저희 쪽에서 탐문하여 보고하라고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 보성에 보낸 감결에, “본 읍(本邑)의 민병은 다른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였다.

○ 벽사역 찰방의 보고에, “압송하여 보낼 죄인들의 취초(取招)를 겨우 끝냈기 때문에 적어서 책자로 만들어 첩보하니 특별히 조치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고 하였다.

12월 26일 맑음 [二十六日晴]

전 영장 겸 토포사(前營將兼討捕使)의 첩보에, “동도 거괴를 철저히 정탐하여 김개남(金開南)이 차출(差出)한 명사원(明査員)이라고 하는 정완석(鄭完石)과 그를 따르는 사람 중에 거괴라고 하는 이문영(李汶永)·이원채(李元采)·김화서(金化西)·박순석(朴巡石) · 김진돌(金眞乭) 등 6명을 모두 사로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크게 군민(軍民)을 모은 뒤, 위의 이문영·이원채·김화서·박석순·김진돌을 이 날에 쏘아 죽였습니다. 명사원이라고 하는 정완석은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머리를 나무상자에 넣어 장교 박봉학(朴奉鶴)과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의 일을 맡아보던 병졸) 소행권(蘇行權)을 정하여 함께 데려가서 바치게 하였고, 의(義)를 따르는 아전과 백성에게 각별히 단속하고, 수성(守城)하는 일을 더욱 신중히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밖에 억지로 ≪동도에≫ 들어간 자는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 하지 말고, 일일이 귀화하여 각자 생업을 안정시키도록 여러 차례 경내의 민인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베껴서 보고할 것이다. 월둥(月燈)과 상사(上沙) 2개면에 숨은 적들을 기찰하여 체포하라는 전령을 내었는데 아직도 조백(皁白, 흰색과 검은색으로 확실한 결과)이 없으니 어찌 모호하단 말인가? 빨리 의를 따르는 인민과 영리한 교졸을 보내 2개면의 적들을 소탕한 뒤에 보고하라”고 하였다.

○ 강진현감의 첩보에, “비류 등이 본 현의 성을 무너뜨린 뒤에 경내의 칠량(七良)과 대구(大口)의 산과 들에 숨어있는 여당(餘黨)을 불러 모아 남은 백성을 도륙할 것이라는 큰 소리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민군(民軍)과 각 요충지를 지키고 넓게 기찰(譏察)을 하였습니다. 본 현의 민병은 애초에 병영을 침입하기 않았고, 다른 경계를 넘은 일이 없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침략한 폐단이 없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더욱 단속하여 혹시라도 법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 장흥의 수성영장(守城領將)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동도 거괴 김개남의 명사원인 정완석(鄭完石)의 머리는 전 영장(前 營將)이 장교와 나졸(羅卒)을 정해 운반하여 바쳤기 때문에 이에 내려 보낸다. 바로 장터 가에 묻어 표지를 세운 뒤에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벽사역 역졸과 민인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지금 본 역의 역졸과 민인들이 동도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마을에 출몰하여 평민을 침탈한다는 소문이 낭자하니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다. 비류를 제거하는 것은 바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침탈을 하여 양민을 보전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바로 적발하여 징계를 하되 특별히 용서를 하라. 이에 전령을 보낸다. 지금 명령을 내려 경고한 뒤에도 지난 악습을 고치지 않고 다시 ≪그런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적발되는 대로 목을 베어 경계할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유념하여 후회하는데 이르지 말라”고 하였다.

○ 장흥 용계면(龍溪面) 장항리(獐項里)에 사는 유학생(幼學生) 이교근(李敎根)이 머리를 숙여 재배(再拜)하고 목욕을 한 뒤에 양호도순무영 우선봉(兩湖都巡撫營右先鋒, 이두황) 합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왕사를 다투어 맞이하니 창생(蒼生, 백성)이 거의 소생의 희망이 있고,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니 적자(赤子, 임금의 백성)가 무슨 훗날의 바람을 품겠습니까? 요사한 기운이 없어져서 관산(冠山, 천관산)이 더욱 푸르고, 기쁜 기운이 떠다니어 예강(汭江)에는 봄이 돌아왔습니다. 편안함을 태산(泰山)에 두어 상주(相州)의 기문(記文)을 읊게 되었고, 이곳을 채(蔡)나라로 보아 회서(淮西)의 비(碑)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개선가에 화답하지 못하고 먼저 기뻐서 뛰며 춤을 춥니다. 유학생 이교근(李敎根)은 참으로 황송하여 머리를 숙여 말씀을 드립니다, 아! 저 동적(東賊)의 무리가 사설(邪說)을 제멋대로 펴니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에 빠져 땅에서 살며 완악함을 품고, 모래를 머금어서 독을 쌓았습니다. 흉악하고 미친 ≪무리를≫ 불러 모아 악(惡)을 키우는데 날이 모자랐고, 잠시 구차하게 살며 폭력에 의지하여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재앙은 자신이 만든 것이어서 죄에서 어찌 도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봉(先鋒) 합하께서는 가슴에 신묘한 방략(方略)을 갖고 계셔서 그 형세가 마치 돌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같을 것이고, 병사는 임금의 위엄에 의지하여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듯이 쉽게 여길 것입니다. 죄가 있어 반드시 죽인다면 복종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먼저 융성한 은혜를 힘쓴다면 사경(四境, 사방의 경계)이 편안함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 거괴를 죽이면 흉악한 무리는 복종할 것입니다. 용맹한 군대가 이미 돌아가서 크게 토벌하여 호남의 어리석은 저들의 더러움을 씻었고, 홍도(鴻圖, 왕업)는 영구히 빛나서 다시 일어나니, 북궐(北闕, 임금)께서 크게 낸 화를 풀었습니다. 승리는 고금(古今)에서 뛰어나고 환호하는 소리는 조야(朝野)에 진동하였습니다. 저는 영락(零落)한 가난한 선비이고 곤궁한 쓸모없는 유생입니다. 지혜는 만물을 두루 아는 데에 부족하여 ≪큰 일을≫ 이룰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사람이 미천하니 은미한 말이 세상에서 듣고 믿어주기를 감히 바라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은 지키고 있고 평소의 뜻은 변하지 않아 안핵사(按覈使)를 도와 모의를 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李侯, 안핵사 이용태를 가리키는 듯)의 억울함을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순찰영(巡察營)에 병사를 구했으나 오히려 마침 박공(朴公, 장흥부사 박헌양)이 교체되어 가슴에 의기(義氣)만 솟구치고 적개심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주(州)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수 백 명의 선비를 얻어 맹서하고 날을 정해 적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약간의 병사도 없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그래서 강진에서 많은 선비를 모으고 본 현에서 전구(戰具, 싸움에 필요한 무기)를 빌리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도와준다는 답신을 얻어 여러 읍에 의병의 격문을 전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끝내 하리(下吏, 아전)의 견제를 받아 일은 뜻대로 되지 못하고 화가 도리어 이어졌습니다. 울분은 병이 되어 종택의 과하를 호소하였지만, 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월석(越石)이 창을 베개 삼은 것을 늘 간절하게 여겼습니다. 간담이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되었고, 집이 무너지고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돌보지 않고 동북(東北)으로 떠나가서 서남(西南)에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관군(官軍)이 경내에 들어와서 원흉(元凶)이 죽음을 당하니 궁박한 적이 마음을 돌렸습니다. 부끄럽게도 자그마한 공헌도 못하고 기쁘게도 흉악한 적이 죽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축하를 드리는 것을 참지 못해, ≪군대가≫ 행진하는 곳에서 기뻐서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삼가 글을 올려 축하를 드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글이 훌륭하나 자질도 그것에 부합되겠는가? 평소에 뜻과 기량이 있으니 그것을 확충하라. 사람은 마치 옥(玉)이 그릇이 되는 것처럼 때를 기다려서 실제의 처지를 겪어보아야 한다. 어찌 글로 되겠는가? 산이 높아야 ≪그치지 않고≫ 계속 흐르는 물이 있다. 물욕(物慾)을 버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라. 선비가 본래 일이 어찌 싸움이겠는가? 밖을 향해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은 선배들이 꺼리던 것이다. 힘을 다해 권면하고 성훈(聖訓, 임금의 훈계)을 크게 드러내기를 매우 바란다.”고 하였다.
벽사역 찰방의 첩보에, “압송하여 보낼 죄인들의 취초(取招)를 지금에야 끝냈기 때문에 ≪그것을≫ 적어서 책자로 만들어 급히 보고합니다. 특별히 조치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고 하였다.

○ 장흥 수성영장(守城領將)의 고목(告目)에, “본 관아의 안하면(安下面) 신촌(新村)의 적괴(賊魁) 선경채(宣景采)를 잡아서 대령했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명령을 받은 지 여러 날이 지나서야 잡아 바친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경내의 동도를 모두 소탕해서 그런 것인가? 그 요점을 매우 알지 못하겠다. 유념하여 거행해서 죄에 저촉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 죄인은 우선 가두어두고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 장흥 수성영장의 고목(告目)에, “동도의 수괴 정완석(鄭完石)의 머리는 영칙(令飭)에 따라 본 읍의 시장가에 묻고 표지를 세웠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라고 하였다.

○ 소모사(召募使)의 첩보에, “남면(南面) 원기(院基)의 장만년(張萬年)은 민군(民軍)이 잡아서 바친 자인데, 동도 중에 도포수(都砲手)로 불리던 자입니다. 민인이 울면서 울분을 풀어주기를 간청하여 바로 때려 죽였습니다. 고읍면(古邑面)의 김학삼(金學三)과 김문유(金文有) 2명은 본래 거괴여서 대진(大陣)에 결박하여 바치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2명의 거괴는 압송하여 가두고, 민병(民兵)에게 거듭 명령하여 계속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진소(陣所)에서 보낸 편지가 이 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도착하여 받았다. 그 편지에, “하나. 이방언은 결박하여 나주의 본진(本陣)에 보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 각 지방을 기찰하여 수색하고 더욱 엄밀히 하라”고 하였다.

○ 보성군수의 첩보에, “본군(本郡)의 비류를 토벌하였습니다. 이 달 19일에 잡은 9명 중에 장흥에서 변고를 저지른 거괴 문공진(文公振)은 답신하여 명령하신 것에 따라 나주에 압송하였고, 나머지 8명도 쏘아 죽였습니다. 이 달 20일에 잡은 자들 중에서 본 읍(本邑)의 거괴 손자화(孫自和) · 배윤경(裵允景) · 양성좌(梁成佐) · 허성보(許星甫) · 허용범(許容範)과 장흥성을 함락시킨 거괴 김보열(金甫烈) · 김성한(金成汗) · 정덕흠(鄭德欽) · 김시언(金時彦) · 구자익(具子益)은 호좌영관(湖左領官)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그들의 당우(黨羽, 주동을 도운 자) 47명은 읍에서 쏘아 죽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 본 읍에 숨어 있는 자가 많은 데다가 이웃 경계에서 도피하는 자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보성 경내가 거의 도망 온 자의 소굴이 되었다. 빨리 기찰하여 잡아 경내를 숙청하고 양민을 구제하라”고 하였다.

○ 능주목사(綾州牧使)의 첩보에, “비류의 거괴로 팔도대접주(八道大接主)라고 불리는 금구(金溝)에 사는 김방서(金方西)를 수성군(守城軍)을 많이 보내어 잡아서 엄중히 가두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압송하여 진영 앞에 대령하라”고 하였다.

○ 흥덕현감(興德縣監)의 첩보에, “동도 거괴와 폐단을 저지른 놈들을 잡아서 토벌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교(吏校)와 수성군(守城軍)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이목(耳目, 정탐군)을 파견하여 백방(百方)으로 뒤를 밟아 탐문을 하였습니다. 본 현의 이동면(二東面) 은동(隱洞)의 서상옥(徐相玉)과 일서면(一西面) 진목정(眞木亭)의 정무경(鄭武京)은 모두 그들의 무리로 사접(私接)의 괴수(魁首)라고 합니다. 평민을 학대하고 재산과 곡식을 빼앗은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르겠고, 더욱이 군사를 일으켜서 나주에 갔다가 얼마 전에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장리(將吏) 등이 즉시 잡아서 대령했기 때문에 철저히 조사를 하였더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2명을 크게 군민(軍民)을 모아 모두 죽였습니다. 그 형편을 빨리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요사한 무리가 증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패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으니 죽여도 죄가 남는다. 이것을 베껴서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 흥덕현감의 연이은 보고에, “본 현의 이동면(二東面) 교동(橋洞)의 고태국(高泰國)은 바로 동도적당(東徒賊黨)이 말한 흥덕 대접주입니다. 비록 그의 무리가 억지로 요호(饒戶)의 돈과 곡식을 빼앗았다고 해도 그 수가 매우 적지 않습니다. 또한 이번 9월에 돈 2,600여 냥을 민호(民戶)에서 강제로 거두어 화약을 만들었습니다. 10월 18일에는 나주성을 함락시킨다고 하며 수 백 명을 인솔하여 광주로 갔다가 이미 도망하였기 때문에 은밀히 정탐군을 보내고, 이교(吏校)에게 엄중하게 명령을 하여 여러 가지 방면으로 뒤를 밟아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달 13일 밤에 좌수(座首) 김병규(金炳奎)가 그가 숨은 곳을 알아내어 보고하였기 때문에 바로 붙잡게 하고 그 사정을 엄중히 조사하니, 조금도 감히 발뺌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태국(泰國)은 동적 중에 거괴라고 할 만한데, 그가 지은 죄상이 다른 적과 다르기 때문에 크게 군민(軍民)을 모아 이 날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그 밖에 나머지 괴수(魁首)와 폐단을 저지른 접주는 계속 뒤를 밟아 체포할 것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죄수가 힘을 내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관(官)의 근심과 분노를 알 수가 있다. 고(高, 고태국)가 놈이 죽으니 마치 눈에 백태가 없어진 것 같다. 이것을 베껴서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 흥덕현감의 연이은 보고에, “동적 중에 본 현 이동면(二東面) 내옥리(內玉里) 고성천(高成天)과 정읍(井邑) 서남촌(西南村) 강윤언(姜允彦) 및 고부(古阜) 하오산(下五山) 김태운(金太云)과 무장(茂長) 사기점(沙器店) 추윤문(秋允文) 등 4명은 본 현의 장리(將吏)와 민병(民兵) 등이 즉각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사정을 엄중하게 조사하였더니, 4명 모두 그들의 무리가 말하는 사접주(私接主)였습니다. 성천(成川, 고성천)은 이번 여름 이후에 평민과 선상(船商)의 재산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적지 않았고, 10월에 군사를 인솔하여 나주에 갈 때에 선봉(先鋒)으로 불렸습니다. 윤언(允彦, 강윤언)은 경내를 두루 돌아다니며 요호(饒戶)와 동학에 들어오지 않은 백성에게 바로 주리를 틀거나 집에 불을 놓아 돈과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그 끝이 없었습니다. 태운(太云, 김태운)은 여러 읍들을 제멋대로 다니며 악형(惡刑)을 가해 재물을 빼앗아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또한 병선(兵船)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무리를 인솔하여 바닷가에 주둔한 적이 있습니다. 윤문(允文, 추윤문)은 흥덕과 고부 사이에서 평민의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르겠고, 더욱이 손화중(孫化中)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그가 사는≫ 이웃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4명의 죄상은 모두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고(高, 고성천) · 강(姜, 강윤언) · 김(金, 김태운) · 추(秋, 추윤문) 등 4명을 크게 군민(軍民)을 모으고 모두 바로 죽인 뒤에 그 형편을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동도를 뿌리 채 잡으니 매우 유쾌하고 기쁘다. 이것을 베껴서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 흥덕현감의 연이은 보고에, “본현의 동적수포유사(東賊搜捕有司, 동도를 찾아내어 잡는 일을 맡아 보는 사람) 김재구(金在九)가 부근의 민병을 인솔하여 동도 거괴인 정읍(井邑)의 차치구(車致九)를 잡아서 바쳤습니다. 차치구는 전봉준과 손화중에게 바로 내려가지 않고 이번 여름 이후에 전봉준후군대장(全琫準後軍大將)이라고 부르며 대장 깃발 숙정과 패를 세웠습니다. 포군(砲軍) 400~500명을 인솔하여 좌우 도(道)의 각 읍을 두루 다니며 관장(官長, 수령)을 욕보이고 백성과 아전을 침탈하여 그 끝이 없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마디마디 놀라왔기 때문에 조목조목 엄중히 조사하여 감히 조금도 발뺌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것 중에, ‘이번 10월 중에 전봉준의 후군대장으로 도당(徒黨)을 인솔하여 공주(公州)와 논산(論山)에 가서 여러 차례 싸움을 했다가 패하여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고 그의 공초(供招)를 들어보니 다른 동적과 함께 논죄(論罪)하여 처단해서는 아니 되고, 읍에서 죽이는 것은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에 관계되기 때문에 차치구를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차치구가 유명한 거괴라고 하니 잠시라도 두어서는 아니 된다. 민을 모아 목을 베어 경계하라. 김재구(金在九)가 힘을 내어 ≪적을≫ 잡은 것은 매우 가상하다. 이것을 베껴서 보고하겠다.”라고 하였다.

○ 흥덕현감의 연이는 보고에, “본 현 현내면(縣內面) 치리(峙里)의 이청용(李靑用) · 이남면(二南面) 해천(海川)의 재인(才人, 광대) 김도순(金道順) · 이서면(二西面) 사천(沙川)의 이희풍(李希豊) · 고부(古阜)의 곽경순(郭京順) · 정읍(井邑)의 신준직(申俊直) 등 5명을 본 현의 수성군(守城軍)과 민병(民兵)이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즉각 엄중히 조사를 하였습니다. 김도순 · 이청용 · 이희풍 · 곽경순은 모두 사접(私接)의 괴수이었고, 신준직은 접사(接司)였습니다. 청용(靑用, 이청용)은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부르고 읍과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며 재물과 곡식을 빼앗았습니다. 도순(道順, 김도순)은 본래 천인으로 접주를 칭하고 그 무리를 풀어서 양반을 잡아다가 때리며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희풍(希豊, 이희풍)은 이번 봄에 고부 · 장성 · 전주에서 싸울 때에 그 곳에 갔고, 원평(院坪)에서 임금의 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을 살해할 때에 따라갔습니다. 경순(京順, 곽경순)은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임신한 부녀자를 향해 포를 쏘아 그 자리에서 사산(死産, 낙태)하게 하였고, 준직(俊直, 신준직)은 적괴 차치구와 속이 통하는 사이로 본 읍에 있는 명례궁(明禮宮) 논의 도조(賭租) 50여석을 마음대로 팔아버렸습니다. 이 5명을 민을 모아놓고 죽였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연이어 행패를 저지른 적들을 잡은 것은 수령과 백성이 서로 믿고 따른 것으로 축하할 만하다. 이것을 베껴서 보고하겠다. 계속 그들을 소탕할 수 있도록 마음을 쓰라”고 하였다.

○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죄인 고응삼(高應三)과 김창환(金昌煥) 2명을 장흥의 인부(印符)를 찾기 위하여 그들을 가둔다고 이미 보고하였다. 그 사이에 조사하여 ≪인부를≫ 찾았는지를 ≪전령이≫ 도착하는 대로 소상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 소모관의 보고에, “지금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따라 본진(本陣)에 가둔 고응삼(高應三)과 김창환(金昌煥)에게 장흥의 인부(印符)를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엄중하게 형(刑)을 가했으나 끝내 바로 고(告)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진(大陣)에 압송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12월 27일 [二十七日]

보성군수의 첩보에, “본 읍의 민병은 다른 경계를 넘지 말라고 특별히 엄중하게 단속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고, 경내의 적들은 사방으로 기찰하여 뿌리를 뽑으라.”고 하였다.

○ 장흥 수성영장(守城領將)의 고목(告目)에, “죄인 6명을 잡아서 대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거주지와 성명을 뒤에 적어서 급히 보고하며, 그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에, “우선 엄중히 가두어두고,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을 기다려라. 계속 정탐을 하라”고 하였다. 뒤에 적은 ≪죄인은≫ 고중진(高仲辰) · 백영희(白永喜) · 김필문(金必文) · 이흥기(李興基) · 김희도(金希道) · 위치도(魏致道)이었다.

○ 일본군 진영 육군소좌(陸軍少佐)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편지에 답장하기를, “삼가 답장을 드립니다. 적괴 이방언을 결박하여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군조(軍曹) 1명과 부대원 10명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였습니다. 이 적의 외모는 시골사람처럼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 마음은 실제로 헤아리기가 어렵고, 겉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안은 많이 음험합니다. 입으로는 옳으나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문자(文字)를 대충 알고 있고 잡술(雜術)에 두루 통하여 시골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몰아 ≪동학의≫ 무리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인의(仁義)를 빌려 어리석은 백성을 끌어 모으고,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의 이름을 갖고 흉악하고 예측하지 못할 모의를 하였습니다. 잠시 조사하고 대면하여 그 겉과 속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흉악함은 전봉준과 손화중보다도 휠씬 더하다고 하니 분명히 조사하여 사형에 처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달 25일에 천관산(天冠山)에 파송한 장졸(將卒)이 26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4점(點, 시간의 단위)에 돌아와서 탐문한 것을 보고한 것에, ‘천관산은 산이 높고 나무는 없는데다가 계곡조차도 깊지 않습니다. 석굴(石窟) 3~4 곳에 그들이 머문 흔적이 있으나 적은 없었습니다. 덕도(德島)에 들어가서 섬의 백성과 적이 만약 들어와서 머무르면 겉으로 잘 대해주었다가 몰래 봉화를 올리면 흥양의 민병이 바로 들어와서 그들을 잡아갈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회령(會寧)과 마도(馬島) 등지에는 적의 종적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갖추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진(本陣)이 장흥의 경내에 들어온 뒤에 병정이 잡은 동도와 각 동(洞)의 백성이 그들을 조사하여 이 날에 죽여야 할 죄에 해당하는 자가 30명이어서 26일 하오(下午) 2점(二點)에 시장에서 쏘아 죽였고, 위협에 못 이겨 억지로 따른 자는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갖추어 보고합니다. 연일 민간에서 잡아 바친 자가 길에 계속 이어져서 이후에는 참작하여 조처하고 조사를 기다려서 계속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능주 수성장(守城將)의 첩보에, “지금 도착한 전령에 따라 통위영 교장(統衛營敎長)의 집안사람인 이명옥(李明玉)을 명령에 의거하여 호송하였고, 가지고 있던 물건은 숫자대로 수표(手標, 영수증)를 바치고 호송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 흥덕(興德)에 주둔하고 있는 장졸(將卒)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한 해가 얼마 남지 않고, 추위가 혹심하며 눈이 활과 칼을 덮고 바람이 전포(戰袍)를 찢는다.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이슬을 맞고 자는 장졸들이 어찌 괴로움을 견디고 질병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 파송한 이후에 규제(規制)를 잃어버릴까 늘 걱정이 된다. 충분히 유념하여 비난을 초래하지 말고 이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이것을 다시 장황하게 반복하여 말한다. 하나. 진영을 합치는 날에 규정을 어긴 장수는 결코 용서할 리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잘 알아 유념하라. 이웃 경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는 각 부대에서는 완급(緩急)에 ≪맞춰≫ 호응하고 계속 연락을 해서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 11월 8일에 서산(瑞山)과 매현(梅峴)에 집결한 적을 격파한 사실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군무아문의 답신내용에, “도착하여 받아보았다. 책자로 만들어 바치라”고 하였다.

○ 11월 17일에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에 주둔한 적을 격파한 사실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는데, 그 군무아문의 답신내용에, “연이어 승리를 하니 다행스럽다. 성책하여 바치고 특별히 방략(方略)을 더하여 ≪그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하라. 오정선(吳鼎善)의 경우에는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 11월 21일에 진중(陣中)에서 잡아 가둔 동도를 일본군 진영에 압송한 사실을 순무영(巡撫營)에 보고하였는데, 그 순무영의 답신내용에, “그 후의 형편을 계속해서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같은 내용의 글을 군무아문에 보고하였더니, 그 답신내용에, “도착하여 받아보았다. 책자로 만들어 바치라”고 하였다.

○ 장흥 공형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군수미 70석을 본읍에 배정했으니 내일 오전까지 진영에 가져와서 납부하라”고 하였다.

○ 군무아문 대신이 보낸 답장에, “편지가 갑자기 끊겨 그립고 쓸쓸하던 차에 보낸 편지를 받았다. 추위가 극심한 때에 영감이 객지에서 고생을 하다가 혈수(血祟, 피로 인한 질병인 듯)로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립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평소에 비할 데가 아니어서 매우 염려된다. 나는 한결같이 우둔하지만 지난 11월 23일에 각 영(營)이 군무아문에 합쳐져서 영사(營使)가 모두 ≪인원수가≫ 줄어 육군성(陸軍省)에는 대신 한 사람 뿐이었는데, 외람되게도 이런 직책을 이처럼 노둔한 재질로 받으니 참으로 송구스러워 땀이 난다. 먼저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부모를 모시며 편안한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말 한 크고 작은 일은 바로 잘 알았다. 그러나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에 몸을 허락했는데, 어찌 주위의 거짓된 참언을 꺼리겠는가? 이번에 영감이 군사를 일으킨 뒤에 만약 병법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어찌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천 사람의 참언이 있더라도, 묘당(廟堂, 조정)의 공의(公議)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괘념치 말고 일을 도모하고 책략을 헤아리는데 근실하여 유종(有終)의 결과를 도모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다.

○ 이 날 도착하여 받은 순무영의 전령에, “진중(陣中)에서 쓸 탄환 15,000개를 별무사(別武使) 김영호(金永澔)로 하여금 가지고 가게 하니, 도착하는 대로 ≪숫자를≫ 살펴서 받아 배급한 뒤에 그 형편을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 동시에 도착하여 받은 순무영의 전령에, “군대 행진의 계령(戒令) 중에 가장 크게 금지하는 것은 민간에 폐를 끼치는 첫째 조항이다. 수많은 병정이 연로(沿路)를 행진하면서 비류를 수색해서 잡는다고 하며 밤에 마을에 가서 평민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는 폐단을 곳곳에서 듣고 매우 통탄스러웠다. 바야흐로 엄중하게 조사를 할 때에 지금 이웃 나라 장수의 보고를 보니, 비단 군률(軍律)에 관계될 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어서, 더욱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전령을 보내니, 전령이 도착하는 대로 상세히 뒤에 적은 말들을 살펴보고 일일이 조사하여 비록 자그마한 삿갓하나 채소 하나라도 민간에 폐단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가두고 이름을 적어 급히 보고하라. 혹시라도 모호하게 늦춘다면 군률(軍律)만 있고 사사로움은 없을 것이니 유념하여 거행하고, 이후 단속에 특별히 마음을 쓰라”고 하였다.
그 후에 일본 소위(少尉) 사이토(齋藤溫)가 말하기를, “내가 홍주(洪州) · 태안(泰安) · 서산(瑞山) 등지에서 동비(東匪)를 토벌하여, 지금에는 ≪동비가≫ 흩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이두황(李斗璜)이 조선의 병정을 인솔하여 와서 백성의 재산을 약탈해 원성이 답지(遝至)하고 있다. 귀국의 병정이 하는 행위를 누구도 금지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그것을 보니, ≪저들 조선 병정이 바로 동비 다음으로≫ 민을 해치는 두 번째 부류이다. 그것을 금지하지 못하면 죽여도 무방하다. 일이 지나간 뒤에 와서 호소하면 어찌 할 수가 없다. 해미(海美) 온 경내의 민심을 위로할 때 집마다 조사해보니, 동도에 들어가지 않은 양민의 집에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집집마다 약탈하여 소 50여 마리를 빼앗아서 가져갔다. 집안의 집물(什物) 중에 솥은 무거워서 빼앗아가지 못하였고, 그 밖의 옷 · 돈 · 곡식 · 그릇과 철물(鐵物)이라고 하는 것은 남김없이 약탈하여 빼앗은 소에 싣고 가버렸다. 불쌍한 이 양민(良民)이 돈과 곡식을 동도에게 빼앗기고 약간 남은 것도 경귀(京貴, 경병)에게 빼앗겨서 남은 것이 없다. 지금 얼어 죽으니 매우 가련하다. 해당 민 등이 울면서 호소하는 것이 일본군 진영만이 아니라 홍주목사(洪州牧使)에게도 있다. 그것을 보니 근심스럽다. 병사라고 하며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병사가 아니다. 이런 뜻을 우리 공사(公使, 일본공사)에게 말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알린다.”고 하였다.

12월 28일 맑음 [二十八日晴]

장흥에 그대로 머물렀다.

○ 보성(寶城)에 감결을 보내 장흥에서 사로잡은 동도를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취초(取招)하게 하였다. 지금 소모관의 첩보를 받아보니, “장흥과 흥양의 2개 읍의 인부는 장흥 대흥면(大興面)의 비류 이인환(李仁煥)이 빼앗아갔다고 저들의 공초(供招)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리(下吏) 임치범(任致範)과 관내(官內)에 사는 주민 주창호(周昌浩)를 파견하여 인부를 찾아 바치게 하였습니다. 두 읍의 병부(兵符)만 찾아서 바쳤기 때문에 이에 봉함하여 올립니다. 본 읍은 원래 장흥을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장흥의 병부는 해당 관아의 감관(監官) 박순동(朴順同)과 병리(兵吏, 병방 아전) 임치범(任致範)을 따로 정하여 보냈으니 도착하는 대로 받으시기를 바라며 그 형편을 보고합니다. 흥양의 병부는 같은 내용의 감결에 따라 감관 주복순(周福順)과 색리(色吏, 일의 책임을 맡은 서리) 조형재(趙亨哉)를 따로 정하여 흥양에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 이 날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문이(文移)하기를, “양호도순무우선봉(兩湖都巡撫右先鋒)이 상고(相考)합니다. 장흥성이 함락된 일은 이미 보고받아 들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본진이 장흥에 도착하여 잡은 동도를 소모관으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취초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소모관의 첩보를 보니, ‘장흥과 흥양의 2개 읍의 인부는 장흥 대흥면의 비류 이인환이 빼앗아갔다는 사실이 저들의 공초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리 임치범과 관내에 사는 주민 주창호를 보내어 찾아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2개 읍의 병부만 찾아내어 바쳐서 이에 봉함하여 올립니다. 장흥병부는 해당 관아의 감색(監色, 감관과 색리)을 따로 정하여 원래 장흥을 겸임하고 있는 보성군수에게 보냈고, 흥양 병부는 감색을 따로 정하여 해당 현감에게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개 읍의 인신(印信)은 아직 떨어진 곳을 알지 못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고합니다.”라고 하였다.

○ 능주목사의 첩보에, “비류의 거괴로 금구에 사는 김방서(金方西, 邦瑞)을 잡아 가두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압송하여 진영 앞에 대령하라”고 하였다. 또한 “김방서를 일병소(日兵所, 일본군이 머무는 곳)에서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의 대대(大隊)에 압송하여 보냈으나 아직 압송하지 못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니,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 낙안군수의 첩보에, “동학 거괴인 보성의 안규복(安奎馥)은 돈령(敦寧) · 좌도도접주(左道都接主) · 집강(執綱) 등을 칭하며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까운 읍에서 폐단을 저지른 자입니다. 그런데 본 읍의 수성군이 서면의 민인과 함께 22일에 뒤를 밟아 체포하여 이 날 크게 군민을 모아놓고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머리를 좌수영에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적의 괴수를 기찰하여 잡으니 매우 유쾌하고 기쁘다. 이어서 베껴 보고할 것이다. 더욱 살펴서 경내의 ≪적을≫ 숙청하라”고 하였다.
낙안군수의 첩보에, “본 읍 동면의 동도 이수희(李守喜)는 처음에 유봉만(劉奉萬)의 협종(脅從,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인데, 10월 모일에 순천에서 넘어와 소요를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본 읍민(本邑民)으로 하여금 잡아서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李, 이수희)란 놈이 먼저 기미를 알고 순천으로 도주하여 다시 김인배(金仁培)의 협종이 되어 동적이 좌수영을 다시 침범할 때에 중군(中軍)으로 따라간 자입니다. 25일에 남상(南上) 쌍전(雙田)의 앞길에서 잡아 군민을 크게 모으고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머리를 좌수영에 보냅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베껴서 보고하겠다. 계속 군민을 훈계하여 사방을 기찰해서 적을 잡으라.”고 하였다.

○ 소모관의 첩보에, “장흥과 흥양, 2개 읍의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대흥면(大興面)의 비류 이인환(李仁煥)이 관장(官長, 수령)을 해치고 빼앗아갔다고 여러 죄인들의 공초(供招)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리(下吏) 임치범(任致範)과 관내의 주창호(周昌浩)를 보내어 찾아서 바치게 하였는데, 2개 읍의 병부만 찾아서 바쳤기 때문에 병부 2개를 봉함하여 대진(大陣)에 보냅니다. 그것을 찾아서 바친 2명의 아전에게 군수미(軍需米)에서 2석(石)씩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병부가 적이 머물던 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니 인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엄중히 조사하여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라. 임치범과 주창호는 그 재주와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넉넉하게 상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 순무영의 전령에, “소모관(召募官) · 참모군관(參謀軍官) · 별군관(別軍官)에 대해서 민간에 들리는 소문이 낭자한데, 이것은 심상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아니 된다. 본진(本陣)에 공로가 있는 5명 이외에는 모두 전령에 따라 ≪직책을≫ 거두어서 해임하여 돌려보내라. 그 중에 본진에서 보낸 군관은 모두 해임한 뒤에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 뒤에 첨부한 것은 이러하다.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어제 순창에서 우리 군사가 동비를 토벌하고 있을 때 대장 남(南, 미나미 소좌)의 전보를 받아보니, ‘전봉준과 김개남은 모두 결박을 했고 나머지 비괴(匪魁)도 연이어서 사로잡았습니다. 비도를 일단 잡으면 감사(監司, 전라감사)가 양민인지 비도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베어버려 법을 따르지 않으니, 해당 감사에게 명령을 하여 잡은 비도를 우리 정토군(征討軍)에게 인도하여 보여주기를 요청합니다.
또한 참모관 · 초모관 · 별군관 등이 문란하여 백성을 어지럽히고 지방에 해를 주니, 이러한 무관(武官)들은 조속히 그만두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학비당(東學匪黨)은 귀국의 역적에 관계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일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사로잡은 비도는 신속히 서울에 압송하여 죄상을 신문해서 전형(典刑, 법)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본사(本使, 일본 공사)가 양력으로 지난 12월 27일에 귀국의 외무대신(김윤식)에게 조회(照會, 통지)한 편지에, ‘명백하게 기술한 것이 책상에 있고, 지금 전의 전보에 의거하여 지방관이 ≪비도를≫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대략 알 수가 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죄를 밝혀 처벌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편지의 요청에 호응하여 귀국의 대신은 신속하게 엄중히 해당 감사에게 명령하여 잡은 비도를 모두 우리 정토부대에 보내어 규명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고, 참모관 · 초모관 · 별군관 등은 급히 소환하여 민심을 바로잡아서 재난을 방지하는 것이 가장 긴요합니다. 이만 줄이며 날마다 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벽사도찰방의 첩보에, “본 역에서 사로잡은 죄인 중에 다시 조사한 죄인 9명과 새로 잡은 죄인 69명의 직초(直招, 바른대로 자신의 죄상을 자백하는 것)를 써서 책자로 만들어 상사(上使)에게 올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성책하여 바치라. 우선 엄중히 가두고 조치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 순무영에 첩보하기를, “이 달 28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본영(本營)의 순뢰(巡牢, 巡令手와 牢子) 손성복(孫性福)이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소모관 · 참모관 · 별군관이 민간에 폐를 끼친다는 소문이 낭자하다. 이것을 심상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 본진(本陣)에 공로가 있는 자중에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령에 따라 ≪직책을≫ 거두어 올려 보내고 해임을 하되, 그 중에 본진(本陣)에서 보낸 군관은 모두 해임하여 돌려보내고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본진에는 장위영 별군관(壯衛營 別軍官) 이겸래(李謙來) · 윤지영(尹摯榮) · 김광수(金光洙) 3명이고, 그 밖에 처음부터 차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22일에 소모관(召募官)의 첩보에, ‘장흥 대흥면(大興面)의 적괴(賊魁) 강위노(姜委奴) · 신문옥(申文玉) · 배성오(裵成五) · 김진옥(金振玉) 등 4명을 해당 면의 민인이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취초(取招)했는데, 바로 죄를 자복하기에 모두 때려서 죽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4일에 좌수영(左水營) 출진영관(出陣領官)의 첩보에, ‘어제 보성에서 잡은 동도 중에 양성좌(梁成佐) · 허성보(許成甫) · 허용범(許容範) 등은 본 읍의 거괴접주입니다. 김보열(金甫烈) · 김성한(金成漢) · 정덕흠(鄭德欽) · 김시언(金時彦) · 구자익(具子益) 등은 장흥성을 함락시킬 때에 거괴 접주입니다. 그래서 민을 모아놓고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보성의 박윤지(朴允之)와 장흥의 김달매(金達每)는 진영 앞에서 쏘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소모관의 첩보에, ‘장흥 웅치면(熊峙面)의 접주 김창환(金昌煥)과 남상면(南上面)의 접주 고응삼(高應三)은 모두 거괴에 해당되어 본 읍의 인신과 병부를 찾기 위해 가두었습니다. 김춘배(金春杯) · 김영삼(金永三) · 이치선(李治先) · 손인태(孫仁太) 등 4명은 민인이 잡아서 바쳤는데, 울면서 복수하기를 요청하여 바로 때려 죽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6일 순천영장(順天營將)의 첩보에, ‘동도 거괴 김개남의 명사원(明査員)인 정완석(鄭完石)과 그를 따르던 거괴 이문영(李汶永) · 이원채(李元采) · 김화서(金化西) · 박석순(朴石巡) · 김진돌(金眞乭) 등 6명은 아전과 백성 등이 모두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정완석은 목을 베어 경계한 뒤에 머리를 나무상자에 담아 장교와 나졸을 정해 바쳤고, 그 밖에 5명은 모두 쏘아죽였습니다.’고 하기에, 베껴서 보고하고, 정완석의 머리는 장흥읍의 시장가에 묻고 표지를 세워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소모관이 잡아서 가둔 김창환과 고응삼은 본읍의 인부를 찾기위해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해 신문을 했으나 끝내 떨어진 곳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소모관이 취초(取招)한 첩보가 있었기 때문에 김(金)과 고(高) 2명을 바로 죽였습니다. 장흥 남상명의 유학 백중인(白重寅)이 잡아서 바친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 이방언(李方彦)은 문자를 제법 알고 잡술(雜術)에도 통하여 시골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무리에 몰아넣었고, 인의(仁義)를 빌려 어리석은 사람들을 회유하였으며 삼남도교장의 이름을 갖고 흉악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의를 하였습니다. 귀화를 한다고 하여 무리를 인솔해서 성을 지키며 밖으로 적병과 호응하여 성과 본 관아를 무너뜨린 뒤에 그대로 적병과 함께 강진에 갔습니다. 그 흉악한 짓은 전봉준과 손화중보다도 휠씬 더합니다. 그래서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에 압송하였습니다. 남강면의 사람들이 잡아서 바친 태정 겸 선봉(先鋒) 고순칠(高順七)과 도성찰(都省察) 마경삼(馬京三)은 그 무리를 인솔하여 가서 각처에서 싸움을 한데다가 재물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에 끝이 없던 자이기 때문에 모두 죽였습니다. 그 밖에 장흥의 수성군(守城軍)이 각 면의 민인 및 벽사(碧沙)의 민인과 함께 잡아서 바친 동도 중에 죽인 자 36명의 이름을 적어서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 이 달 27일 술시(戌時, 오후 7시~9시)경에 별무사(別武使) 김영호(金永澔)가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군대 행진 규칙 중에 가장 금지하는 것은 바로 민간에 폐를 끼치는 첫째 조항이다. 수많은 병정들이 연로(沿路)를 행진하면서 비류를 찾아내어 체포한다고 하며 밤에 마을에 들어가서 평민을 위협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폐단이 곳곳에서 들리니 매우 통탄스럽다. 지금 엄중하게 조사를 할 때에 이웃나라 장수의 보고가 와서 보니, 비단 군율(軍律)에 관계될 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더욱 매우 놀랐다. 이에 전령을 보내니 도착하는 대로 상세히 살피고, 뒤에 적은 말들을 일일이 철저하게 조사하여 비록 자그마한 쌀 한 톨 채소 하나라도 민간에 폐단을 저지른 자라고 해도 모두 가두고 이름을 적어 급히 보고하라. 혹시라도 모호하게 늦춘다면 군율만 있고 사사로움은 없을 것이니 유념하여 거행하고 이후에 단속하는데 더욱 마음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뒤에 첨부한 글은 이러합니다. 일본군 소위 사이토(齋藤溫)가 말하기를, ‘내가 홍주 · 태안 · 서산 등지에서 동도를 토벌하여 지금은 흩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이두황(李斗璜)이 조선병정을 인솔하여 와서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여 원성이 답지(遝至)하고 있다. 귀국의 병사들이 하는 행위를 금지할 사람이 없다. 지금 그것을 보니, ≪저들 조선 병정이 바로 동비 다음으로≫ 민을 해치는 두 번째 부류이다. 금지할 수 없으면 죽여도 무방하다. 일이 지난 뒤에 와서 호소해도 이미 미칠 수가 없다. 해미(海美)의 경내에 있는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집집마다 조사해보니 동도에 들어가지 않은 양민의 집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집집마다 약탈하여 빼앗은 소 50여 마리와 집안의 가재도구 중에 무거워서 빼앗아 갈 수가 없는 솥 이외에 옷 · 돈 · 곡식 · 그릇과 쇠붙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약탈하여 빼앗은 소에 싣고 가버렸다. 불쌍한 이 양민이 돈과 곡식을 동학에게 빼앗겨버리고, 약간 남아있던 것도 경귀(京貴, 京軍)에게 빼앗겨서 남은 것이 없다. 지금 얼어 죽으니 매우 불쌍하다. 해당 민 등이 울면서 호소하는 곳은 일본군 진영만이 아니라 홍주목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 매우 근심스럽다. 병사라고 하며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병사가 아니다. 이런 뜻을 우리 공사(公使, 일본공사)에게 말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알린다.’고 하였다.
이 지시의 글을 절반도 못 읽고 황송하여 땀이 사체(四體)를 두루 적셨다. ≪적을≫ 숙청한 공(功)을 보고하지 못하고 삼가 정중한 지시를 받으니 두려워서 몸 둘 데가 없고 감히 참견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뒤에 적은 사이토(齋藤溫)의 말 중에 해미(海美)의 일은 지금 실상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난 달 7일에 해미성에 주둔한 적을 격파하고 성에 들어가서 보니, 성에는 온전한 집이 없고 집에는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비록 불을 때서 밥을 하려고 해도 그릇이 없었고, 또한 묵으려고 했으나 창호(窓戶)가 깨어져서 어쩔 수 없이 10리 ≪떨어진≫ 마을에 밥을 지어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사방에 벽만 있는 빈 집에서 자리를 덮고 묵었습니다. 그 중에 혹시 온전한 집에 쌓여 있는 것은 적들의 그릇과 적들이 쓰던 것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간간히 지은 초막에 쌓인 것은 무기였고, 매어 논 것은 소와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동도가 남에게서 빼앗은 물건이더라도 적의 물건이기 때문에 무기는 홍주영장(洪州營將)에게 이송하였고, 소 52필과 말 8필 및 당나귀 5필은 진중(陣中)에 주어, 소는 군사들에게 먹였고 말은 짐을 실었습니다. 그 다음날 8일에 서산(瑞山)의 적을 추격하여 격파하였고, 9일에 바로 홍주(洪州)에 갔습니다. 어느 겨를에 온 경내를 두루 다니며 집집마다 약탈을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 허황된 것을 여기서 판별할 수가 있습니다. ‘소 50여필을 빼앗았다’는 말은 해미에서 거둔 전리품을 성책(成冊)하여 보고한 것 중에 소 52마리를 매일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현록(懸錄, 장부에 올려서 적는 것)하였는데, 약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심지어 옷 · 그릇을 운운하였는데, 해미성 전체가 모두 비어서 남아있는 물건이 없었고, 혹시라도 병사가 거두어 가는 폐단이 있었을지라도 적의 소굴에서 거둔 것이지 약탈한 것이 아닙니다. 군수품은 숫자가 있어 날마다 그릇 등의 물품을 점검하여 숨길 곳이 없고 감히 조목조목 변명을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사실이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이처럼 이웃나라 장수에게 의심을 받고 이웃나라에 부끄러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지시의 엄한 글을 받고 스스로 저의 비루함을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조사하면 그 근거가 없는데, 어찌 허물이 있겠습니까? 죄는 실제로 ≪병사를≫ 훈계하지 못한 데에 있으니, 다시 누가 일군(一軍, 全軍)을 맡기겠습니까? 황송하여 몸 둘 데가 없습니다. 땅에 엎드려서 죄를 청하니 밝게 살피시어 처분해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진중에서 쓸 탄환 15,000개를 별무사 김영호를 시켜 보내니, 도착하는 대로 그 숫자를 살펴서 받아 배급한 뒤에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김영호가 보고한 것을 들어보니, 탄환은 일본군진영 대대의 지시에 따라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에 보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이 달 27일에 소모관의 첩보에, ‘장흥과 흥양 2개 읍의 인부를 장흥 대흥면의 비류 이인환이 빼앗아갔다고 ≪저들의≫ 공초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리 임치범과 관내에 사는 주민 주창호를 보내 찾아서 바치게 하였더니, 2개 읍의 병부만 찾아내어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에 봉함하여 올립니다. 장흥의 병부는 감관과 색리를 따로 정하여 원래 장흥을 겸임하고 있는 해당 관아의 보성군수에게 보냈고, 흥양병부는 감색을 따로 정하여 해당 현감에게 보냈습니다. 인신은 계속 조사하여 찾을 것입니다. 이런 뜻을 전라 감영에게도 통지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을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28일 낙안군수의 첩보에, ‘본읍 동면에 사는 동도 이수희(李守喜)는 거괴 김인배의 중군(中軍)으로 따르던 자입니다. 보성의 안규복(安奎馥)은 집강(執綱)으로 변고를 일으킨 자입니다. 본군(本郡)의 수성군이 민인 등과 함께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민을 모아놓고 목을 베었습니다. 그 머리는 좌수영에 보냈습니다.’ 하여 이에 그것을 베껴서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26일에 소모관의 첩보에, ‘장흥의 남면에 사는 장만년(張萬年)은 민군이 잡아서 바친 자인데, 동도 중에 도포수(都砲手)로 불리던 자입니다. 민인이 울면서 원한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때려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흥덕현감의 첩보에, ‘본 현의 이교와 수성군이 잡아서 바친 동도 중에 이동면(二東面) 은동(隱洞)의 서상옥(徐相玉), 일서면(一西面) 진목정(眞木亭)의 정무경(鄭武京), 이동면 내옥리(內玉里)의 고성천(高成天), 정읍(井邑) 서남촌(西南村)의 강윤언(姜允彦), 고부(古阜) 하오산(下五山)의 김태운(金太云), 무장(茂長) 사기점(沙器店)의 추윤문(秋允文), 현내면(縣內面) 치리(峙里)의 이청용(李靑用), 이남면(二南面) 해천(海川)의 재인(才人, 광대) 김도순(金道順), 이서면(二西面) 사천(沙川)의 이희풍(李希豊), 고부의 곽경순(郭京順), 정읍의 신준의(申俊宜)와 본 현의 좌수(座首)인 김병규(金炳奎)가 잡아서 바친 이동면의 고태국(高泰國) 등 12명은 모두 거괴로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무리를 인솔하여 싸움에 나간 자들입니다. 잠시라도 용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모두 민을 모아놓고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본현의 동적수포유사(東賊搜捕有司) 김재구(金在九)가 부근의 민병을 인솔하여 동적거괴인 정읍의 차치구를 잡아서 바쳤는데, 이 놈은 전봉준의 후군대장(後軍大將)으로 대장기(大將旗)와 숙정패(肅靜牌)를 세우며 포군(砲軍) 400~500명을 거느리고 전라좌도(左道)와 전라우도(右道)를 두루 다니면서 관장(官長)을 능욕하고 아전과 백성을 침탈하여 그 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공주와 논산에 가서 여러 차례 싸움을 하였던 자입니다. 그래서 읍에서 마음대로 죽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었습니다’라고 하기에, 이에 베껴서 보고하고 차치구는 유명한 거괴라고 하니 잠시라도 그냥두어서는 아니되며 민을 모아 목을 베어서 경계하도록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장흥 수성영장 등의 고목(告目)에, “본부(本府, 장흥)에 배정된 군수전 1,000냥과 병사들에게 먹일 소 5마리를 운반하여 납부하고, 그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납부한대로 받았다”라고 하였다.

○ 능주목사의 첩보에, “지금 본주(本州, 능주)의 수성장에게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지금 장흥 장서면(長西面) 민인의 등소(等訴, 여러 사람들의 이름으로 낸 청원서)를 보니, 능주 민병의 침탈이 있었다. 그래서 본진(本陣)의 전령을 보내어 알려 ≪그들을≫ 빼앗아가서 독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해당 병사를 조사하여 곧바로 전령을 내어 특별히 엄중하게 다스리고, 다시는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장흥의 장서(長西)와 부평(富平) 등지는 바로 동도의 소굴입니다. 6월 이후에 1,000명이나 10,000명으로 무리를 지어서 능주 경내를 제멋대로 다니며 소와 말 및 재물을 빼앗았는데,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부녀자를 위협하여 범하고 집을 부수며 사람을 때려서 죽인 일이 없는 마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진(大陣)이 와서 비류를 토벌하니, 난리를 겪은 불쌍한 이들 백성이 자신의 소를 끌고 온 것은 10여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흉악한 저 적들이 민병을 몰아내고 잡아간 5명 중에 1명을 끝내 죽여 기세가 아직 두려우며, 영지(令旨, 명령서)를 빼앗았다는 얘기는 매우 허무맹랑합니다. 또한 감히 몽둥이를 받을 요량으로 본진(本陣)이 내린 답신을 속이고, 지난 습속을 고치지 않으면서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작은 규모의 궁색한 관아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칙(令飭, 명령)이 정중하여 민병을 단속하는 것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수 천 명의 적들이 여전히 장성과 능주의 경계 사이에서 모여 포를 쏘고 나팔을 부는 소리가 자주 시끄럽게 울린다고 합니다. 만약 급히 군대를 조치하지 않으면 나중에 간악함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처분하여 피폐한 읍(邑)을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적이 모인 곳을 정탐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 벽사역 찰방의 첩보에, “본 역에서 잡은 죄인 중에 다시 조사한 죄인 9명과 새로 잡은 죄인 69명의 직초(直招, 사실대로 지은 죄를 자백한 것)를 적어 책자로 만들어 상사(上使)에게 올리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책자로 만들어 바치되, 우선 엄중히 가두고 조치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장흥부사의 아들이 이 날에 분상(奔喪, 타향에서 부모의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하였다.

12월 29일 맑음[二十九日晴]

이 날에 죽산(竹山) 포교(捕校)가 와서 바친 포제(褒題)에, “요사한 기운이 비로소 바로잡히고 봄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 벽사역 찰방의 첩보에, “어제 병정과 함께 동도 4명을 잡았기 때문에 직초(直招)를 적어 책자로 만들어 상사(上使, 위 사또)에게 바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베껴서 보고할 때 책자로 만들어 바치되, 우선 엄중히 가두고 조치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 장흥 수성영장 등의 고목에, “삼가 받은 전령의 뜻에 따라 군수미 70석을 진영 앞에 운송하여 납부하고, 그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납부한대로 바치라”고 하였다.

○ 소모관의 첩보에, “장흥에서 잡은 동학 죄인의 성명을 적어 책자로 만들어 대진(大陣, 대군)에 바치며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책자로 만들어 바치라”고 하였다.

○ 장흥유생 위계철(魏啓哲) · 백기효(白基孝) · 김숙현(金淑鉉)의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내는 청원서)에, “푸른 하늘 부월(鈇鉞, 장수에게 軍權의 상징으로 주는 도끼) 아래에서 아! 저 흉도(凶徒)의 죄악은 천번 만번을 죽여도 오히려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신명(神冥)이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시어,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한 곳에 마침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가 이르러, 은혜와 위엄이 버려진 땅에 행해졌습니다. ≪저희를≫ 다시 살려주신 덕(德)은 뼈에 새겨져 잊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남은 요사한 기운이 정화되지 않아, 소모관께서 명을 받아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군사를≫ 되돌리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굶주려서 젖을 먹다가 젖이 떨어지고, 병이 조금 나아지다가 더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픕니다. 실낱처럼 피폐해진 이 불쌍한 목숨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개인의 힘으로 길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특별히 목마름을 구제하는 마음으로 생각하여 소모관에게 답신을 내려, 구군(寇君, 寇恂)을 빌리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게 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난리 뒤에 관아가 비니 백성의 심정이 당연할 것이다. 이것을 당연히 논보(論報)할 것이나, 소모관이 돌아가는 것은 실제로 마음대로 하기가 어렵다. 많은 선비들에게 말하는데, 중지(衆志)로 성(城)을 이루어서 남은 요사한 기운이 다시는 이 경내에 펼쳐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 장흥 부산면(夫山面) 방수장(防守將)의 보고에, “용반(龍盤) 접주 이사경(李士景)을 잡아 압송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이사경을 조사해 보니 과연 거괴였다. 민이 거괴를 잡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계속 살펴서 그들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다.

○ 보성과 흥양에 감결을 보냈다.

○ 장흥 용계면(龍溪面) 내동(內洞)의 동도접주 김희도(金希道)를 잡아 취초(取招)하였는데, 그 구초(口招, 죄인이 심문에 응하여 진술을 한 것)에, “장흥과 흥양 2개 읍의 인신이 용계면 용반 접사(接司) 이정실(李正實)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실을 압송하면, 그를 추궁하여 ≪인신을≫ 바치게 할 방도가 자연히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 길을 찾는 간계가 없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희도로 하여금 이정실의 집에 있는 책에 찍힌 인신≪의 글자를≫ 직접 Tm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색리(色吏) 주처균(周處均)을 따로 정하여 ≪이정실의 집에서 인신을≫ 찾아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한 보고에, “제가 김희도가 쓴 글자를 가지고 이정실의 집에 달려가서 보니, 이정실은 이미 도주하였고, 그의 노모만이 있었습니다. 김희도가 쓴 글자를 보여주고 인신을 추궁하였더니, ‘지난번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 밤에 정실이 집 뒤의 흙을 파는 모양이 있었으니 거기에 가서 상세히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동민을 인솔하여 그 집 뒤에 가서 사면을 파서 살펴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그 마을에 묵고 해가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그곳에 가서 촘촘히 비탈 한 곳을 팠더니, 도자기 항아리가 나왔습니다. 열어서 보았더니 정말로 인신 2과(顆)가 있었습니다. 이에 가져와서 바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신은 감색(監色)을 정하여 보내서 공손히 그것을 받고, 그 형편을 바로 급히 보고합니다.

○ 용하(龍下) 접주 백인명(白寅明)과 용반(龍盤) 접주 이사경을 이 날에 죽였다.

○ 전라감영에 문이(文移)하기를, “상고합니다. 용계면(龍溪面) 내동(內洞) 접주 김희도(金希道)를 잡아 취초(取招)하였는데, 그 구초(口招)에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장흥의 인신(印信)은 감색(監色)을 따로 정해 해당 관아를 겸임하고 있는 보성군수에게 보냈고, 흥양의 인신은 감색을 따로 정해 해당 현감에게 보냈습니다. 주처균(周處均)의 성심(誠心)을 살펴보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래서 먼저 본진(本陣)에서 백미 2석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노하는 적의 괴수를 차례대로 잡은 것은 하늘이 돌보신 것이고, 인신과 병부를 연이어 찾으니 참으로 매우 기쁩니다. 이것을 상고(相考)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보성군수의 첩보에, “장흥부의 병부는 이 날에 받아서 찼습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 흥양의 인신(印信)을 가지고 가는 감관(監官) 박명주(朴明主)와 색리(色吏) 이준용(李俊鏞), 장흥의 인신을 가지고 가는 감관 임장동(任壯同)과 색리 주창섭(周昌燮)에게 이 날 다짐을 받고 훈계하여 보냈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이 달 28일에 장흥의 수성군과 민인 등이 잡아서 바친 해당 관아의 용계(龍溪)에 사는 일개 읍의 동도 거괴 백인명(白寅明)과 용반(龍盤)에 사는 이사경(李士景) 2명은 바로 해당 관아의 성을 무너뜨릴 때에 앞장을 서서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며 재물을 약탈한 자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살점을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바로 쏘아 죽였습니다. 용계 내동(內洞)의 접주 김희도(金希道)라고 하는 놈은 본 관아의 수성군이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엄중히 취초(取招)하였더니, 구초(口招)에, ‘장흥과 흥양 2개 읍의 인신이 용계면 용반의 접사 이정실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압송하면 자연히 추궁하여 납부할 방도가 있겠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려는 간계가 없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로 하여금 이정실의 집에 있는 그 인신의 글자를 직접 쓰게 하였습니다. 색리(色吏) 주처균(周處均)을 따로 정하여 찾아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한 보고에, ‘제가 김희도가 쓴 글자를 가지고 이정실의 집에 달려갔더니, 정실은 이미 도주하였고 노모만이 있었습니다. 김희도의 글자를 내어 보이며 인신을 추궁하였더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밤에 정실이 집 뒤에서 흙을 파는 모양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동민을 인솔하여 그 집의 뒤에 가서 4면을 파서 보았으나 끝내 찾지를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그 마을에서 묵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그곳에 가서 촘촘히 비탈 한 곳을 팠더니 도자기 항아리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열어서 보았더니 정말로 인신 2과(顆)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져와서 바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흥의 인신은 감색(監色, 감관과 색리)을 따로 정하여 장흥을 겸임하고 있는 보성군수에게 보냈고, 흥양의 인신은 감색을 따로 정하여 해당 현감에게 보냈습니다. 주처균의 성심을 살펴보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래서 (본진)에서 백미 2석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사람과 귀신이 함께 분노할 적의 괴수를 차례대로잡은 것은 하늘이 돌보신 것이고, 인신을 연이어 찾으니 참으로 매우 기쁩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대관(隊官) 이규식(李圭植)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한번 분병(分兵)한 뒤에 그리운 마음이 밤낮으로 줄지 않는다. 잠자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는 장졸이 어떻게 고생을 견디고 있으며, 질병이 없는가? 지금 일본군 진영 대대(大隊)의 지시에, ‘병정 100명을 뽑아 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대관(隊官) 박영호(朴永祜)로 하여금 인솔해서 보낸다. 좌1(左一)과 좌3(左三)은 박영호가 관할하고, 좌사(左四)와 우일(右一)은 본 대관(本隊官)이 관할하여 거행하라.
군수품은 인근의 5개 읍에 배정하고 전령을 보내어 바로 바치도록 독촉해서 융통하여 쓰라”고 하였다.
무안(務安) · 함평(咸平) · 영광(靈光) · 고창(高敞) · 무장(茂長)읍에 300냥씩 배정하였다.

○ 삼가 답장을 드립니다. 구력(舊曆) 12월 28일에 보낸 1통의 편지는 29일 신시(申時,오후3시~5시)경에 받아서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귀 진영의 교장 편에 보낸 죄인 이방언은 ≪공초에≫ 의거하여 추궁하였습니다. 전일(前日)에 뽑아 보낼 병사 100명은 빨리 선발하여 보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병사 100명을 뽑아 보내는 일은 아직 듣지 못하였고, 지금에야 하교(下敎)를 받았기 때문에 나주에 대기하고 있는 대관(隊官) 1명과 교장 2명 및 병사 100명을 뽑아 30일에 아침 일찍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죽인 동도는 35명인데, 모두 장흥과 강진의 성을 무너뜨릴 때에 살인과 방화를 하며 매우 패악을 저지른 자들입니다. 그 밖에 따르던 무리 100여명은 엄중하게 훈계하여 풀어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본진이 장흥에 머문 지가 10여일이 되었는데, 적괴(賊魁)는 차례대로 사로잡았고, 인부는 순서대로 찾았습니다. 민이 ≪우리를≫ 의지하는 것 같고 적도 넋이 나갔습니다.
장흥 전체를 헤아려보니, 거의 ≪동도를≫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합니다. 태봉(胎封, 편지 속에 따로 넣은 별지)의 비밀 보고에, 나주성의 풍속이 옛날 같지가 않아 사람이 경박하여 본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번 봄부터는 제법 성을 지키고 동도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기량이 남을 깔보는 습관이 없지 않아 걱정스럽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서로가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곳입니다. 장흥은 처음에 적의 소굴인 것 같았으나, 지금은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남은 백성은 의지할 곳이 없어 한번 군대를 보면 살아있는 부처처럼 우러러 의지합니다. 더욱이 해창(海倉)에 있는 곡식이 적지 않고, 각 동의 민인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습니다. 병사를 주둔하는 것과 같은 일은 장흥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저의 어리석은 의견으로 고명한 분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그것을 가려서 쓰는 여부는 ≪당신의≫ 밝은 재가(裁可)에 달려 있습니다.

12월 30일 맑음 [三十日晴]

나주 동창(東倉) 두민(頭民) 등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본진 대관(隊官) 1명이 병사 100명을 인솔하여 나주로 향해 갈 것이다. 오늘은 장흥관아에서 출발하여 나주의 유치면(有治面) 조양촌(朝陽村)에서 머물고, 내일에는 안의동(安矣洞)에서 묵을 것이다. 잡색(雜色)을 150명으로 삼아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접대하는 일을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하였다.

○ 장흥 안량면(安良面) 지천포(止川浦) 민인 등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지금 이웃 읍의 민병이 동도를 잡는다고 하면서 본포(本浦, 지천포)에 와서 침탈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각 읍의 민병은 다른 경계를 넘지 말도록 이미 감결을 보내어 거듭 훈계를 했으니, 반드시 민병을 보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다시 와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반드시 난류(亂類)일 것이다. 전령이 도착하는 대로 모두 결박하여 잡고, 나중에라도 만약 이웃 읍의 민병이 경계를 넘어 폐단을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마을에서도 잡아서 바치라”고 하였다.

○ 순천 공형의 문장에, “이 달 12일에 좌수영문(左水營門)에서 행진(行陣)한 본 관아의 좌수(座首) 장동렬(張東烈) · 호장(戶長) 장태완(張泰完) · 이방(吏房) 이돈근(李敦根)을 모두 압송하였고, 지난 18일에 쏘아 죽였습니다. 본 관아의 아전과 백성이 놀라서 겁을 먹은 나머지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그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잘 알았다. 과연 무슨 죄목으로 죽였는가? 수영(水營, 좌수영)에서 패악한 놈을 일일이 압송하여 대령하는 일은 이미 비밀 관문(關文)이 있었으므로, 수영에서 행할 것이다. 장차 ≪잘 잘못을≫ 조사하여 바로 잡을 것이다. 너희들 일개 관아의 아전과 백성도 자숙하고 처분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추가하여 답신하기를, “이처럼 답신하여 훈계한 뒤에 혹시라도 제멋대로 하는 거사(擧事)가 있으면 이것은 난민(亂民)이다. 군사가 오는 날에 옥과 돌을 구분하지 않고 성 전체를 유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벽사역 찰방의 첩보에, “본 역에 엄중하게 가둔 죄수 중에 장흥의 중사(中沙)에 사는 한서길(韓瑞吉)은 상등죄인(上等罪人, 죄목이 상 등급에 속하는 죄인)으로 오늘 새벽에 죽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기에, 답신하기를, “갇혀있는 자를 조사하기 전에 죽인 것은 죄수를 감시하는 자의 잘못이다. 엄중히 해당 감독 ≪관리를≫ 다스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 좌수영에 이관(移關)하기를, “조사할 일이 있으니, 본영(本營, 좌수영)의 중초영장(中哨領將) 곽경환(郭景煥)과 서기(書記) 김재호(金在浩)를 즉시 나장(羅將)을 정해 성화같이 압송하여 진영 앞에 대령하라. 혹시라도 잠시 지체하여 분란이 생기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 좌수영에 이관(移關)하기를, “지금 순천부 공형의 문장을 보니, ‘이 달 12일에 좌수영에서 행진(行陣)한 본 관아의 좌수 장동렬과 호장 장태완 및 이방 이돈근을 모두 압송해가서 지난 18일에 그대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해당 관아의 좌수와 공형을 무슨 죄목으로 죽였는지, 만약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면 이것은 제멋대로 죽인 것이다. ≪잘 잘못을≫ 조사하여 바로잡기 위해 그 때 형을 집행한 장관(將官)이 도착하는 대로 압송하여 대령하고, 혹시라도 지체하여 크게 분란이 생기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 양영(兩營)에 첩보하기를, “본진이 이 달 18일에 보성군에 도착하였더니, 일본군 1중대가 있었습니다. 부산항(釜山港) 감리서(監理署) 서기관 박하성(朴夏成)이 함께 인솔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 달 4일에 외무아문(外務衙門)의 전칙(電飭, 전보로 한 명령)을 받고 본 항에 주둔한 일본 육군 소중대(小中隊) 대위(大尉) 스즈끼(鈴木安民)와 함께 먼저 전라도 좌수영에 가서 응원하고, 다시 연로(沿路)의 동도를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 220명과 조선인 인부 150명을 ≪인솔하여≫ 이 달 4일 부산항을 ≪출발해≫ 천천히 걸어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겪었던 사실을 알아내어 지금 적어서 바칩니다. 이에 베껴 쓴 것을 적어 책자로 만들어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책자에, “1894년 12월 4일 부산항 감리서 서기관 박하성(朴夏成)은 외무아문의 전칙(電飭, 전보로 한 명령)을 받고 본 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육군 소중대(小中隊) 대위 스즈끼(鈴木安民)와 함께 먼저 전라도좌수영에 가서 응원하고, 다시 연로(沿路)의 동도를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 220명과 조선인 인부 150명을 ≪인솔하여≫ 12월 4일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70리를 가서 김해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5일에는 김해에서 출발하여 70리를 가서 창원(昌原)에 이르러 묵었고, 6일에는 창원을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진해(鎭海)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7일에는 진해에서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진주(晋州) 영이곡(永耳谷)에 이르러 머물렀고, 8일에는 영이곡에서 출발하여 60리를 가서 곤양(昆陽)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9일에 곤양에서 떠나 60리를 가서 하동(河東)에 이르러 묵었는데, 해당 읍이 전라도 광양의 경계와 단지 강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 천 명의 비류가 광양의 강머리에 집결하여 강을 건너와서 하동을 약탈하려고 밤낮으로 포를 쏘고 본 읍의 민포(民砲)와 대치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해당 관아(하동)의 부사 홍택후(洪澤厚)가 일본군의 응원을 믿고 본 읍의 민포로 하여금 강을 건너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해당 비류도 일본군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을 하니, 해당 민포가 추격하여 비적(匪賊, 동학농민군) 11명을 잡아서 쏘아 죽였습니다. 좌수영우후(左水營虞候) 신홍이 본영의 포병 80명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영접할 때 해당 읍에 와서 주둔하였습니다.
10일 오후 1점(點)에 하동을 떠나 좌수영우후와 함께 길을 안내하여 동도의 소굴로 돌아들어갔는데, 30리를 가서 도착한 곳이 바로 광양의 섬계역(蟾溪驛)으로 해당 역은 유명한 동도의 소굴이었습니다. 마을 앞에 도착하니, 머리에 흰 무명을 매고 목을 돌린 어떤 민정(民丁) 500여명이 포환(砲丸)을 휴대하거나 죽창을 가지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크게 놀라 신우후(申虞候, 신홍)와 함께 그 곳에 가서 너희들이 무슨 일 때문에 이처럼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저들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본 읍의 민포(民砲)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심이 없지 않아서 일본군 대위에게 알리고 수영(水營)의 포군(砲軍)을 불러 저들을 포위하여 먼저 창과 포를 거두고 반복하여 조사를 하였더니, 정말로 하동 강머리에서 쫓겨 흩어진 적이었습니다.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와 자원한 자를 구분하고, 자원한 자 30여명을 일본군 진영에 알린 뒤에 신우후와 포병으로 하여금 쏘아 죽였습니다.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풀어주었습니다. 거두어들인 총 20자루 중에 10자루는 좌수영에, 나머지는 10자루는 진주 참모관(參謀官)에게 보냈습니다. 11일에 섬계역에서 떠나 몇 리를 갔는데, 어떤 촌민(村民)이 반쯤 죽은 사람을 지고 와서 호소하며 그들이 때려잡은 동비의 도집강(都執綱) 정홍섭(丁洪燮)을 대진(大陣)에 바치러 간다고 해서 해당 적을 조사하였습니다. 일행 중에 마침 그 적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가 있어 조사하게 했더니, 정말로 그러하였습니다. 그 적은 구타를 당해 다시 살아날 길이 없어 문초(問招)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을 베어 역참(驛站)에 전하고 광양읍에 이르러 그것을 매달아서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40리를 가서 마침내 광양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해당 읍의 수리(首吏)와 향배(鄕輩)가 민포(民砲)를 많이 보내 비적 50여명을 잡았기에, 거괴 3명은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쏘아 죽였으며 시신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지금은 ≪비적이≫ 모여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다만 성을 지키는 주(州)의 백성을 위로하였습니다. 12일에 광양에서 떠나 40리를 가서 순천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해당 읍에서 민포를 보내 잡은 비류를 광양현에서 처럼 똑같이 처리하였습니다. 13일에 그대로 순천에 머무르며 정탐을 하였습니다. 좌수사(左水使) 김철규(金徹奎, 徹은 곧 澈의 오자)와 영관(領官) 이주회(李周會) 및 방답첨사(防踏僉使) 김경운(金景雲)이 본영(本營, 전라좌수영)의 포병(砲兵) 1,500명을 인솔하여 순천관아에 주둔하며 비류를 토벌하였습니다. 14일에 좌수사 김철규가 영관 이주회와 방답첨사 김경운으로 하여금 나와 함께 가서 힘을 합쳐 주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군과 이 날에 함께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낙안(樂安)에 묵었습니다. 15일에 낙안에서 떠나 30리를 가서 보성(寶城)의 조성원(鳥城院)에 이르렀습니다. 오참(午站)에 영관 이주회와 함께 해당 동(洞)의 비정 7명을 잡아 실정(實情)을 알고 쏘아 죽인 뒤에 파청역(波靑驛)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16일에 파청역에서 떠나 20리를 가서 보성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16일부터 이 달 24일까지 해당 읍에 머물러서 일본군을 파견하거나 민포를 보내 ≪비류를≫ 붙잡아서 쏘아 죽인 자가 50여명이었습니다. 24일에 보성에서 떠나 60리를 가서 장흥에 이르러 묵었고, 25일에 그대로 해당 읍에 머물렀습니다. 정탐을 위해 이 날부터 그믐날까지 계속 머물렀습니다.

제석(除夕, 제야)에 시를 지었는데, 시의 운(韻)은 한(寒) · 난(難) · 만(漫)자이었다.

 ①지산(芝山)의 칠언절구 (七言絶句)
 외로운 등불 빛나고 북풍(北風)은 차가운데,
 이곳에서 이 몸은 해를 보내기 어렵네.
 내년에 오늘 밤이 없는 것은 상관할게 아니나
 부모를 떠나 있는 천리 길은 더욱 아득하네.

 ② 몽재(夢齋)의 칠언절구
 삼천리 밖 추운 곳을 굴러다니며 싸우나
 수레에 한결같은 마음 달리 어려움이 없네,
 가무(歌舞)를 하던 장안(長安)가는 날이 멀지 않음을
 앵무새와 꽃은 곳곳마다 있고 길은 얼마나 아득한가.

 ③ 수재(受齋)의 칠언절구
 삭풍(朔風)은 막막하고 전포(戰袍)는 차가운데
 서른 살에 비로소 가는 길이 험난함을 알겠네,
 새벽종이 치기 전의 이 해에
 긴긴 밤 교분(交分)을 나누는데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④ 윤귀영(尹龜榮)의 칠언절구
 천리 변방에 바람이 불고 나그네 마음 차가운데
 인간사 모든 일에 한가지 어려움이 있네
 연광(年光, 세월)이 오늘 밤에 갈리는 게 아닌가
 서울을 바라보니 길은 아득하기만 하네

주석
김적(金賊) 개남(介男) 김개남의 본명은 기범(箕範)이었으나 농민전쟁 당시 남조선을 연다는 뜻으로 개남(開南)이라 고쳤다. 대체로 관아와 관군 쪽에서는 여느 남지 이름인 개남(介男)으로 표기하고 있다.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해 전라좌도를 관할하였다. 임실도 전라좌도에 해당한다.
도성찰(都省察) 동학의 여러 직임(職任) 중의 하나이다.
오점(五點) 점(點)이 지금의 1시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면 5점은 5시에 해당한다.
공신(拱宸) 신은 북두칠성의 의미로 임금이 계신 곳을 가리킨다. 곧 임금을 받든다는 의미를 담은 북쪽 문을 뜻하는 용어이다.
박문달(朴文達) 문달은 운봉 의병장으로 전 주서였던 박봉양(朴鳳陽)의 자.. 박봉양은 민보군을 조직해 남원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로를 세웠다(「박봉양경력서」『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참조).
금구(金溝)와 태인(泰仁)등지로 나누어 보냈던 장졸(將卒)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공주 노성 논산에서 패전한 뒤 남하였는데 11월 25일 금구 원평, 11월 27일 태인 읍내에서 전투를 벌여 패전했다. 여기에 이두황이 병력을 파견했음을 말한다.
전봉준(全琫準)을 잡아 순창 피노리(避老里)에서 잡혀서 순창 관아에 갇혔다가 주둔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피광리(皮廣里) 피노리(避老里)의 오식. 피광리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거(函車) 함거(檻車)를 잘못 쓴 듯하다. 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레를 말한다.
완영(完營, 전주 감영)에 압송(押送)했는데 김개남은 12월 1일 태인 종송리(현 정읍군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재판절차 없이 전주 서교장(西敎場)에서 처형되었다.
서산(瑞山)과 매현(梅峴) 서산과 매현전투: 이두황은 공주전투에 참전치 않고 11월 초순 우회해 충청도 해안지대로 진출해 11월 8일 서산으로 나와 매곡 해미읍성 승전곡 등의 농민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홍주와 부여지방을 거쳐 노성방면으로 귀환했다.
노성(魯城)과 논산(論山) 노성과 논산전투: 전봉준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잔여 농민군을 이끌고 노성으로 후퇴했는데 이두황군은 11월 중순 농민군을 추격해 노성과 논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계문(啓聞) 관찰사나 지방에 나온 어사등이 임금에게 문서로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기(李沂) (1848-1909):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국왕 주변의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고 국헌(國憲)을 새롭게 하자고 제의까지 하였다. 김개남이 이를 거절하자 구례로 돌아온 뒤, 역으로 군민을 규합하여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을 섰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1895년부터 중앙에 진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순천(順天)과 광양(光陽) 의 적들 김개남 계통인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이해 6월부터 순천 광양과 그 주변 고을을 비롯해 섬진강을 넘어 하동과 진주 일대에 진출했다.
문장(文狀) 공형(公兄)이나 아전 등이 본관이나 다른 상관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말한다.
양영(兩營) 의정부에서는 10월 초순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을 토벌키 위해 임시 총지휘부인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그 총지휘자인 순무사로 신정희를 임명했다. 따라서 우선봉장 이두황, 좌선봉장 이규태는 상급 기관인 순무영에 전황을 보고했다. 이두황은 죽산부사를 겸임한 장위영 영관이어서 두 영은 죽산부의 상급기관인 기영(畿營, 경기감영)과 자신이 속한 장위영에 현지 사정을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최경선(崔慶善) 여기 최경선(崔慶善)은 최경선(崔敬善)과 글자가 다르다. 뒤의 최경선은 광주 나주전투에서 패전한 뒤 동복에서 잡혔다고도 하고(오하기문) 순창 관아에서 억류되었다가 나주 초토영에 인계되었다고도(주한일본영사관기록) 한다. 최경선의 이름 글자와 사실을 부정확하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제부(齊斧) 잘드는 도끼로 임금의 권력을 상징한다.
거괴 전봉준 · 김개남 · 양하일 · 최경선 · 윤종호(尹宗祜) 김개남은 전주감영, 양하일 윤종호 등은 임실 관아에서 불법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전봉준 최경선은 서울로 끌려와 정식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양하일은 유명한 농민군 지도자인 황하일(黃河一)로 보기도 한다.
보벌(寶筏)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피안(彼岸)으로 이르게 하는 보배로운 불법을 말한다.
손장수(孫將, 손권) (孫權):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182~252)로, 유비와 더불어 조조를 적벽에서 무찌르고 위와 제휴하여 제위에 올랐다.
석아(石兒, 용암)가 일찍이 무후(武侯)의 춘수당(春睡堂) 석아는 바위의 미칭. 무후는 제갈량의 시호. 제갈량은 양양의 융중에 은거하면서 낮잠을 즐기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제갈량의 자는 모습이 용을 닮았다고 해서 와룡(臥龍)선생이라 불렀다. 석아가 와룡과 비슷해 제갈량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노문(路文) 외방에 공무로 나가는 관원에게 각 지방의 역(驛)에서 말과 침식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패대신 발급한 문서를 말한다.
민포(民砲) 50명을 인솔하여 관아로 달려갔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영호도집강(嶺湖都執綱) 정우형(鄭虞炯) 등이 1894년 12월 9일 체포 처형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 순천의 영호대도소가 공격을 받고 정우형 등이 죽음을 당한 것은 12월 6일이었다.
김인배(金仁培) (1870-1894) : 전북 금구현(현 김제군 봉남면 화봉리) 출신으로, 1894년 6월 전남 순천에 영호대도소를 설치하고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활동하였다. 9월 1일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넘어 하동을 공격하고 9월 8일 진주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여 순천으로 다시 돌아와 활동하다 12월 7일 광양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효수되었다.
문안(文案) 본디 문서나 문장의 초안을 가리는데 여기에서는 군직의 한 벼슬 이름. 곧 친군영(親軍營)의 중간직급 또는 하급 군사기관에 속한 직함의 하나.
이것을 증거로 삼아 침범하지 말라(물침표) 관군은 신분을 보장한다고 해서 관가에서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물침표를 발행했다. 농민군이 전주를 후퇴할 때에도 홍계훈이 농민군들에게 물침표를 주어 신분을 보장했다. 이를 본받아 수성군이나 유회소에서도 이 증서를 발행해 주었다.
하동의 화개동(花開洞) 지리산 입구인 섬진강 가에 있는 화개동에서는 지리산에 근거를 둔 농민군과 산포수 등 민포군이 서로 전진 후퇴를 반복하는 접전을 벌여 황폐할 지경이었다. 1894년 9월 3일 농민군은 하동부에 도소를 설치하고 자치행정을 도모했고 민포군은 이들을 몰아냈다. 김인배는 농민군을 이끌고 하동 농민군을 도왔다.
오대(五臺)의 승려들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오대현에 있는 산인데 이곳에는 10개의 큰 절에 많은 승려들이 거주한다. 이들 승려들은 장각(張角)과 같은 사교가 일어나 변란을 꾸밀 때 막아냈다. 주희는 이를 찬양했다.
사어(舍魚)와 취웅(取熊)도 판별 맹자는 “물고기도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요 곰발바닥도 또한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언마는 두 가지 모두 가질 수 없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가지리로다. 생도 또한 내가 하고자하는 바요 의리도 또한 내가 하고자하는 바이지마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으면 생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리로다.”(『맹자』 고자장구)라고 했다. 곧 의리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이다.
매가 새를 쫓듯 “그 임금에게 예가 있는 자는 섬기기를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듯 해야 하며 임금에게 무례한 자는 죽이기를 매가 새를 쫓듯 해야한다.”(『춘추』 문공)는 구절이 있다. 선비들이 불충한 동학농민군을 죽여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도릉(道陵, 장도릉) (張道陵):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이름은 능(陵)이다. 벼슬을 버리고 용호산(龍虎山)에 은거하여 연단(煉丹)과 부주(符呪)의 도술을 익혀 도교(道敎)의 조가 되었다.
방훈(龐勛) 당나라 때 사람으로 868∼875에 난을 일으켰다.
방랍(方臘) 북송 말기 절강성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마을에 모두 가시나무와 구기자나무가 생겨났고 마을이 잡목으로 우거져서 황폐해진 풍경을 표현한 말이다.
상봉(桑蓬) 상호봉시(桑弧蓬矢).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사방으로 쏘아 그 아이가 세상을 다스릴 뜻을 가지기를 축원하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고기를 먹을 계책 높은 관리가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건재 (健齋): 임진왜란 당시 의병 3장사의 하나인 김천일(金千鎰)의 호. 임진왜란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자살했다.
제봉 (霽峰): 광주출신의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의 호임.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석저(石底, 김덕령) (金德齡, 1567-1596):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와 연대 미상의 전기소설『김덕령전』이 있다. 광주 석저촌에서 태어났고, 왜놈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고 하였다.
금남(錦南, 정충신) (鄭忠信, 1576-1636):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이괄의 군사를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찌 곳집을 가리키며 지균(指囷): 주유(周瑜)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지나가다가 노숙(魯肅)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곳집 하나를 가리키며 가져가라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아낌없이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2품(品) 봉사(奉使)의 인신(印信) 군무아문은 1894년 6월 갑오개혁 당시 직제 개편으로 병조의 업무를 담당했는데 군무아문 대신은 2품의 품계를 지녔다. 봉사는 당시 군무아문 대신이었던 조희연(趙羲淵)을 가리키며 인신은 나무나 돌에 관리의 증빙을 표시하는 글자를 도장. 곧 군무대신이 발행한 도장을 뜻함.
수기(手旗) 직책을 적은 작은 기. 장수가 행진할 때 손을 가지는 상징 깃발로 직책에 따라 넓이와 색깔이 다름.
지자(持者, 지자군) 지자(持字). 지방 관아 사이에서 공문과 물건을 지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영사 (令辭): 사령. 임금의 지시 글을 적은 것.
녹림(綠林) 한말(漢末) 왕망 때에 왕광(王匡)과 왕봉(王鳳)등이 녹림산을 근거지로 하여 농민군을 조직하여 녹림군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동학군을 녹림군에 비유하였다.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 가 이끄는 일본군은 12월 3일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과 함께 남원에 도착한 뒤 남원에서 순창 · 장성을 거쳐 12월 10일 나주에 도착, 주둔해 있었다. 이두황군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12월 7일 순창을 출발해 12월 8일 구례, 12월 11일 순천, 12월 12일 광양에 도착, 주둔해 있었다.
장흥에 적들 12월 초순 전봉준이 태인전투에서 마지막 패전한 뒤 농민군은 일단 해산했으나 광주 나주에서 패전한 농민군과 합세해 장흥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장흥대접주 이방언의 지휘아래 주변 고을을 석권했다.
행진소(行陣所) 임시로 진영(陣營)이 머무는 곳, 자신의 군대진영.
반초(班超) (33~103): 후한(後漢)의 안릉(安陵)사람으로 자는 중승(仲升)이고 반고(班固)의 아우이다. 서역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군 진영의 대대본부(大隊本部) 중앙정부에서 이해 10월에 충청도 해안지방 토벌을 담당할 초토사로 홍주목사 이승우를 임명하고 이어 호남을 토벌할 초토사로 나주목사 민종렬을 임명하고 각기 초토영을 두게 했다. 패주 농민군이 남하하자 일본은 나주에 특별히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 소좌를 그 책임자로 임명하여 농민군 주요 지도자를 신문하거나 선별해 서울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태정(胎呈) 편지에 따로 적어 놓은 종이를 말한다. 별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서병무) 강진에는 병영을 설치하고 병사(전라병마절도사)를 두었는데 농민군이 장악하지 못했다. 태인 나주 등지에서 내려온 잔여농민군이 장흥관아와 강진 관아를 점령하고 나서 병영을 공격했는데 병사 서병무는 중과부족으로 병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강문안(姜文案) 문안(文案)은 고종 때 친군영의 벼슬이름을 말한다.
남영관(南領官) 남만리(南萬里)를 말한다.
수성패장(守城牌將) 수성군의 순찰 당번을 맡은 장교. 패장은 순찰 구역을 나눈 패의 우두머리.
향도(鄕導, 길을 안내하는 일) 향도(嚮導)로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갈 때에 안내를 하는 벼슬을 말한다.
수성집사(守城執事) 수성군의 서무를 맡아보는 임무. 수성군은 민간 군사여서 집사라 붙인 것이다.
곤륜의 옥과 돌 곤륜산은 중국 서방에 있는 최고의 영산. 이 산에 미옥이 나는데 보배로 침. 옥과 돌을 모두 태운다는 말인 옥석구분(玉石俱焚)과 비슷한 용례로 쓰임.
봉초(捧招) 죄인에게서 구두로 받은 진술을 말한다.
부산에서 1중대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대접주 유하덕 등이 지휘하는 농민군 수 만 명은 이해 12월 초순부터 여수 좌수영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했는데 11월 22일 다시 3차 전면공격에 나섰다. 당시 일본군 상선으로 가장한 쓰쿠바호(筑波号)를 남해 앞바다 일대에 파견했다. 축파호는 육전대로 싣고 부산에서 출발해 통영을 거쳐 여수 언저리에 도착했다. 좌수사 김철규의 요청에 따라 육전대를 상륙시켜 흥국사에 유진하면서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
귀국의 1중대가 부산에서 와서 진영에 도착 스즈끼(鈴木安民)가 이끄는 일본군 1중대(일본군 220명, 조선인 인부 150명)는 12월 4일 부산을 출발하여 12월 6일 진해, 12월 9일 하동, 12월 12일 순천, 12월 15일 보성에 도착하였다.
통위영(統衛營) 1888년에 친군영의 후영(後營)과 우영(右營) 및 해방영(海防營)을 합하여 개편한 군영을 말한다.
함선(艦船) 2척 위에서 말한 쓰쿠바호와 그 부속선인 조강호(操江號)를 말한다. 이곳 농민군은 장흥 강진 그리고 무안 해남일대에서 패주한 뒤 완도 등 여러 섬으로 들어갔다. 이곳 토벌을 맡은 이규태의 좌선봉진은 전함이 없어 섬으로 들어갈 수 었었다. 그리해 두 일본 함선은 여수를 거쳐 해남의 전라우수영을 중심으로 섬으로 들어간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통수(統首) 정부에서는 수성군을 조직하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시행해 서로 감시하게 하고 농민군을 색출하면서 통마다 통수를 두고 장정을 동원하거나 숨은 농민군 색출에 나서게 했다.
통관(通關) 관아와 관아 사이에 공문을 보낼 때 관문(關文)으로 통용하던 일을 말한다.
출진(出陣, 전투에 출동)한 영관(領官) 위급을 당한 각 관아에 일부 병력을 나누어 파견할 때 그 지휘자를 말함. 당시 여수 좌수영에 파견된 이주회는 우선봉장 이두황 다음의 서열이었다.
이방언(李邦彦) (1838-1895 : 榜 ,芳彦이라고도 함)장흥 토반이자 지주집안에서 태어난 학자 출신으로 1891년에 동학에 들어갔다. 18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장흥지역 집강소 활동을 주도하였다. 12월에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을 통솔하여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한 동학농민군과 함께 12월 5일 장흥전투, 12월 7일 강진현 점령, 12월 10일 강진병병 점령, 12월 15일 장흥 석대들전투를 이끈 지도자였다. 12월 24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천관산(天冠山) 장흥의 남쪽에 있는 산(높이 723미터). 이방언의 근거지인 용산 아래 관산과 대덕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 주변 마을이 농민군 집결지여서 패주 농민군이 이산 깊은 골짜기에서 숨어 지내다가 수 백 명이 잡혀 살해되었다 한다.
전 영장 겸 토포사(前營將兼討捕使) 경상감영(대구)의 영장인 지석영(池錫永, 우두 보급 의학자인 듯함)을 말한다. 지석영은 경상감영의 영장으로 있을 때 경상토포사로 임명되어 부산에서 들어온 일본군과 함께 경상도 남해지방 농민군 토벌에 참여해 하동 등지로 진출했다.
예강(汭江) 탐진강의 이명. 탐진강은 장흥지방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예전 제주도 사신이 온 나루가 있다고 하여 ‘탐진’(耽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상주(相州)의 기문(記文)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를 말한다. 고향에 돌아와 태평을 노래한다는 뜻을 담았다.
회서(淮西)의 비(碑) 당나라 때 회수의 서쪽 지방을 평정하고 그 공적을 기려 비를 세울 때 한유(韓愈)가 비문을 지었는데 뒤에 단문창(段文昌)의 글로 대신했다. 송나라 소식이 이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유명했다.(「舊唐書」에 나옴 )
모래를 머금어서 함사역(含沙)이 모래를 머금었다가 사람의 그림자를 쏘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데서 남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울분은 병이 되어 종택의 과하 종택(宗澤)은 남송 벼슬아치로 북쪽 정벌에 나서면서 하수를 세 번 넘었는데 늘 간인의 억제를 당했다. 그래서 근심으로 병을 얻어 죽으면서 큰 소리로 “내가 세 번 하수를 건넜다”고 외쳤다. (「종충간집」에 나옴) 종택을 의인으로 기렸음.
월석(越石)이 창을 베개 삼은 것 월석(越石)은 중국 진(晉)나라 충신 유곤(劉琨)의 자. 유곤은 나라에 충성하면서 늘 노심초사했는데 친구에게 “나는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吾枕戈待旦)이라고 말했다.
취초(取招) 죄인을 문초하여 사실을 진술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보고서나 편지를 말한다.
김방서(金方西) 바른 이름은 김방서(金邦瑞). 금구 출신으로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동향의 일가라 한다. 그는 대접주로 활약하면서 능주로 패주했다가 잡혔다.
사접주(私接主) 동학 교단 또는 대도소에서 임명치 않고 개별 접주가 임명한 방계조직. 동학 도는 농민군 조직은 지역 인맥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차치구(車致九) (1851-1894) : 정읍 입암면 마석리 빈농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전봉준의 권유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정읍의 책임자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동원하였다. 2차 봉기 때도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전봉준의 주력군이 원평 · 태인전투를 벌일 적에도 행동대로 활약했다. 그는 전봉준이 체포되기 직전 순창 피노리까지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흥덕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 체포되어 재판없이 효수되었다. 그의 아들 차경석은 동학계통인 보천교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다.
숙정과 패 (肅靜牌): 군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할 때 정숙하라는 표시로 ‘肅靜’ 두 글자를 나무패에 새겨 세우는 표시. 이것이 전용되어 군사 또는 군령을 시행하는 뜻으로 쓰였다.
고부 · 장성 · 전주에서 싸울 때 이해 봄 전봉준 주도의 1차 봉기를 말한다. 당시 농민군은 장성에서 초토사 홍계훈의 군사를 장성에서 깨고 원평에서 고종이 보낸 사자인 배은환 등을 살해했다.
명례궁(明禮宮) 논의 도조(賭租) 명례궁은 덕수궁의 옛 이름. 왕자군(王子君) 비빈 공주 옹주 등에 궁호를 붙이고 궁방전을 주어 경작농민에게서 수세 또는 도조를 받게 했다. 이들 궁방전이 전국 곳곳에 있어 농민수탈의 표본이 되었다.
영사(營使) 각 영(營)의 절제사를 말하는 듯하다.
육군성(陸軍省)에는 대신 한 사람 군무아문은 갑오개혁 때 병조의 임무를 받아 개편했는데 이해 11월에는 다시 개편해 명령계통을 일원화했다. 이 과정에서 무관출신인 조희연이 대신 서리에서 정식 대신으로 임명받았다. 고위직에서 육군 무관출신은 자신 하나 뿐이라는 뜻이다.
천 사람의 참언 이두황은 군비를 현지 관아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에 따라 각 고을에서 과도하게 물자를 거두어들였고 그 군사들은 골골에 들어가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많은 비난이 쏟아졌고 일본군은 이를 이노우에 공사에게 보고했고 이노우에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정식으로 개화정부에 시정해달라고 항의했다. 이런 사정을 말한 것이다.
경귀(京貴, 경병) 경병(京兵)을 일본군 소위가 가리켜서 한 말이다.
병부(兵符) 인부 병부: 도장과 병부를 말한다. 그러나 인부는 행정관계 수령이 가지고 붉은 도장을 찍어 먹물 도장을 찍는 사사 기관의 것과 구별한다. 병부는 나무패로 만들어 발병(發兵)이라 쓰고 임금과 지휘관이 반쪽씩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군사동원이 필요할 때 임금이 그 반쪽을 내리면 이를 맞추어 보고 동원하는 증빙이다. 그래서 인부와 병부는 지방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목사 부사에게는 가장 소중한 표신이다.
문이(文移) 이 관청에서 맡았던 한 사건의 처리를 다른 관청으로 옮겨 보낼 때에 보내는 글을 말한다.
돈령(敦寧) 돈령부의 직책을 맡은 벼슬아치. 돈령은 글자 그대로 왕과 가까운 모든 친인척의 돈목을 위하는 것을 말한다. 돈령부는 이런 사무 처리를 위하는 기구였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 종정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상사(上使) 사또 곧, 이두황.
태정 (太正): 대정(大正)의 오식. 동학 교단에는 6임의 직책이 있었고 집강소에도 이를 원용했다.
장흥부사의 아들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이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죽음을 당하여 그의 아들이 부고를 받고 달려온 것을 말한다.
죽산(竹山) 포교(捕校) 포교는 관아의 딸린 군교의 하나. 이두황은 죽산부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때때로 진행사항을 보고했다. 그 상급기관인 경기감사는 이두황의 불법사실이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고 그 결과는 오히려 이두황의 전공을 인정해주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포제(褒題) 감사가 관하 수령의 업적에 대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을 말한다.
구군(寇君, 寇恂)을 빌리기를 바라는 처지 후한(後漢) 때에 선정을 베푼 지방관으로 그가 교체되어 떠나간 뒤에 백성들이 다시 오게 해 달라고 애원한 고사를 말한다.
논보(論報) 아랫 관청에서 윗 관청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잡색(雜色) 잡색군(雜色軍)을 말하는 듯하다. 향리 · 서리 · 관노 · 공사천(公私賤)으로 구성되고 25명을 1대(隊)로 편성하였다.
좌수영문(左水營門)에서 행진(行陣) 순천 수성군들은 김인배 등이 좌수영을 공격할 때 출동해 주변 마을에서 무수한 악행을 저질렀다. 이를 일본군 또는 지시를 받은 이두황과 순천부사는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관(移關) 다른 관청으로 사건을 넘길 때에 문서를 갖추어 보내는 것을 말한다, 관자(關子)를 넘긴다는 뜻이다.
부산항(釜山港) 감리서(監理署) 1876년 개항 이후 인천 부산 원산 세 곳에 감리서를 두고 외국 관계의 여러 업무를 보게 했다. 그 중에 부산감리서에서는 주로 일본 관계 업무에 집중했다. 농민전쟁 당시 감리서 관계자들은 전보를 통한 보고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일본어 통역관 현영운은 심지어 관계사실을 정부에 모조리 보고했다.
광양의 섬계역(蟾溪驛) 이해 12월 10일 섬계역 상동의 민인들이 도접주 전갑이, 도집강 정홍섭을 참수하고 농민군 27명을 포살하는 활동을 벌였다. 드믈게 그 학살한 농민군 명단을 적은 「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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