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금일 10월 24일에 충청감영의 적이 10리 밖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길을 재촉하여 진군한 사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또한 당일 신시경에 금강 장기진(將旗津)에 이르러 공주부에 들어갈 여유도 없이 곧 납교(蠟橋)의 후봉에 올라 적의 전세(戰勢)를 바라보니 적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 깃발을 벌려 세우고 수십 리의 산꼭대기에 뻗쳐 있는 것이 마치 병풍으로 둘러싼 것과 같았습니다. 서로의 거리가 1리쯤 되는데 중간에 하나의 개천과 큰 들이 있어 총탄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였고 날은 이미 어두움에 임박하여 형편상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우금치·금학동·효포봉·납교후봉 및 동쪽 갓 산성의 요해 각처에 적을 바라보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25일 새벽에 선봉이 통위영 영관 이하 2개 소대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진을 벌였으나 형편상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염탐하니 이른바 저들의 주력 부대는 효포봉 건너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통위진영의 건너편에 있는 적진은 모두 성원(聲援)하는 적이어서, 납교 후봉(後峰)의 앞과 효포봉의 방어하는 곳은 남북으로 뻗힌 서로의 거리가 수 십리 정도이고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음에 한 곳으로만 진격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효포 등지를 방어하는 각 진에 명령하여 곧바로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 진을 헤아리고 독촉하여 함께 진격했는데, 이때에 통위영 대관 신창희·오창성, 교장 김상운·박상길(朴相吉)이 용기를 분발하여 격렬하게 나아가 위험을 돌보지 않고 총을 쏘면서 앞장서 인도했고 또 군사를 독촉하여 곧바로 적진을 향하면서 어지럽게 총을 쏘아 ≪적을≫사살하였습니다. 적은 총탄에 맞은 자가 5·60명이 되고 부상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선봉이 한 번 꺾임에 산꼭대기에 올라 벌려 서서 바라보던 적은 모두 산에서 내려 후퇴하여 도망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전과 같이 군사를 거두어 방어하였습니다.
당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경, 서산 군수 성하영이 올린 보고[牒呈] 내용에 24일로부터 25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경에 이르기까지 적을 방어한 일은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적과 더불어 싸운 것이 이미 이틀이 지났지만 적은 조금도 후퇴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대관(隊官) 윤영성·백락완이 군사를 나누어 3가지 길로 함께 공격하여, 전투가 반나절이 되어서 수십 명을 사살하자 적이 비로소 후퇴하였습니다. 때문에 추격하여 대포 2좌(坐)와 총·창·탄약·깃발 등을 빼앗았고, 저들은 흩어져 산꼭대기로 피하였습니다. 격퇴하고 있을 즈음에 선봉진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관 백락완으로 하여금 부대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게 하여 이미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 가까운 산꼭대기에 퍼져 있고 군수가 거느린 군사는 지금 4일 밤낮으로 싸우면서 잠시도 쉬지 못하여 힘이 다 빠져 전투에 임하여 힘을 쓰지 못하니 송구함을 가누지 못합니다. 이에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동시에 안성군수 홍운섭의 보고한 내용에 금월 24일 대교(大橋)로부터 공주목으로 돌아와 주둔한 사유를 이미 보고 드린 바 있습니다. 당일 술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명령을 받아 군수는 대관 조병완과 함께 소대 한 개의 병력을 거느리고 금강의 진두에 나아가 지켰고, 참령관 구상조는 참모관 이상덕·신효식(申孝湜)·황승억(黃昇億)과 대관 이상덕, 교장(敎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혁(李章爀)·우기준(禹基埈)·장대규(張大奎)와 함께 소대 한 개를 이끌고 봉수현(烽燧峴)을 지켰습니다. 그 이튿날 25일 인시(寅時, 오전 3∼5시)경에 받은 전령에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적과 더불어 웅치에서 서로 버티고 있은 지 며칠이 되어도 적의 기세가 심히 커서 ≪우리가≫ 소홀함이 있을까 염려스러워 길을 나누어 지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군수는 다만 20명만 대동하여 전날처럼 파수를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관 조병완을 시켜 군수가 대동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부터 오른 쪽을 공격하게 하였고, 참령관 구상조는 그가 거느린 장졸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그 왼쪽을 공격하였습니다. 서산군수 성하영이 지난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는데 적의 기세가 과연 들은 바와 같아 산과 들에 가득하였습니다. 소위 추장(酋長,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이란 자가 가마를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 깃발을 날리며 호각을 불고 벌떼처럼 옹호하면서 다가 왔습니다. 3곳으로 부대가 진격하여 한나절을 힘껏 싸워도 승부를 알 수 없더니 포시(晡時, 오후 3∼5시)에 이르러 70여 명을 사살하고 2명을 사로잡고 군기(軍器)를 뺏으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여 조금 후퇴한 뒤, 들 건너 바라보이는 시야산(時也山) 능선에 모여 진을 쳤습니다. 해는 이미 저물고 군사도 피로하여 서로 교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또한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오경(五更)쯤 되어 여러 적은 어두움을 타고 도주하여 남쪽의 30리 쯤 되는 경천점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승리하였다고 하여 방어를 소홀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각별히 단속하여 전과 같이 파수를 세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숫자와 뺏은 기물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겠거니와 2번 접전할 때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으니 심히 다행한 일입니다. 적의 기세는 저와 같이 크고, 우리 관군[王師]은 사방으로 나누어 방어하여 형세가 매우 고단하였으나, 장졸 이하 각 부대의 병사들이 오직 강렬한 충성심으로 몸의 고통을 잊고 힘을 내어 진격하면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을 모두 섬멸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크게 적의 기세를 꺾어 날뛰지 못하게 하여 물러가서 형적을 숨기게 하였으며 사살한 자도 적지 않고 기물을 뺏은 것도 심히 많았는데 적의 큰 부대를 탈환함이 더욱 가상합니다. 이튿날 오시(午時)경에 경리청의 병정 12명은 적의 남은 무리가 모여 진을 친 곳을 바라보고 갑작스럽게 그들의 대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하니 적들은 놀라 겁을 먹고 도주하였으며, 회선포(回旋砲)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수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의 소굴 뒤를 엄습하였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당장에≪사기를≫격동시키고 권장하는 상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포를 뺏은 경리청 병정 12명에게 은전(銀錢) 1푼씩 시상하였습니다. 각 영에서는 많지 않은 군사로써 각처에 나누어 진을 치고 적은 수로써 많은 적과 접전할 때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는데, 이는 왕의 신령이 미친 것으로 엎드려 기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각 영의 적을 사살한 수효와 탈취한 적의 물품 숫자를 하나하나 책자를 만들어 올려 보낼 것입니다.
제(題): 도착한 문서는 임금에게 아뢸 것이며, 전후로 거듭 두 번을 승리하였다고 하니 장수의 기개와 명령에 잘 따른 병사들이 극히 가탄할 일이다. 경리청 군사가 회선포(回旋砲)를 탈취한 일은 기특한 공이다. 아울러 가상한 일이니 책자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