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두 진영의 군사가 이인과 판치의 두 곳에서 번갈아 방어하겠다는 내용의 보고를 이미 올린바 있습니다. 초 8일 미시(未時, 오후 1∼3시)경에 판치에 주둔한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구두로 전한 급보에 의하면, “당일 미시 경에 비도 몇 만 명이 경천점에서 곧바로 올라오고 혹은 노성현(魯城縣)의 뒷산에서부터 산으로 올라와서 포위하니,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러우며 고함소리가 함께 나왔습니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막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효포·웅치 등지의 요새라 할 수 있는 높은 봉우리에 나아가 진을 치고 특별히 지키고 멀리서 조망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례로 도착한 이인에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이 구두로 전한 급보의 내용에, “비류 몇 만 명이 논산의 직행로에서 고개를 넘어 공격해 오고 또 몇 만 명은 오실산(梧室山) 길을 따라 우리의 뒤를 끊어 포위하여 머무는 지라. 한편으로는 일본군 장교에게 보고하여 군사를 동원하게 하고 또 부대에 머문 통위영의 군사 2개 소대를 파견하게 하여 나누어 보내서 지원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연이어서 판치에 있는 부대의 급한 보고에서, 효포와 능치(陵峙)의 방어선 뒤로부터 비도들의 무리가 산과 들에 가득하고 비록 곧바로 올라오지는 못하지만 두루 잡색의 깃발을 꽂아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워질 무렵에 이르러도 아직 별다른 소요스러운 정형은 없었습니다. 이어 이인에 주둔한 부대의 긴급한 보고 내용을 접하니 두 길의 적병과 더불어 힘을 다해 교전하여 적의 복부와 등의 두 적을 격퇴시키니 10리 쯤 되는 우금치에 물러가 머물렀습니다.
술시 경에 이르러 우리 두 부대의 병사와 군수물자에는 손실된 것이 없었으며, 다만 좌 2소대의 병사 김명수(金明壽)가 왼쪽 어깨에 실탄을 맞아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밤은 깊어 다시 정세를 정탐할 수 없고, 지형이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후속 군사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후퇴하여 우금치에 진을 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거느리고 있는 서산 군수 성하영과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이인 지역을 지원할 때에 복부와 배후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몇 만의 비류를 사살하여 격퇴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병사들에게 명하여 전군이 후퇴하여 주둔하게 하였으니 만일 힘을 분발하여 몸을 바치지 않았다면 이런 전과를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각처에서 적을 방어하고 관망하는 일은 특별히 단속을 가하게 하였고 일본 병사의 사관(士官) 육군 보병 대위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우금치로 나가 일제히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초 9일 새벽에 적진의 형세를 정탐하니 각 진의 바라보이는 곳에 깃발을 두루 꽂았는데 동쪽은 판치 뒤 봉우리에서부터 서쪽으로 봉황산의 뒤 봉우리에까지 3∼40리를 이어 뻗쳐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하고 매우 커서, 우리 군대가 미약한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금학(金鶴)·웅치·효포의 건너 봉우리에 있는 비도들은 10리쯤 서로 바라보이는 높은 봉우리에 나열하여 진을 치고 때로는 고함소리를 지르며, 때로는 포를 쏘아 항상 공격할 기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학동에서 방어하는 통위영 대관(隊官) 오창성(吳昌成), 교장(敎長) 박상길, 웅치의 2곳에 방어하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대관 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 참모장 이상덕(李相德)·황승억(黃昇億), 별군관(別軍官) 유일환(兪一煥), 교장(敎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혁(李章爀)·우기준(禹基埈)과 효포 봉수의 방수 통위영 영관 장용진(張容鎭), 대관 신창희(申昌熙), 교장 김상운(金相雲)에게 특별히 명하여 각각 요해처를 관망하도록 단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비의 정형은 종일토록 출몰하여 곧 공격해 올듯하였고 조금만 소홀하면 산에 올라 시험하고 포를 쏘면 갑자기 몸을 피하니 만일 적이 유혹하는 계책이 아니면 필시 많은 군사의 지원을 요하는 것이니 우리의 단속하는 바가 교전할 때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우금치의 서쪽과 남쪽 2곳의 적도(賊徒)들은 고함소리를 시끄럽게 내면서 항상 공격할 듯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주둔한 서산 군수 성하영, 경리청 영관 윤영성·백낙완에게 명하여 일본 병사와 더불어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경으로부터 비로소 포를 발사하고 몇 차례 적과 교전하였으며 일본 병사는 진을 벌려 앞 봉우리에 올라 총과 포를 몇 십 차례 발사하니 적의 피살자가 많아 감히 가까이 범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과의 차이가 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미시 경이 되어도 격퇴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성심으로 분격하고 사졸들이 분개할 때 참모관 전 도사(前 都事) 권종석(權鍾奭)과 참모사 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 유학(幼學) 정도영(鄭道永) 등은 사졸들을 단속하여 용감하게 전진토록 하였습니다. 본영에서 아뢰어 별군관으로 임명한 출신(出身) 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前 監察) 이재화(李在華), 전 중군(前 中軍) 이종진(李宗珍), 전 수문장(前 守門將) 유석용(柳錫用), 전 부장(前 部長) 박정환(朴晶煥), 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 본 진영에서 군관으로 임명한 전 오위장(前 五衛將) 황범수(黃凡秀), 유학(幼學) 이주서(李周瑞), 사과(司果) 이선(李璿), 경리청 교장 김명환·정재원(鄭在元)·장대규(張大奎)·정인갑(鄭寅甲) 등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올라가서 분발하여 사살한 적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비류들을 계속 진격하여 쫓아가서 적진의 높은 봉우리를 탈환 점거하고 병기와 대포 및 깃발 6·70개를 탈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장교 대위를 비롯하여 일본 병사들과 함께 중로를 따라 남으로 향하면서 적을 쫓았습니다. 공주 영장(營長) 이기동(李基東)은 그 진영의 수교(首校) 박준식(朴準植)과 병교(兵校) 박춘식(朴春植)·안재후(安在厚), 집사(執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 좌별장(左別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송시원(宋始元), 장무군관(掌務軍官) 정평오(丁平吾) 등 그 진영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봉황산 뒤 원봉(圓峯)의 능선을 지키다가 분발하여 북쪽에서부터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진격하여 적을 쫓아냈습니다.
경리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황승억 등은 웅치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방어하다가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의 길에서부터 왼쪽을 따라 돌격하여 힘을 합쳐 교전하면서 10리 쯤 되는 곳까지 쫓아갔으며 경리대관 윤영성과 백락완 등은 우금치의 동쪽 최고봉을 방어할 때 계속해서 올라오는 몇 천 명의 동비들을 힘을 합쳐 방어하여 사살하고 격퇴시켜, 다행히 방어하는 데 실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비도(匪徒)가 도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해가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병사들을 모두 철수시켜 우리 진영으로 돌아오게 하니, 끝내 섬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참모관 전 학관 이구영(李龜榮)과 유학 이승욱(李承旭), 전 사과 신효식·이윤철(李潤徹),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알을 조달하여 보내와서 각 부대로 하여금 조금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병사들을 단속하여 방만하게 순서를 잃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충청감영의 지형은 서북쪽의 큰 길이 큰 강이 횡류(橫流)하는 곳에 이르렀고, 산성은 험한 곳을 의지하고 있으며, 동남의 산세는 높은 봉우리와 절험의 요새로 다만 몇 갈래의 도로가 있기 때문에 비록 성곽의 방어선은 없으나 본래 믿고 방어할만한 곳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아! 저 비류 몇 만 명의 무리가 4∼50리를 이어 포위하여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으면 다투어 점거하여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으로 가며 좌측에서 번쩍 우측에서 번쩍하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려고 하니 저 무슨 의리며 무슨 담략입니까? 그들 실정을 생각하면 뼈와 마음이 떨리는바 우리의 이와 같은 병력으로 전후좌우에서 대비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사람마다 힘을 다하여 용기를 내어 먼저 오르지 않는 자 없으나 마침내 토벌하여 섬멸하지는 못하여 비류가 아직도 날뛰고 있으니 절통하고 한탄스럽습니다.
다행히 일본군의 대위와 각 부대의 장졸 및 종군하는 여러 사람과 토병(土兵) 민정(民丁)의 분투하고 합심한 노력에 힘입어 적의 기세는 조금 꺾였으나 남은 잔당이 아직 많으니 사실상 헤아릴 수 없는 정형이 있습니다. 때문에 전처럼 방어하게 하여 더욱 적을 살피게 한 바 이와 같은 미약한 병력으로 갖은 고생을 한지가 벌써 6∼7일의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싸움을 크게 치른 뒤에도 밤에 노숙하였기 때문에 극히 고통스럽습니다.
경리청 좌 2소대 병사 남창오(南昌五), 중 2소대 병사 김관일(金寬一)은 분발하여 앞에서 싸우다가 남창오는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 김관일은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몸을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어제 총탄을 맞은 병사 김명수와 함께 치료케 하였으며 비류가 날뛸 때는 성에 가득한 백성들이 울면서 도망쳐 잠시라도 보전하지 못하는 듯하여 보이기에 매우 참담하더니 승리한 뒤에 미쳐서는 노소 백성들이 각각 뺏은 깃발을 가지고 기뻐 뛰면서 각 부대와 아문에 알리고 한편으로는 울면서 한편으로는 웃고 기뻐하니 하늘의 뜻과 민심은 환하게 일치되었습니다.
위에 부상한 두 병사와 분발하여 먼저 적진에 오른 장졸과 참모 군관은 비록 직분에 맞는 일을 했으나 포상하여 권면하는 법에 합당하되 감히 함부로 편의에 따르지 못하겠고 탈취한 무기는 책자를 만들어 위에 보고할 것입니다. 무기를 탈취하여 부대 앞에 바친 병사는 뒤에 마땅히 구별하여 보고할 계획이며, 군관인 전 오위장 황범수, 사과 이선, 유학 이주서 등은 우선 임금께 아뢰어 임명케 해서 권면하여 본받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뒤의 상황은 아울러 차례로 보고 하겠습니다.
제(題): 보고문은 도착하였거니와 임금에게 아뢸 것이며, 장관(將官)의 적개심과 사졸들이 잘 따라서 행군한 이후로 가장 큰 승리이다. 극히 가상한 일임에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하고 남은 잔당이 아직 성행하고 괴수를 잡지 못하였으니 이는 앞으로 크게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병사들을 진격하도록 하여 섬멸하기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회에 따라 특별히 도모할 것이며 부상을 입은 3명의 병사는 각별히 구제하고 간호하며 이후의 상황을 계속 보고하고 청한 바 3명의 군관은 다시 공을 세우기를 기다려 포상할 것이다.
나머지는 갑오년(1894년) 11월 27일 관보의 공산초비기(公山勦匪記) 안의 이인지역(利仁之役)과 28일 관보의 효포지전(孝浦之戰), 29일 관보의 우금지사(牛金之師)를 보고 참고할 것.
광무 2년(1898년) 무관학교 시험 보일 때와 광무 4년(1900년) 무관학교 시험을 보일 때 시관(試官) 신기선(申箕善)의 제(題)에, “이규태가 전봉준을 격파한 보고서로 시험을 치른다”라고 하고 일성록(日省錄) 편집관(編輯官) 이승욱(李承旭)의 제문에 요약하여 이르기를, “아! 공은 진실로 죽지 않았도다. 대저 효포의 전투와 우금치의 승리는 어찌 공의 웅도대략(雄圖大畧)이 솟구치고 출몰함과 방불하지 않겠는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