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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선봉진일기 先鋒陣日記
일러두기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17일에 도착한 통위영 영관 장용진의 보고한 내용에 금월 14일 진시 경에 선봉의 대 부대가 동시에 출발하여 참모관 권종석(權鍾奭), 군관 유석용(柳錫用)·이지효·황범수·이주서 등이 유시 경에 용수막의 30리 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숙박하고 선봉진은 공주로 돌아와 주둔한 뒤에 일본군 대위가 거느리는 부대와 더불어 각각 배치할 것을 정하고 해시 경에 일본군 대위의 지시에 의하여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 등을 이인에 보내어 장위영의 부대에 머물렀다가 곧바로 노성읍의 서쪽 길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 대위의 부대는 노성의 봉수봉 뒷길을 따르게 하고 본진은 경천 길을 따라 곧바로 노성의 동쪽 길로 들어가 모두 세 곳의 길을 따라 자시 경에 출발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상지(相池)로 간 좌 3소대의 군사도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려 때에 맞춰 출발하여 곧바로 노성의 동쪽 길로부터 적진이 있는 곳에 달려 들어가니 날이 샐 무렵에 도착하였습니다.

소위 둔취해 있던 적은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여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총을 쏘아 서로 신호로 응하니 봉수봉의 뒤에 있는 일본 군사와 서쪽 길에 진군한 장위진이 일제히 신호에 응하여 양쪽 길에서 달려옴에 그 형세가 산악과 같은 바 일제히 노성읍으로 진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적을 쫓아 체포하여 각각 그가 잡은 것들을 모조리 사살하였습니다. 비류가 논산 등지로 도주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길을 나누어 추적하니, 과연 대촌(大村)의 뒤 원봉(圓峰) 위에서 깃발을 이어 세우고 간간히 포를 쏘아 몹시 놀라웠기 때문에, 군사들을 독촉하여 대관·참모·별군관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쫓아 올라갔습니다. 약간의 진을 치고 모여 있는 적이 모두 도주하기 때문에 그 곳을 탈취 점거하여 적의 깃발을 뽑아버린 뒤에 기를 흔들어 서로 응하여 관군의 점거를 알게 하였습니다.

또 봉수봉과 고봉을 바라보니 진을 치고 모인 무리가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몇 리쯤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승승장구하면서 총을 쏘고 일본 병사와 함께 일제히 진격하면서 진세를 유지하고 오르면서 쟁탈 점거할 때에 장위영 부대는 또 한쪽에서 진군하여 와서 힘을 합하여 토벌하면서 모두를 쫓아 보내고 한편으로는 총을 쏘면서 쫓아가 죽인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많았습니다. 10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해가 저물어 각 부대는 논산 등지로 돌아가 주둔하였습니다.

몇 백의 여염집은 모두 비어 있어 걱정이 되고 참혹하였으며, 밤이 지난 뒤 그 이튿날 16일에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적들의 자취는 전연 볼 수 없었습니다. 전해 들으니 그들은 호남의 경내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각 부대는 노성읍에 돌아와 주둔하려고 강촌(江村)에 도착하였는데 화약을 제조한 곳이 있고, 또 접(接)을 설치한 장소가 있다는 것을 들었기에 참모관·별군관 등이 병사 몇 사람을 거느리고 곧바로 그 집에 들어가 화약을 만드는 기구를 모두 깨버리고 남은 깃발과 짚신, 잡물 등을 부숴버렸습니다.

일본군 대위의 지휘에 따라 경천점의 앞길에 주둔하여 경비하였으며 각 부대의 장졸은 한명도 부상한 자가 없고 노획한 군수 물자와 칼을 가지고 적진에 먼저 오른 장졸의 성명은 차례로 책자를 만들어 보고할 것입니다.

다음에 도착한 장위영 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전령으로 인하여 정산에서부터 출발하여 금월 14일 이인에 주둔하여 숙박한다는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당일 해시 경에 선봉진 참모관이 와서 일본군 장교의 지시를 전하되 곧바로 용수막에서 군사를 합치라고 하기에, 당일 자시 경에 행군하여 용수막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를 접견하니 앞으로 노성의 적과 싸울 것인데, 길은 3갈래로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본 부대는 서쪽의 길을 따라 날이 밝기 전에 전투할 곳에 이르러 서로 접응하자고 하였기 때문에,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의 주산 서남쪽의 능선에 도착하니 날은 아직 밝지 않았습니다. 암석의 송림 숲 사이에 군사를 잠복시키고 적이 모인 곳을 바라보니 먼 곳에 불빛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노성읍인 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요하여 아무런 소리가 없어 몰래 잠복하고 밝기를 기다렸으나 1시간쯤 지나도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불빛이 먼저 주산에서 솟아오름에 우리 군사들이 먼저 점거한 줄을 짐작하고 그대로 빨리 걸어 전진하여 노성읍에 향하니 주민들이 전하기를 적은 어제 이미 도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관 이규식(李圭植)을 보내어 일본 병사의 약속에 따라 노성읍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하여 논산의 10리 쯤 되는 초동(轈洞)에 이르러 식사를 하고 물을 마시며 잠시 머물렀는데 이미 일본군사가 통위영 병사와 함께 논산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듣는 즉시 장비를 갖추고 뒤를 따라 겨우 몇 리를 행하니 ≪어떤 병사가≫말을 급히 몰면서 와 보고하기를 논산에는 적이 들에 가득히 있으면서 관군을 막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전진하였습니다. 몇 리를 못 가서 전투 현장에서 총소리가 들판을 울렸으며 적병의 깃발이 해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우리 부대의 군사가 총소리를 듣고 깃발을 보며 사기가 솟아 앞에 달리던 여러 장관(將官)이 부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뒤를 따라 지원하였습니다. 일본 병사와 통위영 병사가 이미 소토산(小土山)의 적진을 탈환하고 적의 깃발을 휘두르면서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에 우리 부대의 병사들도 일제히 소리를 내어 호응하였으되 적진은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무리를 정돈하여 몇 보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후퇴하여 은진(恩津)의 황화대를 거점으로 삼았으므로 장차 다시 돌진할 염려가 있었습니다.

일본 병사와 통위영 병사들은 먼저 적진을 격파하여 피로할 것을 헤아리고 우리 부대가 앞의 언덕을 점거하여 적정을 정찰하니 적이 황화대를 지키고 있었는데 형세는 오뚝하게 홀로 큰 들 가운데에 서 있고 사방의 능선이 조금씩 외워 있고 가운데의 봉우리는 평평하고 사방에서 외운 산은 천연적으로 성곽이 되어 있었습니다.

망원경[遠照鏡]으로 살펴보니 주위가 심히 넓었으며, 적병이 사방에 서서 각양의 총을 번갈아 발사하니 그 소리가 각각 달랐습니다. 천보총(千步銃) 소리는 크고 탄환은 멀리 가며, 후문총(後門銃) 소리는 약하고 탄환은 빨리 날며, 화승총(火繩銃) 소리는 빈 소리를 내며 탄환은 가까이 떨어지는데, 뒤섞어 마구잡이로 발사하여 탄환이 멀리 날아가거나 가깝게 날아가서 마치 곡식이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충분의 용기가 격동하였기 때문에 날랜 적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대관 윤희영·김진풍(金振豊), 별군관 윤지영(尹摯榮)·이겸래(李謙來)를 파견하여 2개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의 서쪽 넓은 들 가운데를 따라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참령관 원세록에게 소대원의 반을 주었으며, 뒤쪽에 의병(疑兵)을 만들어 대관 박영호(朴永祜)·이규식(李圭植), 별군관 김광수(金光洙)와 더불어 몸소 3개 반의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의 동북쪽 작은 능선을 따라 큰 고함을 내면서 곧바로 올라가 적의 서쪽을 격파하여 포위하니 적은 남쪽의 능선을 향하여 도주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부대의 장졸을 지휘하여 고함을 치면서 쫓아가 그 뒤를 압박하여 공격하니 남은 적 천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새벽하늘의 성근 별 같고 추풍의 낙엽과도 같았습니다.

길에 버린 총과 창이며 밭가에 있는 시체는 눈에 걸리고 발에 차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서산에 해는 걸리고 바닷바람은 점점 일어남에 지는 해를 돌리지 못함을 탄식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병사를 수습하여 드디어 황화대에 주둔하면서 마을의 여염집을 찾아 식사를 하게하고 풍설을 무릅쓰고 밤을 새웠습니다. 이날의 전투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제반 일을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와 함께 하면서 보니 모리오가 마음을 쓰면서 힘을 내는 것이 실로 흠탄(欽歎)할만 하고, 우리 군사가 몸을 버리고 명령을 따르는 것도 가상하였습니다.

이튿날 모리오(森尾)의 지시에 따라 노성읍으로 회군하여 주둔하게 하였으며 회군하던 길에 은진 묵동(墨洞)이 화약을 만드는 곳이란 것을 탐문하여 들었기 때문에 참령관 원세록을 시켜 그 마을에 들어가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사살한 자가 7명이고 나머지는 타일러 석방하였으며 화약을 만드는 기구는 모두 부숴버렸습니다. 어느 지방에 머물러야 할는지 다시 명령을 기다려 거행할 계획입니다.

접전할 때 적에게 부상을 입은 병사 김치순(金致順)은 보부상(褓負商)에게 업혀서 공주 판관(判官)에게 보내어 치료받게 하고 식사하도록 한 연유를 보고합니다. 이번 노성과 논산 두 곳의 승리는 비록 괴수를 섬멸하여 다 죽이지는 못 하였으나 사살한 자와 익사한 자가 대략 수 삼백 명이 넘었으며 이미 나무로 새긴 인장(印章)을 뺏고 또 저들의 이른바 괴수의 깃발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비록 흩어졌다하나 또 호남등지에서 날뛰는 것은 극히 통분하고 한탄할 일입니다.

힘을 내어 충의에 분발하여 명령을 받고 적진에 먼저 오른 각 부대의 장졸은 포상하고 권면하는 합당한 법이 있으니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통위영에서 뺏은 군기의 물자를 책자로 만들 것과 장위영의 죄인성책(罪人成冊)을 아울러 잘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지금 충청도 왼편에는 아직 동비가 모여 진을 치고 소요스러운 보고가 없으니 점점 깨끗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포(內浦)의 임천(林川)·한산(韓山) 등의 읍과 서산·태안 두 읍은 아직 섬멸하여 안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경리청의 두 소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급히 차례로 보고할 계획이라는 연유의 일입니다.

주석
소토산(小土山) 논산에 있는 작은 산으로, 은진(오늘날 논산시)의 황화대가 있는 토성과 함께 평야에 솟은 산이다.
망원경[遠照鏡] 당시 일본군과 관군은 적진을 관찰할 때 망원경을 이용하였다. 그 때에는 원조경이라 불렀다.
화승총(火繩銃) 화승으로 불을 당겨 발사하는 구식 총으로, 화승은 화약심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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