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가 첩보합니다.
동도(東徒)가 충주(忠州) 무극(無極) 장터에 모여 있기 때문에 그들을 초포(剿捕)하기 위하여 이 달 초9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죽산부(竹山府)로부터 떠나 행군하여 30리 거리의 음죽(陰竹) 돌원(乭院)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인 초10일 20리 거리의 무극에 이르러 그들의 거취를 염탐하였더니, 그들은 괴산(槐山) 지방으로 옮겨가서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행군하여 20리 거리의 음성현(陰城縣)에 이르러 유숙하면서 그들의 소식을 염탐하였더니, 그들은 괴산 산성을 불 질러 함락시키고 이내 청주(淸州) 등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순무영으로부터 ‘청주로 달려가서 지원하라’는 전령도 이미 있었고, 또 동도도 청주 지방으로 옮겨가서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 초포를 응원하기 위하여 11일 청안현(淸安縣)으로 가서 유숙하고, 그 다음 날인 12일 40리 거리의 청주성에 도착하였더니, 경리청(經理廳)의 장졸들이 먼저 도착하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유숙하면서 숙의하여 계책을 정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인 13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 본진(本陣)은 경리청(經理廳), 진남영(鎭南營)의 장졸들과 함께 행군하여 보은(報恩) 장내(壯內)에 있는 동도의 소굴로 향해 갔습니다. 40리 거리의 미원점(米院店)에 이르러 저녁밥을 먹은 뒤에 경리청 장졸들은 그대로 미원점에 머물러 뒤에서 응원하기로 하고, 본진과 진남영의 장졸들은 곧 행군하여 5경에 30리 거리의 보은 구현(龜峴) 영점(嶺店)에 도착하였는데, 고갯길은 가파르고 험악하며 골짝은 깊고 밤은 이미 깊어서 적의 정황은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대로 군사를 머물러 밤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 날인 14일 새벽에 재를 넘어가 아침밥을 먹은 뒤에 진남영의 장졸들은 곧장 보은읍으로 가서 유진(留陣)하고, 본진 장졸들은 곧장 장내로 들어갔더니, 동도는 이미 이 달 11일 청산(靑山), 영동(永同) 등지로 옮겨가서 모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보은 장내리의》 상황을 점검하였더니, 비류가 거접한 초교(草窖, 초막)는 4백여 곳이 되고, 당해 동네 가호는 2백여 호가 되는데, 온 마을은 거의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약간 남아 있던 사람들도 멀리서 우리 행진(行陣)을 바라보고는 그들 또한 산으로 올라가 도주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골짝을 수색하여 세 놈을 붙잡아서 즉석에서 목을 벤 뒤에 그 초교와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소굴을 소탕한 다음 도로 보은읍으로 돌아와 세 군영의 장졸들이 모여서 유숙하였습니다. 밤새 달렸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서 하루 머물러 쉬고는 그 다음 날인 16일 출발하여 청산, 영동 등지의 길로 향하였습니다.
30리 거리의 회인현(懷仁縣)에서 유숙하였더니, 당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쯤에 청주 병영의 전령 내에, ‘지금 남쪽의 적이 올라와서 노성(魯城), 논산(論山)에 유진(留陣)하였는데,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였습니다. 순영문(巡營門)의 사자(使者)가 서로, 연달은 것도 또한 계청(啓請)한 것으로 ‘속히 회군하여 불일내에 가서 구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쯤 도달된 충청감영의 관문 내에는 ‘호남 비류가 몽땅 와서 은진(恩津)을 침범하니, 저의 감영, 연기가 경각에 달려있다. 관문이 도착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여 함께 국사(國事)를 구제하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귀영(貴營)의 군사가 저의 영(營)을 구원하러 오게 할 뜻으로 지금 막 계문(啓聞)하였으니, 만일 시일을 끌다가 제때에 미치지 못할 탄식이 있게 되면 당연히 군율이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구원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인 17일 회덕(懷德)으로부터 출발하여 60리 거리의 공주(公州) 부강점(芙江店)에 이르러서 유숙하였더니, 그 날 밤 해시(亥時, 오후 9~11시) 쯤 이어서 도달한 충청도 감영의 관문 내에 ‘귀 영관이 거느린 병정으로 본영(本營, 충청감영)을 와서 지원하게 할 뜻으로 이미 두 차례나 계문을 하였고, 아울러 도순무영(都巡撫營)에도 보고하였으니 반드시 윤허를 얻을 것이다. 즉각 빠른 속도로 행군하여 영하(營下, 충청감영)로 달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인 18일 행군하여 30리 거리의 연기(燕岐) 봉암동(鳳巖洞)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연기 봉암동은 공주와의 거리가 40리 지점이기에 이곳서 거취에 대해 지시를 듣기 위하여 충청감영에 치보(馳報)하고 회제(回題)를 기다리느라 머물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해야 하겠기에 이와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선봉행진(先鋒行陣)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0월
장졸들이 여러 날 길을 걸었다니, 듣고 매우 개탄하였으며, 과로 증상은 면하였다니, 매우 다행이다. 보은에 있는 비류의 소굴을 소탕한 일과 비적 세 놈을 처형한 일 또한 가탄할 일이다. 청산과 영동에서 비류를 쫓는 시기를 잃은 것은 통분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진이 실수한 것이 아니고 법망에서 벗어난 비류들이 멀리 도망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세울 방략도 또한 본진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어제 충청도 감영의 이문(移文)에 따라 영칙(令飭)한 바가 있었다. 기회에 따라 응수하는 절차는 실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잘 알아서 편의하게 거행할 것.
20일
양호순무선봉
부전지 [附箋]
‘……’이라고 한 바, 각 영(營) 병정들이 밤을 새워가며 빨리 길을 걸어서 적의 소굴에 깊숙이 들어가, 비록 적의 괴수는 베지 못했을망정 소굴을 소탕하고 세 놈의 적을 처형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는 뜻으로 제사(題辭)를 보냈다. 그러나 마침 충청도 감영의 비상보도로 인하여 결국 추포(追捕)하지 못하고 지레 돌아온 것은 매우 통완(痛惋)할 일이며, 곧 충청도 감영의 이문에 따라 ‘성하영(成夏永)이 거느린 각 소대는 충청도 감영으로 달려가고, 연기에 머문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린 각 소대는 유성(維城) 근처로 가서 주둔하라’는 뜻으로 두 진(陣)에 전령하였으니, 차례로 도달할 것이다.
충청도 감영의 이문 내에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이 이미 금강진(錦江津) 가에 도착하여 성하영이 거느리던 각 소대를 대신 거느리고, 성하영은 단지 1개 소대만을 거느리므로 관할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다시 홍운섭에게 전령하여 그가 경천(敬天) 등지에 진주(進駐)하여 호남의 비적을 방어하게 하였고, 또 노성(魯城) 등지에서 비적이 운송하는 곡물을 탈취하여 군량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때그때 형편에 따르는 것은 비록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나, 충청도 감영의 이문이 재삼 정녕(丁寧)하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각각 영칙하였으므로 그 연유를 첩보함.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