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군경리청 계원출진 영관[구상조(具相祖)]이 첩보합니다. (개국 503년 10월 21일)
이 달 13일에는 죽산(竹山,, 죽산부사 이두황)이 거느린 군진(軍陣) 및 진남영의 군진과 합세해서 청주로부터 출발하여 곧장 보은으로 향하였는데, 비류는 벌써 기미를 알아차리고 청산, 영동 등지로 도피했다고 합니다. 접주 백학길(白學吉)을 붙잡아서 효수한 뒤에 두 군진과 상의하여 곧장 영동으로 추격 체포하려고 할 즘에, 충청도 감영에서 ‘시급히 달려와 구원하라’고 독촉한 관문이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공주로 향하는 길에 회인읍에서 유숙한 다음, 도집(都執) 유홍구(柳鴻九), 윤경선(尹敬善)과 접사(接司) 이승일(李承一), 우범손(禹範孫)을 추적해서 붙잡았습니다. 그들의 죄질이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곧 효수하였고, 18일에는 모고원(毛考院)으로 달려가서 유숙하였고, 19일에는 충청도 감영에 이르러 순무영의 영칙에 의해 거느리고 간 2소대 내에서 1소대를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에게 넘겨 주었고 이내 그 곳에서 유숙하였습니다. 20일에는 ‘접응(接應)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다시 지휘하겠다’는 제칙(題飭)이 도달하였고, 21일에는 또 충청도 감영의 영지(令旨)가 도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를 첩보해야 하였기에 이상과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순무영선봉진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0월
적을 붙잡아 참수하고 소굴을 소탕한 것은 대단히 상쾌한 일이니, 마땅히 전보(轉報)해야 할 것.
23일
양호순무선봉
부전지 [附箋]
동시에 도달된 서산군수 성하영의 첩정 내의 사연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적을 붙잡아 참수하고 소굴을 소탕한 것은 대단히 상쾌한 일이니, 그 연유를 첩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