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수 성하영이 첩보합니다.
이 달 13일에는 죽산(竹山,, 죽산부사 이두황)이 거느린 군진(軍陣) 및 진남영의 군진과 합세해서 청주에서 출발하여 곧장 보은으로 향하였더니, 비류는 이미 기미를 알아차리고 청산, 영동 등지로 도피하였다고 합니다. 접주 백학길을 붙잡아서 효수한 뒤에 두 군진과 상의하여 곧장 영동으로 추격 체포하려고 할 즘에, 충청도 감영에서 ‘시급히 달려와 구원하라’고 독촉한 관문이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공주로 향하는 길에 회인읍(懷仁邑)에서 유숙한 다음, 도집 유홍구, 윤경선과 접사 이승일, 우범손을 추격해서 붙잡았습니다. 그들의 죄상을 조사하였더니,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곧 효수하였습니다. 18일에는 모고원(毛考院)으로 달려가서 유숙하였고, 19일에는 충청도 감영에 이르러 군수가 거느린 군사 1소대를 신임 영관(領官)인 안성군수 홍운섭에게 내어준 뒤에 순무영의 영칙(令飭)에 의하여 계원영관 구상조(具相祖)가 거느린 군사 2소대 내에서 1소대를 나누어서 거느리고 그대로 충청도 감영에 머물렀으며, 20일에는 ‘접응(接應)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다시 지휘하겠다’는 제칙(題飭)이 도달하였고, 21일에는 또 ‘충청도 감영으로 달려오라’는 영지(令旨)가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연유를 첩보해야 하겠기에, 이상과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순무영선봉진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0월
소굴을 소탕하고 몇 놈을 참수한 것은 대단히 상쾌한 일이나, 청산과 영동 등지의 더러운 것을 말끔히 쓸어버리지 못해 한스럽다. 그러나 몇 놈을 참수한 것은 더욱 통쾌한 일이니, 마땅히 전보(轉報)해야 할 것.
23일
양호순무선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