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가 첩보합니다.
이 달 18일 연기(燕岐) 봉암동(鳳巖洞)에 도착하여 거취에 대한 지시를 듣기 위해서 충청감영에 보고한 연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이 달 2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도달된 청주병영의 감결(甘結) 내에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에 둔취(屯聚)한 비류(匪類)를 속히 초토(剿討)하라’고 했기 때문에, 당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쯤 행진하여 30리 거리의 청주 송정리(松亭里)에 이르러서 유숙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묘시(卯時, 오전 5~7시) 쯤 행군하여 곧장 목천 세성산 아래에 이르러 지형과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세성산은 3면은 몹시 가파르고 1면은 약간 평평하였으며, 누참(壘塹)은 매우 견고하고 널찍하였는데, 깃발이 숲처럼 꽂히고 포 소리가 들판을 울렸습니다. 행진을 잠시 동북쪽 토산(土山) 위에 멈추어 군사를 휴식시킨 뒤에 차례로 출발하여 1개 소대는 세성산 동남쪽 기슭으로부터 포를 쏘면서 세차게 기어오르고, 2개 소대는 세성산 북쪽 기슭 아래에 매복하고, 1개 소대는 접응하려고 토산 위에 유주(留駐)하였습니다.
적이 반나절 동안 버티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게 충돌을 당하여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 때 우리 군사 중에서 동남쪽 기슭으로부터 세차게 기어오른 군사가 먼저 그 성지(城池)를 획득하였고, 북쪽 기슭에 매복한 군사는 도망한 적을 추격해 수십 리쯤 가면서 혹은 사살하기도 하고 혹은 사로잡기도 하여 크게 승리를 하였습니다. 시각은 당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이었으며, 노획한 군수물품은 차례로 실수를 헤아려서 장부를 작성해 첩보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우선 속히 보고해야 하겠기에 이상과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선봉행진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0월 21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겸토포사(兼討捕使) 이(李, 이두황)
비류를 전승한 일은 듣기에 매우 통쾌하니 응당 전보(轉報)해야 하겠거니와, 그들의 괴수를 잡지 못하고 단지 소탕만 하였다면 기회를 잃는 오산이 없지 않았다. 노획한 군수물의 실수에 대해 장부를 작성하는 일은 성화 같이 작성할 것이며, 산길 물길을 줄곧 걸은 장졸들의 노고는 참으로 가탄할 일이다. ‘호궤(犒饋)하는 의식은 먼저 본현으로부터 넉넉히 베풀어주라’는 뜻으로 금방 감칙(甘飭)하였지만, 단지 병영(兵營, 청주병영)의 관문만을 따라 거행한다면 성급한 처사를 면하지 못할 것임.
10월 22일
양호순무선봉
부전지 [附箋]
‘……’이라고 한 바, ‘비류를 쳐서 크게 전승을 얻은 것은 듣기에 매우 통쾌할 일이니, 응당 전보해야 할 것이나 단지 병영(兵營, 청주병영)의 관문만을 따라 거행한다면 성급한 처사를 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제송(題送)하였고, 호궤하는 의식은 먼저 본읍으로부터 넉넉히 준비해서 지공(支供)한 뒤에 모종의 공곡(公穀)과 공전(公錢) 중에서 해당 감영에 수보(修報)할 뜻으로 감결을 발송하였으며, 참모관(參謀官) 정도영(鄭道永), 별군관(別軍官) 이필영(李弼永)과 이종진(李宗珍) 및 병정 5명을 위문 차 떠나보냈고, 참수하고 노획한 실수는 다시 보고함을 기다려서 수보할 계획이니, 그 연유를 첩보함……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