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가 첩보합니다.
이 달 초9일 죽산부에서 출발하여 행진한 이후, 18일에는 연기 봉암동에 도착하여 거취문제에 대한 지시를 듣기 위해 충청감영에 보고한 연유를 이미 19일 봉암동에 있을 때에 급히 보고하였고, 21일에는 목천 세성산에 도착하여 비류를 크게 쳐부수고 그 연유를 또 21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달 20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보내 22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도달된 전령 안에, “대진(大陣)이 남하(南下)한 지 이미 열흘이 되었는데, 겨우 금영의 이문(移文)으로 인하여 본진(本陣)이 연기(燕岐)로 이주(移駐)한 데 대한 보고가 이미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군무(軍務)를 생각하면 소홀하기 막심하여 법에 비추어 책망해야 하겠지만, 본진에 이미 전보(傳報)할 인편 등이 없어 용서할 수밖에 없다. 연기는 유성(維城)과의 거리가 40리가 되는데, 지금 듣건대 비도(匪徒) 또한 이 곳으로 와서 출몰한다고 하니, 감성(紺城)의 입구 등지로 옮겨 주둔해서 먼저 그들의 날뛰는 폐단을 막고 또한 호남의 비류가 경유하는 화근을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토(剿討)하는 일에 있어서는 고립될 염려가 없지 않으니, 금영에서 지원군을 보내오기를 기다려서 거취문제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임기응변하는 것 등은 오로지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고, 멀리서 헤아려서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애구(隘口)를 굳게 지키는 것이 만전지책(萬全之策)이니, 응당 이와 같은 뜻으로 금영에 이문을 보냈다. 그러니 반드시 소상한 관칙(關飭)이 있을 것인즉 편의함을 헤아려서 거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달 16일과 17일 양일은 “즉각 달려오라는 금영의 관문에 따라 영하(營下, 충청감영)로 달려가서 면전에서 직접 분부를 받아 진군할 계획이다”란 뜻을 연기 봉암동에 있을 때 금영에 치보하였더니, 회제(回題) 내에 “비류의 정체를 계속 정탐할 것이며, 머무를 만한 곳에 유진(留陣)하여 선봉의 지휘를 기다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슨 사단(事端)인지 알지 못하여 곧 금영으로 달려가서 면전에서 직접 지휘를 들은 뒤에 진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달 2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 쯤에 도달된 청주병영의 감결(甘結) 내에 “목천 세성산에 둔취(屯聚)한 비류를 속히 초토(剿討)하라”고 하였는 바, 목천의 적은 공주와 청주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앞으로 크게 못된 짓을 할 염려가 있고, 또한 서울을 통래하는 길에서 아주 가까이 있으므로 선봉진의 앞길에 장애가 되니, 심복(心腹)의 화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충청감영의 사기(事機)를 가지고 말한다면, 경리청(經理廳)의 군사가 이미 그 영(營)에 있고, 방수하는 계책도 이전보다 약간 우수합니다. 또 “명령을 들어 거행하라”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미 순무영으로부터 “청주로 달려가 지원하라”는 전령이 있었으니, 거행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먼저 청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걱정거리를 제거하자면 급한 것이 목천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완급(緩急)의 형세를 들어 금영(錦營)에 논보(論報)한 뒤에 행군하여 곧장 목천 세성산 비류가 둔취한 곳으로 들어가서 크게 전승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곧 도달된 금영의 제사(題辭) 내에, “공주로 달려가서 지원하라는 순무영의 전령이 이미 도달되었을 것 같은데, 순무영의 영칙은 듣지 않고 청주병영의 감결만 준수하는 것은 무슨 곡절인지 알 수 없다. 병사(兵使, 충청병사)가 의론을 분열시키기 때문에 지금 막 아뢰어 파면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도달된 금영의 관문 내에, “앞서 접한 귀영관(貴領官)의 문이(文移) 안에 ‘연기에 도착하여 거취문제에 대한 지시를 들으려 하다’고 했기 때문에 감히 ‘공주와 대전으로 진군하라’고 청하였는데, 지금 병영의 감결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갔으니, 문이에 이른바 ‘거취문제에 대한 지시를 들으려고 한다’는 것은 곧 병영을 이른 것인데, 글 뜻을 잘 모르고 진군을 청하였으니, 도리어 당돌함을 깨닫고 마냥 두렵고 부끄럽다. 지금 순무영의 제지(題旨)를 싸서 보내니, 귀영관은 순무영에게 절제를 받을 것인지, 병영에게 절제를 받을 것인지 모르겠다. 또 비류를 초토하는 일로 말하면, 도내에 목천의 비류처럼 봉기한 것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다. 전주를 공격 함락시킨 거물급 괴수 전봉준(全琫準)과 같이 가장 큰 놈은 없다. 또 공주는 도회(都會)의 중지(重地)요 요충(要衝)의 대로(大路) 역할을 하는 곳인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반나절이면 이를 수 있다. 귀영관은 험한 곳을 피해 편한 곳으로 가기를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귀진(貴陣)의 거취문제는 본영(本營, 충청감영)에서 좌우할 바가 아니니, 알아서 거취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목천의 적을 먼저 친 것은 실로 ‘선급후완(先急後緩)’이란 뜻에 따른 것인데, 금영의 관제(關題)가 이처럼 엄격하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세성산의 적을 초토(剿討)할 때 사로잡은 북접(北接)의 괴적(魁賊) 김복용(金福用)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으니, 잡아다가 대진 앞에 대기해야 할지 회제(回題)를 기다려 거행할 계획이며, 군수물품을 적은 장부는 수정해서 첩보해야 하겠기에 이상과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선봉진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0월
작성한 장부를 올렸으니 응당 전보(轉報)해야 하겠거니와, 붙잡은 괴수 김복용은 잠시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즉시 효수하고 곧 본영(本營)에 보고하도록 하며, 군기는 일전의 전령에 의하여 두 읍에 나누어 주도록 하며, 저치된 곡식은 청주병영에 보고하여 먼저 조처하도록 하고, 즉각 밤을 새워서 신속하게 금영으로 달려오도록 하라. 어제 금영의 관칙(關飭)이 있었으니, 이미 출발했는지 모르겠다. 금영에서 알려온 급한 일은 경각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성화 같이 달려갈 것.
24일
양호순무선봉
부전지 [附箋]
붙잡은 괴수 김복용은 잠시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즉시 효수하고 곧 본영(本營)에 보고하도록 하고, 쌀과 벼는 대진이 이동한 뒤에 비도가 다시 약탈할 염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청주병영으로 수송하도록 하라. 군기는 목천(木川)과 천안(天安) 두 읍에 나누어 보내라. 본 영관이 거느린 병정은 금영의 청원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밤을 새워 달려가도록 하라. 노획한 군수물품을 작성한 장부 1건은 수정해서 올려 보냈다. 지금 목천의 비류가 공주와 청주 사이에 모여 소란을 피우니, 그 기세가 매우 거세다. 그래서 본 영관이 깊이 들어가서 소탕하고 거물급 괴수를 잡았으며, 그 밖의 노획한 군기 및 쌀과 벼 등 잡물이 또한 적지 않으니, 그 힘을 다 바친 것이 매우 가상하다. 그 연유를 첩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