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순무영 부군관 최일환이 첩보합니다.
비도(匪徒)의 괴수(魁首)를 찾아내 붙잡으려고 공령(公令)을 받들어 의병 35인을 거느리고 11월 16일에 청산(靑山) 주성면(朱城面) 송현(松峴)에 도착하였는데, 뜻밖에 비도 수삼 명이 각자 총과 창을 쥐고 소나무 숲의 석벽(石壁)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포(砲)를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본군(本軍)이 적세(賊勢)를 몰래 살펴보니, 적당(賊黨) 중의 깃발에 ‘대선생 신원기(大先生伸寃旗)’라고 써 있었습니다. 또 영기(令旗)가 있었는데, 대장(大將)이라고 칭하면서 말을 탄 채 호령(呼令)하면서 마구 총을 쏘아댔습니다. 본군이 분통한 심정을 누르지 못하여 일시에 힘을 합쳐 일제히 포를 쏘아 먼저 몇 놈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그야말로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가 되어 즉시 나뉘어 흩어지기에, 연이어 수십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 놈들의 이른바 대장이라는 박부만(朴富萬)도 총살을 당하였고 산채로 사로잡은 것이 아홉 놈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엄하게 캐물었더니, 구초(口招) 안에 ‘10월 25일에 공주(公州)의 효포(孝浦)에서 패배한 적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법헌(法軒, 최시형)이 있는 곳을 캐물었더니, 목천(木川)과 직산(稷山) 등지에 숨어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를 밟아 잡아내어 차례차례 압령(押令)하여 직산 등지에 도달하였다가, 무고(誣告)로 인하여 김순천(金順天) 등 네 놈과 또 붙잡은 양성(陽城)의 접괴(接魁) 이치오(李致五)를 평택현(平澤縣)으로 옮겨 가두었습니다. 갑오년(甲午年) 11월 2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에 인민(人民)들을 그 현(縣)의 오리정(五里亭)에 크게 모아놓고 아관(亞官)과 함께 참석하여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였으며, 청산에서 적을 격파한 뒤 노획한 군물(軍物) 및 사로잡았거나 총살한 죄인들의 성명(姓名)을 장부로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 이와 같이 첩보를 올리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보를 올린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선봉소(先鋒所)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1월 24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별군관(別軍官) 최(崔)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거늘 성책(成冊)과 보고한 것이 몹시 모호(糢糊)하다. 그러므로 이에 도로 내려보내니 다시 즉시 수정(修正)하여 보내고 획득한 군물도 어디에 귀속시켰다는 보고가 없으니 또한 상세히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도록 할 것.
25일
양호순무선봉(兩湖巡撫先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