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리청 우참령관이 첩보합니다.
대관(隊官) 조병완(曺秉完)과 김명환(金命煥)이 병정(兵丁) 2소대(小隊)를 거느리고 청산읍(靑山邑)에 출진(出陣)한 것은 이미 첩보를 하였거니와, 대관의 수본(手本) 안에 ‘이달 초6일에 옥천읍(沃川邑)에 도착하여 이내면(伊內面)에서 유숙(留宿)하다가 마침 풍설(風雪)을 만나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초8일 대관 조병완은 금영(錦營) 길을 안내하는 사람 현광일(玄光一)과 더불어 병정 1소대를 거느리고 무주(茂朱)로 길을 출발하였습니다. 대관 김명환은 참모관(參謀官) 서병학(徐丙鶴)과 더불어 병정 1소대를 거느리고 영동(永同)의 서재촌(西齋村)에 도착하였더니, 각처에서 망명한 비류(匪類)들이 그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면을 에워싸서 비류 수십여 명을 잡아내고 삼실촌(三室村)으로 행군한 덕분에 비류 수십 명을 잡아냈고 옥천의 오정동(梧井洞)에서 10여 명을 초포(勦捕)하여 엄중히 조사를 하였더니, 영동 서재촌의 접주(接主) 이판석(李判石), 접사(接司) 김철중(金哲仲), 성찰(省察) 김태평(金太平), 포수(砲手) 김고미(金古味), 삼실촌의 접사 배순안(裵順安), 접주 이관봉(李寬奉), 성찰 박추호(朴秋浩), 옥천 이원역(利原驛)의 성찰 이대철(李大哲)과 장명용(張命用), 포군(砲軍) 이오룡(李五龍), 옥천 오정동의 접주 고덕현(高德賢), 접사 고원행(高遠行), 포군 고경일(高敬一) 등 13명이 모두 금산(錦山)을 도륙(屠戮)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달 초9일에 모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목을 졸라매어 죽였고 그 나머지 비류 50여 명은 엄중히 신칙하여 풀어 보냈으며, 무주의 거괴(巨魁)로서 대장(大將)이라고 자칭하는 이응백(李應伯)은 이른바 포솔(砲率)이 5-6백 명이나 되는 놈으로서 난민(亂民)의 두목이 되어 본읍을 탕잔(蕩殘)하고 비도의 괴수와 연합하여 세 군(郡)을 공격하여 함락한 자입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초포(勦捕)하여 초10일에 군민(軍民)을 시장(市場)에 크게 모아 목을 졸라 죽인 뒤에 그 집을 수탐(搜探)하자, 조총(鳥銃) 1자루, 환도(環刀) 5자루, 기폭(旗幅) 1면(面), 철갑(鐵甲) 1건(件), 인궤(印櫃) 1좌(坐), 목인(木印) 1건, 소 2마리를 뒤져냈습니다. 소 2마리는 두 소대에 나눠주어 호궤(犒饋)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
이와 같이 첩보를 올리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보를 올린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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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전보(轉報)하겠거니와 장졸(將卒)이 다니느라 고생하면서 추위를 가리지 못하니 매우 개탄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