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소모관이 첩보합니다.
동비(東匪) 중에서 고부(古阜)에 사는 전봉준(全琫準)은 본래 동학 교도(東學敎徒) 중에서 맨처음 창기(倡起)한 거괴(巨魁)로서 허다한 죄상(罪狀)을 일일이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대중을 속이어 병사로 삼고 왕사(王師)에 항거하면서 주현(州縣)을 타파(打破)하고 창고를 불사르고 마을을 노략질하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양호(兩湖)의 천리(千里) 사이에 오랫동안 밥짓는 연기가 끊긴 것은 모두 이 놈이 한 짓입니다.
예전에 홍산(鴻山)의 적(賊) 이몽학(李夢鶴)이 여섯 성(城)을 함락한 것도 오히려 패역(悖逆)이라고 하였는데, 이 놈은 60여 성을 함락시키고 몇만 명이나 되는 생령(生靈)들을 도륙하고 서너 명의 읍재(邑宰)가 살해당한 것도 이 놈이 한 짓이니, 그 죄상을 따져보면 한(漢)의 황건적(黃巾賊)과 명(明)의 유적(流賊)에 견줄 수 있습니다.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행운으로 천신(天神)이 길을 안내하였는지, 이달 초2일 밤에 이 놈이 김개남(金開南)을 서로 만나려고 몰래 순창(淳昌)의 피노리(避老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사인(士人) 한신현(韓信賢)이 힘써 의로운 거사를 도모하여, 김영철(金永徹)·정창욱(丁昌昱) 2인과 더불어 몰래 민정(民丁)을 인솔하고 갖가지 방도로 주선하여 그를 수종(隨從)하는 세 놈까지 싸잡아 한꺼번에 생포하였으니, 그야말로 함정을 파서 사나운 범을 기다리고 그물을 펼쳐놓고 사나운 새를 기다린 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덕(聖德)이 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세 백성이 힘써 의로운 거사를 도모한 일이 어찌 가상하지 않습니까. 권장하는 방도로 먼저 상으로 1천 냥을 주었습니다.
동죄인(同罪人) 전봉준은 격식을 갖추어 본도(本道, 전라도)의 순영문(巡營門, 전주)에 압상(押上)하려 하였으나, 일본 군대의 대대(大隊)가 때마침 읍(邑)에 들어와 말하기를,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오로지 이 한 놈을 잡기 위해서였으니 함께 서로 간수(看守)하여 경사(京師, 서울)로 압송하여 추국(推鞫)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끌고 가려고 하기에, 그것을 막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죄인 전봉준을 일인(日人)에게 내주었습니다. 이런 연유를 첩보합니다.
이와 같이 첩보를 올리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보를 올린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순무선봉(巡撫先鋒)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2월
전적(全賊, 전봉준)은 그저 속임수를 잘 쓰고 괴상한 하찮은 놈에 불과하니, 그 자는 녹림(綠林)과 비슷한 부류이다. 그 죄는 오히려 황건적과 유적보다 더 크지만, 그 자를 어찌 감히 이들에게 견주겠는가. 하늘의 도리가 매우 밝아서 스스로 삼척(三尺, 國法) 아래에 걸려들었고 세 사람이 힘을 내어 의로운 일을 해낸 일은 어찌 다만 가상한 정도로만 그치겠는가. 마땅히 전보(轉報)하여 포양(褒揚)하고 파격적으로 격려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면면(面面)에 효유(曉諭)하였으며 본진(本陣)에도 마땅히 상(賞)으로 내려주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이미 저축해둔 것이 없어서 필시 끌어오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모종의 공납(公納) 중에서 1천 냥을 떼어 내주라는 뜻으로 본군(本郡)에 감결(甘結)을 보냈다. 그러니 이것을 상고하고 즉시 내준 뒤에 형지(形止)를 치보(馳報)하고 전적을 일본 군대에 압이한 것은 사세(事勢)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를 뒤따르던 세 놈의 성명을 애당초 현록(懸錄)하지 않았고 또 압수(押囚)를 어떻게 하였는지 보고가 없으니, 자못 신중하게 살피는 뜻에 어긋났다. 다시 즉시 똑같이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