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장위영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가 첩보합니다.
지난 달 30일에는 일본 사관(士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와 전주(全州)에서 함께 출발하여 30리를 가 만마관(萬馬關)에 이르러서 유숙하였고, 이 달 초1일에는 30리를 동행하여 임실읍(任實邑)에서 유숙하고, 초2일에는 30리를 동행하여 오수역(獒樹驛)에서 유숙하고, 초3일에는 40리를 동행하여 남원읍(南原邑)에서 유숙하고 이내 그곳에서 하루 머물렀으며, 초5일에는 60리를 동행하여 순창읍(淳昌邑)에서 유숙하고, 초6일은 바로 일본의 원일(元日)이므로 이내 그곳서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구례현(求禮縣) 공형(公兄)의 문장(文狀) 내에 ‘본현 백성들이 유생(儒生) 이기(李沂)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정벌과 수비의 계책을 세워서 군진(軍陣)의 뒤를 따르기를 원하나 순천(順天), 광양(光陽) 등지의 적도(賊徒)가 항상 침범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을 비워놓고 갈 수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추대한 것으로 보아 그에게 재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병(民兵)은 법에서 단지 그 성만을 지키고 지경을 넘을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백성의 의지로 성을 이루어 한 방위를 방호(防護)하고 관군(官軍)의 도움을 기다리도록 하라’는 뜻으로 제급(題給)하였는데, 일본 사관이 이 문장을 보고 본진으로 하여금 구례현 등지로 향해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일에 순창에서 출발하여 40리를 가 곡성현(谷城縣)에서 유숙하고, 초8일에는 30리를 가 곡성 지역인 압록원(鴨綠院)에서 유숙하고, 초9일에는 30리를 가 구례현에서 유숙하고 성을 들어가 보았더니, 본현 유학생 이기가 수백 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성을 지켰습니다. 읍에는 빈 집이 없고, 백성들은 모두 편한 마음으로 본업을 지켰으니, 다른 읍에 비하여 성이 견고하고 온 고을이 안온하였습니다.
이기(李沂)는 시골 서생(書生)으로 한 고장의 추대를 받아 의기(義旗)를 들고 요얼(妖孼)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성을 지키고 밖으로는 적을 방어하니, 백성들이 신뢰하고 한 지경이 그에게 힘입어 안정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이기의 뜻과 재주는 격권(激勸)하기에 합당할 듯하고 그의 정성과 의리를 감안하면 매우 가상합니다. 그러나 본래 의사(義士)라서 현재 가진 직함이 없으니, 민중을 격려하고 권한을 쓰자면 거리낀 바가 많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관함(官銜)을 주어 민중을 이끌고 방수(防守)하게 할 뜻으로 순무영(巡撫營)에 등보(謄報)하는 것이 아마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기가 각처에 파송한 격문(檄文)을 등서(謄書)하여 첨부해 올립니다.
본진은 이대로 하루 머물러 파병(派兵)의 회합(會合)을 기다렸다가 11일에 출발하여 광양 등지로 향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연유를 첩보합니다. 이와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첩보를 선봉진(先鋒陣)에 올립니다.
개국 503년 12월
토벌하고 돌아올 것.
을미(乙未) 정월 초2일 해남읍(海南邑)에서
양호순무좌선봉(兩湖巡撫左先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