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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구례현의 의병맹주 이기가 고하는 글

구례현(求禮縣)의 의병맹주(義兵盟主) 이기(李沂)는 삼가 본도(本道) 열읍(列邑) 여러 장보(章甫)들에게 고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간사한 말을 종식시키고 음탕한 말을 추방하며 양주(楊朱), 묵적(墨翟)을 막자고 말하는 자도 또한 성인의 무리인 것입니다.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누구나 모두 베어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졌거늘, 어찌 꼭 사사(士師)의 직책을 가져야만 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런 이치는 하늘과 땅에 있으므로 눈을 가지고 해와 별을 보는 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때문에 ‘상(殤)으로 치르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신 것은 이보(尼父 : 孔子)께서 동자(童子) 왕기(汪渏)로 말미암아 예(禮)를 비로소 만드신 것입니다. ‘쇠세(衰世)를 족히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자양(紫陽:朱子)께서 오대승(五臺僧)을 위하여 탄식을 자아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모두 고금에 빛이 나 우주(宇宙)를 떠받칠 버팀목이 될 수 있거늘, 하물며 삶도 나의 원하는 바지만, 어물(魚物)을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할 줄 약간 알기 때문에 임금에게 무례한 짓을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매가 새를 쫓는 듯한 기세는 귀머거리나 앉은뱅이에게도 기를 더해줄 수 있거니와 배속에 꽉 차있는 것들은 모두 절의와 문장이 아닙니까?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한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 태평성세를 이루고, 산천이 험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요, 민중들의 마음이 성과 같은 역할을 하니, 무기가 필요 없으며, 오랫동안 국은(國恩)을 하해처럼 받아왔건만, 아! 슬픕니다. 흥쇠(興衰)에 운수가 있어 비색(否塞)과 태평(泰平)이 교대로 찾아옵니다. 천택(川澤)은 깊고 수림(樹林)은 우거졌으므로 어류(魚類)와 패류(貝類)가 어울려있고, 물류는 많고 땅은 크므로 그 사이에 얼간이가 나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전번에 외국의 사학(邪學)이 넘봄으로 인하여 동학(東學)이 몰래 치성(熾盛)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수(符水)로 병을 치료하였으므로 그들은 장각(張角)장도릉(張道陵)의 등속인가 의심하였는데, 끝내는 황지(潢池)에서 무기를 휘둘러 문득 방훈(龐勛)방납(方臘)의 일을 일으켰습니다. 열군(列郡)과 웅번(雄藩)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란을 겪고 있습니다. 도적을 가볍게 여기고 임금의 세력에만 의지하는데도 오히려 조정에 법이 있다고 이르며, 문을 열어 적을 받아들이니 한스러운 것은 봉강(封疆)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산동(山東) 2백 주(州)와 1천 마을이 모두 가시덤불이 났으니, 하북(河北) 24군(郡)에 어떤 사람이 남아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까? 개미처럼 미약한 것들이 결국은 벌의 독침을 마구 휘두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도적 떼가 침범하여 유명한 성들을 점거하였고, 닭과 개가 편히 잘 수 없게 기마(騎馬)가 민간을 들락거립니다. 사대부가 무슨 죄가 있기에 고문하는 형장에 피를 묻히는 것입니까? 사가나 나라가 함께 할 원수는 바로 문정(門庭)의 도적에 대해 이를 갈아야 합니다. 불우한 하사(下士)와 궁색한 수재(秀才)는 육식(肉食)하는 고관들의 무모함을 탄식하며 답답해 죽고 싶은 심정을 견딜 수 없습니다. 무딘 칼로도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에 각오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산을 진다는 것은 헤아리지 않고 단지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드디어 의병을 일으켜 요망한 잡기를 깨끗이 쓸어버리기를 맹세합니다. 밝게 굽어보는 황천(皇天)으로부터 타고난 천성을 가지고 어진 이를 대우하고 선비를 양성한 조종(祖宗)의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여러 군자들은 절의를 숭상하는 호남 고장에서 생장하여 전현(前賢)의 시례(詩禮)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비장한 마음이 북두칠성을 꿰뚫은 것은 응당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과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기풍을 들었기 때문이고, 웅장한 기개가 무지개를 가를 수 있음에는 어찌 석저(石底)와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의 의열(義烈)이 없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용맹을 떨치려고 칼을 들고 먼저 산으로 오르고, 그대들과 짝이 되었는데, 어찌 서로 돕는 일이 어렵겠습니까?
아! 군사가 정직하는 것이 씩씩하는 것이고, 일이 순리적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부는 마땅히 시신이 말가죽에 싸여서 돌아와야 하니 죽어도 또한 충의(忠義)의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자께서 바야흐로 기린각(麒麟閣)을 열어놓고 기다리시니, 이 때가 바로 공명을 떨칠 기회입니다.

갑오(甲午) 12월 (인) 일 동맹(同盟) 유학(幼學) 왕사춘(王師春)
박해우(朴海友)
전도사(前都事) 김홍식(金弘植)
전현령(前縣令) 남궁표(南宮杓)
진사(進士) 김용선(金龍善)
전감역(前監役) 박건양(朴健陽)
유학 유제양(柳濟陽)
박태현(朴泰鉉)
좌군(左軍) 김기문(金淇文)
후군(後軍) 안창섭(安昌燮)
전군(前軍) 고찬식(高昌寔)
의병중군(義兵中軍) 고희수(高熺洙)
이방(吏房) 안기섭(安冀燮)
호장(戶長) 김재현(金在炫)
좌수(座首) 전두경(全斗景)
진사(進士) 고광문(高光文)
우군(右軍) 윤자각(尹滋恪)
집사(執事) 김이호(金履浩)
김광벽(金光璧)
서기(書記) 윤상호(尹相浩)
김광두(金光斗)
권동욱(權東旭)

주석
간사한 말을 종식시키고 음탕한 말을 추방하며 양주(楊朱), 묵적(墨翟)을 막자고 말하는 자도 또한 성인의 무리인 것입니다.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선성(先聖)의 도(道)를 보호하기 위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고 음탕한 말을 추방하여 간사한 말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나는 또한 인심을 바로잡기 위하여 간사한 말을 종식시키고, 잘못된 행실을 막고, 음탕한 말을 추발한다……능히 양주, 묵적을 막는 일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란 말이 보인다.
사사(士師)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재판관을 말한다.
상(殤)으로 치르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신 것은 이보(尼父 : 孔子)께서 동자(童子) 왕기(汪渏)로 말미암아 예(禮)를 비로소 만드신 것입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애공 11년 조에 “제(齊)나라 국서(國書)와 고무비(高無丕)란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노나라를 침범해 왔다……공위(公爲)가 사랑하는 아이 왕기(汪錡)와 함께 병거(兵車)에 탔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그들을 염할 때에 공자는 말하기를 ‘능히 방패와 창을 가지고 사직을 보위하였으니 어린이가 죽었을 때 행하는 장례의 예를 쓸 수는 없도다’라고 하였다. [齊國書高無丕率師伐我(魯) ……公爲與其嬖僮汪渏乘 皆死皆殯 孔子曰 能執干戈 以衛社稷 可無殤也”라는 말이 보인다. 즉 예법에는 어려서 죽으면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를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왕기가 어린 나이로 죽으니 장례절차에 논란이 있자, 공자는 ‘어린 아이지만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으니 성인의 예로 장례를 행해야 옳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는 “노나라가 제나라와 낭(郎)땅에서 싸울 때에 공숙우인(公叔禺人)이 제나라의 군사를 피하여 성보(城保)에 들어온 사람이 피로하여 지팡이를 짊어지고 길에서 쉬는 자를 보았다. 공숙우가 말하기를 ‘백성들에 대한 부역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백성들에게 받아들이는 조세의 부담이 비록 과중할지라도 《만약 위에 있는 사람들이 협심하여 외구의 환난을 방어한다면 오히려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경대부들은 아무런 모책을 세우지 못하고 사(士)는 국난에 달려가 죽지 않으니, 《이 어찌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이겠는가?》 매우 옳지 않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이미 그 잘못을 말하였으니, 《나는 나의 말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고, 이웃에 사는 동자(童子) 왕기(王踦)와 함께 싸움터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다 전사하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동자 왕기를 미성년자의 상(殤)으로 처리하지 않고 《성인(成人)에 대한 예(禮)로써》 상장(喪葬)의 예를 행하고자 하여 ‘어떻겠습니까?’하고 중니(仲尼 : 孔子)에게 물으니, 중니를 말하기를 ‘이미 방패와 창을 가지고 전장(戰場)에 나가서 사직(社稷)을 보위하였으니, 미성년자의 상(殤)으로 처리하지 않고자 한들 또한 좋지 않은가. 《성인의 예로써 대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魯與齊戰于郎 公叔禺人 遇負杖入保者息 曰使之雖病也 任之雖重也 君子不能爲謀也 士弗能死也 不可 我則旣言矣 與其隣童往 皆死焉 魯人欲勿殤童王踦 問於仲尼 仲尼曰 能執干戈 以衛社稷 雖欲勿殤也 不亦可乎]”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삶도 나의 원하는 바지만, 어물(魚物)을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할 줄 약간 알기 『맹자』 고자 상에 “어물(魚物)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熊掌)도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어물을 놓아두고 웅장을 취할 것이다. 삶도 나의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삶을 놓아두고 의(義)를 취하겠다. [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也]”란 말이 보인다.
부수(符水) 황로도술(黃老道術)에서 부록(符籙)을 물 속에 태워서 그 물을 마시어 병을 낫게 하는 일을 말한다.
장각(張角)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장각이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설을 받들어 부수(符水)의 주문으로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고 태평도(太平道)라 하였다. 후한 말기에 국가의 지배질서가 문란해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도 수십만이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렀다.
장도릉(張道陵) 장양(張良)의 8세손. 천목산(天目山)에서 태어나서 장생술(長生術)을 배웠으며, 물러가 산 속에 숨어 살고 한(漢)나라 장제(章帝)와 화제(和帝)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지(潢池) 황지농병(潢池弄兵), 반란을 이른다.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 공수(龔遂) 조에 “바닷가 먼 곳은 성상의 교화를 입지 못하여 백성들이 기한에 허덕이는데, 관리들이 구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폐하의 병기를 황지 속에서 휘두르게 할 뿐입니다. [海瀕遐遠 不霑聖化 其民困於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弄陛下之兵於潢池中耳]”라고 했기 때문에 뒤에 ‘황지농병(潢池弄兵)’은 반란(反亂)을 이르게 되었다.
방훈(龐勛) 당(唐)나라 함통(咸通) 연간에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黃巢)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방납(方臘) 송(宋)나라 청계(淸溪) 사람. 마니교(摩尼敎)를 신봉함. 당시 동남쪽 백성들은 주면(朱勔)이 화석강(花石綱)에서 착취를 일삼은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방납은 백성들의 분노를 인하여 사변을 일으키고 자호를 성공(聖公)이라 하니, 그를 따르는 자가 수만 명이 되었으므로 연달아 주현(州縣)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기린각(麒麟閣) 한나라 때 곽광(霍光), 위상(魏相), 소무(蘇武) 등 공신(功臣) 11인의 초상화를 기린각에 그려서 기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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