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참모별군관이 첩보합니다.
초2일 낙안읍(樂安邑)에서 떠나 50리를 행진해서 흥양(興陽) 지방의 양강원(楊江院)에 이르렀더니, ‘보성(寶城)으로부터 파견되어 가는 일본 소위(少尉) 후지이다쇼다로(藤板松太郞)가 병정 60명을 거느리고 지난 12월 28일 흥양읍(興陽邑)에 들어와 3일을 유숙하고 바야흐로 회군(回軍)하여 이 양강원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가서 만나보고, 또한 머물고 있는 상태를 탐지한 뒤에 그와 함께 한 마을에 머물러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 일본군진은 낙안으로 향해 갔고, 아군은 그 뒤를 따라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흥양읍에 이르렀더니, 본 현감(縣監)이 도임하기 전에 이속과 백성 몇 사람이 계획을 세워 성을 지키면서 유복만(劉卜滿), 오준언(吳俊彦) 등 27명을 잡아 죽이고, 이후 계속 정찰하여 붙잡기 때문에 별로 적의 침입이 없다고 합니다.
이 흥양현은 바다 귀퉁이에 처해 있으므로 온 경내가 모두 흉겸(凶歉)을 입어 아예 낫을 댈 작물이 없기 때문에 주민 중에 유리(流離)하는 자가 10에 8,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비류(匪類)에 대한 염려가 없는 고을인데, 여러 날을 머무는 것은 한갓 읍폐(邑弊)만 끼치는 일이므로 곧 군진을 이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체(事體)를 생각하니 혹 조심성이 부족하여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어서 흥양현의 수성장(守城將)과 공형(公兄)에게 고음(侤音)을 받아서 각별히 단속하였습니다. 본 현감이 복장, 향응 등을 제공하기 위하여 백목(白木) 20필, 말[馬]2필, 담배 10파(把), 짚신 5죽을 군진 앞으로 보내왔기에 각 대오에 나누어 주고, 하루 밤을 지낸 뒤 초4일 회진(回陣)하여 양강원에 이르러서 유숙하고는 초5일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낙안 지방 남하면(南下面) 장좌리(長佐里) 마을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네 주민들이 막걸리 두 동이를 준비해 놓고 길을 막아서서 주둔하기를 청하기 때문에 잠간 쉬어서 나누어 먹인 뒤에 몇 리를 가서 같은 면 벌교시(筏橋市)에 이르러 군대를 주둔하여 머물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