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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선봉진정보첩
일러두기

선정비(善政碑)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군사, 의기 당당한 그 진용(陣容).
기율이 엄하고 분명하니, 침범하지도 놀라지도 말지어다.
간교한 도적을 말끔히 쓸고, 어질고 순한 이를 높였도다.
천추에 찬란하게 빛날 것이니, 호서와 호남은 믿을지어다.

병행위덕비(竝行威德碑)

외직으로 보임해가니, 백성들 모두 관심을 가지도다.
부월(斧鉞)을 가지고 와서, 남쪽 고을을 진정시켰네.
비도들 베어 멸망시키고, 백성들 위무(慰撫)하였도다.
위엄은 서리처럼 차갑고, 은혜는 봄처럼 온화하였네.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

부임한 지 며칠 안 되었으나, 남자도 여자도 기뻐하였네.
불같은 위엄과 안온한 덕으로, 옥과 돌을 구분하였도다.

선정비(善政碑)

대군이 경내에 들어오니, 닭과 개도 놀라지 않았다.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니, 상은 무겁고 벌을 가벼웠다.
복파(伏波)의 절의에, 연산(硯山)의 높은 이름 가졌네.
가는 곳마다 백성들 교화되어, 각자 편안한 생활 누렸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한 번 호남에 부임하여,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백성은 안도하게 되고, 도적은 멀리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스럽게 교화를 시키고, 범죄자를 잡아 다스렸다.
맑은 덕 칭송하기 위하여, 먼저 한 조각 나무 세웠네.

송덕비(頌德碑)

군사가 지나간 곳에는, 마을들 모두 편안함을 누렸다.
적개(敵愾)의 그 의지, 가는 곳마다 거칠 것 없었네.

동불망비(仝不忘碑)

휘날린 깃발 남쪽으로 향하니, 군인들 자세 엄숙하였다.
상벌이 분명하게 행해지니, 민심이 더없이 기뻐하였네.

징청애민선정비(澄淸愛民善政碑)

번쩍번쩍 부월(斧鉞) 휘날려, 호남에 위엄을 베풀었다.
백성은 편안하게 보호하고, 흉적들은 모두 섬멸하였네.
침략하는 일 금지시키고, 모범의 용의 엄숙히 가졌다.
지역을 말끔히 해놓고서, 개선가 부르면서 돌아갔도다.

행군선정비(行軍善政碑)

북방에도 임명이 되고, 남방에도 위엄을 떨쳤으며,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흉적들 깨끗이 씻었다.
죄 있으면 놓아주지 않고, 죄 없으면 곧 용서했다.
옥석이 뒤섞이지 않으니, 예전처럼 안도하였네.
규율대로 행군하여, 추호도 침범하는 일 없었다.
다들 공로 칭송하며 원하는 건, 당신 떠나는 일 없길.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하늘은 큰 책임자를 내어, 왕명을 받들게 하셨네.
호서를 편하게 순찰하고, 남방을 잘 진무하였다.
거물급 괴수는 붙잡고, 협종자는 다스리지 않았다.
백성들 안도하여, 많은 입들 비석 구실을 하였네.
어질도다. 공은, 바로 두남일인(斗南一人)이셨네.
신야(莘野)에서 발을 갈다가, 극진(棘津)을 떠났다.
녹림(綠林)을 섬멸하고,황건적(黃巾賊)을 소탕했네.
사녀들 즐거워 춤추니, 왕화(王化) 다시 새로워졌다.

이상의 비문은 선친께서 일찍이 호서와 호남을 안찰하기 위해 선봉(先鋒)으로 출주(出駐)할 때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을 견디지 못하여 …….

주석
복파(伏波)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생긴 무관(武官)인 복파장군(伏波將軍)의 약칭이다. 여기서는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원은 후한(後漢) 무릉(茂陵) 사람으로 젊어서 큰 뜻을 품었다. 군독우(郡督郵)가 되었을 때 죄수를 놓아주고 북쪽 지방으로 망명하여 목축(牧畜)하더니, 뒤에 복파장군이 되어 교지(交阯)를 정벌하여 평정한 뒤에 동주(銅柱)를 세워 한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공으로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지는 등 크게 출세하였다. 뒤에 무릉(武陵) 오계(五溪)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원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80여 세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장부의 입지는 궁할수록 더욱 굳건하고 놁을 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 [丈夫立志 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하고, 또 “남아는 마땅히 변방 들판에서 죽어서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와 장사를 지내야 한다. [男兒要當死於邊野 以馬革裹屍還葬]”라고 하였는데, 그는 과연 뒤에 전쟁터에서 죽었다.
연산(硯山) 송(宋)나라 때 서임(徐林)의 호인 연산거사(硯山居士)의 약칭이다. 서임은 젊어서 특별한 지조를 가졌고 벼슬은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까지 지냈다.
두남일인(斗南一人) 천하에 제1인이란 뜻이다. 『당서(唐書)』 적인걸전(狄仁傑傳)에 “인인기(藺仁基)가 말하기를 ‘적공(狄公)의 어짊은 북두(北斗) 이남에서는 한 사람 뿐이다. [狄公之賢 北斗二南一人而已]’고 했다”란 말이 보인다.
신야(莘野) 유신국(有莘國)의 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伊尹)이 유신의 들에서 밭을 갈았다”고 하였는데, 그에 대한 조기(趙岐)의 주(註)에 “유신(有莘)은 나라 이름인데, 이윤이 처음 은거했을 때 유신의 들에서 밭을 갈았다”라고 하였다.
극진(棘津) 나루 이름. 『좌전(左傳)』 소공(昭公) 17년 조에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군사를 거느리고 극진(棘津)을 따라 황하(黃河)를 건넜다”란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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