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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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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10월 22일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리는 편지[上巡撫使申正熙書甲午十月二十二日]

며칠 동안 소식이 막혀 매우 그립던 차에 어제 18일에 주신 답장을 받고 위로가 되고 기뻤습니다. 근래에 부모를 모시며 지내시는 형편에 손상은 없고, 모든 일에 정력(精力)을 쓰는 괴로움이 없다니 매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천안에 머무른 지 3일이 되었고 각 부대와 인솔하는 데에 변고가 없으나 다만 전장으로 떠나지 못하여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각처의 비류(匪類)들의 정형(情形)은 점차로 흩어졌다고 하나 목천(木川)의 세성(細城)에 모여 있는 자들이 아직도 화를 자초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거리가 30리에 불과합니다. 읍에 들어가는 날에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밤에 바로 진격하기를 바라고 정의심이 북받쳐서 용기를 내어 통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살피는 처지에 혈기만을 따르는 것은 경솔함을 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함께 나아가 토벌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일어나 그 뜻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도착했을 때에 함께 가서 토벌하기로 의논하였는데,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은 게 없어서 《일본군은》 동로(東路)의 보고에 서로 모이자는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뜻을 견지하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머무르니 민간에 폐단을 끼친 것을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정(軍情, 군의 사정)이 느슨해지고 민심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일상적인 명령 하나 행동 하나에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들의 전행(專行)이 얄미웠습니다. 이것은 곱사등이가 자유롭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 사람들의 원망이 돌아왔지만,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여 《일이》 어긋난 송구스러움을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내포(內浦) 등지에 일본군과 경병(京兵)을 약간 파송(派送)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통촉하신 바이나 애초에 하려던 뜻도 견제를 받아 파송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지금 내포 등지에서 전해온 보고를 들어보니, “처음에 홍주(洪州)에서 토벌을 나온 데다가 경병과 일본군이 계속 오는 것에 겁을 먹어 예산(禮山)과 덕산(德山)에 모여 있던 《적들이》 서로 차질이 생겨 대부분 흩어지고 몇 십명의 남은 무리가 목천(木川)에 모여 있다고 하였고, 해미(海美)·서산(瑞山)·태안(泰安) 등지에는 약간의 《적들이》 해산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용서할 수가 없는 거괴(巨魁)를 제외하고 귀화를 생각한다면 약간의 군사를 보내도 위엄을 펴기에 충분하지만 멀리서 예상하기가 어려워서 이것 때문에 근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오른쪽 연로(沿路, 길가)와 왼쪽 산골의 소위 ‘거포(巨包)’라고 하는 자들은 크게 근심할 것이 못될듯하고 목천(木川)의 비도(匪徒)가 일단 무너지면 형세상 반드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 일본인의 계책을 짐작하여 목천으로 달려가서 그 요충지를 막아 남김없이 전멸시킨 뒤에 호남의 비도를 치러 갈 계획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러 날짜를 늦추었으나 오히려 우리나라의 시의(時宜, 당시의 사정에 맞는 것)를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대체적인 형세로 이처럼 고집하여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인(先人)과 같은 견해로도 깨닫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선봉(先鋒)’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지쳐서 고슴도치처럼 모여 있으니 근심스럽습니다. 금백(錦伯, 충청 감사)이 공문을 2~3번이나 보내왔고, 날을 재촉하여 위급함을 알리려고 직접 군막(軍幕)까지 사람을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의 군사를 보낸 후에 겨우 며칠 늦어진 것을 보고 이 어른이 두려워서 동요하고 사람을 미혹시키니 진실로 걱정스럽습니다. 지난번에 화영(華營, 수원)에서 다행스럽게도 일본어를 하는 사람을 얻어 계차(啓差, 임금에게 아뢰어 직무를 맡기던 일)하는 보고를 하였고 내포(內浦)에 파송된 일본군 진중에도 나누어 보냈습니다. 아산읍에서 청나라 사람들이 남긴 탄환 51상자를 찾아내어 인천항으로 운송할 때에 일본인이 배를 살펴보기 위해 《참모를》 올려 보내도록 권면하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상기(上記)한 참모(參謀)를 계차(啓差)하고 또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많은 비용이 들었으나 이처럼 바로 가니 지금의 낭패스러움을 말로 할 수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인천항에 정박한 뒤에 바로 영하(營下)에서 영(令)을 기다리게 하여 밤을 가리지 않고 행진소(行陣所)가 이른 곳에 딸려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반드시 인천항의 감리서(監理署)에 연유를 관문(關文, 공문)으로 보낸 뒤에 조정이 될 듯합니다. 외서(外署, 외무아문)에 《편지를》 왕복(往復)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전석규(田錫圭)인데 헤아려서 주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탄환과 총담 2가지 군수(軍需)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탄환은 반드시 일본 공사관에 요청을 한 뒤에 얻을 수 있는 일이어서 쉽지 않을듯하나 담요는 비용이 많지 않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니 이 한 가지 물건은 주선하도록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소인(小人)의 형편을 보면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많으나 긴요한 명색(名色)도 없으니 우선 감하(減下, 벼슬아치의 수를 줄임)해 달라는 뜻으로 계(啓)를 올려 윤허를 받았습니다. 영관(領官)이 대신하여 거행하면 실제로 공사(公私)간에 편리하니 형편을 헤아려서 처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석
총담 말총으로 두껍게 짜서 만든 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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