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사에게 올리는 편지 [上巡撫使書]
김개남(金介男)은 완영(完營, 전라 감영)에서 법에 따라 죽였고, 전봉준과 최경선 2명의 적도 차례대로 체포하였으나 일본인에게 포로를 빼앗겼습니다. 더욱이 둘러매고 와서 위양(喂養, 음식을 준다는 뜻으로 죄수를 관리하는 것을 말함)에 잡인을 금지 하여 다른 사람과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비록 죄수를 엄중히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의 신민(臣民)이어서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손화중도 잡았다고 하나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해 매우 울적합니다. 장흥읍은 5일에 마침내 읍의 수령이 해를 입는 데에 이르렀고, 7일에는 강진도 성이 함락되었으나 그 읍의 수령은 피신하여 영암의 성 밖에 있습니다. 끝내 9일에 강영(康營, 강진의 병영)도 함락을 당했고, 그저께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병사(兵使)가 시종(侍從) 몇 명과 함께 걸어서 영암의 경계에 왔습니다. 이것은 비록 공문은 없으나 영암읍의 급보가 어제 새벽에 도착하여 역시 정확한 소식입니다. 매우 한탄스럽고 근심스러워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전주에서 일본인에게 간청하여 빨리 날짜를 정해 출발한 것은 실제로 나주의 급보에서 연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원역(川原驛)에 이르러 그들과 약속하느라 헛되이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장성(長城)에 이르러서 비록 나주에서 계속 급보가 오지 않았으나, 그 일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어서 전진해야 했으나 헛되게도 8일을 묵은 뒤에야 출발했습니다. 마침내 각 영(營)과 읍이 함락되는 이런 해를 입게 하고 생민(生民)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니 제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죄는 만 번을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어찌 감히 발뺌을 하겠습니까? 전주에서 떠난 이후 만약 바로 왔다면 어찌 이런 《일을》 겪었겠습니까? 그 사이에 견제는 감히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의 죄를 특별히 헤아리시어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이 읍에 들어온 뒤에 비로소 일본군 대대장을 만났는데 책망을 당하는 것이 노예보다 심했습니다. 살아서 명(命)을 더럽혔고 죽어서도 이름이 없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강진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아 세 갈래 길로 출발하였는데, 만약 성이 함락되는 일이 없었다면 조금 해볼 수가 있겠지만 지금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통위영(統衛營)의 병사를 무안(務安) 등지로 보내 순찰을 하니 멀리 온 고생만 있고 실효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