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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일러두기

9일에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로 많은 상대를 대적할 수 없다)의 형세로 작은 승리를 거둔 것은 왕령(王靈)에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비록 물러갔으나 여전히 노성(魯城)과 논산 등지에 모여 그 수를 셀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 진잠(鎭岑) 공형(公兄)의 보고를 보니, “청주 일대에서 다시 창궐한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연기(燕岐) 등지에 2개 부대를 뽑아 보냈으나 병력이 이처럼 넉넉하지 않고 그 탄환이 아직도 오지 않아 경리청(經理廳)의 각 부대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일본군 사관(士官)에게 어제 서울에서 탄환이 내려왔다고 했기 때문에 1만개를 요청해서 얻어 우선 나누어 주었으나, 이 탄환이 본래 모양에 적합하지 않아 구차하게 총소리만 내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구(戰具)에 적합하지 않고 한번 싸워 쓰는 데에 불과하여 마음이 조급하고 울적합니다. 금영에 와서 머문 지가 수 십일이 지났으나 아직도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곧 탄환이 떨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이처럼 체류하고 있어 송구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장위영(壯衛營)의 전체 부대는 내포에서 바로 이인(利仁) 등지로 가도록 해당 영관(領官)에게 지시를 하였으나 교도병(敎導兵)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합세해서 함께 나가도록 하는 것은 뜻대로 하기 어려울듯하여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교도소에서 보낸 북어(北魚)와 탄환은 그 사이에 탐문할 방도가 없었으나, 비로소 5~6일 전에 옥천(沃川)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어 보낸 지가 지금까지 며칠이 되었으나 아직도 제대로 도착했다는 기별을 듣지 못해 울적합니다. 각 마을에서 잡아서 바친 비괴(匪魁)는 진영(鎭營)에서 조처하거나 잡은 곳에서 처치했으나 만약 혹시라도 잡아오면 일본인에게 통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뒤에야 따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곤란을 당한 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군 함대가 내포에 와서 정박한 일을 일본인에게 물었더니, “도착했으나 소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늘 이런 경우가 많고, 명색이 대위라는 자도 다른 사람에게 관할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듯하나 250명이 아직도 홍주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주에서 승리한 일은 저번에 적어 보고를 하였으나 해미(海美)와 서산(瑞山)등의 읍에 모여 있는 나머지 무리는 다시 이두황(李斗璜)에게 토벌되어 비로소 서산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이 왔는데, 전임 관장(官長, 수령)의 시신이 비로소 출발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형 박감찰(朴監察)은 4~5일 전에 여기서 떠났을 뿐입니다.
일본인이 순영(巡營)을 핍박한 일은 이미 봉장(封章, 상소)를 했고 또한 적어서 의정부에 보냈으므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무를 그만두고 모든 일에 갈등을 빚으니 한탄스럽습니다. 일본인이 이처럼 거리낌 없는데 소인(小人, 자신을 지칭)에게 있어서는 어찌 말할 게 있겠습니까? 하하!
연이어 적의 사정을 탐문하였더니, “지금 논산과 초포(草浦) 등지에 있고, 일단 패하여 돌아간 뒤에 화약이 부족하다고도 하여 감히 거론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얘기들이 비록 그대로 믿기는 어렵더라도 진격하여 토벌해야 하나 지금 여기에 있는 병사 700여명에서 영(營)에 남을 병사를 제외하면 남은 병사의 수가 넉넉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 있는 일본군도 100명이 넘지 않고 교도병(敎導兵)과 해당 진(陣)과 동행한 일본군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 길에서 들었는데, “청주 원안(圓岸) 등지에 비도(匪徒)가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교도병이 관아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그처럼 도와줄 힘을 가지고서 할 일이 없는 곳으로 바로 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일이 이런 《지경에》 되었으니 다시 연산(連山)으로 바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날짜를 정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권한이 일본군에 있고 내포(內浦)에 간 장위영의 부대는 각각 《적을》 토벌한 뒤에 날을 정해 만나고 나서 병사를 나누어 출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날짜가 늦어지고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끝내 책임 때문에 감히 사사로운 《것을》 말하지 못했고 늘 기회를 놓쳐 송구스럽고 두렵습니다. 그 사이에 사소한 편하지 못한 일들을 어찌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편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탄환이 넉넉하지 않은 것이 가장 첫 번째로 큰일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일본군 진영의 표(標)를 얻었으나 실어올 때에 시일이 많이 소요되어 근심스럽습니다. 그 사이에 공주와 천안에 있는 탄환을 얼마간 들여다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썼으나 지금은 적합한 탄자(彈子)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시하여 밤을 가리지 않고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통위영과 경리청의 탄환은 각각 2개를 함께 올리니 이것을 얻어 보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금영(錦營, 충청 감영)의 중군(中軍) 임기준(任箕準)은 바로 동도(東徒)의 우두머리로 근래에 귀화한 자인데, 금영에서 수령으로 뽑아 보내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하는 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무사히 《일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저께에 일본군 진영에서 잡아가서 관아의 옥에 갇혀 인신(印信)을 싸서 보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를 처벌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한탄스럽습니다.
여러 가지 문부(文簿)와 사소한 일은 직접 점검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이처럼 어리석고 둔하여 늘 빠뜨린 것이 많아 문보(文報, 문서로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가 지체되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한 곳이 있다면 빠뜨리거나 잘못된 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헤아려서 보시고 관대하게 조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사람들이 뒤를 따라와서 일을 해주더라도 본래 법례(法例)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 읍의 마을에 숨은 비괴(匪魁)라고 하는 자를 각 해당 마을에서 잡아 바치거나 포교를 보내 잡은 자가 있습니다. 천안에 있을 때에 일본군 진영에서 《비괴를》 잡는 대로 보내고 마음대로 죽이지 말라는 뜻으로 여러 번 말을 하였으며, 만약 약속을 어기면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 수십 명을 잡아 보냈습니다. 사실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그대로 풀어주었고 단지 몇 명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런 때에 《촌민(村民)들이 그들을》 잡으려는 것은 그 후환을 걱정하고 따라서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근심스럽습니다.
청나라 사람이 남긴 탄환이 천안과 공주의 2개 읍에 몇 만개가 있다고 하나 애초에 모양이 《우리나라의 총에》 맞지 않아 있는 것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만합니다. 죽산(竹山)수령이 얻은 5~6상자의 《탄환은》 모슬총에 사용하였습니다. 통위영(統衛營)은 늘 70~80개를 사용했으나 경리청(經理廳)은 10여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가 없이 일본인이 준 모양이 맞지 않은 탄환을 잠시 나누어 주었을 뿐입니다.
지금 날씨를 보면 매우 추워야 하나 봄날처럼 따뜻하고 때때로 비가 옵니다. 이것이 비록 어긋나는 날씨이더라도 얇게 입은 병사들에게 당장은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솜옷을 입은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은데, 혹시 하루라도 춥게 된다면 추위에 얼을 뿐만 아니라 당장에 병이 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4만여 금이 있은 뒤에야 준비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순사(巡使)와 상의하였으나 우선 마련할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돈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옷을 만들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들어올 《돈을》 대충 헤아려서 사람마다 바느질품을 합해 20냥으로 정해서 3영(營)을 모두 합하면 거의 4만 냥이 넘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군심(軍心, 병사들의 심정)을 보면 원망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마련하여 줄 방도가 있다면 헤아려서 각 병사들의 집에 내어 주어 만들어 오게 한다면 바느질품이 들지 않는 데다 친속(親屬)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니 헤아려서 주선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1만금의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또 빨리 만들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이번 11일에 경리청(經理廳)의 병사들이 논공(論功)을 적어 보고할 때에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여 무리를 모아 강을 건너 올라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난리보다 심하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비록 순상(巡相, 관찰사)과 제가 함께 나가 바로 타일러서 돌아오게 했으나 그 당시의 모습으로는 장관(將官, 장수)을 쏘아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누가 금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훈련되지 않고 신실하지 못한 병사인데다가 소인의 나약함 때문에 이런 변고가 있었으나 그 우두머리를 조사하지 못하고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하였으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한 죄는 진실로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적이 앞에 있는데 이런 행동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군심(軍心)으로 어떻게 나가 싸우겠습니까? 비록 바로 여러 차례 와서 날마다 잘못을 빌었으나 무뢰한 습속이 진실로 이와 같고, 또 단서가 없이 통정(統丁)과 따지려고 하니 안에서 허물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근심스럽고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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